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문학
아지트
형이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구백십오일 만이다.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진 아버지와 다르게 형은 ‘자리 잡히면 데리러 올게.’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고작 열일곱 살에게 잡힐 자리가 있을 리 없다. 혼자 사는 친구 집에 얹혀 있는 주제에 나 같은 혹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 있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름이 다 되어 가는데 형에게서는 감감무소식이다.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 실내복에 다리를 집어넣었을 때다. 벌컥 방문이 열렸다.
“상놈의 새끼. 청소 좀 해놓으면 어디가 덧나!”
엄마가 거인처럼 문가에 서서 소리를 질러댔다. 피곤해서 잠깐 누워 있으려 했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고 말하려 했다.
“불까지 끄고 뭐하고 있었어!”
애초에 불은 켜지 않았다고 덧붙이려고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틈을 주지 않았다.
“꼴에 남자 새끼라고.”
어이없어하는 말투와 음흉한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로변에 발가벗고 서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당신 기분이 상한 만큼 내 기분도 엉망으로 만들 의도였다면, 뜻대로 되었다. 나는 벗어놓았던 교복을 집어들고 욕실로 향했다.
“밥을 처먹었으면 코드를 빼놔야지. 전기세가 공짠 줄 알아!”
밥통 뚜껑 닫는 소리를 들으며, 힘껏 비누칠을 했다. 집에서 밥을 먹어본 지가 한 달도 더 되었다.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연이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수돗물을 세게 틀어 들려오는 말소리를 덮으려 했다.
“물 안 잠가!”
센 수압 정도는 간단히 뚫어버리는 악센 목소리의 위력에, 수돗물을 잠갔다. 언제까지 욕실에 있을 수 없어 옷을 널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그사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눈치껏 행주로 식탁을 닦고 엄마가 먹을 김치를 놓고 수저와 젓가락도 챙겼다. 엄마는 말없이 라면이 든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지금 안 먹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싱크대에서 내 것의 수저와 젓가락을 챙겨 맞은편에 앉았다. 엄마는 그릇에 라면을 덜어 입에 넣었다. 나도 라면을 덜어 그릇에 담았다. 막, 한입을 후루룩 마셨을 때다.
“그 새끼 연락은?”
엄마는 김치를 집어들며 물었다. 여기서 ‘그 새끼’는 형을 가리키는 거다. 엄마는 형이 집을 나간 후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오늘은 형이 내게 연락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짚어주기로 했다.
“전화가 없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요.”
“지금 나한테 휴대폰 없다고 꼬는 거지? 미친놈. 여자 혼자 애 둘 키우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거기다 휴대폰? 휴대폰을 사면 그걸로 끝나?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요금은? 하여튼 이럴 때 보면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제 아비랑 똑같지. 네 힘으로 요금 낼 수 있을 때 그때 사달라고 해.”
엄마는 서슬이 퍼레져서 젓가락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단연코 전화기를 원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묻는 말에 매번 머리를 흔들어대기가 민망했을 뿐이다.
“나갈 땐 지 맘대로 나가도 들어올 땐 지 맘대로 못 들어와. 연락 오면 꼭 전해.”
엄마는 냄비를 자기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나는 김치 줄기를 뒤적이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젓가락과 빈 그릇을 챙겨 들고 싱크대로 갔다. 요란한 물소리에 엄마가 라면을 들이마시는 소리도 묻혔다. 라면의 기름기가 깔끔하게 씻겨 나가는 것처럼 착잡한 기분도 씻어 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엄마가 등을 후려쳤다. 등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한번 말을 하면 들어 처먹어. 그깟 젓가락 닦는데 물은 왜 틀어놓고 지랄이야!”
올려놓은 주전자에 가스 불을 켜면서도 엄마는 내내 나를 노려보았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커피다.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건 나다. 한때 엄마가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이유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유를 알아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다음날, 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굳게 닫힌 정문 옆으로 나 있는 쪽문을 열고 들어섰다. 벽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켰다. 바로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은 임시 건물로 운동장 한 귀퉁이에 있다. 아지트로 가기에 앞서 매점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며 매점 뒤로 돌아가자 폭이 사 미터 정도 되는 공간이 나왔다. 긴 담벼락에 둘러싸인 공간의 끝은 울타리로 막혀있다. 이곳은 CCTV가 없다. 쓰레기통과 잡동사니뿐으로 아이들도 얼씬하지 않는다. 나는 기분 좋게 한 발을 내디뎠다. 나란히 붙어 있는 음식물쓰레기통 세 개를 지나 빈 상자를 쌓아놓은 더미를 지났다. 재활용 쓰레기를 담은 봉지를 지나자 커다란 미루나무가 나왔다.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 안아야 할 만큼 몸통이 큰 나무다. 그 나무 바로 옆에 바위가 있는데 위가 평평하고 길쭉해 다리를 뻗고 앉으면 세상 편했다.
