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예술이라는 유리병의 빈자리
새로운 미학을 향하는 ‘실존하는 청자’
1.
비평이라는 장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논하자면 우선 부정적인 느낌이 역력한, 자주 회자되는 질문, “비평이 왜 필요한가?”에 먼저 답해야 하겠다. 이 질문은 비평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존속해야 하는 이유를 묻거나 증명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비평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은 각기 다르겠지만 비평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이전보다 불분명해지고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비평이 필요 없어졌나 혹은 왜 비평을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나. 비평은 예술 작품을 경유하여 사고를 개진하고, 작품에 내재한 숱한 인문학적 질문을 길어올리며, 새로운 답과 질문의 연쇄를 파생하는 장르다. 예술을 이해하는 길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하고, 예술임을 판단하는 시금석으로도 예술과 현실·사회·독자를 이어주는 매듭으로도 기능하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평을 쓰기 위해서든 제대로 읽기 위해서든 우선은 작품 읽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은 아무도 작품을 읽지 않는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1) 하지만 독자 없이 혼잣말을 흥얼거리게 된 작품은 더는 대화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문학이 사회를 선도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1970, 80년대의 문학을 자주 회고한다. 당시 민주주의를 위시한 가치를 문학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작품들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작가가 투옥되었던 점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학은 왜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가치를 더는 주도할 수 없을 만큼 주변부로 밀려난 문학은 작품성이 떨어진 것일까. 부정적 현실을 향한 칼날을 제대로 벼리지 못하게 되어, 이제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것인가? 그렇다면 문학을 대체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장르들이 정의와 같은 가치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이제 정의란 고루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문학이 수호하려던 가치 그 자체가 의미 없어진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야 한다. 문학이 가치를 선도하지도, 잘못된 사회에 질문을 던지지도 못하므로 문학이 불필요해진 것인가 아니면 더는 그 가치조차 필요 없어진 것인가. 후자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제는 얼어붙은 바다의 면적을 더 넓혀서 멋들어진 아이스 링크장이라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도끼는 필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얼른 폐기되어 마땅한 흉기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려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의 가치를 논하는 비평은 문학보다 더 쓸모없는 것이 된다. 어떤 이들은 비평의 장벽이 낮아져 만인이 비평가인 시대가 도래했다는 긍정적인 변화를 전문적인 비평이 불필요해진 원인으로 꼽는다. 비평장의 경계와 비평가의 권위가 허물어지는 일은 분명 긍정할만한 흐름이지만 실질적으로 만인이 수행하는 비평이 전문 비평의 자리를 대체할 만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모두가 비평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전문 비평가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인과 관계는 타당성이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비평이 추구하던 가치 따위는 효율성 그 자체를 욕망하는 성과 사회에서 유아적인 환상이자 구닥다리 낡은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비평의 효용이 줄어들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읽히지 않는 문학, 팔리지 않는 문학,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문학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건, 읽히지 않는 희망, 팔리지 않는 정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사랑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것과 같아 보인다. 물론 독자들의 외면이 이해되는 작품이 있고 명확한 이유로 외면 받은 작품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문학을 두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비주류적이지만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옹호하고 있는 장르라면 그것에 호응하는 이들의 숫자 같은 것으로 그 효용을 판단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숱한 질문과 답을 지나며 나의 견해는 비교적 뚜렷해진 것 같다. 비평은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비평이 필요한가?
2.
지금-여기에 어떤 비평이 필요한가를 논하기 위해 비평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대학 시절, 평론가였던 남자 선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현아야, 영화 신세계 봤어? 안 봤으면 꼭 봐. 그게 진짜 예술이야. 진짜 남자들의 영화야.” 진짜 예술이 궁금해진 나는 극장에 가서 영화 〈신세계〉(2013)를 봤다. 배우 송지효가 연기한 ‘신우’를 강간하고 죽이는 주인공 ‘정청’이 보여주는 브로맨스에 단 한 순간도 몰입하지 못했다. 정의감을 갖고 비리를 수사하는 신우는 영화 속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드럼통에 갇혀 죽는다. 잠입 수사를 하는 경찰이었으므로 보복 살해를 당하는 것이지만 스토리의 개연성을 위한 장면이라고 포장하기 어려울 만큼 이 여성 인물은 폭력적으로 소비되어버린다. 속옷 차림의 신우를 향해 정청은 “몸매도 먹어줄 만하더라”라는 등의 불필요한 성적 모욕을 남발한다. 이 장면은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는 정청이라는 인물이 추잡한 강간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내게 각인시켰으나 많은 관객은 그가 보여주는 액션 신과 의리 있는 면모에 열광했다. 영화의 전체 평점은 9점에 가까웠으며 많은 이들이 최고의 한국형 누아르라며 찬사를 보냈다. 나만 홀로 토할 듯한 메스꺼움을 느끼며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그때 나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낙담했다. 앞으로도 예술은 내가 오롯이 공감할 수 없는 분야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 ‘진짜 예술’은 ‘진짜 남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때는 향유층에 의해 좌우된 예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무력감을 선사한 작품이 〈신세계〉가 처음이었을까.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피에타〉(2012)를 여자 동기들과 관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끝난 후, ‘아들’이 사정할 수 있도록 자위를 도와주고 그의 살점을 먹는 ‘엄마’2)의 모습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봐야 했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던 침묵은 그것이 이미 권위 있는 영화제로부터 예술성을 보증받은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인지적 부조화의 산물이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생이던 때, 교과서에서 읽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있다. 공교육은 내게 아픈 아내를 때리고 나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보여주고는 그 남자의 순박함을 이해하도록 강요했다. 국어 교과서는 지금도 그대로다. 예술은 내게 영영 좁히기 어려운 거리감을 유지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바꾸어준 것이 바로 비평이었다. 비평가들은 ‘예술’이라는 기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간 전범으로 여겨왔던 작품과 이를 판단했던 기준, 그리고 그러한 기준을 비호해왔던 권력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며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과도한 옹호로 인해 배제되어왔던 윤리를 되찾고자 했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예술이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류적이 관점이 있었을 뿐이다. 처음, 내가 ‘진짜 예술’로 강조되는 예술을 대면했을 때, 예술이라는 유리병은 커다란 돌멩이들을 담고 있었다. 철저히 이성애적인, 지식인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돌멩이들 말이다. 예술은 그것만으로 꽉 차 보였고, 나는 그런 돌멩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재미있지 않았고, 궁금하지 않았으며 가끔 그 유리병에서 미적인 쾌감을 느낄 수 없는 나의 감각이 무딘 것 같아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그것이 편향된 의견일 수 있다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작품들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작품들을 ‘예술’이라고 평하고 싶다면 논증해야 한다. 단일하고 지배적인 예술의 납작한 기준은 사라져야 한다.
