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포럼’

나는 2023년 8월 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고 문화매개실천연구소가 주관한 ‘위험포럼’에 참여했다. ‘위험포럼’은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여러 창작센터의 작가들이 장애예술센터를 중심으로 공동창작을 시도하는 워크숍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하기 위해 다섯 개의 모둠이 구성되었고, 내가 속한 모둠의 구성원은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의 박유석 작가,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안은선 작가, 서울무용센터의 하지혜 안무가였다. 나는 이 모둠에 제안과 진행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로 속해 있었다.
  첫번째 모임에서는 구성원들과 만나 ‘나’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 달랐고, 각자 작업의 규칙이 있었고, 자신의 작업을 쌓아온 시간과 장소를 포함하는 경로가 있었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이력처럼 사용하지만, 예술가 개개인에게 그 기억을 꺼내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모로 다르게 작동할 것이다. 사용하는 시공간과 재료, 불리는 장르가 다르기에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엮이는 지점이 무엇일지 호기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나는 루미큐브를 예를 들어 나의 성향을 털어놓았다. “루미큐브1) 해보신 적 있나요? 거기서 가끔 모든 큐브를 섞어 조합해서 한번에 자신의 모든 큐브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게 저예요.”
  규칙을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조합을 상상하는 것을 즐기는 나에게 ‘위험포럼’의 ‘위험’이라는 말이 그런 방식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했다. 위험은 늘 하던 것과 안전함에서 먼 방향을 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잊어버리고 모두를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이 모임에서 경험할 수 있다면, 모든 경로를 느끼고 내려놓는 자신만의 시도가 결국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규칙과 풍경, 그리고 세상의 방식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게임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에 실패하면 어떡하죠?” “그 시도는 실패하는 거죠. 하하.”


시도

한 인간으로서 각자의 삶에서 예술을 발생시킨 경로를 확인하며 공유하게 되는 것은 예술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그런 경로는 교차점과 방향, 성향을 드러낸다.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각자의 경로에서 ‘편안하게 할 수 있었던 것’과 ‘막히거나 힘들게 했던 것’을 마주하는 시도를 했다.
  움직임으로 리듬감을 만드는 것과 칼군무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지혜 안무가는 오랫동안 한 댄스컴퍼니에서 무용수로 일했고, 현재는 독립하여 자신만의 작업을 쌓아가고 있는 시기였다. 때로는 요가 강사, 다른 공연에 출연하는 무용수, 자신의 안무를 창작하는 시간을 골고루 소화하고 있었다. 일정을 고려해서 몸과 마음의 정확한 분리와 집중으로 각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수행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강한 책임감에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무대 혹은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미끄러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순발력을 발휘하여 언제든 제자리를 찾아야만 하는 것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실을 촘촘히 꿰매 작품을 만드는 은선 작가는 육아와 작업, 그리고 일에 골고루 시간을 분배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각각에서 최소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최대한으로 쏟을 수 있는 시간 단위를 경험으로 인식하고, 오랜 희생과 노력으로 나름의 안정을 찾은 것 같이 보였다. 시간을 더 들이면 모든 것엔 그만한 부피감이 생겨났다. 작업의 양도 채워지고, 가족들과 채워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부피감이 결국 자신의 성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믿는 사람이었다.
  유석은 어린 시절 태양을 바라보며 오른쪽 시력에 문제가 생겨 시각 장애가 생겼다.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기 때문에 그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며 공백을 두는 버릇 같은 것이 있었다. 개인적인 것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는 자신의 감각이 작동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는 사람인 것 같았다. 창작에서 드러나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듯, 어쩌면 서울장애예술센터의 1년 스케줄에서 다소 장애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시되는 것들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장애 예술가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둠 이름이 정해졌다. 지혜 안무가는 강렬한 것을 원했고, ‘썬더볼트’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우리는 그 강렬함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창작

