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 대한 분투가 바로 그 텍스트다.
- 랜달 맥레오드


1. 여기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요

우선, 이 글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잠깐 동안 눈을 감도록 권하겠다.

(사이)

당신은 이 문장에 이르기 전에 과연 잠깐이라도 눈을 감았을까? 그러기는커녕 눈을 감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나 이유를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 줄 몰랐다고? 하지만 나는 이 글의 저자로서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바로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다만 이 문장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이인성의 소설 『한없이 낮은 숨결』(1989)로부터 몰래 빌려온 것이다. 책 한 권 내내 정색을 풀지 않은 채 독자를 호명하고 작가 자신을 심문하고 여하튼 마음이 저려 자주 펼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문학이라는 것을 막 읽기 시작했던 시절 거의 벌거벗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직접적이고자 하는 (그리고 물론 실패하는) 이 소설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단순한 텍스트 관찰자가 아닌, 신체를 지닌 ‘독자로서의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이 소설을 수차례 읽을 동안 저 첫 문장에서 눈을 감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면 한 권의 책을 대할 때 우리가 항상 궁금해하고 문제 삼는 것은 화자와 그 너머의 작가이지 독자로서의 자신(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독자는 지금-여기서 읽고 있는 자신으로서 자명하고, 또 작가와 달리 그게 누구든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정작 맞은편에 놓인 작가들에게도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독자보다 쓰고 있는 그들 자신인 것만 같다. 언제나 텍스트라는 물질적 흔적을 남기는 작가들에 대해서라면 이를 일별해보는 것으로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자들, 특히 동시대 한국문학의 독자들에 대해서라면 문득 심야의 트레일 캠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모습과 흔적을 찾아보려는 내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인터넷 서점 리뷰 란의 주접과 폄하가 아니면 어떤 책이 몇 쇄를 찍었다는 소식, 타임라인 위로 부지런히 텍스트를 실어 나르는 사이버 친구들, 교보문고와 도서전이 이렇게 붐비는데 문학은 왜 해가 갈수록 앓는 소리를 하는가 하는 의문 따위다.
  그런 맥락에서 이인성과 마찬가지로 내가 우선 묻고 싶은 것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문학에 대한 필요 또는 의무감에 가까운 심정으로 웹진과 문예지들의 새로운 권호를 샅샅이 탐방하는 사람일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특정 작가들을 애정하고 새로운 작가들을 환대할 수 있는 호기심 많은 사람일까? 그도 아니면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SNS의 링크를 따라 아무 글에나 도달한 사람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나의 지인? 그런데 당신은 왜 다른 독자가 아니라 그러한 독자가 되었을까. 무엇보다 이들 모두를 ‘독자’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데 당신은 동의할 수 있는가? 과거 이인성은 이 모든 물음을 통해 피그말리온처럼 독자에게 구체적인 신체를 부여하려 하였지만, 이 글에서 나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그들을 한 데 묶고야 마는 독자라는 이름 자체로 나아가보고자 한다.