나는 나무를 등받이 삼아 바위에 앉았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옅게 맡아지는 풀냄새는 덤이다. 이러고 있으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형에 대한 걱정도 화난 엄마도 흐릿하게 멀어진다. 이곳은 나만의 장소 나의 아지트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은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새의 지저귐에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본다. 가슴을 내리 누리던 바윗덩어리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다.
“앗! 깜짝이야.”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커피를 쏟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 바지를 털어보았지만 화끈거리는 것이 허벅지를 덴 것 같았다.
“뭐야, 너?”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불청객의 얼굴이 검게 보인다.
“꺼져.”
그의 협박에 옆으로 한걸음 비켜서자 비로소 이목구비가 보였다. 잡히지도 않게 짧게 자른 머리에 굵은 눈썹 아래 작고 까만 눈동자와 두꺼운 입술이 고릴라를 연상시켰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에 다부진 골격이, 괜한 시비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꺼지라고 새끼야!”
발이 날아왔다. 가슴에 정통으로 맞은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이어지는 발차기. 고릴라는 교복 바지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축구공을 다루듯 나를 굴렸다. 녀석의 현란한 발놀림에 쫓긴 나는 기다시피 도망쳤다.
매점 앞 커피 자판기에 이르러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들었다.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아픔과 참담함에 분노가 솟았지만 그렇다고 매점 뒤로 가 고릴라와 맞짱 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 안방에서 나온 엄마와 마주쳤다. 오늘따라 일찍 퇴근한 모양이다.
“연락은?”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내 방문을 열었다. 교복을 벗어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미친놈.”
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연이어 혀를 찼다.
“유난도, 유난도 저렇게 떠는 건 처음 봐. 이 새끼야, 니 애비도 너만큼 깔끔 떨지는 않았어. 이달부터 수도세 니가 내.”
엄마의 입을 다물 수 있게만 한다면 그깟 수도세쯤 얼마든지 낼 수 있다. 나는 대답이라도 하듯 수도를 세게 틀었다.
“근데 저 새끼가 사람 혈압을 올리네. 안 꺼!”
어쩌라는 건지. 수돗물을 잠그고 옷을 마저 헹군 후 탈탈 털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문득 형이 집에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었다면 ‘그게 자식한테 할 소리냐고’ 소리를 질렀을 거고, 그랬다면 또 삼층과 사층에서 올라와 제발 조용히 좀 살자고 애원하는 소리를 번갈아 들을 뻔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이 밝았다. 밤새 마른 교복 셔츠를 챙겨 입고 거울을 보았다. 고릴라 녀석의 운동화 자국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하지만 허벅지에 든 커피 얼룩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나마 회색이라 눈에 확 띄지는 않았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주머니에 든 동전을 확인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어제 집에 갈 때 슬쩍 학교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분식집에도 기웃거렸다. 떡볶이를 먹느라 나를 못 보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이십사 시간 편의점도 들어갔다.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는 내 뒤통수를 노려보는 점장 빼고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밥은 먹고 다니는지. 친구 집은 지낼 만한지, 걱정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찹찹한 기분을 잠재우듯 자판기 단추를 힘껏 눌렀다. 컵이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겼다. 컵을 챙겨 들고 아지트로 향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어서 와’ 반기는 듯 보였다. 바위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작정 형이 내게로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형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 볼까? 아니, 그건 아니다. 몇 반인지도 모르는 데다 무작정 내가 나타나면 형이 난처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지만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다. 솔솔 부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불안했던 마음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이 시간에 매점 뒤에 올 사람은 없는데. 어제의 악몽이 떠오르자 불안하게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용히 일어나 나무 옆으로 바짝 붙어섰다. 그러고는 살짝 머리를 내밀었다. 고릴라다! 고릴라는 매점 뒷문에 귀를 대고 주먹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매점 아줌마를 찾는 것 같았다. 아줌마는 일곱 시 사십 분쯤에나 출근하는데. 말을 해 줄까 하다 그만두었다. 어제 맞은 걸 생각하면 손톱만큼의 호의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
“앗!”
