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의 이름은 병욱이라. 자기 말을 듣건대 처음 이름은 병옥이었으나 너무 부드럽고 너무 여성적이므로 병목이라 고쳤다가 그것은 또 너무 억세고 남성적이므로 그 중간을 잡아 병욱이라고 지은 것이라 하며 영채더러 하루는,
   “병욱이라면 쑬쑬하지요. 나는 옛날 생각과 같이 여자는 그저 얌전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은 싫어요. 그러나 남자와 같이 억세고 뻑뻑한 것도 싫어요. 그 중간이 정말 여자에게 합당한 줄 압니다.” 하고 웃으며, “영채, 영채…… 어여쁜 이름이외다. 그러나 과히 여성적은 아니외다.”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집에서는 병욱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병옥이라고 부른다. “병옥아.” 해도 대답은 한다.1)


   한국문학 최초의 장편소설로 일컬어지는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시기는 1917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00여 년 전에 씌어진 『무정』은 영채와 선형을 두고 남성 주인공 이형식이 겪는 내적 갈등을 그린, 일종의 삼각관계 연애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정』이 단순한 연애소설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형식의 선택이 갖는 역사적이고도 상징적인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전근대적인 유교적 세계관에 얽매어 있는 영채를 선택할 것인지 근대적 교육을 받고 형식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기로 한 약혼자 선형을 선택할 것인지를 두고 갈팡질팡 고뇌하는 형식의 내면은, 봉건적 과거와 근대적 미래의 기로에 서 있던 당대 청년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던 문화사적 풍경인 셈이다.
   형식, 영채, 그리고 선형이라는 3명의 인물을 중심축으로 『무정』의 내면적 드라마가 개진되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김병욱이라는 여성 인물이다. 과장을 무릅쓰고 말하거니와 이념적인 차원에서 『무정』의 근대적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 성장에 있어서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해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병욱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적은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무정』의 후반부 서사를 돌이켜보면 병욱이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과 서사적 중요성은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신여성 병욱은 순결을 잃고 자살하기 위해 평양으로 향하는 영채에게 “영채씨도 이러한 낡은 사상에 종이 되어서 지금껏 속절없는 괴로움을 맛보셨습니다. 그 속박을 끊읍시오. 그 꿈을 깹시오”(342쪽)라고 말하며 그녀를 계몽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존재이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유학길에 오른 형식 일행이 삼랑진 수해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 수 있도록 한 기획자, 즉 ‘예술을 통한 계몽’이라는 『무정』의 주요 의제를 직접적으로 설파하는 능동적 주체이기도 하다. 주변 인물 병욱이 『무정』의 서사적 대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 성숙도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은 쉽게 간과하기 어려운 질문을 낳는다. 주인공인 형식을 비롯하여 『무정』의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성격적 결점을 지니고 있으며, 어딘가 미성숙한 인물들이라는 점(그리하여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병욱이 이미 성장을 이뤄낸 인물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이광수가 가정하는 근대인의 완성형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광수가 자신의 근대적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신‘여성’인 병욱이라는 캐릭터를 고안하게 된 이유, 병욱이라는 여성이 이광수의 자아 이상(ego-ideal)에 해당하는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일까?
   우선 여성에 대한 당시 이광수의 특별한 계몽적 관심을 염두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정』을 쓸 무렵 청년 이광수는 ‘여성의 지위 제고’ ‘조혼 악습 타파’ 등을 주장하며 여성 해방을 자신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주요한 핵심적인 테마로 다룬 바 있다. 물론, 그의 여성관은 오늘날의 여성주의(또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많은 한계점들을 노정하고 있었던 것 역시 명백하다. 여성에 대한 이광수의 관심이 계몽주의의 하위 범주에 불과했던 측면이 다분하다는 점, 다시 말해 여성 해방이 근대적 기획을 위한 하나의 도구적 단계로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무정』의 서사 전반에서도 잘 드러나니 말이다. 가령, 형식의 각성을 도모하는 서사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영채를 강간의 희생자로 전락시키는 장면이나, 당대의 기생들을 재현하는 대목들은 이광수의 서사 역시 시대적(혹은 젠더적) 한계에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드러내주는 징표들이다.
   병욱을 근대적 여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묘사하기보다 차라리 무성적인 존재에 가까워 보이도록 설정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병욱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적지 않은 의문점들을 남긴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서두의 인용문처럼 병욱은 부모에게 부여받은 이름인 ‘병옥’이 지나치게 여성적이라 하여 거부한다. 아마도, 이름에 각인되어 있는 당대 여성의 운명을 스스로 끊겠다는 주체적 결단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남성의 이름도 거부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병목’이 지나치게 남성적이라서 싫다는 병욱의 심리를, 그녀의 새로운 이름을 여성과 남성의 “중간”에 위치시켰던 이광수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성성의 어떤 측면들 역시 계몽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젠더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성인 병욱이 온전한 남성, 이른바 근대적 주체의 이름을 획득하는 것을 이광수가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일종의 중간자적 존재로 한정시켜버린 것일까?