“끊임없이 여성과 소수자를 해치”3)며 여성 독자들이 상처받는 것에 개의치 않는 남성 중심주의적 예술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유리병 근처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이미 무결하게 폐쇄되어 버린 것만 같던 예술이 완전히 닫혀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리병이 돌멩이만을 담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넘자 유리병 바깥의 무른 흙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많이 있었지만 언제나 가득 찬 것으로 인식되었던 예술이라는 유리병에 여성의 목소리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의 언어와 서사가 작품에 기입되었고 그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다양했다. 여성 비평가들은 유리병 속에 담긴 돌멩이들이 추방될까 두려워진 이들에게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들어야만 했으나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작품들 속에 새겨져 있는 여성 혐오를 지적하고 여성이 배제되어온 교묘한 역사를 논증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문학을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비평적 성찰들은 비윤리적인 요소를 감내하는 고통 없이도 그저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 아름다움에 곧바로 매혹되어버릴 수 있는 예술이 분명히 존재하며, 나도 예술을 감지하는 감식안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유리병은 다시 꽉 차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여성과 남성이라는 분리는 지극히 이성애적인 관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틈이 없다고 생각했던 흙 사이에도 틈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성애 중심주의로부터 소외되어온 동성애가 들어설 빈자리는 충분했다. 비평은 다시 제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물을 들이부었다. 이제 액체로 가득 차 있는 유리병은 온전한 예술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걸로 충분할까? 여전히 제한적인 정상성만을 두둔하며 장애를 가진 이들과 트랜스젠더 주체들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더는 무언가 들어갈 틈이 있지 않은 유리병 앞에서 우리는 예술을 이대로 포기해야 할까? 물리학자 파인만은 우리의 그러한 인지적 한계를 부순다. 파인만은 ‘원자 가설(atomic hypothesis)’을 이야기하며 물방울 하나를 예시로 든다. 물방울 하나는 그저 매끈한 연속체로 보이지만, 이를 10억 배 확대하면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결합된 물 분자들이 서로 완전히 밀착되지는 않은 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지만, 무엇인가 채워넣을 만한 틈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술이라는 유리병은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공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공간으로 인해 예술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비평이란 우리가 수호해야 할 가치를 지키되, 모두에게 동일한 개념인 듯 보이는 가치가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선별과 배제로 성립되어왔다는 점을 끈질기게 논의해야 한다. 예술의 빈자리를 발견하고 아직 내포되지 못한 숱한 가치를 포용해나가도록 앞장서야 한다. 그리하여 예술이 새로운 정의와 사랑의 형태들에까지 열려있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2021년의 지금-여기에서 비평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다. 그런 비평이라면 너무나 필요하다. 그것이 비평이라면 어떻게든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내고 싶다.
3.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비평적 이상이다. 유리병에 물은커녕 성긴 흙을 첨가하려는 시도조차 현실에서는 반발에 부딪힌다. 대부분 비난과 거부에 가깝지만 그나마 논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비판을 선별해보자면, “‘여성비평가들은 알량한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거나,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를 논하는 일은 한국문학의 상징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한국문학사를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는 반박”5)이 있다. 페미니즘 문학과 비평이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미학을 과도하게 억압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은 정치성과 미학성이 대립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유리병을 내적으로 확장하는 비평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문학의 미학성과 자율성을 억압하거나 여성 혐오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만 과도하게 검열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때때로 페미니즘 비평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비약적인 해석을 보고 있자면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기보다 그런 방식으로 오도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페미니즘 비평은 “한국문학사의 미학과 문학적 상상력이 구성돼온 역사적 방식을 검토”하며 “여성혐오적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학”6)을 제시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2021년인 지금에도 유리병에 자리한 흙이 달갑지 않은 이들은 더 넓은 공간으로의 발돋움을 어렵게 한다. 문학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을 반성하며, 창작자가 응당 거쳐야 할 내적인 검열과 고심을 거쳐 내놓은 작품들은 빠르게 미학성이 결여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미학성’이란 남성중심주의 문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일 텐데, 그와 같은 기존의, 구식의, 부적절한 표지로 새로운 문학을 판단하는 일이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봉준은 ‘미학적’이라는 판단을 남성-여성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로 제시하는 조애나 러스를 경유하여 그것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이 ‘중심’과 일치하지 않는 ‘주변’의 모든 글쓰기에 따라붙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미학성이 권력관계와 밀접히 연결된다고 이야기한다.7) ‘미학’이라는 기준이 주변부의 문학을 평가 절하하는 데 자주 사용되어왔다는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Feminism)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반론”8)을 제기하고자 했다는 한 평론가의 글에서 우리는 한국문학에서 ‘미학’이라는 기준에 대한 천착이 얼마나 과도한 것인지와 미학성/정치성의 구분이 지금도 얼마나 공고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페미니즘적인 주제를 지닌 문학이 재미가 없다거나 미학성이 결여되었다는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9) 확인할 수 있었다는 김보경 평론가는 문학의 재미나 작품의 내적 완결성을 애초에 윤리나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 할당하고 있는 듯한 그의 사유를 지적한다. 이에 동의하며 자신의 재미와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 이 남성 평론가에게는 “윤리”이자 “가르침”이겠지만, 여성 독자들의 읽을 재미와 독서를 통해 얻고자 했던 휴식을 방해해왔던 것은 그 어떤 가르침도 아닌 비윤리적인 폭력의 재현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해두고 싶다. 특히 여성을 향한 폭력은 남성 성장 서사에 이용되며 (여성들은 전혀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미적 쾌감을 위해 집요하고 자세히 묘사되면서도 ‘미학’이자 ‘예술’로 포장되었다. “작품 외적 요소”를 참조점으로 삼는 것이 기본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작품이 “내적 요소”를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과 문학작품을 철저히 구분하고자 하는 기획처럼 들린다.
그러나 임지훈 평론가가 외적 요소의 개입 없이도 작품의 내적 논리를 구축한 작품으로 꼽고 있는 강화길의 「음복」10)은 오히려 여성의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과 상호작용하며 완성도를 얻는 소설이다. 여성 독자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현실에서 마주쳐왔던 숱한 얼굴들을 통해 돌봄의 의무를 면제받고서 여성들의 암투와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남성의 ‘그늘 없는 얼굴’11)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에 대한 서술자의 반감이 ‘나의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위치에서 천진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이기적이지만 처절한 소망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읽어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 밖의 현실에서 여성들은 분란을 일으킬만한 요소들을 알아내 미리 조심해야 하고, 일상에 내재한 자잘한 위협까지 예리하게 감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을 작가는 정치하게 재현하고 독자는 독해에 활용하므로 감정적 동조를 일으키며 개연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서사적 빈틈을 소설의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로 적극 활용한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여성 작가와 독자는 삶에서 얻은 앎으로 소설에 빈칸 처리된 부분을 이미 채워 넣은 상태에서 서사와 독해를 시작한다.
