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시대고 에세이의 시대다. 신간 목록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모두가 자기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모르는 이가 보면 출판의 전성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상한 일이다.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로 대표되는 인문학과 출판업은 내가 알기론 최소한 20년은 ‘단군 이래 최대 불황’ 기록을 경신해왔다. 읽고 쓰기를 좋아해 그 일을 업으로 삼은 나 같은 이에게는 무섭고도 쓸쓸한 일이다. 해마다 “올해는 정말 심각합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올해는 정말 심각합니다.” 농담이 아니다. 초판 부수는 3천 부에서 2천 부로 떨어졌다는 말이 들린 지 1년도 넘었다. 이런 시기에 글쓰기 열풍이 불고 있다. 2016년 3월에 발표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1년간 예술 활동을 통한 수입의 중간값이 300만 원이며 36.1%는 수입이 전혀 없었다. 내가 2000년에 잡지사에 입사해 일을 시작한 이래 원고료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 원고지 기준 장당 1만 원 정도가 일반적이다.
   나는 글쓰기 강좌를 5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수강생 부족으로 폐강한 적도 있는 문제의 글쓰기 강좌는 근래 들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몇 년 전 출판사에 글쓰기 책을 내자고 제안했을 때는 ‘언젠가’ 정도의 반응을 들었는데, 올해는 세 곳에서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잠시 착각했다. 내 글이 그렇게 인기가 좋은가. 아니, 그것이 아니다. 쓰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면, 쓰려는 수요가 늘기 위한 선제조건은 읽는 사람의 증가일 텐데, 그게 그렇지 않다. 아주 기이한 산문의 시대, 텍스트의 시대다.
   글을 쓰는 일을 오랫동안 업으로 해온 이들 사이에서 최근 베스트셀러 목록은 도마 위의 식재료 같은 상태가 되었다. 우는 듯 웃는 목소리로 다들 이 책은 어떻게 ‘후졌는지’를 물고, 뜯고, 씹고, 삼킨다. 최근 ‘문장형 제목’이 유행하고 있는데, ‘후졌다’는 고발의 대상인 책 다수가 문장형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수가 ‘괜찮아’ ‘다행이야’로 끝나거나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다. 한때 유행하던 힐링과도 다르고, 인문학 열풍이라던 때와도 다르다.
   소설의 인기는 전 같지 않고, 자기개발서도 전만큼 읽히지 않는다. 인기 에세이의 주인공 중에는 ‘보노보노’ ‘곰돌이 푸’가 있다. 귀염성 없는 인간과 싸워도 승산이 없는데 보노보노와 싸워 이길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인기도서의 작가 이름도 낯설 때가 많다. ‘유명한 작가’가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아니라,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다가 어떤 이름을 발견하게 되어 놀라는 식이다. ‘임자는 뉘시오?’ 하고. 그리고는 맹렬한 비난이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글도 아니다. 이것은 책도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왜 이런 것만 읽는지 모르겠다. 말세다. 자신의 책 판매고에 불만이 많은 사람일수록 불만이 많아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세상 사람의 팔 할 정도는, 애석하게도, 책이 얼마나 안 팔리는지 누가 책을 내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팔 할의 사람들은 바로 베스트셀러 상단의 ‘그런 책’ 제목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원래도 이랬나? 글쎄, 최근 3년 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글을 둘러싼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요즘 내가 글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은 변화다. 