지호에게, 라고 썼다가 지웠다. 안녕, 이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내가 여기 있는 한 지호도 안녕할 리가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첫 문장을 다시 적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알려줄게.
   언젠가 네가 돌아왔을 때 당황하지 않게……


   글자를 눌러 쓰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중 일을 걱정하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가장 난감했다. ‘윤우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머리를 쥐어뜯다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뉘른베르크까지만 가면 돼. 할 수 있지?”
   엄마가 물을 때 고개를 저을걸, 어떻게든 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갈걸, 후회가 밀려왔다.
   프랑크푸르트에 온 지 사일 째.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엄마는 남은 휴가를 반납하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에게는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모에게 전화를 해서 나 혼자 뉘른베르크에 가게 됐다고 알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괜찮지? 내게 물었지만 그건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엄마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원래 엄마의 계획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며칠을 보낸 뒤에 뉘른베르크의 이모네에 나를 데려다주는 것까지였다. 이후에 나는 이모네서 방학을 지내고 개학에 맞춰 이모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길 줄은 엄마도 몰랐겠지만 그렇다고 내 방학 스케줄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열세 살인 내가 외국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 낯선 지역으로 가는 걸 엄마는 염려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열세 살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였다. 무얼 해도 두려운 내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내가 사라져서 다들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모는 뉘른베르크역에서 나를 한참이나 기다렸을 텐데, 한국으로 간 엄마가 다시 돌아왔을까, 내 실종 사건이 뉴스에 나오지 않았을까, 온갖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에 온 것처럼 지호가 내 자리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더 걱정이 되었다. 서로 바뀐 채 이대로 살아간다면? 상상하다가 머리를 휘저었다. 윤우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1983년, 독일에 사는 한국 소년 정지호로 눌러앉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서 방문이 열렸다.
   “아직 안 자고?”
   지호의 아빠이면서 지금은 내가 아빠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물었다.
   “이, 이제 자려고요.”
   나는 허둥거리며 침대로 움직였다. 아빠는 내 행동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방문을 닫았는데, 아빠의 깊게 팬 주름이 한층 깊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지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나는 여러모로 지호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빠를 걱정하고 챙기던 아이, 집안일도 곧잘 하고 방학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돈을 벌었던 아이, 그러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아이.
   지호의 방에 와서 가장 놀란 건 엄청난 양의 스케치와 그림이었다. 지호의 절친인 유찬의 말로는 제대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다고 했는데 지호의 그림은 놀라웠다. 지호와 같은 미술 학원을 다녔더라면 나는 아마 지호를 샘내고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림 실력도 대단했지만 진심으로 그림을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을 끄고 누워도 머릿속은 또렷했다. 아침에 깼을 때 원래의 내 방으로 돌아가 있기를 바라면서 잠든 게 며칠째였다. 당장 내일도 지호로 살아가려면 닥친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건 병아리였다. 하필 방학 중 선택한 아르바이트가 병아리 암수 구별이라니. 유찬과 한국 어른들의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병아리를 감별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호는 기본 교육만 받고도 꽤 잘 해냈다던데, 여러 가지로 못마땅한 녀석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병아리를 만질 수 있게 된 정도였으니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모두에게 짐만 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병아리 걱정을 하자 바로 옆에서 병아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당겼다.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병아리 소리가 까마득해졌다.

   “슈테델 먼저 둘러보자. 르누아르부터 뭉크, 루소의 작품도 있어.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엄마가 휴가의 목적지를 독일로 잡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슈테델 미술관에 가는 것과 이모에게 나를 맡기는 것. 이모도 나를 데리고 인근의 여러 도시를 다닐 터였다. 이모네 집에 머무는 동안 나를 레슨해 줄 선생님도 구해놓았다고 했다. 일찍부터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하는 게 엄마의 의도라는 건 알지만 엄마의 계획 속에서 나는 신나고 재미있는 추억보다 지치고 힘든 기억이 더 많았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된 그림을 스케치하는 아이들 모습이 엄마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 같았다. 진정한 미술 교육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 여러 차례 내게 말해주었다. 내가 경쟁해야 하는 건 그 아이들이라고 엄마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엄마의 뜻에 따라 처음으로 유럽의 예술 기행에 나섰던 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미술 대학을 목표로 하는 중, 고등학교 형과 누나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였다.