‘작품 외적 요소를 받아들일 것에 대한 작가의 요구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그의 이야기는 현실에 대해 작품에서 직접 발화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었다는 진은영 시인의 기념비적인 글을 상기시킨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12)고 토로하는 시인이 문제 제기한 사회 참여와 참여시 사이의 분열에 대하여 다양한 비평적 논의들이 이어졌음에도 여전히 문학의 정치성은 작품 내부로 제한되어 있다. 그리하여 문학이 “외적으로 정립된 윤리의 단순한 재현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13)는 경계(警戒)를 낳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작품이 단순한 재현물에 그치고 만다는 지적은 이제껏 재현된 적 없었던 주체들의 삶과 고통을 새로이 조명하고자 하는 문학작품에는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다. 현실에 산적해 있는 소수자들의 고통을 등지지 않았기에 예술이라는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페미니즘 비평처럼, 비평은 그리고 문학은 오히려 현실을 적극 기입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다. 문학작품 내부에 한정된 정치와 미학을 논의하는 협소한 문학비평이 비평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미학성과 정치성의 대립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를 논의해야 하겠다. 다소 성긴 요약이지만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짚어두고 싶다. 1930년대에 임화, 박용철, 김기림 사이에 벌어졌던 기교주의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김기림은 미학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을 임화는 현실 참여로의 리얼리즘을 주창하였는데 이는 미학성과 정치성 대립14)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에도 여전히 미학과 현실 참여(정치)는 대결 구도에 놓여 있는 듯 보이나, 이들 사이의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미학성과 정치성의 대립으로 단순화된 그들의 논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이들이 근본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 문학을 수립’하자는데 뜻을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임화의 경우 예술 지상주의를 경계하며 문학작품이 첨예한 현실 인식을 갖추도록 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면, 김기림의 경우 편내용주의 목적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자본과 결탁하여 고도로 교묘해지는 일제의 억압에 영합하는 통속 문학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미학적 완성도 또한 괄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우선시해야 할 가치를 두고 대립했을 뿐 문학이 현실 참여적이어야 하며,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문학의 결을 양분하려는 경향이 해방 이후 지속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극대화되며 분단 상황이 이어지는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북한이 주적으로 상정되자,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은 국가 권력에 의해 적극 거부, 부정되었으며 작가, 시민 가릴 것 없이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와 관련한 대부분의 요소에 반감을 보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주제화하여 이야기하는 문학은 부당하게 평가 절하되었으며 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인지하도록 교육하고 그 사상을 검증하도록 요구하는 문화가 굳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미학성과 정치성의 대립에서 은근히 우위를 점하게 되는 쪽은 언제나 미학성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하여 현실 참여적인 문학작품은 그 작품성과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문학적 형상화가 덜 된 작품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가 손들어주었던 쪽은 프로 문학, 사회 참여 문학, 노동 문학 등이 아닌 미학적으로 세련됐다고 여겨지는 문학 쪽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지만,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여 그 우열을 가리고 암묵적으로 더 낮은 등급에 정치성이 뚜렷한 문학들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삶에 더욱 밀착하는 작품들에 미학성이 떨어진다는 불필요한 낙인을 찍어온 것은 아닌지, 문학의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은 추구될 때마다 과도하다는 비판이 따라붙게 된 것은 아닌지 톺아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불충분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집착”이 된다는 점은 그 위계가 얼마나 부수기 어렵도록 단단한 것인지를 노출한다. ‘과도한 집착’이란 말은 오히려 오랜 세월을 극소수의 기득권층에게만 유쾌한 좁디좁은 문학적 가치를 수호해왔던 남성 중심의 비윤리적인 문학에게 돌려줘야 할 수식이 아닌가 싶다.
4.
그렇다면 비평의 역할은 사고의 틀을 부단히 확장하여 ‘예술’이 얼마나 더 너른 품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 정치성의 반대편에 속박되어있던 미학성이 뻗어갈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시인의 실제 이름을 활용하여 작품 바깥의 것으로 규정되어왔던 현실을 시 속에 들여오면서 동시에 시를 현실로 흘러나가게 하려는 최근 시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지금 발표하는 글에서 완결되는 논의가 아니라 많은 비평가와 함께 일궈나갈 수 있는 작업이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의 시에는 미학성과 정치성의 지난한 대립으로부터 탈피하며 분리되어왔던 삶의 층위와 문학적 층위를 한 데 뒤섞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 시가 시도하고 있는 실험은 매우 다양하여 포괄하기 어렵지만 일례로 시인이 자신의 실제 이름을 시 속에 기재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실명을 시 속에 사용한 시인으로 이소호, 황인찬, 김현, 박소란, 이다희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이들은 다층적인 목소리를 시에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한 시인의 발화로 들리도록 유도한다.15) 조대한은 이들이 보여주는 1인칭 발화를 두고 ‘실존적인 삶의 레이어들을 겹쳐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을 ‘나’의 삶 쪽으로 가져오려는 움직임’16)으로 분석한다. 그는 1인칭 발화가 실제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리도록 시에 삽입됨으로써 “지면 속 묵독의 언어”에 현실이 개입된 “이질적인 층”을 덧입혀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했다.17)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며 소설에서의 이 같은 현상을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18)으로 지칭한 바 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퀴어·페미니즘 문학에는 유독 미학성 결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되는데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은 작가의 실제 체험으로 작품이 오독(誤讀)되도록 하여 미학성, 인물의 전형성, 작품 내적 논리의 타당성 등에 대한 (이를 갖추었어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받을 것이 뻔한) 소모적인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는 불필요한 미학성 비판으로부터의 탈피이자 새로운 미학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고백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시 장르에서 이는 더욱 유효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시인이 직접 시 속에서 발화하는 ‘나’로 등장하는 지금의 시적 경향은 목소리를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의 삶 그 자체를 시에 새기는 작업을 수행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개명 전 이름부터 동생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실명을 활용하는 이소호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시인이 적극적으로 시적 정황을 실제 체험으로, 시적 발화를 실제 시인의 목소리로 읽어주기를 권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안녕하세요, 시 쓰는 이소호입니다.”(「사과문」19))라고 직접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심지어 시 「경진이를 묘사한 경진이를 쓰는 경진」 20)에서는 자신의 실물을 담은 사진을 수록하고 “서울 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하였다며 “이경진 작가”를 설명하는데 이러한 시구는 시집 『캣콜링』의 책날개에 기록되어있는 작가의 약력과 완전히 일치한다. 특이한 점은 시인이 자신이 곧 시적 화자라는 등식을 받아들일 것을 피력한 이후 ‘듣는 일’에 주력한다는 점이다. 이소호는 자신을 향한 성희롱과 조롱, 모욕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경청하고 기록한다.
이 시들 속에서 모욕의 말을 듣는 시적 주체는 발화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들에 수긍하거나 항변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된 앞뒤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저 들었던 모욕의 말들을 문자 그대로, 심지어 영어(「캣콜링」)와 스페인어(「나는 스페인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해요」)로까지 재현한다. 시적 화자가 곧 시인 자신으로 읽히도록 촘촘하게 구조를 짜는 시인이 격렬하게 발화하기보다 듣는 행위에 열중하는 일은 의아함을 자아낸다.
