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서 그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현재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꼭 몰래 온 현재를 몰래 환영하는 것만 같았다. 현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할아버지 집을 후다닥 지나쳤다. 먹구가 발소리를 알아챌까 봐 있는 힘을 다해 언덕으로 뛰었다. 배낭을 벗어던지고 그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봄에 왔을 때보다 그네가 낮아진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네 집 지붕이, 마당이, 버스 정류장이 현재 발밑에 있었다.
   “잘 있었어?”
   현재는 그네와 밤나무에 인사했다.
   이 그네는 현재가 꼬마일 때 할아버지가 밤나무에 매달아준 그네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밀어줘야만 탔었는데, 몇 년 사이 현재는 훌쩍 컸다. 지금은 할아버지를 떠나 도시에서 학교에 다닌다. 방학 때나 명절 때만 가끔 그네를 탄 거 같다.
   휙휙휙, 쌩쌩쌩.
   시내로 가는 큰길까지 그네가 닿도록 힘껏 굴렀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거 같았다.
   현재는 엄마 아빠와 살면서 무척 바빴다. 엄마 아빠는 일하느라 바쁘고, 현재는 학교와 학원에 다니느라 바빴다. 할아버지네 집에 자주 올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은 현재가 할아버지네 집에, 아니, 그네가 있는 언덕에 있다. 그것도 혼자서. 현재가 온 걸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손바닥에 열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려 그네 안장에 앉았다. 현재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 목소리가 어느 틈에 현재를 따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재, 벌써 사춘기야? 다른 애들은 선행하는데 어쩌려고 그래?’
   현재는 엄마 말보다 단톡방 글이 눈에 아른거렸다. 채희가 모으는 강키모(강아지를 키우는 모임)도 그랬고, 정우가 올린 해양 캠프도 궁금했다. 하지만 엄마가 하자고 하는 건 다 현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요즘 ‘이현재, 벌써 사춘기야?’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현재 생각에는 현재나 다른 애들이나 다 비슷했다. 현재가 좋아하는 채희도, 현재와 가장 친한 정우도 모두 부모님, 특히 엄마가 하라는 건 다 하기 싫어했다.
   현재가 온 걸 안 걸까? 먹구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언덕 쪽을 보고 있었다. 손짓으로 현재를 부르는 거 같았다. 아직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말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풀밭에 던져놓은 배낭에서 휴대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아마 엄마일 거다.
   ‘다시 집에 갈까?’
   하지만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았다. 그네에서 내리면 이젠 어디든 가야 한다. 할아버지네 집이든, 현재네 집이든. 내일이니까 지금 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다.
   ‘싫은 건 싫은 거잖아.’
   그넷줄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있는데, 무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개망초 꽃이 흔들리며 꽃대 사이로 뭔가 흘끗 보였다. 현재는 그네에서 내려 개망초 꽃 앞으로 기어갔다. 손을 뻗으려는데, 하얀 털 뭉치가 와락 튀어나왔다.
   “으악! 곰인 줄 알았잖아!”
   현재는 풀을 뜯어 백곰, 아니 강아지에게 던졌다. 작은 강아지를 보고 놀랐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강아지는 현재가 만만하게 보이는지 달려들었다. 아르렁댈 때마다 보이는 작고 하얀 이빨이, 현재는 덩치답지 않게 좀 무서웠다. 현재는 천천히 걷는 척하며 배낭을 집었다. 강아지가 현재를 따라 뛰었다. 현재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먹구야! 먹구야! 할아버지!”
    다행히 먹구와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 현재는 자기보다 훨씬 작은 먹구 뒤로 숨었다.
   “머, 먹구야! 쟤, 쟤가 물려고 그래.”
   하얀 강아지는 할아버지를 보자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댔다.
   “쫄랭이 이리 온.”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며 현재를 돌아보았다. 현재는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할아버지 눈길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할아버지, 얘 누구야?”
   쫄랭이는 옆집 할머니네 강아지라고 했다. 할머니가 없을 땐 할아버지가 돌봐주기도 한다고 했다. 쫄랭이는 먹구도 올라가지 않는 마루에 앉아, 할아버지한테 튀어오르고 아양을 떨었다.
   ‘뻔뻔한 강아지다.’
