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하는 생각들; 인간은 내 상상 이상으로 악한 존재라서 실은 이 세상이 파괴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정말 사람들은 동물의 내장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쏟아져나오기를 바랄까? 어린 여자아이들이 옷을 만들다가 공장에 갇혀 죽기를 바랄까? 이웃의 집이 물에 잠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수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일까? 누군가 초과 노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당 기업의 물건을 사는 것일까? 끝도 없이 댈 수 있는 이 어이없는 질문들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생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이 죽고 난 이후에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지 않을까? 패스트 패션 산업이 생태 파괴와 3세계 여성들의 노동 착취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면서 왜 소비를 포기하지 않을까? 적정량을 훌쩍 초월한 강도와 시간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있다고 들었으면서 왜 오늘 당장 이 택배를 받아보는 것을 원할까? 이번 질문들의 대답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분명 존재한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등등……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떤 대답에도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위에서 나열한 상황들은 인간의 도덕적 차원에 호소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환경이나 노동 부문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과정에서는 그토록 빈번하게 도덕적 수사가 사용되는 것일까? ‘착한 소비’라든가 ‘양심적 선택’ 같은 표현 말이다. (귀여운 북극곰이 집을 잃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클리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회가 ‘덜’ 아름다워지는 과정에는 인간이 특별히 나빠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없다. 개인과 집단의 도덕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호소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덕적 수사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이나 환경 부문의 문제 자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과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산업 재해의 책임이 있는 기업에 ‘악하다’든가 ‘비인간적’이라는 도덕적 수사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도덕적 수사가 사건을 기술하는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될 경우, 오히려 기업의 구조적 문제가 가려지기 쉽다. 기업의 ‘악한’ 행태를 둘러싼 도덕적 수사들은 산업 재해를 종종 온정주의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온정주의적 맥락에서는 환경을 보호하거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제가 기업이 특별히 관용을 베푸는 차원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상황은 ‘권력의 온정주의적 형식’을 강화할 뿐이다. 이런 권력의 형식이 문제적인 이유는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분류된 집단의 권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온정을 베풀 능력이 있는 집단에게는 무엇을 생명으로 취급할 것이며, 누구의 생명이 중요하게 취급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력이 부여된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생명 보존과 관련된 윤리적 요구는 곧 사회적 위계와 연관된다. 권력 집단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전략은 그 집단의 권력을 강화할 뿐이며, 그들의 가치 판단에 따라 특정한 취약 집단이 ‘덜’ 애도될 가능성을 용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1)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이 사안을 마땅히 다루어야 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동기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환경 정의와 노동 정의를 촉구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도덕적 호소를 뛰어넘어서 개인과 집단에 윤리적 행위를 요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특별히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환경과 노동 분야가 요구하는 윤리적 행위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다른 감각’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개인의 윤리적 행위가 ‘당연한 것’이 되는 길이다.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인식하게 되는 것. 이쯤 되면 누군가는 이러한 생각을 보고 서두에 늘어놓은 생각만큼이나 어이없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성취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특정하며 ‘규제적 이상’을 상상하려는 데 있지 않다. 정말 그것이 실현 가능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의 글을 생각한다. 인도의 물리학자이자 에코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인도의 자유무역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일부 집단에서 여성에 대한 공격이 8배 증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 시바의 글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분석이 촉구하고 있는 ‘연결’이라는 감각 때문이다. 그녀에게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이 특정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일과 여성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는 일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은 이윤의 발생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자급적 노동이 경제에 기여하는 몫을 평가 절하한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 모델이 부여하는 경제적 가치가 그 존재의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며, 경제에 기여하는 몫이 적은 존재들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도 취약한 상태로 내몰린다는 점이다. 이때 경제 모델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과 젠더 폭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은 구분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강간이나 폭력의 사례가 늘어간다는 사실과 경제 정책 변화와의 연결은 그 이면에 자리한 맥락들을 통해 경제 구조와 젠더 위계 사이의 역학 관계를 드러낸다.

   시바는 소위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가 일어나기 전부터 물질 간의 상호 연결 구조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는 특히 인간의 신체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사회·경제·정치적 맥락과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이기도 하다. 도덕적 호소가 아니더라도, 윤리적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시바가 촉구한 감각에서 발견된다. 나의 신체가 외부 사회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면, 타인의 신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생명 집단이 지리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집단이 경험하는 사회적 위협은 초국가적 사회 구조의 맥락 속에서 곧 나의 위협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어떤 생명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은 나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과 별개의 일이 아니다. 유별나게 도덕적인 동기가 없더라도,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떼어놓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2) 이것은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생태 파괴와 여성 해방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상호 연결성이라는 감각을 통해 도덕적 호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감각이 숨겨진 맥락들을 가시화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감각 영역에서 벗어난 생명 집단과 내가 공유하는 사회적 맥락이 상호 연결성이라는 감각을 통해 드러난다. 이 감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 가시화된 현상에서 가시화되지 않은 맥락들을 읽어내는 것이다.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가 노동자 계급의 허파 이미지를 통해 읽어내는 맥락들이 그 증거이다.