장은정은 이러한 시편들이 “읽는 자들에게 아무런 분열도 일으키지 않”기에 선명하게 읽힐 수 있으며 “성희롱의 전형적 대사”를 그대로 전시하기에 “통쾌한 조롱의 효과를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여성들 사이의 폭력을 다루는 시편들보다는 “뚜렷하게 들리”므로 “핵심적인 시편”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21) 물론 여성들, 심지어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잔혹한 폭력을 묘사하는 시편들이 읽어내기 어려운 요소들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기 위한 설명이겠지만, 이 시편들이 뚜렷하게 들리고, 명확하게 읽히는 것은 여성 독자들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여성에게 실재하는 일상의 폭력은 피해당사자가 필요 이상으로 매번 입증해야 하는 것이며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 한 줄짜리 문장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숱하게 들어왔던 모욕의 말이며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전형적인 2차 가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 전형성이 오래도록 부정당해 왔다. 여성들이 그와 같은 숱한 모욕과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왔음에도 그 원인이 되는 가해 행위는 극소수의 비정상인들이 저지르는 범죄 행위로 치부되어왔다. 시의 제목처럼 이는 “보편적인” 일임에도, 그러한 폭력이 만연해있다는 사실보다 그러한 일을 당한 여성의 ‘불운함’에 더 주목하며 절대다수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폭력은 비가시화되어왔다. 여성의 고통을 재현하는 소설이나 시는 과장되어 있고, 편향적이며, 소수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다수의 무고한 남성을 공격하려는 작품으로 쉽게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이소호를 위시한 시인들은 ‘이러한 시가 왜 필요하나’, ‘시적 화자가 과연 전형성을 갖고 있나’, ‘현실을 과장하고 있지 않나’하는 불필요한 잡음을 제거하며 이것은 ‘나의 이야기’임을 실명으로 보증하고자 한다. 시집에 재현된 현실의 면면들을 시인의 사적 체험으로 수렴시키며 “경진”, “소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자처하는 시인은 그와 같은 시적 정황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임을 강조한다. 이때 비로소 시는 ‘나 또한 그러한 일을 경험했다’는 지극히 사적인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 시인이 실존하는 청자로 나서서 자신이 ‘들었던’ 말을 재현함으로써 시는 발화하고 선언하는 성격이 옅어지며 듣고, 공감하고, 함께 체험하는 공간이 된다. 문학적 형상화가 전혀 없는, 수준 미달의 주관적인 경험 전시로 오해를 받을지언정, 유사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각자의 체험을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것이 그들만의 사적 체험이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다수의 여성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피해임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독자들은 비로소 자신의 불운함과 예민함을 탓하는 내적 검열을 멈추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피해 사실을 ‘호소’할 수 있는 ‘소호’들로 거듭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호’들의 증식은 여성으로 겪는 폭력 안에서 동일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확장되어가며 텍스트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혼종적인 ‘소호’를 근거로 가능한 모든 ‘소호’들이 있는 작품 외부의 실재하는 삶에까지 당도한다.22)
그렇다면 이러한 시편은 전형적인 폭력이지만 ‘전형적’이라고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여성과 같은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폭력을 드러내는 작업이 된다. 리얼리즘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전형성을 확보하지 못해 재현의 대상조차 된 적 없었던 소수자들의 삶을, 불필요한 논쟁에 마모되지 않도록 지켜내며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유리병 안으로 들이는 일조차 철저히 거부당하는 이들의 삶에는 언어가 주어진 적 없으므로 언어화되기 어렵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실명을 강조하고 각주의 형식을 빌려 실제 사례들을 열거해가며(「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 입증하는 이유도 그 비가시성에 있다. 시 작품 안에 사용된 시인의 이름은 곁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작품 외부의 현실을 호출한다. 그리하여 비판을 가장한 미학성에 대한 비난을 불식하며, 없다고 여겨지지만 거의 모든 여성들이 노출되어있는 폭력을 가시화하고 증언한다. 시인이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도, 작품 바깥이라며 작품으로부터 유리되어버리는 삶에도, 그와 같은 폭력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계속 있어 왔다고 말이다.
비평은 예술의 빈자리를 찾아 더 많은 가치에 열려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가치임에도 배제되어왔다면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고 유리병 속에 나란히 놓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유리병을 가득 채울 만큼 채웠다고 느낄 때도, 더 많은 품과 곁을 상상하고 고안하며, 더 많은 가치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유리병의 한정 공간 자체에 안주하지 않고, 흙과 충분한 물을 갖춘 유리병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며 종내에는 유리병이자 예술 그 자체를 파열하여 나오는 나무를 꿈꿔야 한다. 아직 본 적 없지만 유리병의 빈 공간으로 뿌리를 내딛고 유리병에 담긴 모든 요소와 상생하며 끝없이 자라나는 나무, 그 나무의 형상을 닮은 비평이 지금-여기에 절실하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작업처럼 여겨질 때도,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비평은 필요하며, 나는 그러한 비평을 사랑하련다.
비평이라는 장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논하자면 우선 부정적인 느낌이 역력한, 자주 회자되는 질문, “비평이 왜 필요한가?”에 먼저 답해야 하겠다. 이 질문은 비평은 필요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존속해야 하는 이유를 묻거나 증명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비평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은 각기 다르겠지만 비평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이전보다 불분명해지고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은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비평이 필요 없어졌나 혹은 왜 비평을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나. 비평은 예술 작품을 경유하여 사고를 개진하고, 작품에 내재한 숱한 인문학적 질문을 길어올리며, 새로운 답과 질문의 연쇄를 파생하는 장르다. 예술을 이해하는 길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하고, 예술임을 판단하는 시금석으로도 예술과 현실·사회·독자를 이어주는 매듭으로도 기능하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평을 쓰기 위해서든 제대로 읽기 위해서든 우선은 작품 읽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은 아무도 작품을 읽지 않는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1) 하지만 독자 없이 혼잣말을 흥얼거리게 된 작품은 더는 대화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문학이 사회를 선도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1970, 80년대의 문학을 자주 회고한다. 당시 민주주의를 위시한 가치를 문학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작품들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작가가 투옥되었던 점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학은 왜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가치를 더는 주도할 수 없을 만큼 주변부로 밀려난 문학은 작품성이 떨어진 것일까. 부정적 현실을 향한 칼날을 제대로 벼리지 못하게 되어, 이제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것인가? 그렇다면 문학을 대체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장르들이 정의와 같은 가치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이제 정의란 고루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문학이 수호하려던 가치 그 자체가 의미 없어진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야 한다. 문학이 가치를 선도하지도, 잘못된 사회에 질문을 던지지도 못하므로 문학이 불필요해진 것인가 아니면 더는 그 가치조차 필요 없어진 것인가. 후자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제는 얼어붙은 바다의 면적을 더 넓혀서 멋들어진 아이스 링크장이라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도끼는 필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얼른 폐기되어 마땅한 흉기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려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의 가치를 논하는 비평은 문학보다 더 쓸모없는 것이 된다. 어떤 이들은 비평의 장벽이 낮아져 만인이 비평가인 시대가 도래했다는 긍정적인 변화를 전문적인 비평이 불필요해진 원인으로 꼽는다. 비평장의 경계와 비평가의 권위가 허물어지는 일은 분명 긍정할만한 흐름이지만 실질적으로 만인이 수행하는 비평이 전문 비평의 자리를 대체할 만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모두가 비평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전문 비평가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인과 관계는 타당성이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비평이 추구하던 가치 따위는 효율성 그 자체를 욕망하는 성과 사회에서 유아적인 환상이자 구닥다리 낡은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비평의 효용이 줄어들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읽히지 않는 문학, 팔리지 않는 문학,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문학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건, 읽히지 않는 희망, 팔리지 않는 정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사랑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것과 같아 보인다. 물론 독자들의 외면이 이해되는 작품이 있고 명확한 이유로 외면 받은 작품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문학을 두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비주류적이지만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옹호하고 있는 장르라면 그것에 호응하는 이들의 숫자 같은 것으로 그 효용을 판단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숱한 질문과 답을 지나며 나의 견해는 비교적 뚜렷해진 것 같다. 비평은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비평이 필요한가?