   진짜 쫄랭이는 뻔뻔했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자기가 할아버지 손자인 척했다. 현재와 눈이 마주치면 입술을 부르르 떨며 까칠하게 굴었다. 현재가 할아버지 옆에 앉으려고 하자 또 이빨을 드러냈다. 할아버지가 현재 손을 끌어다 쫄랭이 등에 올렸다. 현재의 손길이 닿자 쫄랭이가 몸을 움찔했다. 보드라운 털 속에 만져지는 등뼈랑 갈비뼈가 꼭 부러질 것 같았다. 현재는 쫄랭이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작고 가느다란 뼈가 다칠까 봐 조심스러웠다. 이번엔 쫄랭이도 가만히 있었다. 할아버지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쫄랭이는 편해 보였다. 현재도 이젠 쫄랭이가 무섭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있고 먹구도 있고, 무엇보다 쫄랭이는 그냥 새끼 강아지였다. 한주먹도 안 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쫄랭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현재 손을 핥더니 꼬리를 흔들었다. 살랑거리는 쫄랭이 꼬리를 따라 현재도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가 현재와 쫄랭이를 보며 웃었다.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에 현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할아버지가 현재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할아버지, 나 방학 동안 여기 있으면 안 돼?”
   “……”
   “나 힘들어.”
   “뭐가 힘들어?”
   “그냥, 다…… 싫어……”
   할아버지는 뭐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싫다고 도망치는 건 옳지 않다고.
   “……”
   내키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언덕에 올라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삼십 분 넘게 엄마의 말을 들은 거 같다. 귀도 따갑고, 가슴은 답답했지만, 쫄랭이랑 먹구가 발밑에서 꼬리를 흔들며 현재를 응원했다.
   현재는 엄마가 예약했던 필리핀 영어 캠프를 취소하고, 할아버지네 집에 있기로 했다. 현재는 할아버지네 집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쫄랭이까지 함께라니! 쫄랭이는 틈만 나면 할아버지네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먹구는 귀찮은지 쫄랭이만 나타나면 슬금슬금 피했다. 할아버지도 쫄랭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와 쫄랭이는 할아버지네 집에 둘만 사는 것처럼 서로 쫓아다니고 서로 따라다녔다. 옆집 할머니가 자주 집을 비워서 현재와 쫄랭이는 마음껏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왜 남의 집에 가서 사냐며 할머니가 쫄랭이를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깡깡깡.”
   쫄랭이 우는 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현재는 까치발을 하고 담을 넘겨다보았다. 쫄랭이가 마루 기둥에 묶여 빠져나오려고 바동거리고 있었다. 현재는 꼭 자기가 묶여있는 것 마냥 속상했다. 현재는 용기를 내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쪼, 쫄랭이랑 노, 놀아도 돼요?”
   “안 돼!”
   할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고는 말했다.
   “왜요?”
   “매일 맛있는 거만 줘서 개가 밥을 안 먹잖여! 버릇 나빠져서 안 돼!”
   담을 사이에 두고 현재와 쫄랭이는 만나지 못했다. 쫄랭이가 없는 할아버지네 집은 조용하고 심심했다. 담을 넘어온 쫄랭이 울음소리만 마당에 가득했다. 깽깽깽! 깽깽깽! 쫄랭이의 울음소리가 현재 귀에는 구해달라고 보내는 신호 같았다. 현재 형 도와줘!
   현재는 할머니가 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들어가 기둥에 묶인 끈을 풀었다.
   “답답했지? 뛰어!”
   쫄랭이가 언덕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아직 작아서 자꾸만 풀꽃 위에 자빠졌다. 쫄랭이는 넘어지는 것도 귀여웠다. 현재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었다.
   “쫄랭아, 형이 그네 태워줄까?”
   현재는 쫄랭이를 안고 그네에 앉아 쫄랭이 앞발을 잡고 말했다.
   “쫄랭아, 요기 빨간 지붕은 너희 집이고, 조기 초록 지붕은 우리 할아버지네 집이야. 저기 버스 보이지? 저 버스 타고 가면 형 집 나와. 쫄랭아, 우리집에 갈래?”
   쫄랭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마음속으로 쫄랭이 대신 대답했다. 좋아, 형!
