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문화재단씨앗1)에서 전국 도서관에 조성·확산하고 있는 어린이작업실 모야(MOYA)는 7~13세 어린이가 일상에서 떠올린 호기심과 영감을 표현할 수 있는 도서관 속 열린 작업실입니다. 어린이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모야는 2020년 여름, 제천기적의도서관을 시작으로 매년 꾸준히 공간 조성을 해오며 누적 서른 개 도서관에 확산되었습니다. 현재는 전국의 여섯 개 공공도서관, 열아홉 개의 작은도서관, 그리고 재단에서 자체적으로 조성한 도서관 두 곳에서 모야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모야에 찾아오는 어린이들은 대부분 혼자, 혹은 가족, 친구와 함께 방문한다. 사진에는 각자가 원하는 작업 장소를 선택해 독립적으로 혹은 함께 작업에 몰두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도서문화재단씨앗에서 조성·운영하는 제3의 시간 도서관 속 모야 ⓒ 도서문화재단씨앗

모야는 도서관 운영시간 내에 함께 오픈하며, 이용자는 각 도서관의 작업실 규모에 따라 사전 예약이나 현장 방문을 통해 모야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지난 오 년간 모야는 코로나19 시기를 지나오면서도 평균 재방문율이 80%를 넘을 정도로 반복 방문 양상이 두드러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전국의 서로 다른 규모의 작업실에서 누적 구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총 십만 시간 이상의 경험을 꾸준히 쌓아가고 있으며, 어느덧 전국 도서관에서 어린이의 작업을 지켜보며 도움을 제공하는 모야 운영자를 비롯한 ‘안전한 어른’이 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모야에서는 작업에 몰두하는 어린이를 ‘작은손’이라 부르고 이들을 지원하는 작업실 운영자를 ‘오른손’으로 부르며, 어린이들의 보호자는 한발 물러나 지켜봐주는 역할로서 ‘뒷짐손’으로 불립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 모야의 가장 큰 특징이자 원칙을 꼽으라면, 가르쳐주는 선생님의 존재나 정해진 순서의 프로그램 없이 어린이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하고 결정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야는 ‘작은손이 모험을 시작하는 곳’이라 불립니다.
  모야는 ‘어린이의 경험을 중심에 둔 환경’으로 작업실 공간을 조성해나가고 있습니다. 작업실에서 어린이들은 다양한 재료와 도구, 친구들이 남긴 작품과 책을 넘나들며 탐색하는 경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경험(시도에는 늘 실패가 따르지요), 그리고 나의 영감이나 생각, 이야기를 표현하는 경험을 해나갑니다. 이때, 어린이 이용자가 ‘스스로’ 하는 경험을 위해 도서관과 작업실의 연결성 안에서 어린이 작업자가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100종이 훌쩍 넘는 다양한 재료와 도구에 이용자가 편리하게 접근하고 마음껏 창작해볼 수 있도록 공간, 동선, 가구, 콘텐츠 등을 세심하게 조율하며 조성 이후에도 어린이의 경험 양상을 지속해서 관찰하고 기록하여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고 개선해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작업실을 지키며 어린이를 환대하고 작업을 지켜보는 어른인 ‘운영자’가 중요합니다. 운영자가 어린이와 어린이의 작업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지 않도록, 때로는 한발 떨어져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때로는 함께 고민하는 작업 동료가 되도록 사전에 운영자 교육을 통해 작업실에서의 마인드셋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시작하고 끝맺는 과정을 경험하고 자신의 속도대로 가볼 수 있도록 신뢰해주는 어른의 존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 도서관 안의 작업실인가요?’