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6회 [연결 3] 영향력
기획의 말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튿날이었을 것이다. 한 동료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모여서 뭐라도 해보자고 했다. 작은 액정 창으로도 격앙된 감정이 전해졌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다음 아고라의 게시물들을 읽다가 뉴스를 넋 놓고 보다가 청소를 하다가 문자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결국 그 모임에 나가지 않고 예정되어 있던 라식 수술을 받으러 병원을 향했다.
그날 밤, 꿈에서 그를 보았다. 대통령도 뭣도 아닌 노무현. 그냥 노무현. 그와 나는 동네 친구 같은 사이였고 우리는 한 무리의 일행에 섞여 소풍을 갔다.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과자를 정성껏 따먹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만화책도 읽었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이토록 심심하고 태평한 풍경이라니. 이상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의 흔들리는 잎사귀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또한 이상했다.
그러니까 실은 ‘6.9 작가선언’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이 글을 쓰기로 했고 지금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참석하지 못했던 그 모임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결정된 방식을 따라 나는 나의 한 줄 문장을 보태고 작가선언 당일에 함께 했다. 그것 말고 한 일이라고는 후속 논의를 위해 만들어진 온라인 카페에 가입해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읽은 게 다였다. 행사를 기획한 일군의 동료들은 몹시 분주해 보였다. 겨우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참여자들의 한 줄 문장을 수합하고 낭독 방식을 정하고 선언의 주체와 명칭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고 팸플릿까지 만드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밤샘 회의를 거듭하는 것 같았다. 라식 수술을 받아 갑자기 밝아진 이상한 눈으로, 나는 그들의 열의와 고투를 멀찍이서 지켜만 보았다.
당시 나는 광주에 살았고 작가선언 준비 회의는 서울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쉽게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서이기만 했을까.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던 것 같다. 분명 울분이 치밀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굳이 작가로서……? 구체적인 목표 없이 어떤 실천에 어떻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한 줄 선언을 함께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기보다는 친구들의 부름에 응했다고 하면 될까. 신뢰하는 벗들이 ‘일꾼’을 자처하며 마음을 다해 준비하는 일이었으니까. 6.9 작가선언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그러므로 6.9 작가선언 자체가 아니라, 그 선언이 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것일 테다.
용산 남일당 2013년 1월 모습
작가선언 직후의 실천으로 2009년 한여름에는 용산참사에 대한 릴레이 1인 시위가 있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하는 친구를 응원하러 나가 불탄 건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용산역과 레아호프 사이 땡볕의 거리를 잠시 왔다갔다했다. 겨우 그랬을 뿐이지만, 용산참사에 대한 마음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오는 열차는 용산역에 서고, 용산역에 내리면 남일당 골목에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거나 주변을 서성거리며 변해가는 거리를 눈에 담게 되었다. 그해 초가을에는 나의 두번째 시집이 나왔다. 이런 세계에서 나의 시들이란 뭘까. 갓 나온 따끈한 시집을 책상에 올려두고 해맑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마음이 생각난다.
세번째 시집이 나왔을 때도 그랬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였다. 이런 세계에서 나의 시들이란 뭘까. 도무지 질문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유민 아빠의 단식 투쟁을 조롱하는 ‘폭식 투쟁’ 사태가 벌어졌던 그해 여름, 나는 다시 한 동료에게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뭘 해야 하지 않을까. 뭐라도 해야지. 몇 번의 회의를 통해 그런 이야기들이 오간 끝에 5년 전의 6.9 작가선언을 모델로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 한 줄 문장으로 참여하는 304 낭독회가 기획되었다. 6.9 작가선언의 경험이 없었다면, 체계적 조직 없는 느슨한 연대의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현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304 낭독회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비슷했지만 304 낭독회는 6.9 작가선언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한 달에 한 번씩 5년째 계속되고 있고 현재와 같은 방식이 유지된다면 앞으로 20년 정도 더 이어질 것이다. 나도 6.9 작가선언 때와는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굳이 작가로서……? 같은 의문은 접어버렸다. 안산에는 아이들의 사진이 있었고 광화문광장과 진도에는 유가족들이 있었다. 영석 엄마와 순범 엄마가 건네준 포도와 떡을 먹었고 결의에 찬 경주 엄마의 눈빛을 가까이서 보았으며 호연 엄마와 손을 잡고 호연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낭독회가 3년째로 접어들었던 어느 날, 행사를 마친 후 근처 편의점 앞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몇 명이 둘러앉아 맥주를 마셨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좋게 부는 밤이었으니 봄이거나 가을이었을 것이다. 웃고 떠들며 거리를 오가는 활기찬 사람들을 구경하다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정권이 바뀌고 세월호가 인양된 후였다. 3년이 흘렀다. 낭독회에 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새 일꾼을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시점이었다. 어느새 나도 낭독회의 운영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었고 몇 명의 성실한 동료들이 과부하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거리의 소음을 배경으로 잠시 침묵이 돌았던가. “선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조용하고 단호하게 입을 연 건 낭독회를 가장 오랫동안 열심히 챙겨왔던 동료였다.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진상 규명이 다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가 그만둘 수는 없다고.
