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문학
라즈베리 부루
10月
흰 새들이 언 땅에 내려앉는다.
안개가 자욱한 습지대 마을, 드문드문 선 낮은 건물, 그중에서도 가장 낡은 빌라. 지하에서 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천장 삼아 굴처럼 움푹 들어간 이 캄캄하고 냉랭한 공간에는 언제나 말린 쑥과 마늘이 든 마대 자루가 가득했다.
B02호 할머니와 B01호 할머니의 것이었다. 키우거나 내다 팔거나 먹던 것들이었다. B01호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한동안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대로였기 때문에 나는 종종 그곳에서 밤을 났다. 비가 내리는 밤, 술 취한 남자들이 돌아다니는 밤, 경찰차를 본 밤이면 슬그머니 숨어들어 자루들 틈에 파묻혀 잤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벽 너머로 B02호 할머니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는 비가 종일 몹시 내렸고 술 취한 남자들이 울부짖었으며 경찰차가 번쩍이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나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이미 지쳐서 굴로 내려갔다. 거기서 할머니가 마대 자루들을 자기 집으로 옮기는 모습을 봤다. 텅 빈 바닥을 빗자루로 싹싹 쓸고 헌 이불을 깔아두는 것도 봤다. 할머니도 내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할머니는 길잃은 개나 고양이가 종종 숨어들어 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죽은 B01호 할머니의 영혼이 새 따위로 변해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것들처럼 지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미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B01호에는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몇 달을 더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무섭지도 않을까. 나는 할머니가 무섭지 않았다. 할머니는 곰처럼 커다랬고 나는 새처럼 작았지만, 저물녘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웅크려 조는 귀 가까이 툽툽한 신발 소리가 들려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발소리가 지나간 뒤면 어김없이 국과 밥 냄새가 났다.
11月
부루에게서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부루는 음식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부루는 식물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만 한 화분에 흙과 함께 담긴 작은 라즈베리 나무였다.
B01호 할머니가 B02호 할머니에게 남긴 그것은 어느 날 내 굴 앞에 놓여 있었다. 늘 밥이 놓이던 자리였으므로 나는 할머니가 나더러 이것을 먹으라고 준 것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열매가 열리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데려가 맡았다. B02호 할머니로부터 받은 물건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처음에 부루는 아주 통통한 식물이었다. 식물도 살이 빠진다는 것을 부루를 통해 배웠는데, 부루가 내게 온 뒤로 줄곧 마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부루는 마르면서도 자랐다. 그 점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부루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건강한 식물들도 세상에는 많았다. 나는 부루가 그런 식물이기를 바랐다. 화분에 핏물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예전에 아빠가 고기를 요리할 때면 날고기를 담가 피 우린 물을 화분에 주던 기억이 난 것이었다. 아빠를 떠올린 건 나쁜 일이었다. 뭔가 좋은 일을 한 가지 해서 머릿속을 씻어야 했다. 부루에게 핏물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고기를 구한다는 말인가. 내 상황에 고기를 구하려면 직접 동물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나쁜 일이었다.
굴 한구석에 쌓아둔 피에 젖은 속옷들은 언뜻 죽은 동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낳은 죽은 동물들 말이다. 빗물을 모아둔 통에 그것들을 집어넣자 생리혈이 묽게 번지며 부드러운 쇠 냄새를 풍겼다. 나는 그 핏물을 부루에게 듬뿍 부어주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서였는지 생각보다 부끄럽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만족감이 밀려들자 금세 하품이 나왔다. 잠을 자는 건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였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부루의 잎끝이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부루를 발치에 밀쳐놓았다. 저녁에는 피가 더 많이 섞인 물을 다시 듬뿍 주었다. 자기 전에 살펴보니 노랗게 마른 부분이 더 넓어져 있었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핏물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생리가 끝날 무렵에는 부루의 잎이 온통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슬펐다. 색깔은 숫제 붉었다. 살짝 쓰다듬자 잎 여러 장이 조금의 저항도 없이 떨어졌다.
그대로 얼마간 지냈다. 달과 가슴이 다시 부풀 무렵이었다.
어두운 굴에서 깨어나 앉는데 뭔가 볼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동물의 넓적한 혓바닥처럼 내 볼을 천천히 핥아올리고 다시 핥아올렸다. 다만 아주 보송보송했으며, 침 냄새 대신 풋풋한 풀냄새가 났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를 더듬어 라이터를 찾았다. 불을 켜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부루가 있었다. 아기 얼굴만한 잎을 펼친 부루가 있었다.
