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야기
나눠본 적 없는 대화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박채영의 에세이 『이것도 제 삶입니다』를 읽고
박채영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보았다. 답장이 왔다. 나의 소설 「초파리 돌보기」를 읽었다고 했다. 질병을 갖고 있던 인물이 완치를 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그 소설을 읽고, 박채영 작가는 궁금증이 생겼다고 했다. “작가님에게 ‘해피엔딩’은 무엇일지” 내게 물었다. 질병서사에서 해피엔딩이란 완치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그에게 항상 유효하다고도 했다. 그가 치유라는 개념에 저항하는 중이라는 사실은 그의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그가 나에게 대답을 원할 때 문제는 달라진다. 섭식장애가 치사율이 높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느 쪽으로도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질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내가 가장 자주 떠올리는 책은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질병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접한 책이기 때문이다.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수전 손택이 유방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것, 어머니를 폐암으로 잃고 에이즈로 친구들을 잃었다는 것, 이후에 다시 자궁암에 걸렸다는 것도 같은 페이지에 적혀 있다. “질병에 들러붙어 있는 온갖 은유”를 수전 손택은 파헤친다. 질병은 그저 치료하면 되는 것이지, 하면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나는 ‘치료’라는 단어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책들을 만났다.
최근에는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읽었다. “치유와의 싸움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는 문장으로 일라이 클레어는 책의 1장을 연다. ‘치유’라는 단어가 어떤 상태를 정상으로 상정하고 그로 인해 어떤 상태를 비정상으로 만들어내는지, 의료 시스템과 협작하여 비장애중심주의를 어떻게 더 공고하게 구축해왔는지 밝혀내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계속 수전 손택을 생각했다. 장애로 인해 치유라는 폭력에 평생 시달려온 일라이 클레어에게 수전 손택이 여전히 완치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은 수전 손택에게 일라이 클레어가 치유의 허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일라이 클레어가 주춤거리는 장면이다.
나는 일라이 클레어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일라이 클레어가 친구 P와 다른 입장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일라이 클레어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며, 불안에 휩싸인다. 그 불안의 근거에는 타인이 있다. 타인에 의해 수정되고 재정의되는 세계가 있다.
*
질병과 질병이 아닌 것, 장애와 장애가 아닌 것의 경계를 명확히 나눌 수는 없다. 그런 시도가 적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섭식장애는 수전 손택이 말하는 질병과 일라이 클레어가 말하는 장애, 양쪽에 동시에 맞닿은 지점이 있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결로 다가온다. 섭식장애는 음식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와 그로 인한 적극적인 수행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만 먹을래”라는 쉽고 단순한 말은 내게 작은 성취를 불러일으켰다. 나도 주어진 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발견. 나도 타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깨달음. 꽉 막힌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이나 기준보다는 통제할 수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고 박채영 작가는 『이것도 제 삶입니다』에서 말한다.
일정 기간 단식을 하거나 적은 양의 음식만 섭취하며 지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때 내가 ‘수행’ 같은 단어를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혹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단식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중요시되는 것은 단연 의지일 것이다.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의지가 관여된 행위는 통상적으로 ‘질병’이라 명하지 않는다. 자살의 경우도 그러하다. 질병으로 인한 결과로 자살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살 자체를 질병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합의 때문일 것이다. 마약처럼 중독과 관련된 것들은 수행성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질병으로 분류되지만, 섭식장애는 남용이나 무절제 상태가 아니라 극도의 절제와 통제라는 면에서 중독과도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섭식장애는 단식 투쟁, 혹은 종교인의 수행과 무엇이 다른 걸까?
섭식장애는 질병이 아니라고, 단식 투쟁이나 종교인의 수행, 자살처럼 의지나 선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섭식장애에서 개인의 의지와 선택만을 강조할 때 누락되는 진실이 있는 것처럼, 섭식장애에서 질병적인 특성만을 강조할 때도 누락되는 진실이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이야기되어본 적 없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야기되지 못한다. 섭식장애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저항에 대한 의지보다 증상이나 신체의 변화가 강조되곤 한다. 음식을 먹고 구토를 하는 행위나 뼈가 보일 정도로 말랐다는 묘사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섭식장애가 외모지상주의와 관련되어 얘기될 때만큼은 반대로 한 사람의 선택이라는 뉘앙스가 강조되는 현상을 보인다. 연예인의 다이어트를 따라한다거나 ‘뼈말라족’을 선망한 결과라는 식으로 말이다.