라는 말은 프로젝트를 확산해가는 과정에서 참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기존의 도서관이 어떠한 곳이었는지와 앞으로 어떠한 곳이었으면 하는지에 대한 바람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도서관은 전통적으로 이용자들이 정보와 지식을 찾고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세계를 만날 수 있는 ‘탐색’의 기능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더이상 책으로만 지식과 정보를 얻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공공도서관은 복합문화공간이자 교육 및 여가의 공간으로 그 기능이 점차 확대되어왔습니다. 단순히 책을 열람하고 대출·반납하는 곳, 개인 공부나 숙제를 하는 조용한 학습의 공간을 넘어 다양하고 활동적인 공간으로 변모하며 도서관의 이미지는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추세죠.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여전히 프로그램실 안에서의 일시적 경험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 탓에, 이용자가 시작하고 끝맺는 ‘자유선택’의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공간적 외형이 변화했고 한쪽에서 늘 행사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지만, 도서관의 핵심적인 서비스와 콘텐츠를 마주하는 이용자의 본질적 경험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도서관 속 작업실이란, 도서관에서 ‘탐색’의 경험이 좀 더 확장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물론 책과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가 상상과 지식의 세계를 만나는 경험은 충분히 동적인 경험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와 정보의 바다를 탐험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손에 닿지 않는 책 안의 세계를 실제 세계에 구현해본다거나, 일상에서 떠올린 영감이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표현되는 창조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얼마 전, 저는 한 도서관에서 어린이 이용자를 관찰하다 종이접기 책을 오랜 시간 뚫어져라 ‘읽는’ 어린이를 보았습니다. 그 어린이 곁에 실제 다양한 방식으로 접어볼 수 있는 색종이가 있다면 어땠을까요? 『내일은 실험왕』 만화에서 주인공이 만드는 잠망경을 실제로 만들어볼 수 있는 적절한 재료와 도구가 독자 옆에 놓여있다면, 혹은 우리 가족의 여행 이야기나 동생과 싸운 이야기 등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엮어 나만의 책을 만들어본다면 어떨까요. 어린이는 ‘읽기’라는 방식 외에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속 작업실은 전통적인 책을 통한 탐색 너머로 구체적인 시도와 표현의 기회를 제공하고, 책 이외의 다른 재료와 사물을 감각하며 새로운 탐색과 시도, 표현의 기회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공간입니다.
  어린이의 ‘경험’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이용자가 자신의 능동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동기에 의해 자유롭게 탐색하고 선택이 가능한 것,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조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의미와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곳을 지향함을 말합니다. 여러 공공공간 중에서도 특히나 일상에서의 접근성이 높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이용하는 공간인 도서관이 어린이의 경험 중심의 플랫폼이 된다면, 더 많은 어린이가 더 자주 일상의 공간에서 그 기회를 만나고 넓혀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모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입니다.