   물론 병욱이라는 캐릭터를 고안해낼 당시 이광수가 지니고 있었던 진의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이광수의 기획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적 범주를 초월한 중성성(또는 무성성)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과장일 것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추가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해 보인다. 이를테면 여성이지만 스스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하려고 했던 인물 병욱, 『무정』에서 가장 완성형의 주체에 가까운 병욱에게서 그 어떤 내적인 갈등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무정』이 그려내기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노력했던 인물들의 마음이 어째서 병욱에게서는 잘 엿보이지 않는지에 대한 서사적 의문으로도 연결된다. 문학사적으로 『무정』의 핵심적인 미학적(또는 소설적) 차별성은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소설적 무대, 즉 내면의 형식을 창설한 것에 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병욱이라는 근대인은 그 내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 캐릭터로서 어딘가 특이하고, 한편으로는 부족한 존재이기도 하다. 병욱에게는 고뇌가 없고 내면이 없으며, 따라서 소설적 인물로서 매력을 지니지 못한다. 그간 『무정』에 대한 수많은 문학사적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병욱의 존재가 뚜렷하게 주목받지 못한 것도 한편으로는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해보면, 병욱의 존재는 이광수가 지니고 있던 상상력의 한계를 징후적으로 암시하는 존재처럼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정』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이광수가 인물들의 내면을 그려낼 때 그가 여전히 경험적으로 익숙한 전통 서사와 인간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봉건 윤리에 충실한 영채, 서구 문명과 신학문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하는 선형, 근대적 지식을 습득했으나 이를 내적으로 충분히 체화하지 못한 형식의 마음을 조망하는 것은 이광수에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인간형들이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즉 이광수라는 자아의 파편적인 분신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된 근대 여성으로서의 병욱은 사정이 다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근대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광수에게 병욱이라는 여성은 자신의 인식적 한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 즉 모든 역사적 한계를 넘어선 미래의 접근 불가능한 내면을 가진 판타지적 주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무정』에서 드러나는 서사적 무능은 그 자체로 『무정』의 젠더적 무의식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무정』의 근대적 기획은 여성 해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은 여전히 남성 지식인의 계몽주의적 기획 속에서 한정적으로 가시화 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영채를 구원하는 인물이 여성이면서 또한 봉건적 여성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이광수가 설정했다는 사실은 그 같은 근대적 해방의 주체가 온전한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는 것, 즉 여성과 남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구분 위에서 재현될 수 없는 존재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처럼도 읽힌다. 영채를 구원하는 것은 남성 지식인 형식이 아니라 여전히 여성인 병욱이다. 그러나, 영채를 근대적 세계로 안내하는 병욱이라는 새로운 인간, 남성이 아닌 지식인 청년 병욱의 여성적 내면을 이광수가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병욱이라는 존재가 노정하는 서사적 한계는 근대를 욕망하는 남성 지식인 이광수가 직면하고 있는 인식적 한계이자, 소설사적 한계를 설명해주기도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영채를 구원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병욱이 수행하지만, 이러한 병욱이 어떤 존재인지 이광수는 끝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성 중심의 봉건적 질서 체제를 해체하고, 사람들을 문화적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는 병욱은 과연 여성인가, 아니면 젠더적 범주를 넘어선 인물이어야 했을까? 과연 병욱은 누구인가? 그리고, 병욱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무정』이 제기했지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주체, 내가 『무정』의 젠더적 무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병욱의 의미를 규명하는 일은 이광수 이후의 작가들에게 남겨진 문학사적 과제였다.


강동호

문학평론을 씁니다. 한국문학사에서 여성이 재현되고 상상되는 양태들을 해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최근의 관심사입니다.

2019/02/26
15호

1
이광수, 『무정』, 문학과지성사, 2005, 345~346쪽. 이하 본문에서 『무정』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을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