   런던과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화집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실제로 접했지만 무엇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어디에서 무슨 그림을 봤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대영 박물관을 시작으로 루브르 등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을 진열된 옷 구경을 하듯이 둘러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던 기억만 선명했다.
   로댕 박물관에서 다들 작품을 둘러보고 있을 때 혼자 야외 전시관으로 나가, 생각에 빠진 조각상을 멍하니 보며 마카롱을 먹었던 게 그나마 행복한 순간이었다.
   6학년 내내 늦은 시간까지 입시 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행히 목표로 한 예술 중학교의 입학을 앞두고 있지만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중학교 3년 동안은 예술 고등학교를, 그 뒤로는 미술 대학에 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입시에 맞춰 이전에 출제되었던 정물이나 앞으로 나올 법한 것들만 그렸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건 대학에 가서 실컷 그리라고 했지만 이제는 전부 지겨웠다. 아무것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한국으로, 나는 뉘른베르크에 가기로 한 날, 우리는 같이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기차를 타기 위해 중앙역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거리 귀퉁이에 노숙인이 앉아 있었다. 며칠째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노숙인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들었는데 엄마는 그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을 한층 빨리했다.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올 일은 없었기에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몇 개와 큰 액수가 아닌 지폐가 딸려 나왔다. 노숙인 앞에 놓인 통에 돈을 넣었다.
   “당케.”
   감사 인사를 하면서 노숙인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얼른 손을 빼고 뒤로 물러섰다. 짧은 순간 노숙인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서 보니 노숙인은 생각보다 젊은 얼굴이었다. 앞서가던 엄마는 내가 무얼 하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엄마의 뒤를 따랐다. 잠시 돌아보자 노숙인은 통에 들어 있는 돈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노숙인의 거친 손의 느낌이 살아나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서울에서 봐, 우리 아들.”
   엄마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중앙역에 도착해서 엄마와 헤어졌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지 엄마는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서둘러 공항으로 출발했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오전의 기차역은 몹시 혼잡했다. 다들 분주해 보였는데 즐비한 식당가에서 음식을 포장하거나 선 채로 식사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아 배가 고팠으나 음식은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모를 만나기 전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뮌헨이 종착지인 열차를 타고 두 시간 남진 가서 뉘른베르크역에서 내리면 이모가 마중 나와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전광판을 보면서 승강장 번호를 확인했다.
   열차 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사람들로 복작거렸는데, 예정된 출발 시간이 지나도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들어오지 않자 슬슬 초조해졌다. 열차가 지연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의지할 어른도, 함께 할 친구도 없어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잠시 뒤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안내 방송이 나오더니 전광판의 승강장 번호가 바뀌었다. 무슨 일인지 갑작스레 승강장이 변경된 것이다.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고 나도 다급하게 움직였다.
   변경된 승강장에 다다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다 엉망이 된 기분이었다. 그림 따위 그리지 않겠다고, 화가가 되고 싶은 꿈도 접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서러운 마음에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익스큐즈 미!”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밀치고 뛰어나갔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중심을 잃은 내가 휘청거렸고 끌고 가던 캐리어가 하필 철로가 있는 방향으로 넘어갔다. 캐리어를 잡기 위해 재빨리 손을 뻗었는데 이동하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승강장 가장자리에 있던 내 몸이 떠밀리고 말았다. 발이 미끄러지고 캐리어와 함께 나는 철로 위로 나동그라졌다.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의 낯선 언어가 귀를 울렸다. 선로의 떨림, 열차의 경적이 전해졌다.
   순간 누군가 달려들어 나를 확 밀어냈다. 그대로 나가떨어지면서 여러 가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를 밀어내는 남자의 푸른 눈동자, 그 뒤로 바짝 달려오는 열차.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렸을 때 낙서하듯이 그린 그림, 어른들의 칭찬, 미술학원, 예술 중학교 실기시험 날, 그리고 합격 통지서. 아주 빠르게 많은 일들이 스쳤지만 정작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게 끝이라는 것 외에는.
   숨이 턱 막혀오는가 싶더니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고 나서 내 눈에 보인 건 남자의 눈동자도, 열차도 아니었다. 내 손 안에 있는 걸 나는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노란색, 복슬복슬하고 물컹거리는 감촉.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직접 만질 일은 전혀 없었던 것.
   “으악!”
   화들짝 놀라며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걸 놓쳐 버렸다. 서둘러 몸을 빼다가 우당탕 뒤로 넘어갔다. 병아리가 소리를 내며 살짝 날갯짓을 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카!”