   쫄랭이는 하도 울어서 피곤했는지 현재 다리 위에서 잠이 들었다. 현재는 그네를 멈추고 쫄랭이를 쓰다듬었다. 쫄랭이가 숨을 쉴 때마다 다리가 간질거렸다.
   “인형 같다. 쫄랭아, 너도 형 좋지?”
   현재는 마음속으로 쫄랭이 대신 대답했다. 당근이지!
   현재는 채희에게 쫄랭이 사진을 전송했다. 채희한테서 바로 답장이 왔다.
   ‘정말 천사 같다! 좋아, 현재 너도 이제 강키모 자격 있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엄마에게도 쫄랭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전송했다.
   ‘엄마, 나 잘 지내고 있어.’
   엄마는 여전히 화가 났는지, 사진을 확인하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긴 현재가 엄마라도 화가 날 거 같긴 했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라고 현재는 생각했다. 영어 캠프는 아이들과 그룹으로 가는 거였다. 하지만 현재는 그 아이들을 잘 몰랐다. 더군다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 쫄랭이 사 주면 안 돼?”
   “강아지 키우는 게 쉬운 줄 알아? 밥 줘야지, 똥 치워야지, 씻겨야지, 아프면 병원 데려가야지. 매일 산책도 시켜야지. 아무 때나 놀러도 못 가지. 아이고 힘들어!”
   할아버지한테 말한 건데, 옆집 할머니가 담 위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사실 현재는 쫄랭이가 좋기도 했지만 불쌍하기도 했다. 자꾸 묶여있는 쫄랭이를 구해주고 싶었다. 할머니가 쫄랭이를 잘 돌봐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매일 밥은 주지만, 할머니는 혼자 놀러다니느라 바빴다. 산책을 시키는 것도 못 봤다. 차라리 현재랑 함께 살면 현재도 쫄랭이도 정말 행복할 것만 같았다.
   “잘 키울 수 있으면 데려가.”
   “진짜죠? 약속했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두 달 후에 데려가라고 했다. 이 생각은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쫄랭이가 할머니네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어린데 또 환경이 바뀌는 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엄마 아빠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현재는 언덕에서 쫄랭이를 안고 매일 그네를 탔다. 쫄랭이랑 함께 보낸 여름 방학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쫄랭, 형 보고 싶으면 이거 가지고 놀아. 데리러 올 때까지 잘 있어.”
   현재는 배낭에 달고 다니던 생쥐 인형을 쫄랭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쫄랭이는 생쥐 인형 꼬리를 물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현재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간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할아버지와 먹구만 대문 앞에서 현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현재는 정말 바쁘게 5학년 2학기를 보냈다. 두 달 동안, 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학교도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쫄랭이를 키울 수 있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조건은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도 다니고, 학교도 빠지지 않는 것. 무엇보다 엄마 아빠가 예전처럼 현재를 대하지 않는 게 좋았다. 학원도 현재가 원하지 않는 건 등록하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는 이제 곧 쫄랭이랑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언덕 위에서 그네가 현재를 보고 있었다. 현재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언덕이 온통 보라색으로 살랑살랑 움직였다. 현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할머니네 집으로 갔다. 활짝 열려있는 대문이 현재를 환영하는 것 같았지만, 집은 조용했다. 대신 마당에 화분이 넘어져 있고, 휴지랑 슬리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할아버지네 집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도, 먹구도, 쫄랭이도, 아무도 없었다.
   현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네가 있는 언덕으로 갔다. 언덕에 다 오르기도 전에 국화꽃 향기가 진동했다. 두 달 사이에 언덕은 많이 변해 있었다. 보라색 국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밤나무 밤송이는 벌어져 알밤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바람이 솔솔 불었다. 현재는 한들거리는 그네에 올라 무릎을 힘껏 굽혔다. 그네가 여름보다 더 낮아진 거 같았다. 할아버지네 동네가 현재 발밑에 있었다.
   “이쫄랭, 빨리 좀 와라. 형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냐!”
   현재는 그네에서 뛰어내려 꽃 속에 누웠다. 눈을 감고 쫄랭이와 만나는 순간을 생각했다. 현재는 쫄랭이를 안아줄 거고, 쫄랭이는 현재를 마구 핥아댈 거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그때였다.
