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처
21회 화성을 젠더수행하기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
“장담컨대 그런 일은 없어. 이봐, 인간은 백년도 못 산다고. 한두 세기 가지고 무슨 화성이주계획을 실현하겠어? 인간의 1세대는 늘 꿈을 꿔. 배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쫓거나 황금을 찾아 낯선 땅으로 떠나는 거야. 마침내 정착하고 아들이 그곳을 물려받아. 기름진 땅에는 번영이 이뤄지겠지. 그들의 아들이나 아들의 아들쯤이면 과실에 취해 유약해진단 말이야. 인간에게 성공이란 중력이 줄어드는 것과 같아. 오분의 일 정도 되는 중력만 받고 산다면 키는 크겠지만 뼈는 약해지겠지. 그래서 아무데도 가지 않아. 기왕에 만들어진 세계를 탕진해버리면 저들끼리 전쟁이 시작된단 말이야. 그러면 여기 화성처럼 황무지가 되는 건 순식간이야. 자, 이 스토리에서 너희들의 역할이 뭐일 것 같아? 너희는 1세대의 야망 때문에 태어나서 2세대까지는 부지런히 메시지를 전송하겠지. 3세대쯤이면 잊히기 시작해. 화성기금 같은 게 있으면 전쟁 비용에 벌써 써버렸을걸? 너희가 보낸 전파도 지구 어딘가에 고스란히 고여 있을지 모른다고. 받을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진실은 이거야. 너는 쓸데없는 의무에서 벗어나도 돼. 고감도 안테나를 세우는 데 전력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화성의 돌이라도 하나 치우는 게 나아. 더이상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서 우리와 지내자.”
(「화성의 아이」, 『현남 오빠에게』, 263~264쪽)
김성중의 SF 단편 「화성의 아이」(『현남 오빠에게』, 조남주 외 단편집, 다산북스, 2017; 이하 본문에서 「화성의 아이」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을 표기한다.)에서 인용한 위 대사는 1957년 10월 4일, 소련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했던 시베리안 허스키 종(種)의 개 ‘라이카’가 화성의 위성 이름을 딴 탐사로봇인 ‘데이모스’에게 건넨 말이다. 그리고 두 피조물의 대화를 듣고 있는 ‘나’는 지구의 한 연구소(미국 휴스턴)에서 250년 후의 미래로 보낸 “열두 마리의 실험동물”(245쪽)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화성에 막 도착한 임신부 클론이다. ‘실험동물’이었던 라이카는 “중력도 통과하고 은하계도 통과하고 백색과 적색의 모든 행성을 통과”(250쪽)해서 달에서 화성으로 왔으니까 “죽은 개”(같은 쪽), 즉 유령이겠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인용문에서 라이카가 말하는 ‘인간’(human)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나’의 불안한 꿈속에서 잠깐 출현하는데, ‘나’의 꿈에서 “인간은 무서운 존재였다.”(268쪽) 소설의 시작에서 끝까지, 인간은 그들 곧 동물, 로봇, 클론에게 위협적이고도 적대적인 타자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라는 기호(sign)는 「화성의 아이」의 동물과 로봇, 클론을 실험동물로 취급하는 인류 일반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보통명사에 불과할까. 소설의 몇몇 정보와 진술은 ‘인간’이 특정한 성별로 젠더를 수행하는 어휘임을 직간접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우선 라이카는 암컷이며, 클론인 ‘나’의 성별 또한 여성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모가 둘이나 더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271쪽)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성별이 여자냐고 되묻는”(같은 쪽) 로봇 데이모스의 성별 또한 여성이겠다.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도…… 희미한 단서가 하나 더 있다.
미국 애리조나 출신의 ‘나’는 우주선 발사 직전의 순간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나’의 기억 속에서 지나가듯이 떠오르는 “자만심에 젖은 남자들”(247쪽)이라는 표현을 놓칠 수는 없겠다. 유추해보면, ‘자만심에 젖은 남자들’이란 “인간의 꿈”(246쪽)을 실현할 동료 클론들과 ‘나’의 시간 이동 우주여행에 기대를 건 연구소 직원들이라고 해도 좋다. 이처럼 「화성의 아이」에서 ‘인간’은 ‘자만심에 젖은 남자들’이라는 성별로 젠더화된다. 인간은 남자로 분절된다(hu-man). ‘나’의 꿈속에서 화성으로 오고 있는 70명의 인간들이란, 인용문에서 라이카가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에 지구 행성의 식민 개척사를 주도했던 인간들, 정확히는 ‘그들의 아들이나 아들의 아들’이 ‘나’의 꿈속에서 어지러이 변형되어 나타난 존재들이다. 소설의 서술 전략은 인간을 남자로, 비인간(동물, 클론, 로봇)은 여자로 성별화한다.