박채영 작가는 섭식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한 P병원에서의 기억을 이렇게 서술한다. “내가 나를 지키고자 만들었던 규칙과 원칙들은 모두 병의 증상이 되었고” “의사의 권위로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데 화가” 났으며, “치료에 회의감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섭식장애는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다. 섭식장애는 증상 자체로 하나의 호소다. 호소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호소를 듣는 귀일 것이다. 박채영 작가의 “배신감”은 치료라는 방식으로 오히려 자신의 호소가 묵살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일 터다. 작가가 거부하려는 것은 치료 그 자체라기보다는 치료받는 자와 치료하는 자 사이에 설정된 위계일 것이다. “치료의 주도권을 환자가 쥘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질병서사에서 돌봄이란 치료에 대한 위계와도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다.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자는 치료하는 자의 역할도 대리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때 돌봄받는 자에게는 쉽게 두 가지의 굴레가 씌워질 수 있다. 첫번째는 ‘돌봄받는 자’라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굴레다. 동서를 막론하고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 대상에게 돌봄이나 관리가 필요한 존재라는 프레임을 씌워왔다. 그로 인해 생성된 돌봄받는 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여전히 유효하다. 두번째는 ‘치료가 필요한 자’에 대한 굴레다. 1960년대까지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자폐증이나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어린이”는 “치료시설에서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성인 환자에게 사용하는 강력한 약물, 최후의 수단, 실험적 치료들을”2) 받았다.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군인들도 같은 이유로 “잔혹하기까지 한 극단적인 진단법과 치료법”3)에 시달렸다. 장애인들의 “무급 노동은 아동 노동 착취가 아니라 일종의 치료가 되었다”.4) “흑인의 저항”은 “질병”으로 취급되었으며, “백인의 권력과 통제”가 “치유”5)로 규정되기도 했다. 치료는 오랫동안 억압과 비가시화, 심지어 “박멸”에 이바지한 면이 있고, ‘치료가 필요한 자’라는 명명 또한 종종 그 굴레를 작동시킨다.
어려운 것은, 환자와 의사, 혹은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와는 다르게 이 돌봄 관계에는 희생과 애정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돌봄받는 자와 돌보는 자 사이에 위계가 있는 것처럼, 돌보는 자와 돌보지 않아도 되는 자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 돌봄받는 자는 이 사실까지도 분명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치료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주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돌보는 자에게도 낙인은 함께 찍힌다. 돌보는 자가 돌봄받는 자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돌보는 자는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라는 눈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왠지 반성을 해야 할 것만 같고,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놓인다. 그는 더 잘해야만 할 것 같다. 환자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것에 맞춰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돌봄받는 자와 돌보는 자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 쉽다. 질병, 돌봄, 치료 등은 서로 이어져 있어 어느 한 가지만 떼어내어 그 개념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학습해본 적 없는 대화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대화는 정말 내가 나눠본 적 없는 대화일까. 어쩌면 이 대화의 가능성을 내가 너무 먼 곳에서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채영 작가의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2부 제목은 ‘나를 키운 여성들’이다. 여기엔 박채영 작가가 만난 여러 여성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대안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언니들”도 포함되어 있다. 아홉 살, 사감으로 취직한 엄마를 따라 작가는 대안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작가는 이때 만난 대안학교의 언니들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다고, “응원과 지지로” 힘이 되어 주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관계에서 작가가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활 공간이었던 사감실을 작가가 공유했다는 것을 이 “언니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한 셈이지만 이것은 교환이나 대가가 아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누어주었다는 개념도 맞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이 가진 것을 ‘내 것’이라 여기어 내주는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저 “바닥에서 뒹굴다가 때가 되면 저녁을 해먹고 잠을 잤다”. 기존의 시장경제에서 통용되는 공간 대여나 돌봄노동 서비스의 개념은 이 공동체 안에서 유효하지 않다. 가족 안에서 이뤄지는 돌봄과도 결을 달리한다. 이들의 돌봄에서는 수혜자와 제공자를 명확히 분류할 수 없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가며 연쇄적으로 일어난 행위의 결과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낸 날들일 것이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어쩌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교환이나 대가, 내 것을 나눠 준다는 의식 없이 연쇄적이고 상호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돌봄의 자장 안에 머물렀던 경험 말이다. 그 기억이 대부분 제도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개인들의 교류라는 점은 제도의 허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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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책을 읽고 두 작가가 나눈 이메일 보러 가기
(공개 기간: 2024. 5. ~ 2024. 12.) click
‘질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내가 가장 자주 떠올리는 책은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질병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접한 책이기 때문이다.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수전 손택이 유방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것, 어머니를 폐암으로 잃고 에이즈로 친구들을 잃었다는 것, 이후에 다시 자궁암에 걸렸다는 것도 같은 페이지에 적혀 있다. “질병에 들러붙어 있는 온갖 은유”를 수전 손택은 파헤친다. 질병은 그저 치료하면 되는 것이지, 하면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나는 ‘치료’라는 단어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책들을 만났다.