   금발의 남자가 나를 쏘아보았다.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내게 쏠렸다. 나는 누운 채로 얼어붙어 눈앞의 모습을 얼떨떨하게 보았다.
   “왜 이래?”
   내 또래의 남자아이가 달려오더니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로 나를 질책했다. 남자아이는 비굴한 웃음을 머금으며 금발의 남자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금발의 남자가 혀를 차며 돌아섰고 내게 관심을 쏟던 사람들도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갑자기 주변의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병아리들이 내는 소리가 하나로 모여 실내를 가득 채웠다.
   남자아이가 넘어간 의자를 세우고 나를 부축했는데 나는 남자아이의 손에 이끌려 겨우 움직였다. 일어서서 보니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은 병아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죄다 손에 병아리를 들고 있었다. 밝은 형광등 아래서 아주 짧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병아리를 살펴보고 던지듯 내려놓고 또 다른 병아리를 살피고 내려놓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열차를 피했던 시간이 몇 초나 되었을까. 그때부터 나는 서울에 살던 윤우주에서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과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미카, 한국 이름 정지호가 되어버렸다.

   식탁 위에 아빠가 찌개를 올려놓았다. 광부였던 아빠의 손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요즘 네가 밥을 통 못 먹는 것 같아서.”
   아빠가 슬쩍 웃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나도 애써 웃음으로 답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찌개는 맛있었다. 오랜만에 먹은 한식으로 배가 든든했다.
   서울에서 나는 엄마와 지냈고 지호는 아빠와 둘이 살았다. 지호와 나는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았는데 굳이 필요 없는 공통점을 발견할 때면 조금 씁쓸해졌다.
   초인종이 울리자 아빠가 일어섰다. 문을 열기 위해 걸어가는 아빠는 다리를 절뚝였다. 광산 붕괴 사고로 다친 후유증 때문이었다.
   광부로 지원을 해서 한국을 떠나온 아빠는 비슷한 이유로 간호사가 된 엄마를 만나 결혼했고 이곳에서 지호를 낳았다. 돈을 벌어 한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겠다던 꿈은 지호의 엄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깨지고 말았다. 광산 일조차 할 수 없게 됐음에도 아빠는 한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지 못했다. 식당이나 마트에서 일을 하며 지호를 뒷바라지하고 있다는 대강의 사연을 유찬에게 전해 들었다.
   친아빠는 아니지만 아빠의 뒷모습을 볼 때면 괜히 가슴 한편이 아렸다. 지호를 당장 아빠 앞에 데려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초인종을 누른 건 예상대로 유찬이었다. 유찬은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우리는 2층에, 유찬은 브르노 할아버지와 4층에 살고 있었다.
   브르노 할아버지가 팔을 다쳐 당분간 일을 쉬게 되면서 지호와 유찬이가 할아버지 대신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식 교육도 이수하지 못한 우리가 나이까지 속여 가며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던 건 브르노 할아버지의 추천과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장 일할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한국인이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에 능숙한 솜씨를 보여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아온 덕분이기도 했다. 마침 지호와 유찬이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워왔기 때문에 충분히 도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 놓은 모양이었다. 브르노 할아버지가 팔에 감은 깁스를 풀 때까지만 그 자리를 유찬과 지호가 메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지호가 아닌 내가 하고 있지만.
   “얼굴이 좋아 보인다? 이제 정지호로 사는 데 익숙해진 건가?”
   걸어가며 유찬이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는 퉁을 놓았다.
   처음에 내 얘기를 듣고 황당해하던 유찬은 어느덧 내 말을 전부 믿게 되었는데, 지호를 걱정할 때만 빼면 이 상황을 굉장히 흥미로워하는 건 아닌가 종종 의심이 들었다. 덕분에 유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기는 했다. 지호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가 실수를 할 때마다 유찬은 내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오늘도 갈 거지?”
   유찬이 묻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트램이 다니는 철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에 항상 중앙역으로 먼저 향했다. 비슷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열차에 뛰어들 생각도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매일 나갔다. 찾아야 할 사람도 있었다. 열차의 선로에 떨어졌을 때 나를 밀어낸 푸른 눈동자의 남자를 나는 한참 만에야 떠올렸다. 불쑥 내 손을 잡아 나를 당황시켰던 노숙인이 틀림없었다. 사고가 났던 순간에 우리는 손을 맞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여기로 왔을 게 분명했다. 이곳으로 나를 밀어 넣은 건 그였을 수도 있었다.