사진 속 아지트는 오랜 시간 여러 어린이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고 지금도 계속 수정, 개선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어린이들은 아지트에 들어가 눕기도,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도,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기도, 책을 읽기도 한다. 작업실에서는 어린이가 독서의 공간을 스스로 조성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풍경이다.
친구들이 만든 아지트 안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는 어린이 ⓒ 도서문화재단씨앗



도서관 속 작업실의 풍경: 열 가지 작업자 유형

그렇다면 대체 ‘작업’이란 무엇일까요? 작업실에서 어린이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까요? 성인의 눈에 때때로 어린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이어붙이기나 조합, 꾸미기 정도의 활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업은 어린이가 사물을 탐구하고 손으로 생각을 구현하면서 사고의 힘을 기르며, 자신을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새로운 시도와 실패 속에서 자신감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국의 모야를 돌아보면 다채로운 색깔과 유형의 작업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곳곳의 모야에서 오늘도 각자의 언어와 방법과 관점으로 나름의 작업을 진행해가고 있지요. 무언가를 창조해내려 골몰하는 과정에는 열 가지 모습만이 있을 수 없지만, 전국 모야를 관찰하며 발견한 어린이들의 작업 풍경을 열 가지 유형2)으로 소개해봅니다.
  첫번째 유형은 ‘연구자’로서의 작업자입니다. 연구자는 어떤 주제의 전문가입니다. 하나의 주제나 재료에 깊이 골몰하여 하나에서 열 가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자로, 같은 주제를 지치지 않고 여러 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탐구합니다. 이를테면 자동차 연구자는 매번 자동차를 만들지만, 한 번은 평면으로, 또 한 번은 입체로, 또 다른 날은 이전과 다른 재료를 통해 모양이나 접근을 바꾸어 만들어보는 것이죠. 대구의 한 작은도서관의 파충류 연구자는 책을 통해 파충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책에 실린 사진을 관찰해서 그림을 그리고, 입체로 파충류 모형을 만들기도 합니다. 파충류에 대한 사랑은 반복, 확장적인 작업으로 이어지고 파충류를 넘어 포유류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연구자 유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자신의 관심사를 탐구하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집중하며 자신의 이전 작업에 다시 방문해 이를 재해석, 재창조하기도 합니다.
  두번째는 ‘수집가’입니다. 수집가 유형은 예리하고 밝은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재료를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 모야에 새로운 재료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사용해보는 유형이기도 하죠. 이들은 수집 자체를 작업으로 삼기도 하며, 수집한 재료를 조합해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수집가 유형의 한 작업자는 자신이 모은 재료들을 분류해 각각을 보관할 상자를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작업자는 모야의 재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일상에서 그와 어울릴 만한 재료들을 가져와 조합하며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재료의 수집은 자신만의 분류체계를 갖추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수집가 중에는 편집력이 돋보이는 섬세한 작업자들이 많습니다.
  세번째로 작업실에서 정말 자주 볼 수 있는 ‘실험가’를 소개합니다. 실험가는 스스럼없이 시도하며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합니다.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며 이를 검증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난관과 시행착오를 견뎌냅니다. 그 과정에서 경로를 탐색하고, 때로 난관을 만나 실패를 경험하며 문제를 해결해가지요. 이 유형의 가장 큰 특징은, 실패를 작업의 한 과정으로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발전해나간다는 것입니다. 허무맹랑한 가설이라도 실험가들이 계속 시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성인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작업실에서는 남의 걸 따라 해보는 ‘모방가’의 활약 역시 대단합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따라했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은 모습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사실 모방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남의 것을 관찰하고 흡수하며 자신의 관점과 해석, 기술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만들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따라해볼 수 있도록,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갈 수 있도록 하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에 놓인 책과 모야의 어린이들이 만들고 간 작업물은 모두 똑같이 훌륭한 참고와 모방의 원천이 되어줍니다.
  이어서, ‘탐험가’들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서 새로움을 찾아내는 발견자들입니다. 탐험가의 관심은 건물 바깥의 자연과 환경을 향합니다. 이 유형이 나타나려면 주변 환경이 갖춰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의 초록색 풀잎들, 생김새가 다양한 나무들, 귀를 간질이는 물소리, 하늘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여지 등이 있다면 좋겠지요. 근처에 작은 개울과 논밭이 있는 서천의 한 작은도서관에서 특히 탐험가가 많이 보이는데, 이들은 올챙이 뜰채와 종이 어항 등 자연 관찰에 필요한 도구를 직접 만들고 바깥으로 나가 자연 속에서 자신이 만든 도구를 탐험에 활용하고 보완점을 발견해 수정해나갑니다.
  ‘스토리텔러’ 또한 작업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작업자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멋진 이야기를 꾸며내고, 또 그것을 다양한 재료와 도구, 장치를 활용해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는 유능함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이들의 세계관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모야에서 시를 쓰고, 일상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들고, 스스로 캐릭터와 배경을 설정해 기상천외한 판타지 모험물을 뚝딱 지어내는 이들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주변의 피드백을 간절히 바라기도 합니다.

모야의 전시대는 어린이들의 작업이 의미 있게 전시되고, 다른 사람과의 생각의 교류가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곳이다. 특히 책을 만든 어린이들은 자신이 만든 출판사의 이름을 홍보하거나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이 감상평을 남기는 장치를 만들어두기도 하며, 여기서 어린이들이 재미있는 필담을 주고받는 장면을 관찰할 수 있다.
다른 친구들이 만든 책을 읽어보는 독자들 ⓒ 도서문화재단씨앗