부루라는 이름은 그때 붙여주었다. 큰 다행에 압도된 채였다. 나는 계속 부루의 반짝이는 잎과 오동보동한 줄기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따뜻하기까지 했다. 부루야, 나도 모르게 내가 부루를 불렀다. 부루야, 잠시 뒤 부루는 서툰 움직임으로 가장 기다란 줄기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부루는 계속 자랐고 계속 피를 원했다. 그 파릇파릇한 요구는 무구하고도 사랑스러워 모른 체하기 어려웠다. 생리가 시작하기 전이라 깨진 유리 조각을 주워다 손가락에 상처를 내 물에 넣었다가 주었지만 부루는 그것을 한 방울도 삼키지 못했다. 오히려 구토하듯 흙 표면으로 핏물이 배어나와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눌러 주어야 했다. 나도 답답했다. 사람이 한 달 내내 생리를 할 수는 없다고 부루에게 설명했더니 부루는 크게 실망한 듯 잎들을 벽 쪽으로 돌리고 며칠간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풀죽은 아이처럼 어느새 깊이 잠들어버렸다.
12月
다음 생리를 시작할 무렵에는 공기가 확연히 차가워져 배가 더 아팠다. 웅크린 채로 핏물을 부루에게 부어주었다. 흙이 천천히 젖어들자 부루가 기지개를 켜듯 잎사귀 하나하나를 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픔이나 추위가 조금 잊히는 것도 같았다. 물을 좀더 부어주자 부루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몸도 조금 떨렸다. 물통을 또 기울이려는데 무언가 내 손을 건드렸다. 됐어요, 됐어. 부루가 말하며 잎사귀로 내 손등을 두어 번 더 건드렸다. 내가 천천히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가까이 대자 부루가 자기 잎 바닥을 그 위에 댔다. 한 번에 많이 먹지는 못하니까, 조금씩 매일이요. 부루는 아주 높은 신분의 어린이처럼 말했다. 의젓한 말씨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루가 잘 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알겠어요. 대답했다.
하룻밤 새 한 뼘은 더 커져버린 부루에게 눈을 뜨자마자 핏물을 부어주었더니 부루는 꿈틀거리며 전날보다 크게 움직였다. 그러다 밖으로 나오겠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부루는 밖으로? 하고 되뇌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정말 화분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다족류의 다리처럼 파도치듯 움직이는 실뿌리에서 흙가루가 보소소 떨어져내렸다. 나는 이부자리를 걷어 부루가 요 위로 올라오도록 권했다. 아무리 뿌리를 뻗어도 파고들 수 없는 땅이라니, 부루는 내 이불에 뿌리를 부비며 재잘거렸다. 그런데 미움받는다고 느껴지지는 않으니 신기하네요. 나는 종알거리는 부루의 몸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 오, 이렇게 하니까 꼭 온몸이 뿌리가 된 느낌이에요.
- 그건 좋은 느낌이야?
- 글쎄…… 자꾸 밑으로만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만 파고들고 싶은 느낌이니까요.
-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구나.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글쎄……
우리는 대화 끝에 조용히 웃음을 주고받았다. 부루는 하품까지 했다. 부루가 잠들었다가 다시 잠잠해질까 봐 나는 다급히 물었다. 한 번 피를 마시면 언제까지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부루는 편안히 늘어뜨렸던 이파리 중 딱 하나를 들어올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피를 흘리자고 마음먹었다.
1月
아침이면 부루는 늘 먼저 일어나 있었다. 부루는 이런 삶이 재미있다고 했다. 이제 나만큼 커다래진 부루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마음이 달았다. 그러나 나의 굴이나 내가 가진 것 중에 흥미로운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루에게 외출을 제안했다.
- 하지만 나는 이미 밖으로 나왔는데?
- 여기를 나가면 또 다른 바깥이 있어.
- 아하, 여기가 네 화분이구나.
- 맞아.
- 너는 무얼 먹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돼?
- 음…… 마음.
- 마음?
- 한 번에 많이 먹지는 못하니까, 조금씩 매일.
- 그건 누가 주는 거야.
- ……
- 내가 줄까?
부루가 계단을 올라 처음 찬란한 햇빛 속으로 걸어나왔을 때 나도 그 뒤를 따랐다. 혼자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한 뒤로는 늘 해가 진 뒤에 움직였고 내 굴에는 빛이 직접 들어올 틈이 없어서 오랜만에 마주한 해의 밝음에 어지러웠다. 부루는 희한한 행복의 소리를 내며 줄기 하나하나를 길게 뻗고 잎을 펼쳤다. 나도 허리를 더 곧추세웠지만 부루는 잠시 동안 실제로 조금 더 자라기까지 했다. 잎과 줄기 사이에 가려져 있던 작은 몽우리들이 드러났다. 너, 꽃이 피려나 봐. 내가 말했다. 원한다면 계속 바깥에 있어도 돼. 양지바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껏 자라는 거야. 내 말에 부루는 말없이 잎 몇 개를 움츠려 몽우리들을 감추었다.
그러나 부루는 그 뒤로 종종 혼자서 외출했다. 어디까지 다녀오는지 모르겠지만 저녁에 돌아온 부루의 몸에는 이런저런 냄새가 묻어 있었다. 철새의 냄새, 쓰레기 태우는 냄새, 수초 냄새, 술이나 담배 냄새도 났다. 그중에는 먹을 만한 것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부루가 내게 먹을 것을 구해다 준 것이었다. 누군가 먹다 남긴 튀김이나 빵 조각은 차가웠지만 아직 부드러웠고 때때로 아주 깨끗했다. 내가 밥을 먹으면 부루는 으레 자기 몫으로 핏물 한 컵을 달랬다. 생리 때 모아둔 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 피는 이게 마지막이네. 부루에게 거무튀튀한 핏물이 반 조금 넘게 담긴 컵을 건네며 말하자 부루는 그 컵을 들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단번에 마시고 잠자리에 든 부루가 이른 새벽 밖으로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루는 그 뒤로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부루가 돌아오지 않자 생리를 안 했다. 생리를 안 해서 부루가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둘 사이에는 연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몸이 점점 아파지는 데다 날씨가 이렇게 추워지니까 생리를 건너뛴 거고 부루는 부루대로 떠날 때가 되었던 것인지도. 나는 B02호 할머니 생각을 더 자주 했다. 할머니가 내게 부루를 남기고 어디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점점 더 자명해졌다. 그러나 지금 화분은 텅 비어 있었다.
하루는 정말 기다리던 부루가 왔다. 커다란 덩치로 이부자리에 푹 파묻혀 몸을 녹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웃음이 얼굴로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다. 부루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잠자코 밥을 먹었다. 부루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내 피를 찾았다. 이번 달엔 없어. 내가 우물거렸다. 부루가 놀란 듯이 잠자코 있자 나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 내가 너한테 피 주는 사람이냐?
- 피 준 사람.
- 그렇지.
- 그리고 피 줄 사람.
- ……
- 그럼 피 주는 사람 아닌가?
- ……
- ……
- 더이상 안 나오면 어떡할 건데?
- 더이상 안 나오면?
- 주고 싶다고 다 줄 수 있는지 알아? 여건이 안 되기도 하는 거야.
부루는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 하지만 피 냄새가 나는데?
나는 속옷을 벗어 부루에게 집어던졌다.
- 봐라, 봐. 이게 뭐 귀한 거라고 내가 감추겠어?
- 귀하지도 않은 걸 감추니까 더 치사한 거지.
- 뭐라고?
- 내가 다시 작아지기를, 화분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거야?
부루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는 부루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긍하게 됐다. 부루가 옳았다. 나는 부루를 더 많이 보고 싶었다.
부루는 바깥에서 피를 구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쓰레기봉투를 뒤져 생리대나 탐폰을 주워 와 내 굴 여기저기에 쌓아두었다.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빵을 씹다보면 몇 번씩이나 구역질이 났다.
부루가 여기저기 꺾이고 뜯어진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그날에도 나는 대야에 탐폰을 담가 핏물을 우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다급히 돌아온 부루가 이부자리 위로 쓰러졌다. 부루는 소리를 내며 앓았다. 우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나를 봤어. 부루가 말했다.
- 바로 너에게 올 수 없어서 빙 돌아 움직이며 따돌려야 했어.
- 왜 바로 올 수 없었는데?
- 너를 지켜야 하니까. 네가 여기 숨어 사는 걸 어른들이 몰라야 하니까.
- ……어른들은 계속 모를 거야.
- 저기 괴물이 있다고 사람들은 소리치고 길가의 나무들은 가지를 단단하게 얽어 나를 방해했어.
- 어쩌면 도와주려던 건지도 몰라.
- 울면서 몸부림치는 내 머리 위로 새들이 날아갔어.
- 새들이?
- 크고 하얀 새들이.
나는 부루의 너덜거리는 잎을 잘라냈다. 부러진 줄기들을 테이프로 조심스레 붙였다. 그러는 동안 부루는 어딘가에 있는 입으로 계속 말했다. 도망치는 동안 계속 꽃이 떨어졌어. 어쩌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나를 찾아올 거야. 부루는 이제 제법 어른처럼 말했다. 잠깐이면 돼. 내가 당분간 떠나 있을게. 내가 줄기들을 꽉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당분간 밖에 나가지 않으면 되잖아! 우리 여기 같이 있으면 안전하잖아!