2.
지금-여기에 어떤 비평이 필요한가를 논하기 위해 비평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대학 시절, 평론가였던 남자 선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현아야, 영화 신세계 봤어? 안 봤으면 꼭 봐. 그게 진짜 예술이야. 진짜 남자들의 영화야.” 진짜 예술이 궁금해진 나는 극장에 가서 영화 〈신세계〉(2013)를 봤다. 배우 송지효가 연기한 ‘신우’를 강간하고 죽이는 주인공 ‘정청’이 보여주는 브로맨스에 단 한 순간도 몰입하지 못했다. 정의감을 갖고 비리를 수사하는 신우는 영화 속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드럼통에 갇혀 죽는다. 잠입 수사를 하는 경찰이었으므로 보복 살해를 당하는 것이지만 스토리의 개연성을 위한 장면이라고 포장하기 어려울 만큼 이 여성 인물은 폭력적으로 소비되어버린다. 속옷 차림의 신우를 향해 정청은 “몸매도 먹어줄 만하더라”라는 등의 불필요한 성적 모욕을 남발한다. 이 장면은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는 정청이라는 인물이 추잡한 강간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내게 각인시켰으나 많은 관객은 그가 보여주는 액션 신과 의리 있는 면모에 열광했다. 영화의 전체 평점은 9점에 가까웠으며 많은 이들이 최고의 한국형 누아르라며 찬사를 보냈다. 나만 홀로 토할 듯한 메스꺼움을 느끼며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그때 나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낙담했다. 앞으로도 예술은 내가 오롯이 공감할 수 없는 분야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 ‘진짜 예술’은 ‘진짜 남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때는 향유층에 의해 좌우된 예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무력감을 선사한 작품이 〈신세계〉가 처음이었을까.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피에타〉(2012)를 여자 동기들과 관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끝난 후, ‘아들’이 사정할 수 있도록 자위를 도와주고 그의 살점을 먹는 ‘엄마’2)의 모습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봐야 했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던 침묵은 그것이 이미 권위 있는 영화제로부터 예술성을 보증받은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인지적 부조화의 산물이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생이던 때, 교과서에서 읽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있다. 공교육은 내게 아픈 아내를 때리고 나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보여주고는 그 남자의 순박함을 이해하도록 강요했다. 국어 교과서는 지금도 그대로다. 예술은 내게 영영 좁히기 어려운 거리감을 유지하는 대상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바꾸어준 것이 바로 비평이었다. 비평가들은 ‘예술’이라는 기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간 전범으로 여겨왔던 작품과 이를 판단했던 기준, 그리고 그러한 기준을 비호해왔던 권력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며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과도한 옹호로 인해 배제되어왔던 윤리를 되찾고자 했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예술이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류적이 관점이 있었을 뿐이다. 처음, 내가 ‘진짜 예술’로 강조되는 예술을 대면했을 때, 예술이라는 유리병은 커다란 돌멩이들을 담고 있었다. 철저히 이성애적인, 지식인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돌멩이들 말이다. 예술은 그것만으로 꽉 차 보였고, 나는 그런 돌멩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재미있지 않았고, 궁금하지 않았으며 가끔 그 유리병에서 미적인 쾌감을 느낄 수 없는 나의 감각이 무딘 것 같아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그것이 편향된 의견일 수 있다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러한 작품들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작품들을 ‘예술’이라고 평하고 싶다면 논증해야 한다. 단일하고 지배적인 예술의 납작한 기준은 사라져야 한다.
“끊임없이 여성과 소수자를 해치”3)며 여성 독자들이 상처받는 것에 개의치 않는 남성 중심주의적 예술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유리병 근처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이미 무결하게 폐쇄되어 버린 것만 같던 예술이 완전히 닫혀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리병이 돌멩이만을 담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넘자 유리병 바깥의 무른 흙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많이 있었지만 언제나 가득 찬 것으로 인식되었던 예술이라는 유리병에 여성의 목소리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의 언어와 서사가 작품에 기입되었고 그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다양했다. 여성 비평가들은 유리병 속에 담긴 돌멩이들이 추방될까 두려워진 이들에게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들어야만 했으나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작품들 속에 새겨져 있는 여성 혐오를 지적하고 여성이 배제되어온 교묘한 역사를 논증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문학을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비평적 성찰들은 비윤리적인 요소를 감내하는 고통 없이도 그저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 아름다움에 곧바로 매혹되어버릴 수 있는 예술이 분명히 존재하며, 나도 예술을 감지하는 감식안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유리병은 다시 꽉 차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여성과 남성이라는 분리는 지극히 이성애적인 관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틈이 없다고 생각했던 흙 사이에도 틈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성애 중심주의로부터 소외되어온 동성애가 들어설 빈자리는 충분했다. 비평은 다시 제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물을 들이부었다. 이제 액체로 가득 차 있는 유리병은 온전한 예술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걸로 충분할까? 여전히 제한적인 정상성만을 두둔하며 장애를 가진 이들과 트랜스젠더 주체들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더는 무언가 들어갈 틈이 있지 않은 유리병 앞에서 우리는 예술을 이대로 포기해야 할까? 물리학자 파인만은 우리의 그러한 인지적 한계를 부순다. 파인만은 ‘원자 가설(atomic hypothesis)’을 이야기하며 물방울 하나를 예시로 든다. 물방울 하나는 그저 매끈한 연속체로 보이지만, 이를 10억 배 확대하면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결합된 물 분자들이 서로 완전히 밀착되지는 않은 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지만, 무엇인가 채워넣을 만한 틈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술이라는 유리병은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공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공간으로 인해 예술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비평이란 우리가 수호해야 할 가치를 지키되, 모두에게 동일한 개념인 듯 보이는 가치가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선별과 배제로 성립되어왔다는 점을 끈질기게 논의해야 한다. 예술의 빈자리를 발견하고 아직 내포되지 못한 숱한 가치를 포용해나가도록 앞장서야 한다. 그리하여 예술이 새로운 정의와 사랑의 형태들에까지 열려있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2021년의 지금-여기에서 비평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다. 그런 비평이라면 너무나 필요하다. 그것이 비평이라면 어떻게든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내고 싶다.
3.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비평적 이상이다. 유리병에 물은커녕 성긴 흙을 첨가하려는 시도조차 현실에서는 반발에 부딪힌다. 대부분 비난과 거부에 가깝지만 그나마 논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비판을 선별해보자면, “‘여성비평가들은 알량한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거나, ‘한국문학의 여성혐오를 논하는 일은 한국문학의 상징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한국문학사를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는 반박”5)이 있다. 페미니즘 문학과 비평이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미학을 과도하게 억압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은 정치성과 미학성이 대립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유리병을 내적으로 확장하는 비평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문학의 미학성과 자율성을 억압하거나 여성 혐오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만 과도하게 검열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때때로 페미니즘 비평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비약적인 해석을 보고 있자면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기보다 그런 방식으로 오도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페미니즘 비평은 “한국문학사의 미학과 문학적 상상력이 구성돼온 역사적 방식을 검토”하며 “여성혐오적 상상력을 경유하지 않고도 새로운 미학”6)을 제시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2021년인 지금에도 유리병에 자리한 흙이 달갑지 않은 이들은 더 넓은 공간으로의 발돋움을 어렵게 한다. 문학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을 반성하며, 창작자가 응당 거쳐야 할 내적인 검열과 고심을 거쳐 내놓은 작품들은 빠르게 미학성이 결여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미학성’이란 남성중심주의 문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일 텐데, 그와 같은 기존의, 구식의, 부적절한 표지로 새로운 문학을 판단하는 일이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봉준은 ‘미학적’이라는 판단을 남성-여성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로 제시하는 조애나 러스를 경유하여 그것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이 ‘중심’과 일치하지 않는 ‘주변’의 모든 글쓰기에 따라붙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미학성이 권력관계와 밀접히 연결된다고 이야기한다.7) ‘미학’이라는 기준이 주변부의 문학을 평가 절하하는 데 자주 사용되어왔다는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Feminism)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한 반론”8)을 제기하고자 했다는 한 평론가의 글에서 우리는 한국문학에서 ‘미학’이라는 기준에 대한 천착이 얼마나 과도한 것인지와 미학성/정치성의 구분이 지금도 얼마나 공고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나에게는 재미가 1순위인데, 그 재미가 분출되는 지점이 다소 비윤리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 “윤리, 좋지. 다만, 재밌는 한에서.” 왜냐하면 나는 내가 휴식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택한 작품에서 윤리가 재미를 압도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싶지 않으며, 그러한 압도가 나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의 창조물을 통해 재미를,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이지, 그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독자가 작가/인물의 사상에 대해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이다. 인물의 행위나 서사상의 사건이 소설 내적 요소들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외적 요소를 통해 설명될 수밖에 없을 때, 그러한 작품 외적 요소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할 때, 독자는 작가가 설정한 이와 같은 구도를 하나의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나는 작품이 작품 내적 요소를 통해 어느 정도의 해석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작품 외적 요소를 참조점으로 삼는 것이 결코 디폴트(Default)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중략)
문학의 윤리란 어디까지나 작품의 내적 요소를 통해 발원하는 것이지, 작품 외적 요소로 정립되어 있으면서 작품이 그에 기대어 가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 문학이 윤리가 태어나는 자리일 수는 있어도, 외적으로 정립된 윤리의 단순한 재현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임지훈, 「너의 불완전함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부분.
이 글을 통해 “페미니즘적인 주제를 지닌 문학이 재미가 없다거나 미학성이 결여되었다는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9) 확인할 수 있었다는 김보경 평론가는 문학의 재미나 작품의 내적 완결성을 애초에 윤리나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 할당하고 있는 듯한 그의 사유를 지적한다. 이에 동의하며 자신의 재미와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 이 남성 평론가에게는 “윤리”이자 “가르침”이겠지만, 여성 독자들의 읽을 재미와 독서를 통해 얻고자 했던 휴식을 방해해왔던 것은 그 어떤 가르침도 아닌 비윤리적인 폭력의 재현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해두고 싶다. 특히 여성을 향한 폭력은 남성 성장 서사에 이용되며 (여성들은 전혀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미적 쾌감을 위해 집요하고 자세히 묘사되면서도 ‘미학’이자 ‘예술’로 포장되었다. “작품 외적 요소”를 참조점으로 삼는 것이 기본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작품이 “내적 요소”를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과 문학작품을 철저히 구분하고자 하는 기획처럼 들린다.
그러나 임지훈 평론가가 외적 요소의 개입 없이도 작품의 내적 논리를 구축한 작품으로 꼽고 있는 강화길의 「음복」10)은 오히려 여성의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과 상호작용하며 완성도를 얻는 소설이다. 여성 독자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현실에서 마주쳐왔던 숱한 얼굴들을 통해 돌봄의 의무를 면제받고서 여성들의 암투와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남성의 ‘그늘 없는 얼굴’11)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에 대한 서술자의 반감이 ‘나의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위치에서 천진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이기적이지만 처절한 소망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읽어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 밖의 현실에서 여성들은 분란을 일으킬만한 요소들을 알아내 미리 조심해야 하고, 일상에 내재한 자잘한 위협까지 예리하게 감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을 작가는 정치하게 재현하고 독자는 독해에 활용하므로 감정적 동조를 일으키며 개연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서사적 빈틈을 소설의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로 적극 활용한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여성 작가와 독자는 삶에서 얻은 앎으로 소설에 빈칸 처리된 부분을 이미 채워 넣은 상태에서 서사와 독해를 시작한다.
‘작품 외적 요소를 받아들일 것에 대한 작가의 요구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그의 이야기는 현실에 대해 작품에서 직접 발화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었다는 진은영 시인의 기념비적인 글을 상기시킨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12)고 토로하는 시인이 문제 제기한 사회 참여와 참여시 사이의 분열에 대하여 다양한 비평적 논의들이 이어졌음에도 여전히 문학의 정치성은 작품 내부로 제한되어 있다. 그리하여 문학이 “외적으로 정립된 윤리의 단순한 재현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13)는 경계(警戒)를 낳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작품이 단순한 재현물에 그치고 만다는 지적은 이제껏 재현된 적 없었던 주체들의 삶과 고통을 새로이 조명하고자 하는 문학작품에는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다. 현실에 산적해 있는 소수자들의 고통을 등지지 않았기에 예술이라는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페미니즘 비평처럼, 비평은 그리고 문학은 오히려 현실을 적극 기입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다. 문학작품 내부에 한정된 정치와 미학을 논의하는 협소한 문학비평이 비평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미학성과 정치성의 대립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를 논의해야 하겠다. 다소 성긴 요약이지만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짚어두고 싶다. 1930년대에 임화, 박용철, 김기림 사이에 벌어졌던 기교주의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김기림은 미학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을 임화는 현실 참여로의 리얼리즘을 주창하였는데 이는 미학성과 정치성 대립14)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에도 여전히 미학과 현실 참여(정치)는 대결 구도에 놓여 있는 듯 보이나, 이들 사이의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미학성과 정치성의 대립으로 단순화된 그들의 논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이들이 근본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 문학을 수립’하자는데 뜻을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임화의 경우 예술 지상주의를 경계하며 문학작품이 첨예한 현실 인식을 갖추도록 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면, 김기림의 경우 편내용주의 목적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자본과 결탁하여 고도로 교묘해지는 일제의 억압에 영합하는 통속 문학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미학적 완성도 또한 괄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우선시해야 할 가치를 두고 대립했을 뿐 문학이 현실 참여적이어야 하며,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문학의 결을 양분하려는 경향이 해방 이후 지속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극대화되며 분단 상황이 이어지는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북한이 주적으로 상정되자,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은 국가 권력에 의해 적극 거부, 부정되었으며 작가, 시민 가릴 것 없이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와 관련한 대부분의 요소에 반감을 보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주제화하여 이야기하는 문학은 부당하게 평가 절하되었으며 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인지하도록 교육하고 그 사상을 검증하도록 요구하는 문화가 굳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미학성과 정치성의 대립에서 은근히 우위를 점하게 되는 쪽은 언제나 미학성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하여 현실 참여적인 문학작품은 그 작품성과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문학적 형상화가 덜 된 작품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가 손들어주었던 쪽은 프로 문학, 사회 참여 문학, 노동 문학 등이 아닌 미학적으로 세련됐다고 여겨지는 문학 쪽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지만,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여 그 우열을 가리고 암묵적으로 더 낮은 등급에 정치성이 뚜렷한 문학들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삶에 더욱 밀착하는 작품들에 미학성이 떨어진다는 불필요한 낙인을 찍어온 것은 아닌지, 문학의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은 추구될 때마다 과도하다는 비판이 따라붙게 된 것은 아닌지 톺아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불충분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집착”이 된다는 점은 그 위계가 얼마나 부수기 어렵도록 단단한 것인지를 노출한다. ‘과도한 집착’이란 말은 오히려 오랜 세월을 극소수의 기득권층에게만 유쾌한 좁디좁은 문학적 가치를 수호해왔던 남성 중심의 비윤리적인 문학에게 돌려줘야 할 수식이 아닌가 싶다.