   스스스슥, 사사사삭.
   현재 머리 위에서 뭔가 움직였다. TV에서 보았던 방울뱀 소리가 이랬던 것 같았고, 멧돼지나 큰 동물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현재는 눈을 파르르 떴다.
   “으악!”
   현재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그넷줄을 잡았다. 피할 데라곤 밤나무뿐인데, 현재는 나무를 탈 줄 몰랐다. 급한 대로 그네에 올랐다. 누런 털이 이빨을 드러내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으아악!”
   현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네를 굴렀다.
   “먹구야! 살려줘! 먹구야! 먹구야!””
   한 백 번은 먹구를 부른 것 같았다.
   “깨갱, 깨갱!”
   현재가 눈을 떴을 때는 누런 털의 꽁무니가 언덕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내가 온다는 거 할아버지한테 못 들었어?”
   현재는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괜히 먹구를 나무랐다. 먹구는 그네 아래서 꼬리만 살살 흔들고 있었다.
   “죽을 뻔했네, 가자.”
   현재는 먹구 옆에 딱 붙어 언덕을 내려왔다. 사자를 닮은 그 겁쟁이는 보이지 않았다. 현재는 할머니네 집을 지나쳐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얼마나 놀랐는지 쫄랭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반으로 줄어든 거 같았다. 대문 앞에서 할아버지가 현재를 반겼다.
   현재는 까치발로 옆집 할머니네를 보았다. 사자 같은 개가 너덜너덜 헤진 생쥐 인형을 입에 물고…… 현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 쫄랭이 어디 갔어?”
   “쫄랭이잖여.”
   ‘말도 안 돼!’
   쫄랭이는 여름 방학 때 보았던 새끼 강아지가 아니었다. 하얗던 털도 누런빛을 띠었고, 덩치가 먹구보다 훨씬 컸다.
   “야, 너, 진짜 쫄랭이 맞아?”
   쫄랭이는 관심 없다는 듯 엎드려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재는 선물로 사 온 개껌을 담 너머로 던졌다. 쫄랭이는 으르렁대며 물러섰다가 개껌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곤 화분의 흙을 파더니, 화초를 뽑아버렸다.
   “쫄랭! 나 생각 안 나?”
   쫄랭이는 휴지통의 쓰레기들을 헤집느라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재는 남은 개껌을 던지고는 대문을 잠그고, 마루에 벌렁 누워버렸다.
   “왜, 쫄랭이가 못 알아봐서 섭섭해?”
   “뭐, 그냥.”
   그때였다. 쫄랭이네 할머니가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쫄랭이 데려갈 거지?”
   현재는 못 들은 척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렸다.
   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쫄랭이 자랑을 줄줄이 읊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고……
   “못 알아보잖아요. 바보 같이요.”
   현재는 목이 메어 억지로 말했다.
   “뭔 소리여. 쫄랭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정말 쫄랭이는 그사이 훈련을 잘 받긴 한 거 같았다. 할머니가 앉으라면 앉고,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렸다. 거기다 한 번 짖으라면 한 번 짖고, 세 번 짖으라면 세 번 짖기도 했다. 할머니 앞에선 한없이 순하고, 거기다 재롱까지 부렸다. 하지만 현재 눈에는 말썽 피우는 문제견으로 보였다. 더 크면 진짜 사나운 사자가 될 거 같았다. 채희는 쫄랭이 동영상을 보더니 웃음 이모티콘을 잔뜩 넣어 답장을 보내왔다.
   ‘개춘기인 거 같다. 우리 몽몽이도 그랬어.’
   엄마한테도 쫄랭이 동영상을 보냈다. 엄마가 기절할지도 모르니까 미리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엄마, 어떡하지?’
   ‘많이 컸네. 쫄랭이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쫄랭이랑 잘 이야기해 봐.^^’
   하지만 쫄랭이는 대화가 안 됐다.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으르렁거리거나,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물고 뜯고 망가뜨리느라 바빴다. 할머니가 쫄랭이를 목줄에 묶어 데려왔지만, 대문 앞에서 거칠게 뻗대어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꼭 현재네 집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배신자! 나도 너 필요 없어!’