부루는 대꾸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정말로 묵직한 발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부루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가지 마! 나는 부루를 끌어안았다. 부루의 뿌리를 붙들어 다시 화분에 쑤셔넣었다. 부루는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기어나오더니 아예 화분을 높이 들어 내동댕이쳐버렸다.
화분이 박살나며 비로소 그 받침에 놓여 있던 열쇠가 드러났다. B02호라고 적힌 작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내가 열쇠를 집었다. B02호의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니 달각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등 뒤로 문을 잠갔다. 할머니는 없었다. 할머니가 언젠가 나를 위해 굴을 치우느라 집 안으로 옮겨 둔 잡동사니들만 거실 한가득이었다. 안방에는 깨끗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부루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품을 하며 그 위로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루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불을 들춰보니 바닥에 깐 요가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루가 그것을 들고 욕실로 갔다. 욕실에는 커다란 고무 대야가 있었다. 거기 찬물을 받아 이불을 담그자 금세 핏물이 한가득 우러났다. 밤에 부루는 나와 함께 자는 대신 욕실에서 홀로 밤을 보냈다. 중간중간 새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날이 완전히 밝아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자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핏물을 마시고 커다래진 부루가 와그르르 문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욕실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집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무성했다. 내 눈 닿는 곳마다 온통 부루, 세상이 전부 부루였다. 그러나 빼곡한 줄기들에는 이제 꽃이 한 송이도 남아있지 않았다. 잎의 색도 조금 탁해진 것 같았다. 부루, 아파? 내가 묻자 부루가 웃었다. 아픈 건 너야. 부루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내 이마를 짚었다.
며칠이 지나도 생리는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이제는 더이상 생리라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피가 너무 빨갰다. 쉬지 않고 흘렀다. 생식기가 하나의 자상 같았다. 베이고 또 찔린 상처였다. 오늘 병원에 가 보자. 부루가 차분히 속삭였다. 무서워요. 내가 고개를 젓자 부루는 다시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현관 쪽으로 난 줄기를 이용해 우리가 굴에서 쓰던 이불을 가져와 내 몸에 둘러주었다. 그 이불마저 피로 다 젖고 말았을 때도 부루는 혼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부루는 이제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혼자 하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늘 나를 보살폈다. 땀을 닦아주고 물을 먹여주고 밤이면 가장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 넣어 품어주었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빨리 자라고 싶었지. 부루가 말했다. 엄마 같다. 내가 말했다. 당연히 농담이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부루는 더욱 촘촘히 잎과 줄기를 뿜어냈다. 숨을 쉴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났고 어디로 돌아눕든 푹신푹신 부드러웠다. 흙이 뿌리를 감싸듯 부루가 나를 완전히 감싸버렸기 때문에 피가 계속 나는지 멈췄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머릿속이 점점 더 부옇게 흐려져 갔다. 하루는 부루가 나를 깨우며 자꾸 울었다. 눈물은 빗물처럼 내 몸 위로 툭툭 떨어져 부루 안에 고였다. 나는 한동안 부루의 뱃속에 그렇게 잠겨 있었다.
2月
이윽고 부루는 긴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뱃속의 아기가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장가에는 가사가 따로 없었으나 그 내용은 이와 같았다.
부루는 혼자 알 하나를 낳을 것이다
희고 작고 둥근 알을
그 뒤에 다시 작아져
작은 부루에 작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햇살이 알을 비출 것이다
희고 작고 둥근 알을
그 뒤에 흰 새 태어나
작은 부루의 작은 열매를 먹을 것이다
붉은 열매는 달콤하고
새의 깃털을 붉게 하리라
새의 부리를 짧게 하리라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 들리고
흰 천을 든 인간들 너머로
열매를 문 채 날아가리라
붉은 새는 푸른 하늘을 빗겨
먼 땅으로 가네
곰과 호랑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곳
마침내 부루는 시들고
부루1는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네
멀리서 언 땅이 녹는 동안에―
흰 새들이 언 땅에 내려앉는다.
안개가 자욱한 습지대 마을, 드문드문 선 낮은 건물, 그중에서도 가장 낡은 빌라. 지하에서 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천장 삼아 굴처럼 움푹 들어간 이 캄캄하고 냉랭한 공간에는 언제나 말린 쑥과 마늘이 든 마대 자루가 가득했다.