나를 발견한 고릴라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시발. 어제 그 새끼네? 너, 여기서 뭐 해?”
“커피 마시는데요.”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밀었다.
“무슨 커피를 숨어서 마셔!”
고릴라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숨은 게 아니라……”
“아놔, 내가 여기 오지 말랬지?”
내 말이 들리지 않은 듯 주먹이 날아왔다. 복부에 꽂힌 주먹은 돌멩이처럼 단단했다.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허리가 기역 자로 꺾였다. 뒤이어 날아온 발차기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방어에만 급급한 나를 고릴라가 일으켜 세웠다.
“너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
고릴라의 거친 숨소리가 정수리에 와닿았다. “십 분 전쯤요.” 나는 고릴라 발치에서 뒹구는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한 커피가 아까웠다.
“여기서 뭐 봤어?”
“아무것도.”
이번에도 고릴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숨어서 왜 날 봐. 날 왜 감시해, 새끼야!”
무차별 날아오는 발차기와 주먹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도저히 머리를 들 수 없었다. 고릴라의 융단폭격이 별안간 멈췄다. 거슬리는 쇳소리가 두어 번 나더니 뭔가 덜컹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고릴라가 나를 나무 옆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나는 마른오징어처럼 고릴라와 나무 사이에 납작하게 붙어버렸다. 행여 비명이라도 지를까 걱정이 되었는지 고릴라의 두툼한 손바닥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통째로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낯선 아저씨의 음성에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쇠만 고치면 안 돼요?”
매점 아줌마다.
“여기 부식이 심해서 열쇠로 잠가도 소용없어요. 맘먹고 털려고 하면 십 분이면 털겠네.”
“누가 매점을 털어요, 훔쳐 갈 게 뭐 있다고.”
“못 들었어요? 저기 고등학교 매점 돈 통 털렸다는데.”
“여긴 중학굔데요. 그리고 우리 학교 애들은 착해서 그런 짓 못해요.”
“뭐, 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아저씨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통째로 갈면 얼마에요? 건물이 오래돼서 여기저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
두 사람은 다시 매점으로 들어갔는지 거슬리는 쇳소리 후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릴라는 빠끔히 머리를 내밀고 동태를 살핀 후 천천히 팔을 떼었다.
“너, 내 말 잘 들어. 두 번 다시 여기 오. 지. 마. 또 오면.”
고릴라는 의미심장하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다음날 학교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일곱 시일 거다. 오랜 습관이란 그런 것이다. 매점 앞은 고요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어제와 똑같은 맛이다. 이제 교실로 가면 된다. 교실에서도 커피는 마실 수 있으니까. 그런데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볕에 뒤통수가 따갑다.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음과는 상관없이 발걸음이 아지트로 향했다. 음식물쓰레기통을 지나는데 상자를 쌓아놓은 더미 옆에서 고릴라가 툭 튀어나왔다. 허공에 맴돌던 녀석의 눈길이 내게로 와 꽂혔다.
“너!”
녀석의 입에서 짧은 외침이 터졌다. 고릴라는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쪽으로 달려온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녀석의 발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앗, 시발.”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채인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고릴라의 가슴팍이 커피에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종이컵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넘어지면서 커피를 쏟은 것 같았다.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고릴라의 판단은 달랐다.
“근데 이 새끼가.”
고릴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가슴팍의 도드라진 젖꼭지를 바라보며 ‘오해’라고 말하려 했다. 매번 그랬듯 이번에도 말을 하기도 전에 녀석의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이리저리 몸을 놀리기에 급급했다. 녹슨 쇠문 소리에 발길질이 허공에 멈췄다.
“거기서 뭐하니?”
매점 아줌마다. 고릴라는 재빨리 나를 바위 뒤로 밀어넣고는 바닥에 뒹구는 빈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커피를 마시다 쏟았어요.”
“그거 빨리 빨아야 얼룩이 가실 텐데. 이리 와, 주방 세제 줄게. 그걸로 빨아야 깨끗하게 지워져.”
고릴라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를 무섭게 쏘아보고는 매점으로 들어갔다. 나는 허벅지에 흐릿하게 남은 얼룩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다음날도 나는 매점으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컵을 꺼내려 허리를 숙이는데 ‘윽’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파스를 석 장이나 붙였는데도 여기저기 쑤시고 결린다. 종이컵을 집어든 손이 덜덜 떨렸다. 상자 더미가 가까워질 때다. 매점 뒷문에 고릴라가 바짝 붙어 있다. 인기척을 느낀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근데 진짜 저게.”
