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소설과 사상》 1994년 여름호)는 소비대중문화시대라고 명명되는 1990년대 문화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각인되어왔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94년은 사회적으로도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7월)과 한강 성수대교 붕괴(10월)가 일어났던 해기도 하다. 당시 문민정부의 출범 이후 문학예술 산업은 자본과 제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풍요 이면에는 일상의 삶 속에서 체감되는 상대적 빈곤과 모순의 문제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배수아의 소설이 포착하는 도시 일상의 황막한 공간은 이러한 전환기 한국사회의 한 풍경을 일정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백화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십대 여성이 남자친구와 한적한 국도를 드라이브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대학을 그만둔 채 집을 나와 취직한 후 스스로의 생계를 꾸려가는 중이다. 가족서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배수아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분명한 사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여자 의사나 동시통역사, 하다못해 번듯한 오피스 걸조차도” 될 자신이 없었던 주인공은 “아버지나 오빠 같은 남자와 결혼하여서 친정에서 김치를 가져다 먹으면서 끊임없이 애를 낳으면서, 시집간 사촌언니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고 일찌감치 결심한다. 그녀가 보여주는 결혼 제도에 대한 냉소적 반응에는 ‘봄바람 같고 한여름 날의 폭우 같은 사랑’이 더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일상 현실에 대한 비판과 거부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에 흐르는 불안의 정서는 독신 여성이 감당하는 실질적인 고독과 빈곤의 삶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은 “주변의 여학교 동창들은 결혼을 하거나 대도시의 커리어우먼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녀를 감싸는 불안과 허무의 감정은 주변 친구들의 삶에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스며들어 있다. 일상의 안정과 물질적 안락을 적절히 추구하려는 삶 속에도 공허와 허무는 깃들어 있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친구 역시 자신을 사로잡을 강력한 사랑의 감정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원하지만 결국 일상에 적응해서 살아간다.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한여름의 거리로 뛰쳐나오던 불타는 뺨을 가진 소녀”였던 사촌 역시 주인공의 눈에는 어느 순간 생기를 잃어버린 얼굴로 다가온다. 내무부의 공무원과 결혼했던 동창 소영은 단단하고 견고한 주방 가위로 손목을 그어 자살하고 만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친구들 역시 모호하고 막연한 삶의 불안 앞에서 각자의 포즈로 서 있을 따름이다. 이들을 잠시나마 묶어주는 것은 ‘눈 오는 한밤의 유원지’ 같은 공간에서 만났던 한밤의 아스라한 기억들뿐이다.
   여성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배수아 소설은 새로운 세대의 풍속과 가치관을 담아내면서도 ‘여성의 내면’에 대한 현재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90년대 소설을 읽는 당시 비평의 관점을 주도했던 것은 ‘공동체’와 대조되는 ‘개인’, 혹은 이념적 명분에 대조되는 ‘내면성’에 대한 부각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과 ‘내면성’에 방점을 둔 당대의 비평 담론은 여성적 자아를 바깥 세계와 고립된 ‘사적인’ 것으로 가두는 해석의 문제점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 소설사의 맥락에서 되짚어보면, 배수아 소설은 자기고백적인 후일담과도 거리를 두면서도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하는 중산층 여성의 욕망과도 변별되는 독특한 고립의 감각을 보여준다. 독립 이후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인 불안은 화려한 백화점 공간의 브랜드들 속에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의 문제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장래를 약속하지 않는 남자와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주인공이 은연중에 느끼는 위축감 역시 이러한 안온한 중산층 일상과 자신의 삶이 갖고 있는 분명한 격차에서 기인한다.
   주인공의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국도에서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은 일상의 불안과 슬픔 속에서 발견한 자기 반영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그녀는 스물다섯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을 때, 낯설고 작은 도시의 초라한 거리 길가에서 만난,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들에게서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바라본다. “종이봉투에 담긴 푸른 사과를 팔면서” “밤이 어두워지면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듯이 하며 낮은 산들 너머 강가의 집으로 들어가는 나의 뒷모습”은 불투명한 시제 속에서 끊임없이 뒤섞여 나타나는 내면의 환영이다. 물론 주인공의 기억이 끊임없이 호출하는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이 본질적으로는 소비적 일상 그 자체가 산출한 시뮬라크르의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도 분명하다. 고단한 삶에서 오는 적대감과 불안을 담고 있는 여인의 환상은 그 자체의 실존적 이미지라기보다는 오래된 흑백영화, 로맨스 소설, 옛날 동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떠도는 가상적인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영원히 가지 못할 먼 데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짠 두꺼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있을 것 같은” 환상은 소비일상의 감각적 문화가 산출한 나르시시즘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에 뿌리를 대고 있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는 배수아 소설의 중요한 장면을 만들어낸 공간인 동시에 ‘90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젊은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배수아 식으로 표현하면 ‘블루’라는 색깔 자체가 90년대의 일상을 포착하는 시각적 기호이다. 불안과 결합된 푸른색의 이미지는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일탈과 탈주의 욕망을 담아낸다. “푸른 사과를 팔고 있던 여인의 무표정하고 건조한 눈동자, 그 여인의 낯설음과 황량함에 가슴 떨려 하면서 종이봉투에 든 푸른 사과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스케치북에 푸른 색연필로 그 사과를 그렸”던 주인공은 지금도 그 이미지를 쉽게 지우지 못한다.


   나는 공항에서 그에게 푸른 사과가 있던 국도에 대해서 물어봤어야만 했었다. 그러면 그는 기억을 되살려 대답해주었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만 하는 곳이야. 근처에 강이 있고 호수도 있지. 국도로 접어들면 바다로 가는 길 쪽으로 곧바로 가면 돼. 방 안의 테이블 위에서 여러 가지 주방용품들과 초콜릿 조각과 캔 커피 사이에서 헹켈 가위가 변함없이 반짝였다.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캔에 반쯤 남아 있던 미지근해진 캔 커피를 마셨다. 새벽이 이제 오려고 하는 마지막 여름의 어둠을 향해서 나는 속삭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섹스의 기쁨도 모르고 사랑의 감동도 없다. 멀리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산한 먼지바람 속에 서 있다. 초록빛 강물 냄새와 오래된 풀잎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바다로 가는 길이 이쪽인가요, 하고 차를 멈추고 여행자들이 내게 묻는다. 바람이 나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길가의 키 큰 마른 풀들을 눕게 한다. 그들의 차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이 요란하고 그들은 푸른 사과를 산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소설과 사상》 1994년 여름호)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감흥이 없는 섹스를 마친 후 홀로 깨어 있다.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놓은 견고한 헹켈 가위는 남자친구가 가져온 초콜릿과 선물들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다.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의 황량한 이미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타인의 기준에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자기만의 고독과 환상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에서 현재적으로 와닿는 생생한 고독의 감각은 세속적 일상과 구분되는, 자기만의 고독과 환상을 미학화하는 단호한 태도에서 구축되는 것이라고 봐도 좋겠다.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을 전환점으로 글쓰기의 욕망을 통해 고독의 탐색을 심화해가는 배수아 소설의 방향은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예시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시공간의 여성주체를 그려나가는 개성적인 방식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정이현 소설, 김애란 소설과도 연결되면서 ‘도시와 여성’의 문학적 계보를 새롭게 읽게 만든다.



백지연

한 인물의 생애를 해석하는 전기적 글쓰기에 매력을 느껴 비평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6-70년대 한국문학 작품과 90년대 문학사 자료를 읽고 공부하는 중이다. 최근 새롭게 부각되는 페미니즘 이슈와 연관하여 삶의 현장과 적극적으로 호흡하는 문학비평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