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미술관 밖으로 나갈 때 가장 즐거워한다. 가령 조각공원이나 미로정원으로 이어지는 회랑에서 아이의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실내에서 실외로, 다가가지 말 것에서 만져도 되는 것들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로소 잔소리로부터, 자잘한 통제의 낱말들로부터 벗어난다. 아무리 미술관에서 마련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즐겼다 하더라도, 아이는 광장으로 달려나가며 작고 허술한 제 공작물과 서툰 스케치를 유모차 뒤에 던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사실 아이보다 더 즐거운 이는 어쩌면, 돌봄의 역을 맡고 있는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더는 작품이라 명명된 해석의 대상 앞에 아이를 두고 긴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정작 소외를 겪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현대미술이다. 그것은 아이(와 그 보호자)에게는 그저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현대미술은 아이들로부터 배격당한다. ‘이게 뭐야?’ 얼마 전 아이가 바스키아의 스케치와 워홀의 실크 스크린을 보며 손가락질을 했을 때, 도슨트의 친절한 설명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렇게 현대미술은 아이라는 희소한 관객을 제 몫으로 갖지 못하고 위계적으로 재활용되는 집단 언어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이런 걸 어른들이 고상한 복장과 표정으로 한없이 들여다보는 모습이 아이에게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풍경일 텐데, 그 이상함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미술의 실재는 다만 자기방어적인 것이다.
  어린이 미술관이라는 전용 공간을 개발하고, 아이들을 현대미술로부터 분리한 데에는 이 이상한 풍경의 민망함을 감춰야 할 필요가 그 배경으로 자리한다. 현대미술은 아이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미술은 아이들이 그것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즉각적인 반응물로 볼 공산이 크다고 성급하게 전제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전제는 현대미술이 아이들에게 갖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은 스스로를 해석의 대상으로, 의미가 부여될 가능태로 제시하지 못할 때 가장 위태로워지기에, 아이들을 위협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 위협은 현대미술이 제 미적인 가능성을 통렬하게 시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구태여 의미를 부여받지 않아도 개인화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때, 미술은 제 견고한 쓸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이 관객은 높은 확률로 현대미술이 스스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들의 눈길을 끈다면, 그리고 심지어 거기서 아이가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현대미술은 거의 탈맥락적으로 스스로를 보편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특질을 즉각적으로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현대미술은 아주 높은 확률로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제도화된 현대미술은 이 어린이라는 드문 기회를 수용하기보다는 (위험한 존재로서) 이들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제도를 고안하는 데에 집중해왔다. 이는 차별이다.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미술관

미국에서 19세기 말 어린이 박물관과 미술관 혹은 미술관 내부의 ‘어린이방’(Children’s room)이 만들어진 이래로1), 미술관은 학교 이외의 교육 장소로 여겨져 왔다. 한국의 경우,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층 원형 전시실에 처음으로 어린이 미술관이 생겼고, 201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하나의 전시장이 어린이 미술관 공간으로 전용됐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린이 미술관은, 어린이들의 실기 창작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출발해 점차 교육과 전시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이처럼 어린이의 제도적 미술 경험은, 어린이 미술관이라는 별도의 기관에서 수행되어왔다. 이러한 공간적 분리는 중요한 인식의 틀을 전제한다. 어린이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인식 혹은 선입견이 곧 어린이와 미술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분리주의적 접근은, 박물관/미술관 전시의 역사적 맥락과도 관련이 있다. 근대적 박물관의 탄생 자체가 제국주의 산물로서 소장품에 대해 위계적 질서와 가치체계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었고, 이때 미술관은 근대적 교육 체계에서 공교육 기회의 확대를 위한 계몽주의적 역할을 투사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전시’의 역사는 박물관/미술관과 동물원으로 환원되는 타문화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 욕망과 맞물린다. 즉, 문명/비문명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규범적 질서 속에서 대상과 주체가 구분된 전시 방식이 그 관람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말하자면, 화이트 큐브로 표상되는 근대 이후의 미술관 체계는 미술관 전시에서 관람자의 역할을 ‘보는 것’으로 설정하였고, 이 고정된 역할 설정은 관조적인 관람의 방식을 일반화해왔다.
  그렇게 근대적 시민 주체—평균적인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시 관람의 기본적인 전제는, 작품이 진열장에 놓이는 방식에서부터 어린이 관객을 소외시킨다. 제국주의적 위계질서에 따라 구성된 전시의 역사에서, 규범적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한 ‘미숙한 존재’로서의 어린이에게 미술에 대한 접근성은 애초부터 제한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현재 주요 국공립 미술관에서 어린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별도로 만드는 것은, 실상 어린이 미술관이란 분리주의적 정책을 기관화한 것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오히려 제도적 편의를 위해 성인과 아이를 대칭적으로 구분하고, 어린이들의 예술 경험을 선제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어린이 전시를 둘러싼 고정관념