4.
그렇다면 비평의 역할은 사고의 틀을 부단히 확장하여 ‘예술’이 얼마나 더 너른 품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 정치성의 반대편에 속박되어있던 미학성이 뻗어갈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시인의 실제 이름을 활용하여 작품 바깥의 것으로 규정되어왔던 현실을 시 속에 들여오면서 동시에 시를 현실로 흘러나가게 하려는 최근 시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지금 발표하는 글에서 완결되는 논의가 아니라 많은 비평가와 함께 일궈나갈 수 있는 작업이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의 시에는 미학성과 정치성의 지난한 대립으로부터 탈피하며 분리되어왔던 삶의 층위와 문학적 층위를 한 데 뒤섞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 시가 시도하고 있는 실험은 매우 다양하여 포괄하기 어렵지만 일례로 시인이 자신의 실제 이름을 시 속에 기재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실명을 시 속에 사용한 시인으로 이소호, 황인찬, 김현, 박소란, 이다희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이들은 다층적인 목소리를 시에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한 시인의 발화로 들리도록 유도한다.15) 조대한은 이들이 보여주는 1인칭 발화를 두고 ‘실존적인 삶의 레이어들을 겹쳐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을 ‘나’의 삶 쪽으로 가져오려는 움직임’16)으로 분석한다. 그는 1인칭 발화가 실제 시인의 목소리처럼 들리도록 시에 삽입됨으로써 “지면 속 묵독의 언어”에 현실이 개입된 “이질적인 층”을 덧입혀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했다.17)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며 소설에서의 이 같은 현상을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18)으로 지칭한 바 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퀴어·페미니즘 문학에는 유독 미학성 결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되는데 ‘1인칭 작가 주인공 시점’은 작가의 실제 체험으로 작품이 오독(誤讀)되도록 하여 미학성, 인물의 전형성, 작품 내적 논리의 타당성 등에 대한 (이를 갖추었어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받을 것이 뻔한) 소모적인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는 불필요한 미학성 비판으로부터의 탈피이자 새로운 미학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고백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시 장르에서 이는 더욱 유효한 개념으로 작용한다.
시인이 직접 시 속에서 발화하는 ‘나’로 등장하는 지금의 시적 경향은 목소리를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의 삶 그 자체를 시에 새기는 작업을 수행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개명 전 이름부터 동생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실명을 활용하는 이소호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시인이 적극적으로 시적 정황을 실제 체험으로, 시적 발화를 실제 시인의 목소리로 읽어주기를 권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안녕하세요, 시 쓰는 이소호입니다.”(「사과문」19))라고 직접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심지어 시 「경진이를 묘사한 경진이를 쓰는 경진」 20)에서는 자신의 실물을 담은 사진을 수록하고 “서울 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하였다며 “이경진 작가”를 설명하는데 이러한 시구는 시집 『캣콜링』의 책날개에 기록되어있는 작가의 약력과 완전히 일치한다. 특이한 점은 시인이 자신이 곧 시적 화자라는 등식을 받아들일 것을 피력한 이후 ‘듣는 일’에 주력한다는 점이다. 이소호는 자신을 향한 성희롱과 조롱, 모욕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경청하고 기록한다.
이래서난우울한여자는싫어야징징짜지말고똑바로말해그리고말하기전에다시한번생각좀해봐내가이렇게무식한여자랑사귀었었나?너똑똑하잖아그런것아니잖아대화가되잖아그러니까뭘아는것처럼행동하지마오빠가차근차근알려줄게다널위한거야너나못믿는거야?농담인데왜정색을하고그래전에도말했지만니가기세고예민해서우리연애까지불행해진거야-이소호, 「오빠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부분.
동양 여자들은 스페인어를 못하더라. 영어만 아는 바보들이야. 너도 바보야? 그게 아니라면, 내 이야기를 못 알아 듣는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존나 어처구니없네. 야! 나 기분 나빠서 더는 운전 못하겠어. 여기서 내려. 십 분 동안 걸어가면 호텔이야! 내 택시에서 내려! 이 미친년아!-이소호, 「나는 스페인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해요」 부분.
이씨 집안 대는 다 끊겼네.(1988, 아빠) 설거지는 네가 할 일이야.(2011, 아빠) 이년아.(2002, 아빠) (……) 요즘 여자 시인들은 서정이 없어 쌍욕 쓰고 섹스 쓰고 발랑 까져서.(2015, 선배)-이소호, 「일요일마다 쓰여진 그림」 부분.
이 시들 속에서 모욕의 말을 듣는 시적 주체는 발화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들에 수긍하거나 항변하지도 않을뿐더러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된 앞뒤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저 들었던 모욕의 말들을 문자 그대로, 심지어 영어(「캣콜링」)와 스페인어(「나는 스페인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해요」)로까지 재현한다. 시적 화자가 곧 시인 자신으로 읽히도록 촘촘하게 구조를 짜는 시인이 격렬하게 발화하기보다 듣는 행위에 열중하는 일은 의아함을 자아낸다.
장은정은 이러한 시편들이 “읽는 자들에게 아무런 분열도 일으키지 않”기에 선명하게 읽힐 수 있으며 “성희롱의 전형적 대사”를 그대로 전시하기에 “통쾌한 조롱의 효과를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여성들 사이의 폭력을 다루는 시편들보다는 “뚜렷하게 들리”므로 “핵심적인 시편”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21) 물론 여성들, 심지어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잔혹한 폭력을 묘사하는 시편들이 읽어내기 어려운 요소들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기 위한 설명이겠지만, 이 시편들이 뚜렷하게 들리고, 명확하게 읽히는 것은 여성 독자들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여성에게 실재하는 일상의 폭력은 피해당사자가 필요 이상으로 매번 입증해야 하는 것이며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지는얼마나깨끗하다고유난이야못생긴주제에기어서라도집에갔어야지”-이소호, 「가장 사적이고 보편적인 경진이의 탄생」 부분.