그 말이 나는 슬프고 뜨거웠다. 그리고 용기가 되었다. 정말 304회를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지레 걱정과 회의가 앞섰지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그냥 하겠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세월호로 향하는 마음은 엷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두세 명이 겨우 모여 2014년 4월 16일의 304명을 추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어간다. 왜냐하면,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간신히 말을 찾았을 때 어렵게 찾은 그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문득 떠올랐을 때 그 떠오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 할말이 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더 이어질 말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자리.
네번째 304 낭독회(2014년 12월 27일)
304 낭독회 소책자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폭력, 위계, 혐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 적혀 있다. 2016년 12월 31일, 스물여덟번째 낭독회에서부터 추가된 문구다. 그해 가을 SNS를 통해 이루어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영향이었다. 낭독자 중에는 명백한 가해 사실이 밝혀진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국가의 폭력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문학의 장에서 발생한 폭력을 시야 밖으로 밀어둘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또 막연한 절박함으로 그 무렵 열 몇 명의 동료들이 모여 ‘페미라이터’라는 연대체를 만들었다. 조직화하지 않고, 의사 결정의 위계를 두지 않고, 우리가 몸담은 세계의 성폭력·위계폭력을 거절하는 열린 장소를 머릿속에 그렸다. 작가서약 운동을 시작했고 700여 명이 서약에 동참했다. 6.9 작가선언과 304 낭독회가 꾸려지던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가. 다른 동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내 몫의 의견을 낼 때는 적어도 그랬던 듯하다.
연대체 페미라이터는 채 6개월이 안 되어 해산을 고했다.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지만, 일단은 직접민주주의의 쓴맛을 절감했다 하면 될까. 누군가는 짧고 굵게 당장 눈앞에 있는 피해자와 연대하고 싶어했고 누군가는 장기적 안목으로 문학출판계의 체질 변화를 모색하려 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문학의 장소를 만들고 싶어했고 누군가는 실질적인 성폭력 대응 기구를 먼저 마련하고 싶어했다. 6.9 작가선언과 304 낭독회에서는 각자가 각자의 대표로 서면서도 한마음으로 모일 수 있었는데, 문학 현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연대자의 마음과 당사자의 마음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싸워야 할 대상은 국가나 정권이나 자본주의 같은 것이 아니어서 추상화나 간접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해와 피해에 얽힌 이들이 모두 가까이에 있었다. 나 자신도 어느 쪽으로든 자유롭지 않은 탓에 매 사안이 구체성으로 육박했다. 어렵고 뜨거웠다. 그 어렵고 뜨거운 구체성과 대면하는 ‘공동’의 방식을, 열린 연대체이고자 했던 페미라이터는 찾아내지 못했다.
페미라이터 작가 서약
단서를 붙여야 한다. 실패한 것은 페미라이터가 그룹으로서 도모했던 방식이라고. 그 실패로 인해 오히려 개개인으로서의 페미라이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지 않나. 나는 그렇게 믿는다. ‘공동’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공동’의 속박에서 벗어나, ‘각자’의 역량과 기질에 맞는 방법과 속도로, ‘각자’와 ‘각자’가 연결되는 보다 유연한 고리를 찾아, 다른 문학과 다른 시스템과 다른 삶을 향해 움직인다. 성찰을 거친 ‘각자’의 방식이 축적되어 접속의 표면적이 넓어질 때, 단단하되 경직되지 않은, 유연하되 나약하지 않은, ‘공동’의 다른 가능성을 언젠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각자’의 방식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데에 지금은 인색해지지 말아야 할 시간일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튿날이었을 것이다. 한 동료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모여서 뭐라도 해보자고 했다. 작은 액정 창으로도 격앙된 감정이 전해졌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다음 아고라의 게시물들을 읽다가 뉴스를 넋 놓고 보다가 청소를 하다가 문자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결국 그 모임에 나가지 않고 예정되어 있던 라식 수술을 받으러 병원을 향했다.