B02호 할머니와 B01호 할머니의 것이었다. 키우거나 내다 팔거나 먹던 것들이었다. B01호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한동안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대로였기 때문에 나는 종종 그곳에서 밤을 났다. 비가 내리는 밤, 술 취한 남자들이 돌아다니는 밤, 경찰차를 본 밤이면 슬그머니 숨어들어 자루들 틈에 파묻혀 잤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벽 너머로 B02호 할머니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는 비가 종일 몹시 내렸고 술 취한 남자들이 울부짖었으며 경찰차가 번쩍이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나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이미 지쳐서 굴로 내려갔다. 거기서 할머니가 마대 자루들을 자기 집으로 옮기는 모습을 봤다. 텅 빈 바닥을 빗자루로 싹싹 쓸고 헌 이불을 깔아두는 것도 봤다. 할머니도 내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할머니는 길잃은 개나 고양이가 종종 숨어들어 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죽은 B01호 할머니의 영혼이 새 따위로 변해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것들처럼 지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미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B01호에는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몇 달을 더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무섭지도 않을까. 나는 할머니가 무섭지 않았다. 할머니는 곰처럼 커다랬고 나는 새처럼 작았지만, 저물녘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웅크려 조는 귀 가까이 툽툽한 신발 소리가 들려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발소리가 지나간 뒤면 어김없이 국과 밥 냄새가 났다.
11月
부루에게서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부루는 음식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부루는 식물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만 한 화분에 흙과 함께 담긴 작은 라즈베리 나무였다.
B01호 할머니가 B02호 할머니에게 남긴 그것은 어느 날 내 굴 앞에 놓여 있었다. 늘 밥이 놓이던 자리였으므로 나는 할머니가 나더러 이것을 먹으라고 준 것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열매가 열리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데려가 맡았다. B02호 할머니로부터 받은 물건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처음에 부루는 아주 통통한 식물이었다. 식물도 살이 빠진다는 것을 부루를 통해 배웠는데, 부루가 내게 온 뒤로 줄곧 마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부루는 마르면서도 자랐다. 그 점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부루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건강한 식물들도 세상에는 많았다. 나는 부루가 그런 식물이기를 바랐다. 화분에 핏물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예전에 아빠가 고기를 요리할 때면 날고기를 담가 피 우린 물을 화분에 주던 기억이 난 것이었다. 아빠를 떠올린 건 나쁜 일이었다. 뭔가 좋은 일을 한 가지 해서 머릿속을 씻어야 했다. 부루에게 핏물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고기를 구한다는 말인가. 내 상황에 고기를 구하려면 직접 동물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나쁜 일이었다.
굴 한구석에 쌓아둔 피에 젖은 속옷들은 언뜻 죽은 동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낳은 죽은 동물들 말이다. 빗물을 모아둔 통에 그것들을 집어넣자 생리혈이 묽게 번지며 부드러운 쇠 냄새를 풍겼다. 나는 그 핏물을 부루에게 듬뿍 부어주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서였는지 생각보다 부끄럽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만족감이 밀려들자 금세 하품이 나왔다. 잠을 자는 건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였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부루의 잎끝이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부루를 발치에 밀쳐놓았다. 저녁에는 피가 더 많이 섞인 물을 다시 듬뿍 주었다. 자기 전에 살펴보니 노랗게 마른 부분이 더 넓어져 있었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핏물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생리가 끝날 무렵에는 부루의 잎이 온통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슬펐다. 색깔은 숫제 붉었다. 살짝 쓰다듬자 잎 여러 장이 조금의 저항도 없이 떨어졌다.
그대로 얼마간 지냈다. 달과 가슴이 다시 부풀 무렵이었다.
어두운 굴에서 깨어나 앉는데 뭔가 볼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동물의 넓적한 혓바닥처럼 내 볼을 천천히 핥아올리고 다시 핥아올렸다. 다만 아주 보송보송했으며, 침 냄새 대신 풋풋한 풀냄새가 났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를 더듬어 라이터를 찾았다. 불을 켜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부루가 있었다. 아기 얼굴만한 잎을 펼친 부루가 있었다.