   처음 여기로 왔던 날, 제일 먼저 달려간 곳도 중앙역이었다. 유찬의 손까지 뿌리치면서 나는 무조건 내달렸다.
   역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멈춰 섰다. 식당과 상점의 간판이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엄마와 헤어지던 카페는 작은 마트가 되었고, 파니니를 팔던 식당 앞에는 책과 신문이 진열되어 있었다. 서둘러 신문을 집었다.
   1983.
   날짜가 적힌 숫자를 보자 머리가 빙 도는 것 같았다.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렸던 승강장으로 뛰어갔지만 내가 알던 풍경이 아니었다. 내 짐도 없어졌다. 선로에 떨어질 때 잃어버렸는지 휴대전화도 없었다. 있다 해도 휴대전화로 전화나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지만. 뒤따라온 유찬이 내 팔을 잡았을 때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날 이후로 중앙역은 바뀌지 않았다. 매일 같은 자리에 나가 사고가 났던 철로 앞에 섰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밀어내던 푸른 눈동자의 남자도 찾을 수 없었다.

   “구텐 탁, 미카!”
   “안녕, 지호!”
   작업장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다들 지호와 유찬의 사정을 알고 있는 데다가 우리 팀은 전부 한국인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리에 앉아 병아리를 내려다보았다. 노란색 병아리들이 울어댔다. 처음에는 만지기도 싫었는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손 안에 품었다. 보드라운 털이 느껴질 때면 몽글거리는 기분이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했는지 잠시 잊을 때도 있었다. 작은 날개, 통통한 몸통은 볼수록 귀여웠다.
   “병아리 감상은 그만하고. 여기를 주의 깊게 보라고.”
   옆에서 유찬이 병아리의 엉덩이를 내밀었다. 단 몇 초 만에 병아리의 암수를 구별해서 따로 구분해 놓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알을 낳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병아리들은 다른 시스템으로 키워지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브르노 할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도 곧 눈을 부릅뜨고 병아리를 들여다보았다. 손끝의 감각에도 집중했다. 일을 제대로 못해서 아르바이트까지 잘리고 떠난다면 지호가 나를 엄청나게 원망할 것이다. 나랑 똑같이 생긴, 어딘가에 있을 지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병아리 한 마리를 손에 쥔 채로 나는 머뭇거렸고 유찬이 수시로 나를 흘끗거리며 도와주었다.
   “지호야, 잠깐만!”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우리랑 같은 팀에 있는 누나가 불러 세우더니 내 손에 종이 가방을 쥐여주었다.
   “별건 아니지만 아빠랑 먹어. 지난번에 은이를 그려준 답례야.”
   “네?”
   “한국에 있는 연이 누나 동생. 저번에 네가 그려준 사진 속 모델 말이야.”
   유찬이 말하면서 팔로 나를 툭 쳤다.
   “아, 그…… 랬죠.”
   “편지랑 함께 은이한테 보냈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 그림을 그려준 오빠가 유명한 화가가 될지 모른다고 하니까 고이 간직하겠대.”
   누나가 싱긋 웃어주었고 나도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나를 포함해서 네 그림을 잘 소장하겠다는 사람이 많아. 참, 네가 아니라 지호 그림이지만.”
   밖으로 나오며 유찬이 말하다가 얼른 정정했다.
   처음에는 지호라는 아이가 미웠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게 지호 탓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둘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지호를 이해하게 되었다. 때로는 부러웠다. 나에 비하면 형편없이 안 좋은 조건 속에서도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유찬의 말에 내가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슛, 슛!”
   유찬이 외쳤고 잠시 뒤에 다 같이 아쉬운 탄성을 뱉어냈다. 아빠와 브르노 할아버지가 맥주잔을 부딪쳤다. 차범근 선수의 골은 빗나갔지만 경기의 분위기를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다. 축구를 보는 동안 나도 손에 땀을 쥐면서 응원을 하게 되었다.
   분데스리가에서의 차범근 선수 활약상은 얼핏 들었지만 그 경기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브르노 할아버지 집에 모여 우리는 차범근 선수가 속한 프랑크푸르트 팀을 응원했다.