녀석의 손에 쇠파이프가 들린 것을 보자, 머릿속의 경고음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요란하게 울려댔다. 고릴라가 내게 서너 걸음 다가왔을 때다. 딱! 소리와 함께 경첩 한쪽이 떨어졌다. 위에 붙어 있는 경첩도 간당간당했다.
“야, 나 바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꺼져.”
고릴라는 귀찮은 파리를 쫓듯 쇠파이프 든 손을 밖으로 내저었다.
“빨리 안 가?”
녀석의 목소리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볍게 몸을 옆으로 비켜서 돌멩이를 피했다.
“저 새끼가 정말 사람 돌게 만드네.”
고릴라는 제 성미에 못 이겨 달렸다. 나도 내처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 자판기 앞까지 왔을 때 나 혼자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느라 종이컵에 있던 커피도 바닥이 났다. 나는 자판기에서 새로 커피를 뽑아들고 모퉁이를 돌았다. 음식물쓰레기통에 이르자 고릴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매점 문을 떼어 옆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숨죽인 채 조용히 움직였다.
“아, 씨!”
고릴라의 낮은 욕설에 숨을 참았다. 고릴라는 내가 아닌 덧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 같다. 덧문을 살피던 고릴라는 파이프로 방충망을 툭툭 쳐 댔다. 나는 상자 더미 뒤로 솟아오른 미루나무를 바라보았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미루나무로 향했다. 상자 더미를 지나며 곁눈질로 고릴라를 흘낏거렸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삐죽하게 튀어나온 돌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새로 뽑은 커피가 바닥에 쏟아졌고, 무릎이 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지에 구멍이 나지는 않았다는 정도다. 어느새 다가온 고릴라가 멱살을 움켜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너 오늘 죽어봐.”
고릴라는 문을 따지 못한 분풀이를 내게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발과 손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용을 썼다. 그러다 재활용 봉투를 쌓아놓은 더미 속으로 쓰러졌다. 그 위를 고릴라가 덮쳤을 때다.
“어머머!”
매점 아줌마였다. 소리와 동시에 고릴라가 납작 엎드렸다. 고릴라의 몸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의 굵은 팔뚝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저씨 문 언제 돼요? 네, 완전히 떨어졌어요. 오늘 중으로 달아주셔야 할 것 같은데.”
아줌마는 전화 통화를 하는지 연신 ‘네, 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뭐라 중얼대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동안에도 고릴라는 죽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여덟 시가 됐나 보다. 고릴라는 일어나 앉아 허탈한 표정으로 매점을 바라보았다.
“너 때문에 다 망쳤어, 개새끼야.”
고릴라가 나를 깔고 앉아 얼굴에 강펀치를 날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교복을 벗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엄마가 오기 전 교복을 빨아야 했다.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팔이며 다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상놈의 새끼.”
방문을 벌컥 연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옷은 빨면서 청소 좀 해놓으면 어디가 덧나?”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씻은 엄마는 주방으로 가 물을 끓였다. 머그잔에 봉지 커피를 뜯어 넣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허구한 날 그렇게 빨아대면 뭔들 남아날까. 알아서 해. 낡았으니 새로 맞춰달라는 둥 그딴 소리만 해봐.”
엄마는 끓는 물을 잔에 붓고 봉지로 휘휘 저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났다. 문득 오늘 아침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주방으로 갔다. 커피를 마시던 엄마의 눈초리가 내 얼굴에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그잔에 커피를 붓고 물을 따랐다.
“얼굴 꼬라지가 왜 그래? 맞았어?”
엄마는 입에서 잔을 떼지 않고 물었다. 딱히 해 줄 말도 없어 고개만 끄덕이고는 잔을 들고 내 방으로 갔다.
“사람이 묻는데 머리만 까닥여? 왜 맞았냐니까?”
엄마가 따라오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화풀이요.”
“화풀이라니!”
엄마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도 저한테 화 풀잖아요. 그것과 같은 거예요.”
아무래도 고릴라한테 맞을 때 머리가 돈 것 같다. 툭툭 튀어나오는 말에 내가 더 놀랐다.
“근데 이 새끼가.”
엄마 얼굴이 벌게졌다.
“형 들어오면 아무 말 마세요. 다시 나가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시라고요.”