부루라는 이름은 그때 붙여주었다. 큰 다행에 압도된 채였다. 나는 계속 부루의 반짝이는 잎과 오동보동한 줄기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따뜻하기까지 했다. 부루야, 나도 모르게 내가 부루를 불렀다. 부루야, 잠시 뒤 부루는 서툰 움직임으로 가장 기다란 줄기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부루는 계속 자랐고 계속 피를 원했다. 그 파릇파릇한 요구는 무구하고도 사랑스러워 모른 체하기 어려웠다. 생리가 시작하기 전이라 깨진 유리 조각을 주워다 손가락에 상처를 내 물에 넣었다가 주었지만 부루는 그것을 한 방울도 삼키지 못했다. 오히려 구토하듯 흙 표면으로 핏물이 배어나와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눌러 주어야 했다. 나도 답답했다. 사람이 한 달 내내 생리를 할 수는 없다고 부루에게 설명했더니 부루는 크게 실망한 듯 잎들을 벽 쪽으로 돌리고 며칠간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풀죽은 아이처럼 어느새 깊이 잠들어버렸다.
12月
다음 생리를 시작할 무렵에는 공기가 확연히 차가워져 배가 더 아팠다. 웅크린 채로 핏물을 부루에게 부어주었다. 흙이 천천히 젖어들자 부루가 기지개를 켜듯 잎사귀 하나하나를 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픔이나 추위가 조금 잊히는 것도 같았다. 물을 좀더 부어주자 부루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몸도 조금 떨렸다. 물통을 또 기울이려는데 무언가 내 손을 건드렸다. 됐어요, 됐어. 부루가 말하며 잎사귀로 내 손등을 두어 번 더 건드렸다. 내가 천천히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가까이 대자 부루가 자기 잎 바닥을 그 위에 댔다. 한 번에 많이 먹지는 못하니까, 조금씩 매일이요. 부루는 아주 높은 신분의 어린이처럼 말했다. 의젓한 말씨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루가 잘 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알겠어요. 대답했다.
하룻밤 새 한 뼘은 더 커져버린 부루에게 눈을 뜨자마자 핏물을 부어주었더니 부루는 꿈틀거리며 전날보다 크게 움직였다. 그러다 밖으로 나오겠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부루는 밖으로? 하고 되뇌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정말 화분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다족류의 다리처럼 파도치듯 움직이는 실뿌리에서 흙가루가 보소소 떨어져내렸다. 나는 이부자리를 걷어 부루가 요 위로 올라오도록 권했다. 아무리 뿌리를 뻗어도 파고들 수 없는 땅이라니, 부루는 내 이불에 뿌리를 부비며 재잘거렸다. 그런데 미움받는다고 느껴지지는 않으니 신기하네요. 나는 종알거리는 부루의 몸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 오, 이렇게 하니까 꼭 온몸이 뿌리가 된 느낌이에요.
- 그건 좋은 느낌이야?
- 글쎄…… 자꾸 밑으로만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만 파고들고 싶은 느낌이니까요.
-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구나.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글쎄……
우리는 대화 끝에 조용히 웃음을 주고받았다. 부루는 하품까지 했다. 부루가 잠들었다가 다시 잠잠해질까 봐 나는 다급히 물었다. 한 번 피를 마시면 언제까지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부루는 편안히 늘어뜨렸던 이파리 중 딱 하나를 들어올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피를 흘리자고 마음먹었다.
1月
아침이면 부루는 늘 먼저 일어나 있었다. 부루는 이런 삶이 재미있다고 했다. 이제 나만큼 커다래진 부루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마음이 달았다. 그러나 나의 굴이나 내가 가진 것 중에 흥미로운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루에게 외출을 제안했다.
- 하지만 나는 이미 밖으로 나왔는데?
- 여기를 나가면 또 다른 바깥이 있어.
- 아하, 여기가 네 화분이구나.
- 맞아.
- 너는 무얼 먹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돼?
- 음…… 마음.
- 마음?
- 한 번에 많이 먹지는 못하니까, 조금씩 매일.
- 그건 누가 주는 거야.
- ……
- 내가 줄까?
부루가 계단을 올라 처음 찬란한 햇빛 속으로 걸어나왔을 때 나도 그 뒤를 따랐다. 혼자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한 뒤로는 늘 해가 진 뒤에 움직였고 내 굴에는 빛이 직접 들어올 틈이 없어서 오랜만에 마주한 해의 밝음에 어지러웠다. 부루는 희한한 행복의 소리를 내며 줄기 하나하나를 길게 뻗고 잎을 펼쳤다. 나도 허리를 더 곧추세웠지만 부루는 잠시 동안 실제로 조금 더 자라기까지 했다. 잎과 줄기 사이에 가려져 있던 작은 몽우리들이 드러났다. 너, 꽃이 피려나 봐. 내가 말했다. 원한다면 계속 바깥에 있어도 돼. 양지바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껏 자라는 거야. 내 말에 부루는 말없이 잎 몇 개를 움츠려 몽우리들을 감추었다.