   노동자계급의 허파라는 이미지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만일 표면적으로 외부의 사회 세력들이 내부 신체기관을 변형시켜 왔다면, 사회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 개인의 몸과 사회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움직임은, 여타 다른 사적이고 정치적인 인신론적, 제도적, 그리고 분과학문적 영역들 사이를 혼잡하게 오가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허파는 확실하게 노동자에게 '속하'지만, 그것은 또한 의학, 법률, '산업 위생', 직장 보건, 보험금 청구, 노동조합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자세하게 조사하는 대상이다.3)

   만약 인간의 몸과 사회 시스템을 연결하는 물질적 상호 교환의 감각이 없다면, 노동자 계급의 허파는 그저 허파일 뿐이다. 그러나 상호 연결성의 감각은 눈에 보이는 것(허파)에서 보이지 않는 것(사회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누군가가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어떤 노동 환경에서, 어떤 식사를 하고, 어떤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등의 정보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허파 이미지는 개인이 경험하는 사회·경제·정치적 맥락에 관한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이 증거가 채택되는 방식은 서론에서 언급한 도덕적 수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타인의 신체가 사회 시스템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가시화될 경우, 그것이 나의 신체와 무관한 맥락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드러난다. 이때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맥락을 통해 다른 생명 집단은 지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나에게 ‘보이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나와 타인의 신체가 상상적 유대감이 아닌, 실제적 사회 구조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 행위를 요청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4)

   실제로 이 감각이 부재할 때 생기는 문제들은 세상을 ‘덜’ 아름답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다. 그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는 감응 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물병이 쓰레기라는 사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의류 수거함에 철 지난 옷을 버릴 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그것이 어느 가난한 나라에 주어지고(버려지고) 그 나라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재사용될 것을 믿는다. 그런데 시야에서 사라진 옷(쓰레기들)이 어딘가로 가서 잘 처리될 것이라는 이 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호 연결성을 감각하지 못한다면 가시성의 범위를 벗어난 생명 집단은 고려의 대상이 되기 쉽지 않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잊어버리거나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글라데시로 수출된 한국의 헌 옷들은 잘 처리되기는커녕 지역의 강을 파괴하는 쓰레기 산을 성실히 쌓아가고 있다.

   개인의 행위가 오직 가시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때는 심지어 생태 정의를 표방하는 움직임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친환경 전략의 경우가 그렇다. 기업들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한 아이템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소비자들은 소위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면서 환경을 구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어 간다. 그러나 실제로 기업들이 친환경 마케팅 전략에 주목하면서 폐페트병의 가격이 치솟았고, 현재는 폐플라스틱이 없어서 구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기업들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상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묻지 않고, 소비자들은 소비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직 폐페트병으로 만들었다는 제품을 과잉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환경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착각을 제공하고 그 착각에 빠진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가시성에 의해 개인의 행동이 지배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잘 보여준다. 지리적/시간적/구조적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 집단 혹은 현상 간의 연결 구조를 희미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너무 멀리 있다. 이 거리를 좁히고 나와 다른 생명체 그리고 사회·경제적 압력 등의 맥락이 꼼짝없이 엉켜 있다는 감각을 경험할 방법은 없을까? 그런 점에서 최근 환경과 젠더 혹은 노동 부문 간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문학 작품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어떤 이야기들은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거리로 인해 희미해지는 상호 연결성을 회복시킨다.

   예를 들어, 최은미의 소설 「눈으로 만든 사람」5)에서는 젠더 억압과 환경 정의 그리고 신체 간의 상호 연결성을 드러내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소설 속의 여성 인물이 현재 경험하는 사건들은 오래전 혹은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맥락과 연결된다. 이 경우에 개인이 마주한 상황은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측면에서만 해석될 수 없다. 개인의 식습관, 피임법, 수면의 질, 신체적 통증, 가족 구성원 내의 위치, 노동 환경, 비윤리적 동물 사육 환경 등의 요소는 서로를 가로지르며 영향을 미치고, 촘촘하게 엮인 맥락을 형성하여 개인적 차원의 경험을 사회적 차원의 것으로 읽게 만든다. 이 소설은 특히 여성 인물의 신체를 통해 비가시화된 맥락들의 상호 연관성을 드러낸다. ‘강윤희’의 여덟 살 딸아이 ‘백아영’의 신체 변화는 그 연결망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가족 제도 내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강윤희’는 남편 ‘백은호’와 같은 성을 공유하는 딸 ‘백아영’이 형성하는 친밀함과는 대비되게 다소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들의 관계를 바라본다.