나는 또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겁이 나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잠갔다. 엄마가 방밖에서 뭐라 해댔지만 듣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의자를 끌어당겨 창턱에 잔을 놓고 눈을 감았다. 나는 내일도 나만의 의식을 치르러 아지트로 갈 것이다. 형은 어디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까? 형을 찾으러 가야겠다. 나는 형을 꼭 찾을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심장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 실내복에 다리를 집어넣었을 때다. 벌컥 방문이 열렸다.
“상놈의 새끼. 청소 좀 해놓으면 어디가 덧나!”
엄마가 거인처럼 문가에 서서 소리를 질러댔다. 피곤해서 잠깐 누워 있으려 했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고 말하려 했다.
“불까지 끄고 뭐하고 있었어!”
애초에 불은 켜지 않았다고 덧붙이려고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틈을 주지 않았다.
“꼴에 남자 새끼라고.”
어이없어하는 말투와 음흉한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로변에 발가벗고 서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당신 기분이 상한 만큼 내 기분도 엉망으로 만들 의도였다면, 뜻대로 되었다. 나는 벗어놓았던 교복을 집어들고 욕실로 향했다.
“밥을 처먹었으면 코드를 빼놔야지. 전기세가 공짠 줄 알아!”
밥통 뚜껑 닫는 소리를 들으며, 힘껏 비누칠을 했다. 집에서 밥을 먹어본 지가 한 달도 더 되었다.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연이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수돗물을 세게 틀어 들려오는 말소리를 덮으려 했다.
“물 안 잠가!”
센 수압 정도는 간단히 뚫어버리는 악센 목소리의 위력에, 수돗물을 잠갔다. 언제까지 욕실에 있을 수 없어 옷을 널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그사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눈치껏 행주로 식탁을 닦고 엄마가 먹을 김치를 놓고 수저와 젓가락도 챙겼다. 엄마는 말없이 라면이 든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지금 안 먹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싱크대에서 내 것의 수저와 젓가락을 챙겨 맞은편에 앉았다. 엄마는 그릇에 라면을 덜어 입에 넣었다. 나도 라면을 덜어 그릇에 담았다. 막, 한입을 후루룩 마셨을 때다.
“그 새끼 연락은?”
엄마는 김치를 집어들며 물었다. 여기서 ‘그 새끼’는 형을 가리키는 거다. 엄마는 형이 집을 나간 후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오늘은 형이 내게 연락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짚어주기로 했다.
“전화가 없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요.”
“지금 나한테 휴대폰 없다고 꼬는 거지? 미친놈. 여자 혼자 애 둘 키우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거기다 휴대폰? 휴대폰을 사면 그걸로 끝나?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요금은? 하여튼 이럴 때 보면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제 아비랑 똑같지. 네 힘으로 요금 낼 수 있을 때 그때 사달라고 해.”
엄마는 서슬이 퍼레져서 젓가락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단연코 전화기를 원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묻는 말에 매번 머리를 흔들어대기가 민망했을 뿐이다.
“나갈 땐 지 맘대로 나가도 들어올 땐 지 맘대로 못 들어와. 연락 오면 꼭 전해.”
엄마는 냄비를 자기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나는 김치 줄기를 뒤적이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젓가락과 빈 그릇을 챙겨 들고 싱크대로 갔다. 요란한 물소리에 엄마가 라면을 들이마시는 소리도 묻혔다. 라면의 기름기가 깔끔하게 씻겨 나가는 것처럼 착잡한 기분도 씻어 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엄마가 등을 후려쳤다. 등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한번 말을 하면 들어 처먹어. 그깟 젓가락 닦는데 물은 왜 틀어놓고 지랄이야!”
올려놓은 주전자에 가스 불을 켜면서도 엄마는 내내 나를 노려보았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커피다.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건 나다. 한때 엄마가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이유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유를 알아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다음날, 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굳게 닫힌 정문 옆으로 나 있는 쪽문을 열고 들어섰다. 벽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켰다. 바로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은 임시 건물로 운동장 한 귀퉁이에 있다. 아지트로 가기에 앞서 매점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며 매점 뒤로 돌아가자 폭이 사 미터 정도 되는 공간이 나왔다. 긴 담벼락에 둘러싸인 공간의 끝은 울타리로 막혀있다. 이곳은 CCTV가 없다. 쓰레기통과 잡동사니뿐으로 아이들도 얼씬하지 않는다. 나는 기분 좋게 한 발을 내디뎠다. 나란히 붙어 있는 음식물쓰레기통 세 개를 지나 빈 상자를 쌓아놓은 더미를 지났다. 재활용 쓰레기를 담은 봉지를 지나자 커다란 미루나무가 나왔다.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 안아야 할 만큼 몸통이 큰 나무다. 그 나무 바로 옆에 바위가 있는데 위가 평평하고 길쭉해 다리를 뻗고 앉으면 세상 편했다.