   다친 팔을 하고도 할아버지는 음식을 준비했고 아빠와 내가 4층으로 올라갔을 때 마침 유찬은 제 얼굴만 한 프레첼을 뜯어먹고 있었다.
   “얀, 그만. 다른 음식도 많아.”
   브르노 할아버지가 어색한 한국말로 걱정스럽게 말했는데 둘은 정말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전 유찬의 부모님이 이웃이던 브르노 할아버지에게 유찬을 맡기고 다시 돌아오지 않은 날부터 둘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되었다. 이제는 부모님이 데리러 와도 절대 브르노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유찬은 앙다문 입으로 말했었다.
   내 입에는 너무 짠 소시지도, 이제는 질려버린 슈니첼도, 둘러앉아 먹으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모두가 모였을 때는 한국말과 독일어, 영어를 섞어 사용하는 데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나도 이런 분위기에 차차 익숙해져 갔다. 유찬의 말대로 정지호로 살아가는 데 적응이 되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에게 공통점이 많다 해도 나는 지호가 될 수 없었고 그건 지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지호의 그림들을 하나씩 다시 보았다. 지호의 방에는 그림이 가득했다. 벽면에도 잔뜩 걸려 있었다. 펼치는 노트와 스케치북마다 지호의 그림이 나왔다. 종이가 부족할 정도로 지호는 그림을 그려댔고 실제로 지호의 그림 도구들은 낡고 닳아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절실했던 이유가 분명했다.
   지호의 그림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표현이 다채로웠다. 병아리를 소재로 한 그림도 많았는데 털 하나까지 세세하게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병아리를 감별해내면서 겪은 일을 만화처럼 스토리로 엮어낸 것도 있었다. 웹툰으로 연재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쿡쿡 웃으며 봤다. 병아리의 형체에 사인펜이나 마카 같은 재료로 다양한 무늬를 덧입힌 그림은 개성이 두드러져 보였다.
   지호의 그림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스케치북의 맨 끝장에 있는 그림을 여러 번 보았는데도 볼 때마다 그림에 빠져들었다. 작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병아리와 병아리를 받아내려는 듯 손바닥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그림의 중앙을 차지했다. 어지러이 널려있는 시곗바늘,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지는 듯한 배경은 마치 달리의 초현실적인 그림을 연상시켰다. 병아리는 손에 잡힐 듯했고 시계의 초침은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같은 재료, 비슷한 톤으로 시험에 나올 법한 정물만 반복적으로 그리던 나와는 달랐다. 지호의 열정 앞에서 입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가만히 지호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연필을, 물감을 손에 잡고 싶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예중 실기 시험이 끝난 뒤로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지호의 그림을 보자 밀어두었던 마음이 움직였다. 지호가 한만큼, 아니 그 이상을 나도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볼펜 깍지를 끼운 지호의 연필을 잡았다. 물감은 거의 모든 색이 빈 통이었다. 내가 가진 재료를 나누어 주고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도화지를 펼치고 바로 손을 움직였다. 지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재료가 별로 없어 잡히는 대로 색을 입혔다. 하나의 그림에 여러 재료가 혼합되었다. 물감부터 파스텔, 색연필, 크레용까지.
   다가오는 기차, 기차역의 전광판, 푸른 눈동자, 깊은 홀에 힘없이 빨려 들어가는 소년의 형상. 어느덧 그림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마지막 채색을 했을 무렵에야 동이 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그림에 빠져들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성적이 쑥 올랐을 때만큼이나 가벼운 기분이었다. 잠을 못 잤는데도 개운했다. 마침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벌써 일어났……”
   아빠가 방문을 열었다. 말을 채 끝내기 전에 아빠의 시선이 내 그림으로 옮겨갔다. 흘끗 아빠 눈치를 살폈는데 아빠의 입술이 미세하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
   아빠는 나직이 말하고 나서 방문을 닫았다. 전과 다른 나를,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번번이 실수만 하는 나를 아빠는 많이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지호가 아니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미안, 오늘은 기차역에 같이 못 가겠어.”
   어쩐 일인지 유찬이 내려오지 않아 4층으로 올라갔더니 늦잠을 잔 유찬이 칫솔을 입에 물고 웅얼거렸다.
   “그래. 이따가 보자.”
   어차피 작업장에서 만날 거라서 나는 먼저 집을 나섰다. 언제까지 유찬과 함께 다닐 수도 없었다.