그날 밤, 꿈에서 그를 보았다. 대통령도 뭣도 아닌 노무현. 그냥 노무현. 그와 나는 동네 친구 같은 사이였고 우리는 한 무리의 일행에 섞여 소풍을 갔다.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과자를 정성껏 따먹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만화책도 읽었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이토록 심심하고 태평한 풍경이라니. 이상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의 흔들리는 잎사귀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또한 이상했다.
그러니까 실은 ‘6.9 작가선언’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이 글을 쓰기로 했고 지금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참석하지 못했던 그 모임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결정된 방식을 따라 나는 나의 한 줄 문장을 보태고 작가선언 당일에 함께 했다. 그것 말고 한 일이라고는 후속 논의를 위해 만들어진 온라인 카페에 가입해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읽은 게 다였다. 행사를 기획한 일군의 동료들은 몹시 분주해 보였다. 겨우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참여자들의 한 줄 문장을 수합하고 낭독 방식을 정하고 선언의 주체와 명칭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고 팸플릿까지 만드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밤샘 회의를 거듭하는 것 같았다. 라식 수술을 받아 갑자기 밝아진 이상한 눈으로, 나는 그들의 열의와 고투를 멀찍이서 지켜만 보았다.
당시 나는 광주에 살았고 작가선언 준비 회의는 서울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쉽게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서이기만 했을까.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던 것 같다. 분명 울분이 치밀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굳이 작가로서……? 구체적인 목표 없이 어떤 실천에 어떻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한 줄 선언을 함께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기보다는 친구들의 부름에 응했다고 하면 될까. 신뢰하는 벗들이 ‘일꾼’을 자처하며 마음을 다해 준비하는 일이었으니까. 6.9 작가선언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그러므로 6.9 작가선언 자체가 아니라, 그 선언이 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것일 테다.
작가선언 직후의 실천으로 2009년 한여름에는 용산참사에 대한 릴레이 1인 시위가 있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하는 친구를 응원하러 나가 불탄 건물을 눈으로 확인하고 용산역과 레아호프 사이 땡볕의 거리를 잠시 왔다갔다했다. 겨우 그랬을 뿐이지만, 용산참사에 대한 마음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오는 열차는 용산역에 서고, 용산역에 내리면 남일당 골목에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거나 주변을 서성거리며 변해가는 거리를 눈에 담게 되었다. 그해 초가을에는 나의 두번째 시집이 나왔다. 이런 세계에서 나의 시들이란 뭘까. 갓 나온 따끈한 시집을 책상에 올려두고 해맑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마음이 생각난다.
세번째 시집이 나왔을 때도 그랬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였다. 이런 세계에서 나의 시들이란 뭘까. 도무지 질문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유민 아빠의 단식 투쟁을 조롱하는 ‘폭식 투쟁’ 사태가 벌어졌던 그해 여름, 나는 다시 한 동료에게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뭘 해야 하지 않을까. 뭐라도 해야지. 몇 번의 회의를 통해 그런 이야기들이 오간 끝에 5년 전의 6.9 작가선언을 모델로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 한 줄 문장으로 참여하는 304 낭독회가 기획되었다. 6.9 작가선언의 경험이 없었다면, 체계적 조직 없는 느슨한 연대의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현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304 낭독회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비슷했지만 304 낭독회는 6.9 작가선언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한 달에 한 번씩 5년째 계속되고 있고 현재와 같은 방식이 유지된다면 앞으로 20년 정도 더 이어질 것이다. 나도 6.9 작가선언 때와는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굳이 작가로서……? 같은 의문은 접어버렸다. 안산에는 아이들의 사진이 있었고 광화문광장과 진도에는 유가족들이 있었다. 영석 엄마와 순범 엄마가 건네준 포도와 떡을 먹었고 결의에 찬 경주 엄마의 눈빛을 가까이서 보았으며 호연 엄마와 손을 잡고 호연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낭독회가 3년째로 접어들었던 어느 날, 행사를 마친 후 근처 편의점 앞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몇 명이 둘러앉아 맥주를 마셨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좋게 부는 밤이었으니 봄이거나 가을이었을 것이다. 웃고 떠들며 거리를 오가는 활기찬 사람들을 구경하다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정권이 바뀌고 세월호가 인양된 후였다. 3년이 흘렀다. 낭독회에 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새 일꾼을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시점이었다. 어느새 나도 낭독회의 운영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었고 몇 명의 성실한 동료들이 과부하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거리의 소음을 배경으로 잠시 침묵이 돌았던가. “선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조용하고 단호하게 입을 연 건 낭독회를 가장 오랫동안 열심히 챙겨왔던 동료였다.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진상 규명이 다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가 그만둘 수는 없다고.