그러나 부루는 그 뒤로 종종 혼자서 외출했다. 어디까지 다녀오는지 모르겠지만 저녁에 돌아온 부루의 몸에는 이런저런 냄새가 묻어 있었다. 철새의 냄새, 쓰레기 태우는 냄새, 수초 냄새, 술이나 담배 냄새도 났다. 그중에는 먹을 만한 것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부루가 내게 먹을 것을 구해다 준 것이었다. 누군가 먹다 남긴 튀김이나 빵 조각은 차가웠지만 아직 부드러웠고 때때로 아주 깨끗했다. 내가 밥을 먹으면 부루는 으레 자기 몫으로 핏물 한 컵을 달랬다. 생리 때 모아둔 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 피는 이게 마지막이네. 부루에게 거무튀튀한 핏물이 반 조금 넘게 담긴 컵을 건네며 말하자 부루는 그 컵을 들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단번에 마시고 잠자리에 든 부루가 이른 새벽 밖으로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루는 그 뒤로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부루가 돌아오지 않자 생리를 안 했다. 생리를 안 해서 부루가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둘 사이에는 연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몸이 점점 아파지는 데다 날씨가 이렇게 추워지니까 생리를 건너뛴 거고 부루는 부루대로 떠날 때가 되었던 것인지도. 나는 B02호 할머니 생각을 더 자주 했다. 할머니가 내게 부루를 남기고 어디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점점 더 자명해졌다. 그러나 지금 화분은 텅 비어 있었다.
하루는 정말 기다리던 부루가 왔다. 커다란 덩치로 이부자리에 푹 파묻혀 몸을 녹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웃음이 얼굴로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다. 부루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잠자코 밥을 먹었다. 부루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이내 피를 찾았다. 이번 달엔 없어. 내가 우물거렸다. 부루가 놀란 듯이 잠자코 있자 나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 내가 너한테 피 주는 사람이냐?
- 피 준 사람.
- 그렇지.
- 그리고 피 줄 사람.
- ……
- 그럼 피 주는 사람 아닌가?
- ……
- ……
- 더이상 안 나오면 어떡할 건데?
- 더이상 안 나오면?
- 주고 싶다고 다 줄 수 있는지 알아? 여건이 안 되기도 하는 거야.
부루는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 하지만 피 냄새가 나는데?
나는 속옷을 벗어 부루에게 집어던졌다.
- 봐라, 봐. 이게 뭐 귀한 거라고 내가 감추겠어?
- 귀하지도 않은 걸 감추니까 더 치사한 거지.
- 뭐라고?
- 내가 다시 작아지기를, 화분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거야?
부루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는 부루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긍하게 됐다. 부루가 옳았다. 나는 부루를 더 많이 보고 싶었다.
부루는 바깥에서 피를 구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쓰레기봉투를 뒤져 생리대나 탐폰을 주워 와 내 굴 여기저기에 쌓아두었다.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빵을 씹다보면 몇 번씩이나 구역질이 났다.
부루가 여기저기 꺾이고 뜯어진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그날에도 나는 대야에 탐폰을 담가 핏물을 우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다급히 돌아온 부루가 이부자리 위로 쓰러졌다. 부루는 소리를 내며 앓았다. 우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나를 봤어. 부루가 말했다.
- 바로 너에게 올 수 없어서 빙 돌아 움직이며 따돌려야 했어.
- 왜 바로 올 수 없었는데?
- 너를 지켜야 하니까. 네가 여기 숨어 사는 걸 어른들이 몰라야 하니까.
- ……어른들은 계속 모를 거야.
- 저기 괴물이 있다고 사람들은 소리치고 길가의 나무들은 가지를 단단하게 얽어 나를 방해했어.
- 어쩌면 도와주려던 건지도 몰라.
- 울면서 몸부림치는 내 머리 위로 새들이 날아갔어.
- 새들이?
- 크고 하얀 새들이.
나는 부루의 너덜거리는 잎을 잘라냈다. 부러진 줄기들을 테이프로 조심스레 붙였다. 그러는 동안 부루는 어딘가에 있는 입으로 계속 말했다. 도망치는 동안 계속 꽃이 떨어졌어. 어쩌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나를 찾아올 거야. 부루는 이제 제법 어른처럼 말했다. 잠깐이면 돼. 내가 당분간 떠나 있을게. 내가 줄기들을 꽉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당분간 밖에 나가지 않으면 되잖아! 우리 여기 같이 있으면 안전하잖아!