2. 문학의 장르화, 또는 텍스트 소환술

내가 스스로를 문학 독자라고 생각해온 시간은 십여 년 남짓이지만, 그 사이에도 강산은 분명 변한 것처럼 보인다. (문학 그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 독서 행위라는 문제에 한정하자면 그것은 사회적·문화적 변화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분석하는 것은 이 글의 역할이 아니되, 나는 그 결과가 이희우가 제안한 개념인 ‘매력의 경제’의 전면화라고 생각한다.1)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오늘날 한국문학은, 혹은 더 구체적으로 소위 순문학은, 스스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이런 결론은 직관적인 것이지만 그사이 내가 보아 온 두 가지 변화는 이에 조응하는 것이다: 1) 안으로는 SF 등 장르문학과의 적극적 공존, 2) 밖으로는 낭독회와 작가와의 만남 등 현장(이하 ‘낭독회’로 통칭)의 대두.
  구체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기에 앞서 여기서 말하는 장르와 장르화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내게 장르란 일종의 문법이고 장르는 하나의 척도인데 예컨대 “장르는 문화가 삶을 셈하는 단위다”2). 이 문장에는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으니 엄격한 의미에서 삶은 셈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계가 발명되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이 계량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처럼, 우리는 삶과 예술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드는 다양한 도구들을 발명해왔다.장르(화)라는 것은 그러니까 불가능했던 인식론적 전환을 끌어내는 하나의 구문론적 기예(art)다. 그렇다면 순문학의 장르화란 무슨 말일까? ‘순’문학은 애초에 ‘특정한’ 장르도 아니었다는 것일까? 사정은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 이는 순문학 스스로가 ‘장르들의 장르’인 것처럼 굴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특권을 사용해 자신에 대한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분리’를 유지해왔고, 이는 한때 유효한 전략이자 심지어는 일종의 면죄부가 되어주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그것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족쇄가 되었다. 이희우에 따르면 오늘날 문화 영역 전체에서 위와 같은 ‘칸트식 분리’가 더이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문학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변화를 외면하며 담장을 높이고 호시절이 돌아오길 기다리기, 다른 하나는 늦게나마 ‘매력의 경제’에 뛰어들어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실제로 벌어진 일은 둘 다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후자의 과정을 곧 문학의 장르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예술 또는 문화적 장르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폭발적인 이동성과 편재성을 얻게 된 이래, 예컨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리가 문학 외에도 향유할 수 있는 장르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게임부터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대부분 풍부한 감각적 기호들로 무장해 있고 이는 곧 매력의 경제의 장에서 유통시킬 수 있는 자본으로 기능한다. 가진 것이 흰 종이에 검은 글씨뿐인 문학은 이러한 측면에서 근본적인 불리함을 안고 있었고, 어떻든 자신의 감각적 기호를 추가로 갖추기 위해 분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순문학의 자장 안에서 이를 가장 열심히, 또 잘 수행해낸 것은 다름 아닌 낭독회들이었다. 나는 이것이 낭독회를 주최하는 출판사나 서점들의 어떤 전략이었다고는 믿지 않지만, 적어도 공급과 수요의 양자 모두로부터 요청된 것이라고 믿는다. 낭독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텍스트를 모종의 감각적 대상으로 ‘소환’하는 하나의 리추얼, 곧 ‘매력의 생산활동’이다. 거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첫째로는 물론 텍스트-작가의 현현이지만, 이 글에서 내가 더 주목하고 싶은 둘째는 바로 독자의 현현이다. 책과 작가가 궁금해 찾아왔을지 모르는 독자들이 실상 거기서 경험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감각적 (재)확인이다. 무대 위의 작가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텍스트를 책 밖으로 불러냄으로써 그 (불)영속성을 역설적으로 현시할 때, 작은 의자에 앉아 그것을 목격하는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감각적 주체성을 획득당한다. 나는 낭독회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에 비해서라면 대상이 되는 책이나 텍스트 그 자체는 하나의 구실이라고까지 여겨진다. 문학의 기호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텍스트였던 시절 곧잘 떠올려지던 이미지들, 예컨대 골방에 들어앉아 걸작을 써내는 얼굴 없는 작가의 형상은 이제 장르의 시간(과 그러므로 경제) 바깥의 것이 된다. 이는 나아가 독자 자신에게까지 해당되는 것으로, 그들의 익명성은 이제 하나의 환상으로만 남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문학의 기호의 발생에 기여한다. 오늘날 문학이라는 장르는 이렇듯 텍스트에 그치는 대신 다양한 종류의 ‘현장’에서 작가와 독자들을 통해 자신의 기호를 전개 및 수렴시켜간다.
  개인적으로 창작자와 감상자를 포함하는 개인들의 힘으로 특정 예술 장르의 운명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지난 수십 년간 한국문학이 멸종의 위기와 불안을 겪지 않았던 시기 또한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문학의 노력들은 그 자체로 의미도 성과도 있었던 것이며, 나는 여기에 어떤 말을 더하고 싶은 마음도 능력도 없이 응원할 따름이다. 다만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미지의 독자를 위한 빈자리가 낭독회에 깔린 의자의 수에 그쳐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믿는다. 문학은 ‘정말로’ 독자를 원하는가? 만약 오늘날의 문학이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독자들이 그 기호의 장을 유영하는 중이라면, 우리가 (재)발명할 수 있고 심지어 보다 시급하게 그래야 하는 것은 독자 그 자체라기보다도(독자는, 작가가 그러한 것처럼, 출현하는 것이지 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모델, 즉 독자라는 기호인 것처럼 보인다. 이희우의 말마따나, “기호는 공허한 것이지만 기호를 사유화하는 능력, 즉 매력은 속임수가 아니다.”3)


3. 밀렵을 밀렵하는 밀렵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예수회 사제 미셸 드 세르토는, 저서 『일상의 발명』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이래 학교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 텍스트의 경전화와 독서의 수동성이라는 관념에 반대하며 독자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밀렵(poaching)으로서의 읽기’를 제안한다.

사실 읽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부과된 시스템(도시 혹은 슈퍼마켓의 확립된 질서와 유사한 텍스트의 시스템) 속에서 편력하는 것이다. 최신 연구들은, “모든 독서는 그것의 대상을 수정한다”는 것, (보르헤스가 이미 말했던 대로) “한 가지 문학이 다른 문학과 다른 것은 텍스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문학이 읽히는 방식에 의해서”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로 혹은 도상으로 된 기호들의 시스템은 독자들이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주기를 기다리는 형식들의 저장고라는 것을 보여준다. (…) 독자는 작가의 고유한 자리를 빼앗지도 않고, 작가의 여러 자리 중 단 하나도 빼앗지 않는다. 독자는 텍스트 속에, 이 텍스트들이 ‘의도’했던 것과 다른 것을 창조해낸다.4)

세르토는 ‘밀렵’ 개념을 통해, 어떠한 사회적 권력 구조를 반영하는 작가와 독자의 위계를 타파하면서도 그들 간의 구분을 섣불리 무화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독자 기호를 구축해낸다. 밀렵꾼으로서의 독자들은 “여행자이다. 그는 저자―하나의 고유한 장소를 창설하는 자, 언어의 밭을 일구는 옛 농민의 후계자, 우물을 파고 집을 짓는 건축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독자는 타자의 영토 위를 돌아다니고, 자신이 쓰지 않은 지면을 유목민처럼 가로지르고 밀렵하며, 이집트의 부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 탈취한다.”
  그러나 더이상 ‘경전 제국주의’랄 것이 부재하는 오늘날, 내가 세르토의 도식에 첨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텍스트를 생산하는 작가 또한 ‘창조성’ 따위의 선험적 권위를 적어도 온전히는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전부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밀렵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떤 작가라도 그가 쓰기 위해서는 우선 읽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의미를 물론 포함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문학 또는 문예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언어(와 그 세계)를 밀렵하는 행위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는 자신의 수확물들을 잘 손질해 텍스트, 또는 책이라는 공간에 묻어두고 자리를 뜸으로써 최소한의 비상연성(imperformativity)을 완성한다5). 근본적으로 외재화된 그 형식은 물리적으로든 인식적으로든 언제나 접근가능한 것이며, 독자란 그것을 열고 취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모든 이들을 일컫는다. 심지어 책이라는 사물의 아름다움…… 독자의 입장에서는 범법 조장이 아니라면 미필적 고의라 항변할 법도 하다. 반면 문학의 ‘위기’와 별개로 작가는 정작 자신이 완성한 작업의 행방에 더이상 아무런 권리도 관심도 없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독자에 의해 전유될 텍스트의 운명에 대해 원칙적으로 알 수가 없다. 밀렵꾼으로서의 독자가 작가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부재와 이러한 미지뿐이다. 그는 텍스트라는 건축의 열린 문으로 잠입해, 그 모든 의미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쓰인 것으로서의 텍스트에 대한 한 독자는 작가와 분명한 시차를 지니며 이들은 결코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지만(그 경우 그것은 ‘구술 소통’에 속한다), 그럼에도 독자는 작가와 특정한, 은밀한 방식으로 공모하는 자라는 것이다. 독자가 공모하게 되는 대상이란 그러나/그러므로 작가의 현현이 아니라 그의 부재이다. 텍스트와 관련해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텍스트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의 이러한 관계의 형태로 존재하며, 텍스트는 그러한 은밀함이 기거하는 물질적 기반으로 기능한다. 세르토는 이러한 과정을 ‘동화’(assimilation)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공모의 감각’을 다른 어떤 장르가 아닌 문학을 읽을 때 종종 느끼곤 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독자로서의 자신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세르토는 글쓰기-독서 쌍의 의미를 최대한으로 넓혀 그것이 생산-소비 쌍의 보다 일반적인 형태라고 말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글쓰기-독서에는 그러한 경제논리를 초과해버리는 지점이 있는데, 그 지점에서는 사용과 교환이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이 글의 맥락에서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작가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독자도 멸망할 수 없다.