   기차역으로 들어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람은 많고 다들 분주해 보였다. 평소와 사뭇 다른 마음이 들었던 건 오랜만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호의 자리에 있는 동안 계속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지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언제든 지호가 돌아왔을 때 편지나 어떤 말보다도 그림으로 내가 왔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갑자기 병아리도 보고 싶었다. 어제보다 오늘은 훨씬 많은 병아리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서!”
   그때 느닷없는 외침과 소란이 일었다. 휙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뛰어오던 사람과 몸이 부딪쳤다. 그 바람에 상대방이 중심을 잃어 철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이 기울어졌고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을 먼저 떨어뜨렸다. 소매치기라는 걸 알았지만 그 외의 것은 판단할 새가 없었다. 손을 뻗어 철로에 떨어지는 남자의 손을 그러쥐었다. 남자도 힘껏 내 손을 잡았다. 있는 힘을 다해 남자를 앞으로 당겼다. 우리 둘의 몸이 가까스로 승강장의 가장자리에서 안으로 넘어올 때에 나는 바로 앞에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아!”
   그토록 찾던 푸른 눈동자의 남자였다. 내가 상황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우리 둘은 손을 잡은 채로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졌다. 온몸으로 충격이 흡수되며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곧이어 들린 열차의 굉음, 사람들의 아우성과 외침, 바닥에서 전해지는 딱딱한 감촉과 몸의 통증.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얼른 남자를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번쩍 안아올렸을 때에야 가까스로 눈을 떴다. 나는 승강장 안쪽의 안전한 쪽으로 옮겨졌고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는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내 눈은 푸른 눈동자의 남자를 찾고 있었다.
   “어디 있어요? 그 사람……”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열차는 다행히 비껴갔어.”
   갑자기 들린 한국말에 정신이 들었다. 한국인 누나가 다가와 손을 잡아주며 나를 안심 시켰다.
   “널 구해준 사람은 사라졌어. 조금 전까지 분명히 있었는데.”
   누나가 말하면서 두리번거렸다. 날 구해준 사람? 승강장 밖으로 떨어지는 남자의 손을 잡아준 건 나였는데……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1983년에는 볼 수 없던 전자식 전광판이 보였다. 7번 승강장, 뮌헨 1201. 사고 전 바뀐 승강장 위치와 내가 타야 했던 열차 번호였다. 몸을 일으켜 먼 곳까지 내다보았다. 있었다. 엄마와 헤어지던 카페, 파니니를 팔던 식당.
   “지금이 몇 년이에요?”
   “어?”
   누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신기한 건 내가 과거에 있던 건 며칠이나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사고가 나던 그 시점 그대로였다.
   마침 도착한 구조대가 내게 올 때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중앙역을 빠져나왔다.
   나를 구해준, 그리고 내가 구해주었던 푸른 눈동자의 남자를 찾아야 했다. 쉬지 않고 뛰었지만 노숙인이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여기 있던 남자 어디로 갔어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영어로 물었으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푸른 눈동자의 남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둘은 같은 사람이었을까. 남자의 존재를 알고 싶은데 찾을 길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이번에는 작업장이 있던 곳으로 달렸다. 하지만 건물은 다른 간판이 올라가 있었다. 지호와 유찬이 살던 아파트에도 가보았지만 예전과 달리 입구가 잠겨 있었다. 문을 흔들고 두드리자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나와 나에게 화를 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대섰다. 여러 일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아빠와 유찬, 브르노 할아버지와 병아리 감별사들. 바랐던대로 제자리로 왔건만 마지막 인사를 못하고 온 게 마음에 걸렸다.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지호였다. 지호도 제자리로 돌아갔을까. 반드시 그래야 했다. 지호는 돌아가서 하던 일을 마저 해야 했다. 아빠의 곁에, 유찬과 브르노 할아버지, 많은 한국인들의 곁에 있어야 했다.
   지호와 유찬의 나이를 가늠해보았다. 둘은 여전히 친구로 지내는지, 아직도 프랑크푸르트에 사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떻게든 찾아볼까 싶었지만 곧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지호는 계속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숨이 가라앉고 나니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는 싫은 일에 억지로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이모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일부러 찾지 않아도 언젠가는 지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달랐지만, 또 나와 같았던 지호를.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아마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싶은 그림도 생겼다. 그려야 하는 그림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들. 이제는 누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이은용

함께 생각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고민합니다.
동화 『열세 번째 아이』를 썼습니다.

2020/04/28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