‘기획자’는 작업실의 동료들이 저마다의 역할로 참여할 수 있는 판을 만듭니다. 함께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고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며 이벤트를 도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작업이란 작은 사물 하나를 만드는 것 이상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획자들은 자신만의 출판사를 만들어 시리즈물을 계속 기획해내고 마케팅 전략을 짜내기도, 친구와 작은 스무디 가게를 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참여와 투표를 독려하여 새로운 기획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장인’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정교한 작업을 하는 숙련된 기술자 혹은 도구 제작자로서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이들은 자기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으며,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자세하고 꼼꼼히 심혈을 기울여 도구를 제작합니다. 주제를 구현할 때 명확한 기준점을 가지고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입니다.
  작업실의 풍경을 바꾸는 ‘설계자’ 유형은 집, 아지트, 교량, 빌딩, 놀이기구 등 주제에 맞는 형태와 구조를 설계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재료를 선별하며 시도와 난관을 감수하는 건축가들입니다. 이들의 작업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조합과 연결, 지지 구조 등에 대한 시도가 드러납니다. 설계자들의 작업은 점차 고난도의 작업으로 확장되고 이 과정에서 때론 자신의 의도대로 작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만, 이 어려움이 오히려 설계자들이 작업에 몰두하게 만드는 중요한 지점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술가’ 유형의 작업자는 때때로 자신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설명하는 데에 갑갑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냥’ 만든 거라는 말과 달리, 이들의 작업에서는 독특한 재료 사용, 색의 조화, 형태의 균형 등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재료의 질감과 색감, 형태의 리듬감과 균형감과 더불어 때론 정의하기 힘든 미적 요소를 지닌 작업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해내곤 하지요.

모야를 설명할 때 종종 소개하는 시에서 로리스 말라구찌는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언어가 백 가지는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천 가지, 만 가지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는
백 가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린이는 가지고 있죠.
백 가지의 언어
백 가지의 손
백 가지의 생각
백 가지의 생각하는 방법
놀이하는 방법, 말하는 방법을.

―로리스 말라구찌, 「천만에요, 백 가지가 있어요」 부분


무언가를 읽은 뒤의 산출물이 독후감 글짓기로만 나올 리 만무한, 어린이들이 다루는 언어와 도구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린이가 세상을 읽고 표현할 다양한 언어를 시도해보고 누릴 수 있는 일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일의 도서관이 해나갈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모야의 실험을 지속하려 합니다.