읽는 방식, 쓰는 방식, 파는 방식이 다 변하고 있는 중이며, 양대 사양 산맥인 인쇄 매체와 출판업에 한발씩을 걸치고 일을 하는 나는 그 변화가 궁금하고, 기대되며, 근심된다. 글로 보이지 않는 것도 글이며, 글로 보이는 것은 글이 아니다. 읽는 사람 없이도 글은 수없이 퍼블리시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 모든 것을 현재 시점에서 풀어보자면 에세이의 유행이 있다고 나는 주장하려는 참이다. 그리고 텍스트는 이전 어느 때보다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소확행 시대의 글쓰기. 에세이의 유행은 내용 면에서 그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에세이는 소설이 아닌 산문이면서,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낸 글을 말한다. 영어로 에세이(essay)를 ‘소논문’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중수필(重隨筆)이라고 불렀던, 학술적이거나 과학적인 내용으로 비개성적이고 논리적, 객관적인 내용인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 에세이의 유행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글쓰기 모두를 포괄하는데,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긴 번역서의 경우는 사적인 에세이와 비개성적인 에세이가 모두 포함되지만 한국어로 쓰인 에세이의 경우는 사적인 에세이의 비중이 높다. 일본어에서 번역된 에세이는 사적인 에세이의 비중이 높은데, 이 경우에도 한국어로 쓰인 사적인 에세이와는 구분된다. 번역서들은 대체로 유명인(소설가, 뮤지션, 방송인 등)의 에세이라면 한국에서 현재 유행하는 글은 유명인의 저작과 일반인의 저작이 고루 섞여 있다. 후자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사생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5년 전만 해도, 유명인에게 에세이를 쓰게 하면 잘 팔린다는 말이 흔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살 것이므로. 지금 역시 그렇다. 하지만 양상이 다르다. 지금은 지상파 TV에 나오는지 여부가 유명인의 기준이 아니게 되었다. SNS 팔로워가 많은 저자는 에세이 시장에서 전문 작가(소설가, 시인, 기자 등)보다 강력한 판매력을 지닌다. 애매한 유명인일 바에는 아예 일반 독자가 모르는 이름인 쪽도 괜찮다. 이름값이 아니라 좋은 제목과 좋은 경험이 주목받는 에세이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전문 작가의 선호도는 뒤로 밀리는 추세다.
   『마녀체력』은 25년 넘게 에디터로 살며 책을 만들어온 저자 이영미가 운동에 관심을 갖고 체력을 키운 내용을 모은 에세이다. 피트니스 전문가가 쓴 운동 가이드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는 이 책은, 운동에 관심없던 보통 사람이 중년의 문턱에서 변화하는 경험을 담았다. 나 역시 평범한 직장인으로 각종 통증과 싸우며 중년이 되어가는 입장인데, 『마녀체력』은 정보는 부족했지만 유머와 공감은 충분했으며, 동기부여도 되더라. (그리고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궁금증. 만약 당신이 정말 체력을 키우고자 애쓴다면 타인의 성공담보다는 실행 가능한 실용서나 전문가의 조언이 담긴 책을 원하지 않을까? 비전문가인 개인의 경험담이 내게도 맞는 처방전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한다면, 당신은 그런 ‘실용적’인 이유로 책을 샀다가 실패해본 적 없는 의지력의 화신이거나, 아예 그런 책을 사본 적 없을 가능성이 높다. 새해 목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원이 뭔지 아시는지? 금주와 금연, 다이어트, 독서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작심 3일도 지키기 어려운 저 모든 것을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충분히 실패해왔다.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지시하는 조언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실패하면서도 조금씩 발전해가는 모습을 선호한다. 집에서 간단히 따라 하는 ‘홈트레이닝’ 스타들은 다수가 인스타그램으로 짧은 영상을 올리며 유명세를 얻었고, 그들 중에는 피트니스 관련 자격증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격증이 있다 해도 유명해진 뒤 딴 경우가 주를 이룬다.