나는 나무를 등받이 삼아 바위에 앉았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옅게 맡아지는 풀냄새는 덤이다. 이러고 있으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형에 대한 걱정도 화난 엄마도 흐릿하게 멀어진다. 이곳은 나만의 장소 나의 아지트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은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새의 지저귐에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본다. 가슴을 내리 누리던 바윗덩어리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다.
“앗! 깜짝이야.”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커피를 쏟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 바지를 털어보았지만 화끈거리는 것이 허벅지를 덴 것 같았다.
“뭐야, 너?”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불청객의 얼굴이 검게 보인다.
“꺼져.”
그의 협박에 옆으로 한걸음 비켜서자 비로소 이목구비가 보였다. 잡히지도 않게 짧게 자른 머리에 굵은 눈썹 아래 작고 까만 눈동자와 두꺼운 입술이 고릴라를 연상시켰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에 다부진 골격이, 괜한 시비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꺼지라고 새끼야!”
발이 날아왔다. 가슴에 정통으로 맞은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이어지는 발차기. 고릴라는 교복 바지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축구공을 다루듯 나를 굴렸다. 녀석의 현란한 발놀림에 쫓긴 나는 기다시피 도망쳤다.
매점 앞 커피 자판기에 이르러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들었다.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아픔과 참담함에 분노가 솟았지만 그렇다고 매점 뒤로 가 고릴라와 맞짱 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 안방에서 나온 엄마와 마주쳤다. 오늘따라 일찍 퇴근한 모양이다.
“연락은?”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내 방문을 열었다. 교복을 벗어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미친놈.”
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연이어 혀를 찼다.
“유난도, 유난도 저렇게 떠는 건 처음 봐. 이 새끼야, 니 애비도 너만큼 깔끔 떨지는 않았어. 이달부터 수도세 니가 내.”
엄마의 입을 다물 수 있게만 한다면 그깟 수도세쯤 얼마든지 낼 수 있다. 나는 대답이라도 하듯 수도를 세게 틀었다.
“근데 저 새끼가 사람 혈압을 올리네. 안 꺼!”
어쩌라는 건지. 수돗물을 잠그고 옷을 마저 헹군 후 탈탈 털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문득 형이 집에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었다면 ‘그게 자식한테 할 소리냐고’ 소리를 질렀을 거고, 그랬다면 또 삼층과 사층에서 올라와 제발 조용히 좀 살자고 애원하는 소리를 번갈아 들을 뻔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이 밝았다. 밤새 마른 교복 셔츠를 챙겨 입고 거울을 보았다. 고릴라 녀석의 운동화 자국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하지만 허벅지에 든 커피 얼룩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나마 회색이라 눈에 확 띄지는 않았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주머니에 든 동전을 확인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어제 집에 갈 때 슬쩍 학교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분식집에도 기웃거렸다. 떡볶이를 먹느라 나를 못 보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이십사 시간 편의점도 들어갔다.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는 내 뒤통수를 노려보는 점장 빼고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밥은 먹고 다니는지. 친구 집은 지낼 만한지, 걱정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찹찹한 기분을 잠재우듯 자판기 단추를 힘껏 눌렀다. 컵이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겼다. 컵을 챙겨 들고 아지트로 향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어서 와’ 반기는 듯 보였다. 바위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작정 형이 내게로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형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 볼까? 아니, 그건 아니다. 몇 반인지도 모르는 데다 무작정 내가 나타나면 형이 난처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지만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다. 솔솔 부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불안했던 마음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이 시간에 매점 뒤에 올 사람은 없는데. 어제의 악몽이 떠오르자 불안하게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용히 일어나 나무 옆으로 바짝 붙어섰다. 그러고는 살짝 머리를 내밀었다. 고릴라다! 고릴라는 매점 뒷문에 귀를 대고 주먹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매점 아줌마를 찾는 것 같았다. 아줌마는 일곱 시 사십 분쯤에나 출근하는데. 말을 해 줄까 하다 그만두었다. 어제 맞은 걸 생각하면 손톱만큼의 호의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
“앗!”
나를 발견한 고릴라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시발. 어제 그 새끼네? 너, 여기서 뭐 해?”
“커피 마시는데요.”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밀었다.
“무슨 커피를 숨어서 마셔!”
고릴라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숨은 게 아니라……”
“아놔, 내가 여기 오지 말랬지?”