4. 박물관의 켈트족 유물 앞에서

그들은 사서 읽고, 빌려서 읽고, 주워서 읽고, 훔쳐서 읽고, 더이상 책 아닌 것마저 읽다가, 끝내는 자신이 읽는 것을 책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독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애증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작가라 불리게 되었다. 배수아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2023) 또한 이렇게 읽히는 책으로, 여기에는 글의 서두에 언급한 이인성의 소설만큼이나 ‘강제적’인 고백들이 가득하다. 나는 그가 어느 순간 이후 훌륭한 작가라기보다 독자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가 오가는 한국과 독일의, 서가와 정원의 쓸쓸하고 매혹적인 풍경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모든 텍스트를 자신의 방식으로 ‘밀렵’하면서도 그것을 훼손하지 않을 줄 아는 영혼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가 아끼는 대상은 사물로서의 책과 그것이 담지하는 텍스트의 완결성이 결코 아니다. 그의 독자로서의 은밀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나는 평소처럼 서가 어딘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찾아낸 엽서를 북마크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무심코 살펴본 그 엽서의 수신인이 다름 아닌―베를린 서가의 주인 이름과 함께이긴 하지만―내 이름인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 누군가, 나를,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마도 시인이 분명한 사람이 베를린 인근의 수도원 마을을 방문하고 두 장의 엽서에 이어지는 글을 타이핑했다. 그리고 엽서에 순서대로 I과 II라고 표기한 후 각각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그러나 첫번째 엽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중에 분실되어 버렸고, 두번째 엽서만이 수신자의 우편함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첫번째 엽서에만 남겼으므로 받은 사람은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엽서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이 엽서를 누가 보냈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겠지만, 나는 묻지 않기로 한다. 대신 이 집에 속한 이 아름다운 사물을, 나는 말없이 징수한다.6)

​이 사연은 그 자체로 완결된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나는 정말이지 조금 뒤에 이런 내용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

(...) 관절에 통증이 있는 WG는 어느 순간부터 손으로 글을 쓸 수 없어 구식 타이프라이터로 엽서를 쓰며, 종종 두세 장의 엽서를 이어서 쓰고, I, II, III 등으로 번호를 붙여서 보낸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우리에게도 엽서를 보냈다고. 우리는 WG와 헤어진 다음날 론강의 계곡을 걸으며 WG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번개 구름보다 더 빠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천둥소리와 섬광에 갇혔다. “우리는 박물관의 켈트족 유물 앞에서 언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WG가 남긴 작별의 말이었다.7)