   백은호와 백아영은 닭발볶음을 심하게 좋아했다. 강윤희가 반찬가게에서 반찬과 국을 배달시켜 먹는 걸 본 시어머니는 수시로 백은호와 백아영의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 날랐다. 일주일에 한 번은 곰솥에 가득 볶은 닭발을 들고 왔고, 백은호와 백아영은 비닐장갑을 끼고 앉아 그 많은 닭발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입술이 벌게지도록 닭의 한 부위만을 집중적으로 뜯어먹는 부녀를 보고 있으면 강윤희는 입이 안 다물어지곤 했다.6)

   ‘강윤희’와 달리 ‘백은호’와 ‘백아영’은 비슷한 식습관을 가졌다. 그들은 육식 위주의 자극적 식단을 추구하지만, 이는 ‘강윤희’가 어릴 적부터 즐겨 먹던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강윤희’가 가사노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준다. 국과 반찬을 배달시켜 먹는 것으로 가족의 식사를 해결해왔으나, 그것을 본 시어머니가 손수 남편 ‘백은호’와 손녀 ‘백아영’의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윤희’가 공적 영역의 노동자 역할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반찬들에 “고기의 여러 부위를 그에 맞는 조리법으로 꾸준히 먹여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믿음”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강윤희’는 이 믿음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었지만 “자신도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상태”였다. 시어머니가 반찬을 해오고 백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특정한 식습관을 공유하는 상황은 가족 제도 내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분배하는 젠더 위계질서와 구분되어 읽히지 않는다. 곧이어 ‘백아영’의 신체에서는 성조숙증을 의심하게 할 만한 증상들이 발견된다.

   백은호는 식이요법과 운동 얘기를 했다. 백은호의 입에서 식이요법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강윤희는 포크를 집어 던질 뻔했다.
   “너는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체하는 거야?”
   백은호가 안 먹고는 못 사는 소와 돼지와 닭의 고기가 자연스럽게 살다 죽지 못한 동물들의 인위적인 고기라는 것을 백은호는 속시원히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 그러나 고기를 먹이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건 해롭지 않은 고기를 먹이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성호르몬제를 맞고 번식을 반복한 초식동물들의 고기를 백아영은 아기 때부터 먹어왔던 것이다.7)

   인위적으로 호르몬이 조작된 고기를 먹고 자란 ‘백아영’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아영’이 보이는 성조숙증 증상은 초식 동물들이 사육되는 비윤리적 환경을 재현하는 무대가 된다. “어려서부터 성호르몬제를 맞고 번식을 반복한 초식동물들의 고기”가 성조숙증을 치료하기 위해 성호르몬 억제제를 맞아야 하는 ‘백아영’의 신체에 투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백아영’의 신체 변화 역시 동물들이 사육되는 비윤리적인 환경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아이에게 성호르몬 억제 주사를 맞히면서 동시에 그 주사가 성장을 늦출까 봐 성장 호르몬 주사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살다 죽지 못한” 동물들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윤희’는 이 두 현상이 가진 시간적·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밀접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남편 쪽 식습관의 부자연스러움을 강력하게 인지하는 것이며 딸의 신체 변화를 두고 “이게 다 고기 때문이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딸의 몸이 변하는 현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이면에서 교차하는 맥락을 감각하기 때문이다. 가족 제도 내에서 가사노동을 제대로 수행할 책임이 있는 특정 젠더의 상황이나 고기가 사육되는 환경 등의 요소는 딸의 신체 변화를 통해 감지되며 그것들이 형성하는 맥락을 가시화한다.

   사실 ‘백아영’의 몸만이 아니었다. ‘강윤희’가 경험하는 신체의 통증 역시도 개인의 성적 경험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공론화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족 구도적 맥락의 결과였다. ‘강윤희’는 어릴 적 친척 ‘강중식’으로부터 성추행을 경험했다. 그 경험 이후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백아영’을 임신했을 때 빼고는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아”올 정도로 내내 그 고통은 ‘강윤희’를 따라다녔다. 이처럼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신체는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거리가 있는 현상들과 연결되며 환경이나 젠더 억압 등의 맥락을 가시화한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은 신체의 변화나 통증이지만, 사회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기반으로 다양한 맥락들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윤희’의 통증은 오직 본인만 아는 증상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딸의 성조숙증 증상과 달리 ‘강윤희’의 통증은 타인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쉽게 성추행의 경험과 연결되지 않는다. 본인조차도 성추행 당사자인 ‘강중식’이 그 사실을 언급하기 전까지는 “몸의 증상을 빼면 그만큼 그 일은 현실감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가족들을 비롯해 남편 ‘백은호’까지도 ‘강윤희’의 통증과 그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한다. ‘강윤희’의 경우는 신체의 증상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경험을 공론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종의 고립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강윤희가 가장 외로운 순간은 자신이 왜 그토록 완전한 피임을 원하는지 백은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백아영이 성조숙증 확진을 받았을 때도, 틱 증상이 생겼을 때도 아무도 자신만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강윤희는 생각했다. 강윤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서만 노를 젓고 혼자서만 책임지며 혼자서만 비난받는 것 같았다.8)