부루는 대꾸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정말로 묵직한 발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부루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가지 마! 나는 부루를 끌어안았다. 부루의 뿌리를 붙들어 다시 화분에 쑤셔넣었다. 부루는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기어나오더니 아예 화분을 높이 들어 내동댕이쳐버렸다.
화분이 박살나며 비로소 그 받침에 놓여 있던 열쇠가 드러났다. B02호라고 적힌 작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내가 열쇠를 집었다. B02호의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니 달각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등 뒤로 문을 잠갔다. 할머니는 없었다. 할머니가 언젠가 나를 위해 굴을 치우느라 집 안으로 옮겨 둔 잡동사니들만 거실 한가득이었다. 안방에는 깨끗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부루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품을 하며 그 위로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루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불을 들춰보니 바닥에 깐 요가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루가 그것을 들고 욕실로 갔다. 욕실에는 커다란 고무 대야가 있었다. 거기 찬물을 받아 이불을 담그자 금세 핏물이 한가득 우러났다. 밤에 부루는 나와 함께 자는 대신 욕실에서 홀로 밤을 보냈다. 중간중간 새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날이 완전히 밝아 햇빛이 창으로 들어오자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핏물을 마시고 커다래진 부루가 와그르르 문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욕실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집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무성했다. 내 눈 닿는 곳마다 온통 부루, 세상이 전부 부루였다. 그러나 빼곡한 줄기들에는 이제 꽃이 한 송이도 남아있지 않았다. 잎의 색도 조금 탁해진 것 같았다. 부루, 아파? 내가 묻자 부루가 웃었다. 아픈 건 너야. 부루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내 이마를 짚었다.
며칠이 지나도 생리는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이제는 더이상 생리라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피가 너무 빨갰다. 쉬지 않고 흘렀다. 생식기가 하나의 자상 같았다. 베이고 또 찔린 상처였다. 오늘 병원에 가 보자. 부루가 차분히 속삭였다. 무서워요. 내가 고개를 젓자 부루는 다시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현관 쪽으로 난 줄기를 이용해 우리가 굴에서 쓰던 이불을 가져와 내 몸에 둘러주었다. 그 이불마저 피로 다 젖고 말았을 때도 부루는 혼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부루는 이제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혼자 하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늘 나를 보살폈다. 땀을 닦아주고 물을 먹여주고 밤이면 가장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 넣어 품어주었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빨리 자라고 싶었지. 부루가 말했다. 엄마 같다. 내가 말했다. 당연히 농담이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부루는 더욱 촘촘히 잎과 줄기를 뿜어냈다. 숨을 쉴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났고 어디로 돌아눕든 푹신푹신 부드러웠다. 흙이 뿌리를 감싸듯 부루가 나를 완전히 감싸버렸기 때문에 피가 계속 나는지 멈췄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머릿속이 점점 더 부옇게 흐려져 갔다. 하루는 부루가 나를 깨우며 자꾸 울었다. 눈물은 빗물처럼 내 몸 위로 툭툭 떨어져 부루 안에 고였다. 나는 한동안 부루의 뱃속에 그렇게 잠겨 있었다.
2月
이윽고 부루는 긴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뱃속의 아기가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장가에는 가사가 따로 없었으나 그 내용은 이와 같았다.
부루는 혼자 알 하나를 낳을 것이다
희고 작고 둥근 알을
그 뒤에 다시 작아져
작은 부루에 작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햇살이 알을 비출 것이다
희고 작고 둥근 알을
그 뒤에 흰 새 태어나
작은 부루의 작은 열매를 먹을 것이다
붉은 열매는 달콤하고
새의 깃털을 붉게 하리라
새의 부리를 짧게 하리라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 들리고
흰 천을 든 인간들 너머로
열매를 문 채 날아가리라
붉은 새는 푸른 하늘을 빗겨
먼 땅으로 가네
곰과 호랑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곳
마침내 부루는 시들고
부루1는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네
멀리서 언 땅이 녹는 동안에―
현호정
믿을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예컨대, 창조 신화를 새로 쓰면 우리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장래희망은 deus otiosus. 쓴 책으로 『단명소녀 투쟁기』가 있다.
2021/12/28
49호
- 1
- 부루(扶婁)는 단군왕검의 뒤를 이은 2대 단군으로 전해진다. 부루의 어머니는 강의 신의 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조선 신화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신화에서 그녀의 이름은 유화로, 아버지인 하백이 그녀의 입을 잡아당겨 새의 부리로 만드는 벌을 준다. 훗날 이 부리를 잘라 말하는 입을 되찾은 그녀는 알을 낳아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기른다. 부리에 씨앗을 문 새 모습의 농경신으로 섬겨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