이 한 줄짜리 문장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숱하게 들어왔던 모욕의 말이며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전형적인 2차 가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 전형성이 오래도록 부정당해 왔다. 여성들이 그와 같은 숱한 모욕과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왔음에도 그 원인이 되는 가해 행위는 극소수의 비정상인들이 저지르는 범죄 행위로 치부되어왔다. 시의 제목처럼 이는 “보편적인” 일임에도, 그러한 폭력이 만연해있다는 사실보다 그러한 일을 당한 여성의 ‘불운함’에 더 주목하며 절대다수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폭력은 비가시화되어왔다. 여성의 고통을 재현하는 소설이나 시는 과장되어 있고, 편향적이며, 소수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다수의 무고한 남성을 공격하려는 작품으로 쉽게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이소호를 위시한 시인들은 ‘이러한 시가 왜 필요하나’, ‘시적 화자가 과연 전형성을 갖고 있나’, ‘현실을 과장하고 있지 않나’하는 불필요한 잡음을 제거하며 이것은 ‘나의 이야기’임을 실명으로 보증하고자 한다. 시집에 재현된 현실의 면면들을 시인의 사적 체험으로 수렴시키며 “경진”, “소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자처하는 시인은 그와 같은 시적 정황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임을 강조한다. 이때 비로소 시는 ‘나 또한 그러한 일을 경험했다’는 지극히 사적인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 시인이 실존하는 청자로 나서서 자신이 ‘들었던’ 말을 재현함으로써 시는 발화하고 선언하는 성격이 옅어지며 듣고, 공감하고, 함께 체험하는 공간이 된다. 문학적 형상화가 전혀 없는, 수준 미달의 주관적인 경험 전시로 오해를 받을지언정, 유사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각자의 체험을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것이 그들만의 사적 체험이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다수의 여성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피해임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독자들은 비로소 자신의 불운함과 예민함을 탓하는 내적 검열을 멈추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피해 사실을 ‘호소’할 수 있는 ‘소호’들로 거듭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호’들의 증식은 여성으로 겪는 폭력 안에서 동일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확장되어가며 텍스트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혼종적인 ‘소호’를 근거로 가능한 모든 ‘소호’들이 있는 작품 외부의 실재하는 삶에까지 당도한다.22)
그렇다면 이러한 시편은 전형적인 폭력이지만 ‘전형적’이라고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여성과 같은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폭력을 드러내는 작업이 된다. 리얼리즘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전형성을 확보하지 못해 재현의 대상조차 된 적 없었던 소수자들의 삶을, 불필요한 논쟁에 마모되지 않도록 지켜내며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유리병 안으로 들이는 일조차 철저히 거부당하는 이들의 삶에는 언어가 주어진 적 없으므로 언어화되기 어렵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실명을 강조하고 각주의 형식을 빌려 실제 사례들을 열거해가며(「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 입증하는 이유도 그 비가시성에 있다. 시 작품 안에 사용된 시인의 이름은 곁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작품 외부의 현실을 호출한다. 그리하여 비판을 가장한 미학성에 대한 비난을 불식하며, 없다고 여겨지지만 거의 모든 여성들이 노출되어있는 폭력을 가시화하고 증언한다. 시인이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도, 작품 바깥이라며 작품으로부터 유리되어버리는 삶에도, 그와 같은 폭력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계속 있어 왔다고 말이다.
비평은 예술의 빈자리를 찾아 더 많은 가치에 열려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가치임에도 배제되어왔다면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고 유리병 속에 나란히 놓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유리병을 가득 채울 만큼 채웠다고 느낄 때도, 더 많은 품과 곁을 상상하고 고안하며, 더 많은 가치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유리병의 한정 공간 자체에 안주하지 않고, 흙과 충분한 물을 갖춘 유리병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며 종내에는 유리병이자 예술 그 자체를 파열하여 나오는 나무를 꿈꿔야 한다. 아직 본 적 없지만 유리병의 빈 공간으로 뿌리를 내딛고 유리병에 담긴 모든 요소와 상생하며 끝없이 자라나는 나무, 그 나무의 형상을 닮은 비평이 지금-여기에 절실하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작업처럼 여겨질 때도,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비평은 필요하며, 나는 그러한 비평을 사랑하련다.
성현아
문학평론을 주로 쓰지만 어떤 글이든 쓸 수 있다. 무용하고 선하며 온기를 지닌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쓴다.
2021/10/26
47호
- 1
- 프란츠 카프카,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서용좌 역, 솔, 2004, 67쪽.
- 2
- 이후에 그녀가 복수를 위해 엄마 행세를 했다는 점이 밝혀지지만, 그 이전에는 아들-엄마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더불어 실제 엄마든 아니든, 엄마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아들의 살점을 받아먹거나 그의 자위를 돕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해당 장면은 서사에도 불필요한 것이다.
- 3
- 정세랑 외 4인, 「어떻게 할 것인가-문단 내 성폭력과 한국의 남성성」, 《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78쪽.
- 4
- 리처드 파인만,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박병철 역, 승산, 2003, 42~44쪽.
- 5
- 오혜진, 「페미니즘 비평과 ‘예술 알못’」,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오월의봄, 2019, 215~216쪽.
- 6
- 위의 글, 217쪽.
- 7
- 고봉준, 「시 비평의 현재와 ‘시민성’이라는 문제」, 《현대시》 2021년 8월호, 105쪽.
- 8
- 임지훈, 「너의 불완전함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문장 웹진》 2021년 5월호.
- 9
- 김보경, 「퀴어 패러독스」, 《현대시》 2021년 7월호, 91쪽.
- 10
- 강화길, 『화이트 호스』, 문학동네, 2020.
- 11
- 강화길, 「음복」, 『화이트 호스』, 문학동네, 2020, 40쪽.
- 12
-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 69쪽.
- 13
- 임지훈, 앞의 글.
- 14
- 엄밀히 말하자면 임화와 김기림이 미학성과 정치성을 두고 대립했다기보다 이러한 논쟁을 미학성/정치성이 대립하는 구도로 단순화시킨 후대 연구자들의 해석이 그러한 구분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 15
- 이에 대해서는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에 발표한 「시와 복고-다시 만난 서정」이라는 글에서 다룬 적이 있다.
- 16
- 조대한, 「‘나’의 응답 :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 모음》 2021년 봄호, 306쪽.
- 17
-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 사회》 2019년 겨울호, 98쪽.
- 18
- 성현아 외 11인, 「이차원의 사랑법」, 『2021 신춘문예 당선 평론수필집』, 정은출판, 2021, 238쪽.
- 19
- 이소호, 『캣콜링』, 민음사, 2018.
- 20
- 이소호,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현대문학, 2021.
- 21
- 장은정, 「겨누는 것」, 『캣콜링』 해설, 민음사, 2018, 155쪽.
- 22
- 성현아, 「이 가을, 당신에게 대화를 부칩니다.」, 《서정시학》 2021년 가을호, 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