여기서 나는 문득 내 읽기를 멈추어야만 했다. 왜? 작가는 첫번째 장면에서 본 엽서의 송신인에 대한 의문을 파고드는 대신 그것을 “말없이 징수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삼십여 페이지 뒤에서 그는 이 송신인의 정체 또는 강력한 용의자를 알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앞서 마주쳤던 엽서를 떠올리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전혀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물론 이 두 이야기 속의 엽서들은 전혀 다른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글이나 기억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는 것일 수 있다. 심지어 그렇더라도 이 두 엽서는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고 이것은 독자로서는 기쁘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용보다 뒤에 도착한 송신인이라니, 나라면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배수아는 충분한 단서를 모으고도 결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나는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는 내내 그가 어떤 식으로든 두 엽서가 동일한 것임을 말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끝까지 엽서의 비밀을 상연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엽서는 놀랍게도 서로 다른 두 장의 엽서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 작가(독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비-연결되고 있다. 나는 그가 이 두 엽서의 관계나 정체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한다기보다는 그것을 무한히 지연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발생한 시간이 한 장의 엽서 내부에 놓여 그것을 두 장으로, 나아가 그 이상의 복수(複數)로 증식시키고 있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해? 인용한 장면의 다른 문장들로부터 유추하건대 그것은 엽서를 엽서에게, WG를 WG에게 돌려주기 위함이다. 나는 이 윤리, 또는 차라리 폭력이 분명 작가가 아닌 독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엽서에 대해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묻지 않기를 택한 순간, 그의 미지는 ‘아직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종적인 것이 된다. 문학이라는 형식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 틈은 곧 (작가 자신을 포함하는) 독자들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배수아는 그렇게 독자인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며, 또한 거기서 멈추는 대신, WG의 이야기를 모르는 척 들려줌으로써 독자의 독자인 우리에게까지 은밀히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묻고 있다. 당신도 여기에 들어올 거냐고.
  오늘날의 문학 독자란 결국 이인성이 ‘부르는’ 독자와 배수아가 ‘부르지 않는’ 독자, 이 두 불가능한 형상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 글에서 당신의 눈을 감기거나 이런저런 물음의 답을 듣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저자와 만나지 않는 것으로(만) 끝내 만나게 되어있다. 이 글에서 살펴본 동시대 문학의 현상들은 그러나 이에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이 나아가는 이중(double)일 것이다. 책 주변을 언제나 감싸는 “밤의 모호함”(뒤라스) 안에서 밀렵으로서의 읽기를 행하는 독자들에게는 비관이―그리고 물론 낙관도—들어설 자리가 많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흔적으로 남긴 궤적과 결절은 반드시 후대의 독자들에게 재발견되게 되어있다. 당신이 어떤 독자이고 이 글을 어떻게 읽게 되었든, 우리가 모두 같은 열린 문을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오석화

2018년 《비유》에 시 「P.S. Sorry So Sloppy」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도 쓰고 공부도 하지만 블로거인 듯하다. 요새는 베르나르 스티글러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 ‘무개화차(https://blog.naver.com/ooopak11)’를 운행 중.

쓰는 이가 결국 혼자인 것처럼 읽는 이도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은 때로 얼마든지 잊힐 수 있다.

2024/01/03
65호

1
이희우, 「매력의 경제학」, 《문장웹진》 2022년 2월호, 바로가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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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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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셸 드 세르토, 신지은 역, 『일상의 발명』, 문학동네, 2023, 302-303쪽.
5
‘imperformative’는 독립 큐레이터이자 작가 스티븐 라이트가 밀렵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로, ‘비수행적’으로도 번역될 수 있으나 문맥을 고려해 ‘비상연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밀렵의 특징 중 하나는 밀렵이 정의상 엄격하게 비상연적(imperformative)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작업에 서명하거나, 자신의 밀렵을 상연하는(performs) 밀렵꾼은, 밀렵꾼이 아니거나 적어도 오랫동안 밀렵꾼일 수 없다. 밀렵은 본질적으로 사건의 지평선에서 물러나 일상(the usual)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사용자성의 어휘집을 향하여』의 번역은 격주로, 『관객하는 ㅁ』, 지하출판소, 2020을 참고.
6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문학동네, 2023, 3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