   최근 인기를 끈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경도의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은 백세희의 에세이다. 우울증 관련 도서 출간은 꾸준히 증가추세인데, 그중 이 책이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마녀체력』처럼 제목부터 솔깃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역시 우울증 전문가가 쓴 책은 아니다. 우울증 관련 치료를 받는 이들에게 이 책에 대해 물었더니, 신경정신과에 가거나 약물치료를 받기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을 보면 병원에서 듣는 이야기나 약물치료의 효과 등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아하는 듯하다는 분석이 돌아왔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순 없다. 의사, 학자, 전문가들이 해주지 않는 공감, 그야말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같은 입장’에서의 고통을 나눠준다는 사실만으로 더 위안이 되는 독서가 된다. 병원에 가서 아픈 곳을 설명할 기회도 없이 차트만으로 약 처방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먼저 아파본 누군가가 고통을 솔직히 보여준다는 일의 고마움 혹은 감동을 쉽게 이해하리라.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뭐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명심하라. 전문가가 쓴 책을 읽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책은 책일 뿐이고, 의미 있는 개선은 책을 읽은 후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TMI. 최근 널리 쓰이는 ‘too much information’의 약어처럼, 에세이 읽기는 누군가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일’이 되었다. 이런 책들의 내용을 TMI에 비유한 것은, 우울증에 대한 책이라고 우울증 얘기만 있는 게 아니고, 떡볶이 얘기도 등장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떡볶이에는 관심이 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만! 또한, 마녀 같은 체력을 키우자고 해서 운동 얘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간 해온 일, 가족 관계를 비롯, 독자는 저자의 삶에 대해 필요 이상의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그렇게 특정된 사연은 특정된 독자를 불러모은다. 공감, 혹은 창작자가 읽는 나를 ‘알아(봐)준다’는 느낌이 중요해졌다. 책을 한 권 읽으면 같은 고민을 가진 한 사람의 친구를 얻는 것과 같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전문가가 필요 없기로는 마케팅 역시 마찬가지다. 라이프스타일이 곧 상품이 된다. 인스타그램이 유행하는 지금, 라이프스타일은 그 자체로 글과 이미지, 물건의 조합으로 노출되며 해시태그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 마케팅은 현재 일간지 서평보다 인스타그램 노출이라고들 한다. 보기 좋은 물건들과 함께 책을 세팅하고 사진을 찍은 뒤, 해시태그를 달아 올린다. 팔로워가 많을수록 효과가 뛰어나다. ‘무심한 듯 건네지는’ 시시콜콜한 정보가 공들인 서평보다 더 ‘진짜 같다’고 느끼는 문화다. 책의 완성도나 글의 유려함을 강조하는 전문가의 서평보다, 누군가가 휴양지에서 찍은 사진 귀퉁이에 살짝 걸쳐진 ‘펼쳐진 책’ 쪽이 더 궁금하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저 책 제목은 뭔가요?” 유명인의 계정에 이런 식으로 노출된 사진이 있다면 바로 눈길을 끌고 팬들 사이에서 제목이 공유된다.
   라이프스타일을 노출하는 일반인 인기 계정주는 어떤 사람인가. 일반인이라고 해도 TV에 노출되는 연예인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이들, 더 큰 구매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바로 ‘쇼핑몰 운영자’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계정주 본인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매출로 직접 이어진다. 그들이 직접 판매하는 물건이 아니라 해도 인스타그램 ‘노출’을 조건으로 한 패키지가 일간지 광고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책의 경우는 정말 운 좋게 노출되는 경우가 아니면 그런 방식을 쓰지 않는데(들인 돈을 회수할만큼의 판매가 이루어지기를 낙관하기 어렵기 때문일 듯하다), 대신 편집자, 출판사 마케터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그런 용도(#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그 경우는 ‘관계자’가 칭찬하기 때문에 ‘진짜 같은’ 흥미를 끄는 데는 큰 효과가 없다. 오묘하지 않은가. ‘진짜 같은’이라는 말은 진짜와는 관계없다. 하지만 그런 걸로 치는 셈이다. 그렇게 ‘우연히’ 노출된 듯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해시태그가 달리고 질문 댓글이 달린다. “저거 어디서 사셨어요?” 보통의 독자에게 어떤 책의 신뢰도는 여러 번 공유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읽고 있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읽고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 호기심을 끈다. ‘사진이 말해요.’ 일간지 광고를 해야 ‘출판사에서 뭐 좀 하고 있나 보다’하고 생각하던 문화는 이제 이렇게 변화하는 중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블로그 마케팅은 전보다 시들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이니 글쓰기는 붐이 될 수밖에 없다. 직업 작가의 글은 점점 안 팔리지만, 일반인 작가의 글은 점점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 글을 잘 쓰는 능력이나 전문성만큼이나 고유한 경험이 독자들 사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미 유명한 사람보다 이제 유명해지려는 사람이 더 자기 홍보에 열심이고, 그 말인즉슨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에게 더 열심히 다가간다는 뜻이다. 독자도 발견되고 싶어 한다. 익명의 독자에 머무는 대신, 소통하고,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SNS를 통해 소통하는 신인 에세이 작가들은 적극적으로 독자들을 찾아다니며 ‘좋아요’를 누르거나 감상 글을 ‘공유’한다. 독자에게도 주목받을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독자로 인정받은 경험이 작가가 되고자 하는 용기를 북돋는다. 전문성을 갖추기는 어렵지만 누구에게나 고유한 경험은 있다.