작업실 문화는 어떻게 읽는 풍경을 바꾸는가

앞서 작업실의 풍경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도서관 속의 어린이 경험이 ‘이렇게까지’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러한 작업실의 환경과 문화가 어린이들의 책 읽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작업실의 의미는 어린이를 독립적이고 생산적인 인간,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인간으로 위치 짓게 한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에 활동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작업실에서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피고 관찰하며 영감을 얻기 위해 바삐 움직입니다. 다른 친구에게 “그 재료 어디서 났느냐, 그거 어떻게 만드냐”고 묻기도 하고, “제가 만든 것 어떤가요?”하고 피드백을 듣고자 대화를 스스럼없이 시도합니다. 때로는 처음 만난 어린이들끼리 서로에게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만든 작업물을 가지고 함께 놀며 게임을 하거나 시합을 벌이기도 하고, 함께 큰 프로젝트를 도모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무척 고요하게 자신만의 생각에 잠기거나 무언가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폭발적인 집중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용자가 이렇게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몰입하고 연결되는 작업실의 환경은 독서의 풍경에 영향을 미칩니다.
  작업실이 있는 도서관 실험을 위해 만들어진 대학로 제3의 시간 도서관의 모야3)에서는 작업자의 정체성을 지닌 독자를 위한 책을 수서하고, 작업실의 독자가 책과 만나는 통로를 다양하게 설계하며, 사려깊게 고른 책이 독자와 언제, 어떻게 만나는지 관찰하고 분석하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작업물을 분석하여 그곳에서 서가의 주제를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업자 어린이들이 서가에 더 편히 접근하도록 하고 작업 과정에서 관심과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실이 있는 도서관 실험에서 발견한 점은 작업실에서의 경험 반경이 넓어지면서 어린이들이 책과 만나는 통로와 접점이 다양해진다는 것입니다.
  작업 전 공간 적응을 하거나 몸풀기를 할 때 어린이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책을 올 때마다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가볍고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책을 집어 들어 ‘작업실 모드’에 시동을 걸기도 합니다. 혹은 자세히 읽지 않더라도 훑어보면서 새로운 책을 빠르게 탐색하기도 하죠. 작업 중에 틈틈이 휴식과 환기의 시간을 가질 때면 어딘가에 기대거나 편안히 누웠을 때 눈높이에서 쉽게 보이는 책을 집어들기도 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손으로 구현해내는 녹록지 않은 작업 과정에 잠시 이완의 시간을 주는 것이죠. “책을 읽으면 다음에 뭘 만들지 생각이 잘 나요”라고 말해준 이용자의 말에 힌트가 있듯, 잠깐의 환기나 휴식은 다음 작업을 이어나가는 데에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작업에 참고하기 위한 책을 탐색하고 소개받을 때는 책의 특정 장면에 나온 사물이나 기구를 따라 그리거나 구현해보고자 자세히 뜯어보기도 하고, 책 속의 이미지를 어떤 재료로 만들면 좋을지 고민하며 실제 사물로 변환해보는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혹은 다양한 교통수단이나 무기 등 백과에 등장하는 선명한 사진들을 보며 어떤 모델을 만들지 구상하기도 합니다. 한편, 작업을 마치고 오롯이 독서를 하기 위해 서가로 진입하는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책에 대한 평소의 호감을 바탕에 둔 어린이들이기에 여러 권의 책을 이어서 몰입해 읽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친구와 놀이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에 접근하는 경우는 형태와 물성이 독특하고 놀이의 성질을 지닌 책과 만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들은 친구와 긴 책, 넓은 책을 함께 펼쳐보기도 하고 팝업북을 작동시켜보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처럼 작업실 안에서 읽는 경험은 작업 과정의 흐름을 따라 다양한 공간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두 어린이가 모야의 서가에서 병풍처럼 길게 펼쳐지는 형식의 그림책 『물이 되는 꿈』(글: 루시드 폴, 그림: 이수지)에 둘러싸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성이나 만듦새가 독특한 책은 어린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때로 경이감을 주기도, 놀이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친구와 책을 가지고 놀이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 ⓒ 도서문화재단씨앗

한편, 작업의 경계 안에서 책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스스로 글을 짓고 책을 만들거나, 다른 친구가 만든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한 소감과 의견을 남긴다거나, 모야 서가에 있는 책을 읽고 다른 친구에게 그 책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와 장면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스스로 주제를 정해 자신만의 새로운 서가 큐레이션을 선보이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장면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현재까지 발견된 ‘작업실이 있는 도서관’의 독자 유형은 감상자(Viewer), 탐험가(Explorer), 독서가(Reader), 작업자(Maker), 플레이어(Player), 큐레이터(Curator) 등 기존 도서관 풍경의 독자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앞으로 다양한 페르소나를 지닌 독자가 더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게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만들고, 대화하고, 노는 폭넓은 활동 반경 안에서 책과 만나는 다양한 경로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면 어쩌면 정숙한 분위기에서 책 읽는 게 싫어서 도서관에 오지 않는 잠재적 독자를 견인하는 힘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가 더 많은 공간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상상을 실현해보는 기회가 일상에서 주어지기를, 그 안에서 사물과 책과 이야기, 만남과 대화를 넘나들며 자신의 모험을 계속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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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은

도서문화재단씨앗 공간사업실 PM으로 내일의 어린이실, 어린이작업실 모야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일상에서 모험과 성장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며 어린이의 경험을 위한 도서관 속 새로운 공간, 콘텐츠, 운영 모델을 확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24/05/01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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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사회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확장하며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도서관이 그러한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는 공공의 인프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도서관의 새로운 공간, 콘텐츠, 운영의 상을 제안하고 확산하는 일을 하는 비영리민간재단입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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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볼 수 있는 어린이들의 다양한 경험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열 가지 이상으로 더 많은 장면을 수집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했습니다. 한 어린이가 하나의 유형에 국한되지 않으며, 또 고정되지도 않습니다. 사진 자료와 함께 실제 사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궁금하시다면 ‘어린이작업실 모야’에서 진행한 컨퍼런스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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