어린이와 미술관의 위계적 관계는 어린이의 미술 경험을 오브제에 대한 해석과 감상보다는 ‘교육적’ 체험의 과정으로 고정되게끔 했다. 오늘날 미술관들은 그 소장품을 활용하여 다양한 교육 활동을 기획하고 그 결과물을 전시함으로써, 현대미술을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위치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 기조 아래서, 어린이들에게 현대미술은 진열장 안에 있는 오브제라기보다는 ‘직접 만지고 놀이할 수 있는 체험식 교재’여야 한다는 전제가 점차 공고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술 작업을 감상의 대상에서 체험의 재료로 전환시키려는 움직임은, 오늘날 포스트 뮤지엄 담론에서 그 정당성을 얻는다. 실로 전 세계 미술관의 전반적 기조는 관객의 능동성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리고 이 큰 흐름 속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그 방향성을 명시적으로 표면화하기에 매우 알맞다. 일방적 지식의 전달이 아닌 ‘상호성’을 전제로 하는 배움이라는 수사가 미술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미술관에서 작품과 스스로 관계를 맺기보다는 프로그램 기획에 따라 사전에 조율된 상호작용을 수행한다. 미술관과 어린이 관객 간의 교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어린이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공식화하고, 내부적으로는 어린이 프로그램의 성과지표를 수량화한다. 어린이들은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고 미술관은 무엇을 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아이들에게 미술관 방문은, 능숙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검증된 일정을 수행하는 패키지 관광과 유사한 것이 된다. 형편이 된다면 한 번쯤 구매해볼 만한 상품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어린이 미술관과 그 프로그램은, 지리적으로 교차하는 사회 계급의 문제를 고스란히 옮겨온다. 여느 인프라 시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 미술관은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접근성은 개인이 보유한 사회-경제-문화 자본의 수준에 따라 차별화된다. 더구나 일과를 스스로 조직하고 이동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 한계를 갖는 어린이들에게 이와 같은 계급적인 차별은 성인들 사이에서보다 더욱 심화될 공산이 크다. (지역적으로 편중되고 계급적으로 위계화된) 국공립 미술관에 대한 접근은, 성인 관객들보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차별화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이다. 특히나 어린이들의 현대미술 경험이 전술한 바와 같이 프로그램 체험으로 자리잡은 점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프로그램형 미술체험이 미술관에 갈 수 있는 어린이들과 갈 수 없는 어린이들 간의 차이를 제도화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 체험의 마중물

미술관 프로그램은 학습적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하는 이면에는 물론, 미술관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민주적인 맥락이 자리한다. 그 프로그램이 수도권의 중산층에게 집중적으로 제공되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특정 자본이 미술 기관을 독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린이 미술체험이 철저히 폐쇄된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어린이 미술 프로그램의 개방성은 분명 미술관이 민주적인 시민 플랫폼으로 기능하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측면이 크다.
  더불어 이는 관람객 중심의 동시대 미술관의 지향성과도 맞물린다. 영국 테이트 모던의 테이트 익스체인지(Tate Exchange)나 미국의 모마 아트랩(MoMA Art Lab) 등 해외 미술관에서 전폭적으로 추진해온 ‘과정으로서의 예술’ 프로그램은, 관객이 제공하는 상호성을 해당 기관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데 집중한다. 가령 테이트 익스체인지의 경우, “모두가 협업하고 아이디어를 실험하며 예술을 통해 삶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고 공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2) 이처럼 참여형 미술 프로그램은 민주적 플랫폼의 형식 안에서 미술관의 미래를 모색하는 운영 전략의 시험대로 활용된다. 여기서 다시 어린이와 현대미술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자면, 이 파일럿 테스트에 있어서 어린이 프로그램은 높은 효용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서의 (사전에 조율된) 상호성이 갖는 문제는 확연하다. 관객 활동의 범위가 제한된 탓에 미술관이 어린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 역시 마찬가지로 제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황지영 국립현대미술관 교육문화과 학예연구사는 “최소한의 촉진”만으로 관람객들이 스스로 더 많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한다.3) 즉, 동시대 미술 기관과 현대미술이 어린이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혹은 스스로의 미래를 가늠하고자 한다면, 수행과 평가로 귀결되는 학습 기반의 교육형 프로그램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어린이의 탁월성