   책은 팔리지 않지만 글은 항상 읽는다. 글쓰기가 붐인데 독자는 줄어드는 중이다. 십 대를 대상으로 하는 강연을 할 때 내가 자주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알고 싶은 게 있을 때 어디에 검색해요?” 성인들은 포털사이트를 먼저 떠올리지만, 십 대 청소년은 ‘유튜브’라고 한다. 모든 것을 유튜브에서 보고 배운다. 게임을 할 때, 물건을 살 때와 같은 돈을 써야 할 때 위험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구매 후기와 사용기를 동영상으로 보는 것은 물론이고, 실연을 당했을 때도 유튜브를 검색해 슬라임(액체 괴물, 액괴라고도 부른다.)을 만지는 관련 제목의 영상을 찾아본다. 슬라임은 찰흙처럼 주무르면서 그 형태를 바꿀 수 있는데, 찰흙보다 더 쉽게 모양이 바뀌며, 여러 색상과 종류가 있고, 만지는 재미가 중독적이다. 나는 처음 슬라임 영상을 보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젤리 같은 슬라임을 주무르면서 여러 형태를 만드는 내용의 영상인데 제목은 ‘짝사랑하다 상처받은 적’, ‘오늘 학교에서 생긴 일’같은 식이다. 영상을 보면 왜 제목이 그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영상만 보고는 그런 내용인지를 유추하는 일이 불가능해서다. 영상에서는 액괴를 손으로 주무르기만 한다. 그러면 짝사랑하다 상처받아서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자막이 나온다. 자막이 내내 좋아했다가 잘 안 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콘텐츠는 영상인가 텍스트인가? 이렇게 물어보자. 만일 액괴 영상에서 텍스트를 모두 빼버린다면 영상만 보고 이것이 무엇에 대한 내용인 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불가능하다. 하지만 십 대들에게는 영상에 포함된 텍스트는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인식된다. 글씨까지가 영상인 셈이다.
   에세이의 시대는 그 ‘관계성’에 방점이 찍힌 글쓰기에 최적화되어있으며, 보통의 경험과 공감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가르쳐 온 전문가의 조언보다 높은 선호를 받게 한다. 지식의 종언인가. 에세이는 원래 학술서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전문가의 시대를 누가 열었을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환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의사, 가짜뉴스 같은 지상파 뉴스, 환경파괴 정책을 자문하는 교수, 주례사비평을 하는 평론가. 이전에 문자화된 지식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던 이들은 소수였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권위와 문자는 분리되는 중이다. 읽고 쓰기, 혹은 쓰고 읽기는 이전 어느 때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이다혜

자유주제의 산문이라면, 요즘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에세이의 유행 그 자체에 대해 쓰면 어떨까 싶어 시작했다. 분석하는 글쓰기와 공감하는 글쓰기가 앞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서로 더 닮아가거나 완전히 결별하게 될지 궁금하다.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