썬더볼트. 공기 중 물질들의 반응이 모여 번개를 이루듯, 참여하는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흐르며 생동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가운데, 특정 순간에 합일점이 발생하여 스파크가 일어날 만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모이면 그런 순간이 종종 발생하지만, 그것이 매번 일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스파크가 가능한 조건과 요소는 무엇일까?
  각각의 다른 성질은 섞일 수 있는가? 원래의 상태가 무엇인 줄 알고 섞였을 때, 예단하지 않은 채 그대로 끌려갈 수 있을까? 거기서 생기는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 밖에 있는 영역은 무엇일까? 우리가 최근까지 휩쓸리지 않고 버텼던 것과 매번 휩쓸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돈은 얼마만큼 필요한가? 신뢰는 언제 쌓이는가? 두리번거리며 이야기는 쌓여갔다.
  장르 간 협업에서 각 예술가의 기술을 조합하는 것, 혹은 전문스태프로 나열되어 기능하는 것과 그들의 내적 예술발생 경로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장을 펼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면 얼마만큼의 다른 에너지를 끌고 와야 하는가? 그 차이는 작품의 결과를 달라질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레이스로 펼쳐져 있을 때, 고집해야 하는 것과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나와 다른 존재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모이는 시간, 만족감은 효율과 적절함으로 계산되어야 하는 것일까?
  목표와 결과가 없는 것도 위험한 일일까? 공동의 적이 생기면 투지가 생겨서 좋은 것일까? 예술의 의지가 없어질 만큼 평화로운 상태라면? 상징적인 공간을 점유하여 나와는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나의 문제를 전시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 것일까? 그 모든 과정이 이력으로 남는 것이 중요한 사람과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이 과정을 얘기할 수 있을까? 비명을 지른다. 하루만에 세상도 나도 바뀔 수 없기에. 잔상으로, 불꽃으로, 어딘가 주머니에 간직하고 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하나씩 쓰레기통에 버릴지라도.
  9월 22일 이뤄진 2차 ‘위험포럼’에서 썬더볼트 멤버들은 각자 “나의 작업이 온전한 작업이 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글을 작성했고, 그 글을 녹음한 각자의 목소리를 포럼에서 모두가 눈을 감고 가만히 듣는 시간을 가졌다. 마주한 장벽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태도로 지나쳤는지, 뚫어보거나, 부수거나, 모른 척하거나, 넘어갔는지, 결국 그것들을 지나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과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편안한 상태에서 목소리로 녹음한 것을 공유했다. 거기엔 새로움에 대한 갈망도, 인정욕구의 방향도, 길 잃은 즐거움도, 동료의 핀잔도, 새로운 꿈도 담겨 있었다. 나는 이 모임이 공동창작의 결과물을 목표로 하는 방식이 아닌 이 모임 자체의 경험이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썬더볼트’는 현장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는 스파크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방

작품이 발생하는 최소 단위 혹은 최초의 조건은 무엇일까? 은선 작가는 ‘실’을 떠올렸고, 유석 작가는 ‘빛’을 떠올렸다. 지혜 안무가는 ‘몸’을 떠올렸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떠올려보자고 제안하여 ‘마음’을 포착했다. 춤을 추는 사람이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떨까? 몸이 움직일 때 마음의 소리를 꺼내어 보면 어떤 것이 들리게 될까? 자신이 발생시킨 최초의 빛과 실, 그리고 마음은 세상이 만든 장벽, 내가 만든 장벽들을 통과하여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 그리고 그 도착지는 내가 정말 원하는 종착지가 될 수 있을까?
  최근 나는 자신의 껍질을 계속해서 깎아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예술가가 아니게 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나는 이것이 예술 중심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근원에 가까운 두려움이라고 생각된다. 장벽이 곧 내가 인식하고 있는 껍질임을 느끼게 될 때, 나는 그 허물에서 벗어낼 수 있을까? 내가 예술가 혹은 나를 지칭하는 것들의 옷을 벗어버리고 나니 장벽이라는 개념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여정에서 해방은 내 허물이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끝까지 들여다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었을까?
  11월 24일 마지막 ‘위험포럼’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과하며 느꼈던 해방을 짧게나마 공유할 수 있었다. 무대에서 세운 계획이 무색해질, 시각예술가의 시각 체계를 무화할, 그 모든 시간의 축적에 내가 있음을 믿는 손길과 조용한 실천들로 해방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그곳엔 시각예술가, 장애인, 무용수라 표기된 카테고리 껍질을 벗은 그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차지량

차지량은 개인의 온전함과 자유를 꿈꿉니다. @cha_pang_cha_pang

2024/01/17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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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성에 의해 타일 조각의 조합을 맞추며 자신이 가진 조각을 내려놓는 보드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