지금까지 근현대 미술 기관이 어린이를 현대미술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동시에 그 경험의 방식을 교육형 프로그램으로 제도화해왔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이와 같은 ‘어린이 특정적’ 미술에 내포된 계급적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그것이 가진 민주적 플랫폼으로서의 잠재적 역량을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 한계와 가능성, 효과와 부작용은 어쩌면 하나의 잘못된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린이는 제도미술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며 그 상호성의 방식 또한 제한할 수 있는 수동적인 객체라는 생각이다. 사실 어린이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그 분리로부터 조금도 소외를 감각하지 않는다. 현대미술 제도가 아이들의 미술체험을 어린이 미술관이라는 전용공간으로 분리하고, 교육형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로부터 사전에 조율된 상호작용을 유도할 때, 정작 미술의 영토에서 분리되고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는 대상은 현대미술 스스로다. 다시 말해, 이때 ‘아이들’은 현대미술을 자신들로부터 분리하고, 미술관 프로그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적당히 얻되 그 교환관계에 충실히 임하지 않는다. 언제나 손해를 보는 것은 현대미술 제도 자체다.
  어린이의 미디어 경험을 연구해온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소니아 리빙스톤(Sonia Livingstone) 교수는 오래전 모든 미디어 학자는 외계인이 텔레비전을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상상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여타 사회적 요인들과 끊임없이 공변하는 탓에— 미디어 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효과를 분별하기 어려운 사회과학의 실재에 대한 비유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e familiar)라는 학자들의 어디까지나 가망 없는 바람을 함축한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를 낯설게 보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더군다나 그 어려움의 정도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이국의 것을 소개하기만 해도 제법 낯선 감각을 생산할 수 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동시대인들에게 낯선 것이란 매우 드물고, 새로운 감각이란 그보다 더 희소한 것이 되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란 말은 이제 그저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 이 낯섦의 고갈은 동시대 미술의 위기를 요약하며, 미술 제도가 그토록 관객 참여형 프로그램에 매진하는 배경을 제공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는 세계에서 창작자는 제 고유성을 주장하는 데에 전력을 다해야 하겠지만, 이는 결코 홀로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때, 어린이가 가진 탁월성은 제도와 일반 성인 관객 모두를 압도한다. 어린이는 진부성과 전형성으로 촘촘하게 조직된 세계에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주체들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현대미술 창작자들과 제도의 수행자들이 거의 전적으로 어린이들이 개별 작업들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지에 주목하고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제와의 조우에서 갈등을 빚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이제 그리 많지 않다. 동시대 미술은 그러한 이들에게 크게 의존하며 매 순간을 맞이해왔고, 이 존재 양식은 달라지기 어렵다. 따라서 세계에 온 시간이 짧은 덕에 이 갈등을 자연화할 수 있는 어린이들은 그만큼 현대미술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지 제도적 환대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관객 범위의 확대로 합리화될 공산이 크다. 나는 현대미술의 생산과 향유의 전 과정에 어린이들이 주도적인 결정권을 가지게 될 때, 우리가 다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되리라 믿는다.

조은비

조은비(www.addingpages.com)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면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출발한 고민을 토대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조건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미술의 언어로 드러내는 데에 관심을 가져왔다. ‘너무 늦지 않은’(서울메트로미술관, 2023), ‘우연을 기대’(d/p, 2022), ‘모빌’(두산갤러리 서울, 2017), ‘복행술’(케이크갤러리, 2016)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2024/05/01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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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진, 「문화역량 지표체계를 기반으로 한 어린이미술관 전시프로그램 분석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학과 미술교육전공, 박사학위논문, 2019, 21쪽.  
2
“A space to collaborate, test ideas and discover new perspectives on life, through art.”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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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참여한 2021년 아르코 공공예술사업 연구지원형 ‘돌보는 시간: 미술관과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관계 맺기 연구’(윤주희, 이슬비, 조은비, 2021) 연구자료집에서 참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