최근에는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읽었다. “치유와의 싸움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는 문장으로 일라이 클레어는 책의 1장을 연다. ‘치유’라는 단어가 어떤 상태를 정상으로 상정하고 그로 인해 어떤 상태를 비정상으로 만들어내는지, 의료 시스템과 협작하여 비장애중심주의를 어떻게 더 공고하게 구축해왔는지 밝혀내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계속 수전 손택을 생각했다. 장애로 인해 치유라는 폭력에 평생 시달려온 일라이 클레어에게 수전 손택이 여전히 완치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은 수전 손택에게 일라이 클레어가 치유의 허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일라이 클레어가 주춤거리는 장면이다.
활동가이자 작가로서 일하던 어느 날, 나는 연단에 서서 또다시 크리스토퍼 리브 이야기로 열을 올리며 장애와 치유에 관한 거짓말을 낱낱이 밝히던 중이었다. 문득 강연장 뒤에 내 친구 P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암을 겪고 살아남은 그녀의 이야기가, 수술이며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그녀가 경험한 죽을 고비 등의 이야기가 번개같이 나를 스친다. 갑자기 내 말들이 텅 빈 수사에 다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치유가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잠시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로 불안에 휩싸여 있다.1)
잠시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로 불안에 휩싸여 있다.1)
나는 일라이 클레어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일라이 클레어가 친구 P와 다른 입장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일라이 클레어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며, 불안에 휩싸인다. 그 불안의 근거에는 타인이 있다. 타인에 의해 수정되고 재정의되는 세계가 있다.
일정 기간 단식을 하거나 적은 양의 음식만 섭취하며 지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때 내가 ‘수행’ 같은 단어를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혹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단식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중요시되는 것은 단연 의지일 것이다.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의지가 관여된 행위는 통상적으로 ‘질병’이라 명하지 않는다. 자살의 경우도 그러하다. 질병으로 인한 결과로 자살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살 자체를 질병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합의 때문일 것이다. 마약처럼 중독과 관련된 것들은 수행성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질병으로 분류되지만, 섭식장애는 남용이나 무절제 상태가 아니라 극도의 절제와 통제라는 면에서 중독과도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 섭식장애는 단식 투쟁, 혹은 종교인의 수행과 무엇이 다른 걸까?
섭식장애는 질병이 아니라고, 단식 투쟁이나 종교인의 수행, 자살처럼 의지나 선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섭식장애에서 개인의 의지와 선택만을 강조할 때 누락되는 진실이 있는 것처럼, 섭식장애에서 질병적인 특성만을 강조할 때도 누락되는 진실이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이야기되어본 적 없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야기되지 못한다. 섭식장애는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저항에 대한 의지보다 증상이나 신체의 변화가 강조되곤 한다. 음식을 먹고 구토를 하는 행위나 뼈가 보일 정도로 말랐다는 묘사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섭식장애가 외모지상주의와 관련되어 얘기될 때만큼은 반대로 한 사람의 선택이라는 뉘앙스가 강조되는 현상을 보인다. 연예인의 다이어트를 따라한다거나 ‘뼈말라족’을 선망한 결과라는 식으로 말이다.