   현재는 엄마가 도착하기 전에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네에 앉아 빙글빙글 돌다가 눈을 떴다. 한숨이 나왔다. 쫄랭이의 배신은 지금까지 겪어본 일 중에 가장 슬픈 일이라고 현재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보라색 국화꽃 위로 털북숭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현재는 너무 놀라 그네에 얼어붙어 있었다.
   “쪼, 쫄랭이?”
   쫄랭이는 정말로 현재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꼬리만 남은 생쥐 인형을 입에 물고는, 꼬리를 바짝 치켜든 채 한 발 한 발 그네 앞으로 다가왔다. 현재는 재빨리 안장을 밟고 섰다. 쫄랭이가 몸을 날려 그네로 달려들었다.
   “엄마아!”
   쫄랭이가 그네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현재는 죽을힘을 다해 그네를 굴렀다. 쫄랭이가 현재의 바짓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쫄랭이가 매달려 있어 그네는 똑바로 나가지 않고, 비틀비틀 흔들렸다.
   “저리 가!”
   쫄랭이는 그네가 움직이는 대로 질질 끌려다녔다.
   “야, 너 정말 왜 이래?”
   현재는 쫄랭이한테 섭섭하고 놀라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쫄랭이 데려가려고 용돈도 십만 원이나 모았는데, 강키모에 들어가려고 채희한테도 엄청 자랑했는데…… 아무리 그네를 구르고 발버둥을 쳐도 쫄랭이는 바짓자락을 놓지 않았다.
   점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제는 그네가 아니라, 쫄랭이가 그네를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몇 번을 더 끌려다녔을까? 바지가 찢어지거나 쫄랭이가 다칠 거 같았다. 아니면 밤나무 가지가 부러지거나! 머리 위에서 밤알이 우두두두 떨어졌다. 현재는 그네에서 몸을 날렸다. 바짓자락을 물고 있던 쫄랭이가 나동그라지며 깽깽거렸다. 현재는 쫄랭이에게 소리쳤다.
   “아파? 나보다 더 아파? 겁쟁이, 바보! 넌 이제부터 쫄탱이야!”
   쫄랭이가 일어섰다. 겁쟁이가 아니라는 듯이 한 발, 한 발……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현재는 밤송이를 집어들고 말했다.
   “내 말 안 들으면 던질 거야! 앉아!”
   쫄랭이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엔 밤송이를 던지는 척하며 소리쳤다.
   “이쫄랭, 앉아!”
   쫄랭이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떨며, 슬며시 앉았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밤알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목에서 꺽꺽 소리가 났다.
   “잘했어, 엎드려!”
   이번에도 쫄랭이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낑낑대며 엎드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현재는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꼭 말 안 듣는 꼬마가 억지로 엄마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되는데.
   “기다려!”
   현재는 절뚝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신발 한 짝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쫄랭이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엎드려 있었다. 현재가 일어나라고 하면 곧 일어나려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쫄랭, 마지막으로 묻는다. 나랑 진짜 안 갈 거야?”
   “컹컹!”
   처음으로 쫄랭이가 대답했다. 안 가!
   ‘배신자!’
   “쫄랭아! 쫄랭아!”
   언덕 아래서 할머니가 쫄랭이를 불렀다.
   쫄랭이가 벌떡 일어섰다.
   “앉아! 나랑 안 갈 거면!”
   쫄랭이가 낑낑대며 앉았다.
   울다가 웃으면 진짜 안 되는데, 현재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쫄랭이가 할머니 말보다 현재 말을 들은 거니까! 밤송이 가시가 따가웠다.
   “안 간다고 앉을 건 아니잖아!”
   현재는 밤송이를 멀리 던져버렸다.

   현재는 할아버지 슬리퍼를 신고, 담을 넘겨다보았다. 쫄랭이가 낯익은 신발 한 짝을 물어뜯고 있었다.
   “쫄랭, 나 진짜 간다. 잘 있어.”
   쫄랭이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잘 가!
   탁탁! 현재는 가슴을 두 대 맞은 거 같아서, 뒤돌아보지 않고 엄마 차에 올라탔다.

지안

자신과 동일시하던 대상과 이별하며 점점 나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피할 수 없었고, 알아듣기 어려웠던 이별에 조용한 응원을 더합니다. 성장했으니까요.

2023/01/31
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