그 말이 나는 슬프고 뜨거웠다. 그리고 용기가 되었다. 정말 304회를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지레 걱정과 회의가 앞섰지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그냥 하겠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세월호로 향하는 마음은 엷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두세 명이 겨우 모여 2014년 4월 16일의 304명을 추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어간다. 왜냐하면,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간신히 말을 찾았을 때 어렵게 찾은 그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문득 떠올랐을 때 그 떠오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 할말이 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더 이어질 말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자리.
304 낭독회 소책자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폭력, 위계, 혐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 적혀 있다. 2016년 12월 31일, 스물여덟번째 낭독회에서부터 추가된 문구다. 그해 가을 SNS를 통해 이루어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영향이었다. 낭독자 중에는 명백한 가해 사실이 밝혀진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국가의 폭력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문학의 장에서 발생한 폭력을 시야 밖으로 밀어둘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또 막연한 절박함으로 그 무렵 열 몇 명의 동료들이 모여 ‘페미라이터’라는 연대체를 만들었다. 조직화하지 않고, 의사 결정의 위계를 두지 않고, 우리가 몸담은 세계의 성폭력·위계폭력을 거절하는 열린 장소를 머릿속에 그렸다. 작가서약 운동을 시작했고 700여 명이 서약에 동참했다. 6.9 작가선언과 304 낭독회가 꾸려지던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가. 다른 동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내 몫의 의견을 낼 때는 적어도 그랬던 듯하다.
연대체 페미라이터는 채 6개월이 안 되어 해산을 고했다.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지만, 일단은 직접민주주의의 쓴맛을 절감했다 하면 될까. 누군가는 짧고 굵게 당장 눈앞에 있는 피해자와 연대하고 싶어했고 누군가는 장기적 안목으로 문학출판계의 체질 변화를 모색하려 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문학의 장소를 만들고 싶어했고 누군가는 실질적인 성폭력 대응 기구를 먼저 마련하고 싶어했다. 6.9 작가선언과 304 낭독회에서는 각자가 각자의 대표로 서면서도 한마음으로 모일 수 있었는데, 문학 현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연대자의 마음과 당사자의 마음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싸워야 할 대상은 국가나 정권이나 자본주의 같은 것이 아니어서 추상화나 간접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해와 피해에 얽힌 이들이 모두 가까이에 있었다. 나 자신도 어느 쪽으로든 자유롭지 않은 탓에 매 사안이 구체성으로 육박했다. 어렵고 뜨거웠다. 그 어렵고 뜨거운 구체성과 대면하는 ‘공동’의 방식을, 열린 연대체이고자 했던 페미라이터는 찾아내지 못했다.
단서를 붙여야 한다. 실패한 것은 페미라이터가 그룹으로서 도모했던 방식이라고. 그 실패로 인해 오히려 개개인으로서의 페미라이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지 않나. 나는 그렇게 믿는다. ‘공동’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공동’의 속박에서 벗어나, ‘각자’의 역량과 기질에 맞는 방법과 속도로, ‘각자’와 ‘각자’가 연결되는 보다 유연한 고리를 찾아, 다른 문학과 다른 시스템과 다른 삶을 향해 움직인다. 성찰을 거친 ‘각자’의 방식이 축적되어 접속의 표면적이 넓어질 때, 단단하되 경직되지 않은, 유연하되 나약하지 않은, ