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304 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304번 열리는 낭독회다. 2014년 9월 20일에 처음 모인 이후,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4시 16분에 모여 “오늘은 4월 16일입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2040년 1월이 304번째 낭독회가 될 예정이다. 매월 낭독집을 디자인 하는 박시하 시인에게 ‘공동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일까?


   작가들이 이룬 ‘공동체’라는 개념과 현장을 동시에 접한 것은 시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갓 시인이 되었지만 작가라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이전에 내가 경험한 사회는 종교와 학교뿐이었고 나는 작가를 소설이나 시에 나타난 어렴풋한 상으로만 짐작하고 있었다.
   ‘6.9 작가선언’은 그러므로 나에게는 커다란 발견이었다. 작가들은 모여서 작가선언을 하고,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에 함께 참여했고, 사회적인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퍼포먼스를 할까 궁리했다. 나는 반복되는 긴 회의 속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못하면서 그들을 관찰했고, 자연스레 작가를 일군의 사회적 ‘공동체’―약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로 인식하게 되었다.
   ‘1월 11일’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시인, 소설가)와 디자이너, 심지어 알지 못하는 가수에게까지 메일을 보냈다. 일단 동인이 결성되자 만남을 주선하고 빼앗긴 장소인 홍대 두리반에서 매달, 총 여덟 번의 ‘불킨낭독회’를 열었다. 포스터를 만들어 출력하고 낭독책자를 복사해서 나르고 붙이는 일이 행복했을 뿐, 힘들거나 지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내게 ‘연대’라는 말은 신에 대한 믿음 이후로 가장 강하게 믿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시를 썼다. 골방에 틀어박혀서 쓴 게 아니라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노제에 참석하고 와서, 불킨낭독회에 갔다가 와서 썼다.
   내가 배운 바, 작가는 그런 존재다.

   나는 아직도 작가인 내가 그 공동체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 사라진 장소와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해 말하는 공동체. 때로 실재하기도 하고 부재하기도 하지만, 어디에선가 이어지고 재발견되고, 또다시 잊혀지는 공동체.

   사실,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목소리가 304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사라진, 죽은 이들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기억되어야 하고 불리어야 하는 이름이라는 사실에 그 자리의 모두가 동의했다. 이름들이 또박또박 분명히 발음되는 소리는 마치 어떤 발걸음 소리처럼, 또는 심장박동 소리처럼 들렸다. 모두의 마음이 아프게 뜨거워졌다. 예순번째 304 낭독회가 열리는 자리였다.


예순번째 304 낭독회 소책자


양경언 평론가의 목소리로 낭독된 304명의 이름

   ‘304 낭독회’는 세월호 참사로 사라진 사람들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와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낭독회이다. 그들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낭독회를 열어 총 304번의 낭독회를 하려고 한다. 지난 7월 27일에 예순번째 낭독회가 열렸고, 앞으로 244번의 낭독회가 남아 있다.
   이 낭독회를 위해 일하는(사회를 보고, 회의를 열고, 장소와 낭독자를 물색하고, 새로운 일꾼을 모집하는) 작가들을 그들은 스스로 일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일의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금전적인 보상은 당연히 없지만, 누군가는 그들에게 조금쯤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런 이익도 없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없다는 아주 편협한 전제를 갖고 말이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만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그 일을 한다. 나 자신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쓰는 것은 읽는 것으로, 나아가 살아가는 것으로 연장되고 확장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중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무감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는 단지 이렇게 모여서 낭독을 하고 그 낭독을 듣는 일이 위안이 되어서 낭독회에 오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다를 것이고, 그런 다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작지만 분명한 ‘말의 힘’으로 나아가는 ‘공동체’가 있고 그 공동체는 개별적인 동시에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촌 위트앤시니컬에서 열린 마흔다섯번째 304 낭독회(2018년 5월 26일, 사진 강경석)

   혹시 당신은 글을 쓰는 작가들이 누구보다도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 세계가 확실해야 하는 존재라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고, 혹은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단어에 편견을 가진 것이다. 모두 개별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자기의 글을 쓰지만, 느슨하고도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공동체는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의견을 가졌거나 사상이 다르거나 방식이 다르며, 다른 일상과 다른 사랑과 다른 취향을 갖고 살아가지만, 한 달에 한 번 사라져간 304명의 이름을 함께 부르기 위해 모인다.
   그들의 구호는 언제나 같다.  “오늘은  4월 16일입니다.”  “끝날 때까지끝내지 않겠습니다.”

   혹시 이 공동체가 낯설고 기이하게 생각되는가?


   파괴되지 않은 것이 비록 소수적이고 ‘드물고 기이한’ 방식으로라도 존속한다. (…) 바로 그 ‘발걸음’ 자체에 우리의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그것은 이탈이고, 충돌이며, 지평을 가로지르는 ‘불덩이’이고, 어떤 새로운 형태의 창안일 것이다.

   이것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쓴 『반딧불의 잔존』(김홍기 옮김, 길, 2012)에서 오래전에 내가 줄을 그어놓은 문장들이다.
   예술이 정치적인 역할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작가들이 사회적인 공동의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따지기에 앞서 예술 그 자체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라. 예술은 ‘드물고 기이한’ ‘불덩이’가 아니던가? 문학은 어떤 경우에라도 새로워야 하는 것 아니던가? 혹시 기존의 질서에 부합하고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가? (만약 그런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더운 8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4시 16분, 변함없이 304 낭독회가 열린다. 이제 예순한번째다. 장소를 마련하고 낭독자를 모집하고 그들의 낭독글을 받아 소책자를 만들고 그것을 펼쳐 들고 함께 읽는다. 그것만으로는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을 다시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살려냄-기억함-끝나지 않는 애도가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인가? 예순 번의 낭독회에 함께하면서 지금까지 지켜본 증인으로서, 나는 그것이 어쩌면 같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기억하는 공동체다. 오직 기억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로서 잠시 만나 기억을 공유하고 긴 애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런 후에 각자의 삶을 향해 흩어질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마음과 기억에 304명의 이름을 품고 있다. 그 이름을 사라지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를 나눴고, 다시 나눌 것이다.
   그들은 드물고 기이하고 새롭게, 있다.


박시하

시를 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숨겨진 진실을 쓰는 일을 주로 고민하고 있다. 고양이와 개를 키우고 sf 호러물을 좋아한다. 304 낭독회 일꾼으로 포스터와 소책자를 만들고 있다.

2019/09/24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