내 말이 들리지 않은 듯 주먹이 날아왔다. 복부에 꽂힌 주먹은 돌멩이처럼 단단했다.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허리가 기역 자로 꺾였다. 뒤이어 날아온 발차기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방어에만 급급한 나를 고릴라가 일으켜 세웠다.
“너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
고릴라의 거친 숨소리가 정수리에 와닿았다. “십 분 전쯤요.” 나는 고릴라 발치에서 뒹구는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한 커피가 아까웠다.
“여기서 뭐 봤어?”
“아무것도.”
이번에도 고릴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숨어서 왜 날 봐. 날 왜 감시해, 새끼야!”
무차별 날아오는 발차기와 주먹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도저히 머리를 들 수 없었다. 고릴라의 융단폭격이 별안간 멈췄다. 거슬리는 쇳소리가 두어 번 나더니 뭔가 덜컹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고릴라가 나를 나무 옆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나는 마른오징어처럼 고릴라와 나무 사이에 납작하게 붙어버렸다. 행여 비명이라도 지를까 걱정이 되었는지 고릴라의 두툼한 손바닥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통째로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낯선 아저씨의 음성에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쇠만 고치면 안 돼요?”
매점 아줌마다.
“여기 부식이 심해서 열쇠로 잠가도 소용없어요. 맘먹고 털려고 하면 십 분이면 털겠네.”
“누가 매점을 털어요, 훔쳐 갈 게 뭐 있다고.”
“못 들었어요? 저기 고등학교 매점 돈 통 털렸다는데.”
“여긴 중학굔데요. 그리고 우리 학교 애들은 착해서 그런 짓 못해요.”
“뭐, 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아저씨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통째로 갈면 얼마에요? 건물이 오래돼서 여기저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
두 사람은 다시 매점으로 들어갔는지 거슬리는 쇳소리 후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릴라는 빠끔히 머리를 내밀고 동태를 살핀 후 천천히 팔을 떼었다.
“너, 내 말 잘 들어. 두 번 다시 여기 오. 지. 마. 또 오면.”
고릴라는 의미심장하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다음날 학교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일곱 시일 거다. 오랜 습관이란 그런 것이다. 매점 앞은 고요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어제와 똑같은 맛이다. 이제 교실로 가면 된다. 교실에서도 커피는 마실 수 있으니까. 그런데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볕에 뒤통수가 따갑다.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음과는 상관없이 발걸음이 아지트로 향했다. 음식물쓰레기통을 지나는데 상자를 쌓아놓은 더미 옆에서 고릴라가 툭 튀어나왔다. 허공에 맴돌던 녀석의 눈길이 내게로 와 꽂혔다.
“너!”
녀석의 입에서 짧은 외침이 터졌다. 고릴라는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쪽으로 달려온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녀석의 발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앗, 시발.”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채인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고릴라의 가슴팍이 커피에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종이컵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넘어지면서 커피를 쏟은 것 같았다.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고릴라의 판단은 달랐다.
“근데 이 새끼가.”
고릴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가슴팍의 도드라진 젖꼭지를 바라보며 ‘오해’라고 말하려 했다. 매번 그랬듯 이번에도 말을 하기도 전에 녀석의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이리저리 몸을 놀리기에 급급했다. 녹슨 쇠문 소리에 발길질이 허공에 멈췄다.
“거기서 뭐하니?”
매점 아줌마다. 고릴라는 재빨리 나를 바위 뒤로 밀어넣고는 바닥에 뒹구는 빈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커피를 마시다 쏟았어요.”
“그거 빨리 빨아야 얼룩이 가실 텐데. 이리 와, 주방 세제 줄게. 그걸로 빨아야 깨끗하게 지워져.”
고릴라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를 무섭게 쏘아보고는 매점으로 들어갔다. 나는 허벅지에 흐릿하게 남은 얼룩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다음날도 나는 매점으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컵을 꺼내려 허리를 숙이는데 ‘윽’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파스를 석 장이나 붙였는데도 여기저기 쑤시고 결린다. 종이컵을 집어든 손이 덜덜 떨렸다. 상자 더미가 가까워질 때다. 매점 뒷문에 고릴라가 바짝 붙어 있다. 인기척을 느낀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근데 진짜 저게.”
녀석의 손에 쇠파이프가 들린 것을 보자, 머릿속의 경고음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요란하게 울려댔다. 고릴라가 내게 서너 걸음 다가왔을 때다. 딱! 소리와 함께 경첩 한쪽이 떨어졌다. 위에 붙어 있는 경첩도 간당간당했다.