   ‘강윤희’의 통증과 ‘강윤희’가 처한 사회적 맥락 사이의 연관성은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게 차단되었다. 그 결과 그녀가 느끼는 고립감 역시 하나의 증상으로 출현한다. 친척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더해 그것을 고백할 수 없기에 이중으로 경험하는 억압이 ‘강윤희’의 고립감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특정한 맥락을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맥락 간의 연결을 차단하는 ‘구분’의 작업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강윤희’가 여성 가사 노동자로서 경험하는 고립감은 자신의 통증이나 딸의 성조숙증을 젠더나 환경의 맥락과 연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다. 표면적 현상을 그 이면의 맥락들과 연결하지 못하게 되면서 “혼자서만 노를 젓고 혼자서만 책임지며 혼자서만 비난받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발생한 일들의 책임과 비난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며,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 구조의 맥락은 삭제된다.

   게다가 이 증상은 특정 여성 집단들에게서 관찰되기도 한다. 최은미의 다른 소설 「여기 우리 마주」9)와 이주혜의 소설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10)는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고립감과 코로나바이러스의 증상이 병립하면서 특정 여성 집단이 경험하는 분리의 경험을 증언한다. 이주혜의 소설에서는 코로나로 격리 중인 상황에서 여성 인물이 경험하는 조난의 감각이 “처음 당하는 상황인데도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기술되면서 오래전 겪었던 육아와 출산의 맥락적 상황이 드러난다. 한편 최근 이서수의 소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11)에서는 “언니, 젊은 사람들이 왜 자꾸 죽는 걸까?”라는 질문을 통해 청년 세대의 신체와 사회·경제적 구조 사이의 상관성을 우회적으로 묻거나, 「미조의 시대」12)에서 수위 높은 성인 웹툰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수영 언니’가 복용하는 탈모약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가시화하는 맥락적 증거로 그려진다.

   어떤 이야기들은 신체와 사회적 맥락 간의 연결성을 밀접한 차원의 감각으로 돌려준다. 이 감각은 물질 간의 상호 연결 구조에 기반하는 것이고, 이 구조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돌보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 나의 생명을 돌보는 일과 타인의 생명을 돌보는 일을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호소를 뛰어넘어 개인과 집단에 윤리적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성조숙증을 치료하는 과정은 동물들의 비윤리적 사육 환경을 개선하려는 일과 별개가 아니며, 노동자의 처우를 보장하는 일은 내가 탈모약 복용을 중단하려는 시도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이상 착한 마음 같은 것에만 기대를 걸 수는 없다. 특별히 도덕적인 인간이 필요하지 않은 윤리적 행위의 요청 근거가 필요하다.

최선교

마감을 하던 날에 뉴스를 봤다. 내가 쓴 글과 그 소식의 거리가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았다. 익숙해서 닳아버린 말들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싶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2022/11/29
60호

1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2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94쪽.
3
스테이시 앨러이모, 『말, 살, 흙』, 윤준·김종갑 옮김, 그린비, 2018, 76쪽.
4
상호 연결에 관한 감각은 비단 특정한 환경 정의 운동이나 노동자의 권리 보장 같은 부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이 말했던 돌봄의 윤리에서 돌봄 행위가 일방적인 여성의 자기희생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역시도 인간관계란 상호적이라는 다소 근본적인 관점에서 나온다. 관계 안에 놓인 존재들이 별개의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은 어느 하나만을 돌보는 일을 애초에 불가능하게 만든다.
5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눈으로 만든 사람』, 문학동네, 2021.
6
위의 책, 101쪽.
7
위의 책, 107쪽.
8
위의 책, 115쪽.
9
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눈으로 만든 사람』, 문학동네, 2021.
10
이주혜,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문학동네》 2021년 겨울호.
11
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릿터》 2022년 4/5월호.
12
이서수, 「미조의 시대」, 《Axt》 2021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