박채영 작가는 섭식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한 P병원에서의 기억을 이렇게 서술한다. “내가 나를 지키고자 만들었던 규칙과 원칙들은 모두 병의 증상이 되었고” “의사의 권위로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데 화가” 났으며, “치료에 회의감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섭식장애는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다. 섭식장애는 증상 자체로 하나의 호소다. 호소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호소를 듣는 귀일 것이다. 박채영 작가의 “배신감”은 치료라는 방식으로 오히려 자신의 호소가 묵살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일 터다. 작가가 거부하려는 것은 치료 그 자체라기보다는 치료받는 자와 치료하는 자 사이에 설정된 위계일 것이다. “치료의 주도권을 환자가 쥘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질병서사에서 돌봄이란 치료에 대한 위계와도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다.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자는 치료하는 자의 역할도 대리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때 돌봄받는 자에게는 쉽게 두 가지의 굴레가 씌워질 수 있다. 첫번째는 ‘돌봄받는 자’라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굴레다. 동서를 막론하고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 대상에게 돌봄이나 관리가 필요한 존재라는 프레임을 씌워왔다. 그로 인해 생성된 돌봄받는 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여전히 유효하다. 두번째는 ‘치료가 필요한 자’에 대한 굴레다. 1960년대까지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자폐증이나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어린이”는 “치료시설에서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성인 환자에게 사용하는 강력한 약물, 최후의 수단, 실험적 치료들을”2) 받았다.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군인들도 같은 이유로 “잔혹하기까지 한 극단적인 진단법과 치료법”3)에 시달렸다. 장애인들의 “무급 노동은 아동 노동 착취가 아니라 일종의 치료가 되었다”.4) “흑인의 저항”은 “질병”으로 취급되었으며, “백인의 권력과 통제”가 “치유”5)로 규정되기도 했다. 치료는 오랫동안 억압과 비가시화, 심지어 “박멸”에 이바지한 면이 있고, ‘치료가 필요한 자’라는 명명 또한 종종 그 굴레를 작동시킨다.
어려운 것은, 환자와 의사, 혹은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와는 다르게 이 돌봄 관계에는 희생과 애정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돌봄받는 자와 돌보는 자 사이에 위계가 있는 것처럼, 돌보는 자와 돌보지 않아도 되는 자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 돌봄받는 자는 이 사실까지도 분명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가 치료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주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돌보는 자에게도 낙인은 함께 찍힌다. 돌보는 자가 돌봄받는 자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돌보는 자는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라는 눈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왠지 반성을 해야 할 것만 같고,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놓인다. 그는 더 잘해야만 할 것 같다. 환자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것에 맞춰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돌봄받는 자와 돌보는 자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 쉽다. 질병, 돌봄, 치료 등은 서로 이어져 있어 어느 한 가지만 떼어내어 그 개념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학교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사감실에 언니 한둘이 이미 누워 있었다. 사감실 문을 잠그는 게 원칙이지만 (심지어 분명 잠궜지만) 카드나 젓가락으로 쉽게 딸 수 있었다. 방바닥에 드러누운 언니들 옆으로 봉지만 남은 내 과자들이 보였다. “채영아, 미안해”라고 하면서도 언니들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6)
작가는 이때 만난 대안학교의 언니들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다고, “응원과 지지로” 힘이 되어 주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관계에서 작가가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활 공간이었던 사감실을 작가가 공유했다는 것을 이 “언니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한 셈이지만 이것은 교환이나 대가가 아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누어주었다는 개념도 맞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이 가진 것을 ‘내 것’이라 여기어 내주는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저 “바닥에서 뒹굴다가 때가 되면 저녁을 해먹고 잠을 잤다”. 기존의 시장경제에서 통용되는 공간 대여나 돌봄노동 서비스의 개념은 이 공동체 안에서 유효하지 않다. 가족 안에서 이뤄지는 돌봄과도 결을 달리한다. 이들의 돌봄에서는 수혜자와 제공자를 명확히 분류할 수 없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가며 연쇄적으로 일어난 행위의 결과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낸 날들일 것이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어쩌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교환이나 대가, 내 것을 나눠 준다는 의식 없이 연쇄적이고 상호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돌봄의 자장 안에 머물렀던 경험 말이다. 그 기억이 대부분 제도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개인들의 교류라는 점은 제도의 허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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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책을 읽고 두 작가가 나눈 이메일 보러 가기
(공개 기간: 2024. 5. ~ 2024. 12.) click
임솔아
장편소설 『최선의 삶』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중편소설 『짐승처럼』이 있다.
2024/05/15
67호
- 1
- 일라이 클레어, 『눈부시게 불완전한』, 하은빈 역, 동아시아, 2023, 40쪽.
- 2
- 스티브 실버만, 『뉴로트라이브』, 강병철 역, 알마, 2018, 271쪽.
- 3
- 디디에 파생, 리샤르 레스만, 『트라우마의 제국』, 최보문 역, 바다출판사, 2016, 82쪽.
- 4
- 일라이 클레어, 『눈부시게 불완전한』, 하은빈 역, 동아시아, 2023, 90쪽.
- 5
- 앞의 책, 53쪽.
- 6
- 박채영, 『이것도 제 삶입니다』, 오월의봄, 2023,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