“야, 나 바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꺼져.”
고릴라는 귀찮은 파리를 쫓듯 쇠파이프 든 손을 밖으로 내저었다.
“빨리 안 가?”
녀석의 목소리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볍게 몸을 옆으로 비켜서 돌멩이를 피했다.
“저 새끼가 정말 사람 돌게 만드네.”
고릴라는 제 성미에 못 이겨 달렸다. 나도 내처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 자판기 앞까지 왔을 때 나 혼자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느라 종이컵에 있던 커피도 바닥이 났다. 나는 자판기에서 새로 커피를 뽑아들고 모퉁이를 돌았다. 음식물쓰레기통에 이르자 고릴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매점 문을 떼어 옆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숨죽인 채 조용히 움직였다.
“아, 씨!”
고릴라의 낮은 욕설에 숨을 참았다. 고릴라는 내가 아닌 덧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 같다. 덧문을 살피던 고릴라는 파이프로 방충망을 툭툭 쳐 댔다. 나는 상자 더미 뒤로 솟아오른 미루나무를 바라보았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미루나무로 향했다. 상자 더미를 지나며 곁눈질로 고릴라를 흘낏거렸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삐죽하게 튀어나온 돌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새로 뽑은 커피가 바닥에 쏟아졌고, 무릎이 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지에 구멍이 나지는 않았다는 정도다. 어느새 다가온 고릴라가 멱살을 움켜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너 오늘 죽어봐.”
고릴라는 문을 따지 못한 분풀이를 내게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발과 손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용을 썼다. 그러다 재활용 봉투를 쌓아놓은 더미 속으로 쓰러졌다. 그 위를 고릴라가 덮쳤을 때다.
“어머머!”
매점 아줌마였다. 소리와 동시에 고릴라가 납작 엎드렸다. 고릴라의 몸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의 굵은 팔뚝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저씨 문 언제 돼요? 네, 완전히 떨어졌어요. 오늘 중으로 달아주셔야 할 것 같은데.”
아줌마는 전화 통화를 하는지 연신 ‘네, 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뭐라 중얼대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동안에도 고릴라는 죽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여덟 시가 됐나 보다. 고릴라는 일어나 앉아 허탈한 표정으로 매점을 바라보았다.
“너 때문에 다 망쳤어, 개새끼야.”
고릴라가 나를 깔고 앉아 얼굴에 강펀치를 날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교복을 벗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엄마가 오기 전 교복을 빨아야 했다.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팔이며 다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상놈의 새끼.”
방문을 벌컥 연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옷은 빨면서 청소 좀 해놓으면 어디가 덧나?”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씻은 엄마는 주방으로 가 물을 끓였다. 머그잔에 봉지 커피를 뜯어 넣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허구한 날 그렇게 빨아대면 뭔들 남아날까. 알아서 해. 낡았으니 새로 맞춰달라는 둥 그딴 소리만 해봐.”
엄마는 끓는 물을 잔에 붓고 봉지로 휘휘 저었다.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났다. 문득 오늘 아침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주방으로 갔다. 커피를 마시던 엄마의 눈초리가 내 얼굴에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그잔에 커피를 붓고 물을 따랐다.
“얼굴 꼬라지가 왜 그래? 맞았어?”
엄마는 입에서 잔을 떼지 않고 물었다. 딱히 해 줄 말도 없어 고개만 끄덕이고는 잔을 들고 내 방으로 갔다.
“사람이 묻는데 머리만 까닥여? 왜 맞았냐니까?”
엄마가 따라오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화풀이요.”
“화풀이라니!”
엄마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도 저한테 화 풀잖아요. 그것과 같은 거예요.”
아무래도 고릴라한테 맞을 때 머리가 돈 것 같다. 툭툭 튀어나오는 말에 내가 더 놀랐다.
“근데 이 새끼가.”
엄마 얼굴이 벌게졌다.
“형 들어오면 아무 말 마세요. 다시 나가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시라고요.”
나는 또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겁이 나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잠갔다. 엄마가 방밖에서 뭐라 해댔지만 듣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의자를 끌어당겨 창턱에 잔을 놓고 눈을 감았다. 나는 내일도 나만의 의식을 치르러 아지트로 갈 것이다. 형은 어디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까? 형을 찾으러 가야겠다. 나는 형을 꼭 찾을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심장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성희
신나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글을 쓰고 싶다.
2021/04/27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