따라서 김성중의 SF에서 화성은 지구 행성의 불안한 미래이며, 나아가 지구 행성의 역사, 곧 식민 개척과 정복을 수행했던 ‘자만심에 젖은 남자들’ ‘그들의 아들이나 아들의 아들’의 남성지배의 ‘스토리’(history)에서 황폐해져버린 지구의 과거와는 단절되어야 할 미래의 장소가 된다. 화성에 대한 정보를 지구로 전송하는 임무를 맡은 로봇과 임신한 클론을 화성으로 미리 보내는 화성 테라포밍의 1단계란 처음부터 실패했던 지구에 대한 식민지배, 곧 남성지배의 맹목적인 반복이자 엔트로피적인 확장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와 데이모스는, 라이카가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한 지 다섯 시간 만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훗날 인간에 의해 한낱 “우표”(263쪽)로 기념되는 방식과 똑같이 취급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나’와 라이카, 데이모스의 ‘스토리’는 화성에서 처음부터 다시 씌어져야만 하겠다. 지구에서 “스스로가 무슨 생물인지조차 알지 못한”(247쪽) ‘나’는 화성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 화성은 미개척의 자연이 아니다. 화성은 젠더를 새롭게 수행하는 문화적인 장소가 된다. SF는 새로운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관념을 제안한다.
글 첫머리의 「화성의 아이」의 인용문으로 되돌아가 보면, 죽은 개의 유령인 라이카의 말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역사에 대한 의미심장한 경고문이 된다. 소설에서 “여기가 어디야? 우주야, 사후야?”(252쪽)라고 묻는 ‘나’의 질문에 대한 라이카의 대답은 지극히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장소를 묻는 건 우리가 누구냐고 묻는 것과 같아.”(같은 쪽) 장소에 대한 질문은 정체성, 정확히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된다. 「화성의 아이」에서 젠더화되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다. ‘나’와 라이카, 데이모스에게 화성은 지구에서의 남성지배의 젠더수행을 허무는 장소로 새롭게 정체화될 것이다. 소설에서 화성이 어떤 곳으로 묘사되었는가. “마침내, 화성에 발을 디뎠다. 풍경 자체는 지구의 황무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모서리가 뾰족한 돌, 윤곽뿐인 바위들, 구름 한 점 없는 살구빛 하늘. 여기가 정말 화성인가? 구름이 없는 탓에 하늘은 무표정한 얼굴 같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256쪽)
반복하지만, 화성은 동물과 클론, 로봇이 개척해야 하는 미지의 자연이 아니다. 화성의 땅은 이미 ‘지구의 황무지’를, 화성의 하늘은 ‘사람의 얼굴’을 얼마간 닮았다. 화성은 지구에서의 남성지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화성을 개척하는 일이란 지구에서 신대륙을 개척해왔던 끔찍한 역사를 반복할 위험을 내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는 그럴 수 없어야 한다. 장소를 묻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화성의 자연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은 화성을 새로운 문화적 장소로 정체화하는 첫번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결사막은 라이카에 의해 ‘에덴’으로 새롭게 명명될 것이다. 그곳은 이미 폐허의 과거가 된 지구의 에덴과 결코 같을 수 없다.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는 지구의 기억, 인간의 기억, 역사의 기억과 스스로 단절을 꾀하고 그들 버림받은 존재들끼리의 공존을 모색하는 이야기이자 지구의 역사(hi/he-story)와 단절하는 화성의 역사(her-story)를 새롭게 서술하는 단편 SF이다. 그리고 화성에서의 공동체의 삶은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애완벼룩을 정성스럽게 보살피는 라이카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한마디로 공생이라고 하겠다. 김성중의 단편에서 또다른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나’가 라이카와 데이모스가 우주선 아래에 달아준 해먹에서 낮잠을 자면서 태동(胎動)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것이 “실험의 탓인지, 새끼를 품은 어미가 겪는 자연스러운 본능인지 구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과 상관없이 진실”임을 깨닫는 부분이다(266쪽). 이러한 깨달음이 인간이 수행한 실험 결과든, 본능 표출이든 간에 그것을 서술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자각하는 일은 화성에서의 새로운 젠더 수행이라고 하겠다.
결국 「화성의 아이」는 ‘나’가 꿈속에서 라이카로부터 듣는 말 “한 아이가 태어났도다!”(269쪽)는 말의 의미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가 이 말(‘한 아이가 태어났도다!’)에 대해 질문하자 라이카는 “넌 한나 아렌트도 안 읽었어?”(같은 쪽)라고 반문한다. ‘한 아이가 태어났도다!’ 이 감탄의 언명은 공교롭게도 스푸트니크 2호가 발사된 이듬해에 출간된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표현”1)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957년에 인간이 만든 지구태생의 한 물체가 우주로 발사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인간의 조건』은 “인류는 지구에 영원히 속박된 채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적극 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2) 그러나 이 책은 미래와 다른 행성을 식민화하려는 의도에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아렌트는 자신의 책에서 기술의 진보에 따른 미래에 대한 무분별한 식민화 가능성에 대해 당혹스러움과 불안감을 기꺼이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는 아렌트의 불안과 당혹을 희망으로 다시 쓰는 새로운 정체성의 우화가 되겠다.
복도훈
다만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투명한 나와 타자를 상상하려고 합니다.
2018/08/28
9호
- 1
-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312쪽.
- 2
-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49, 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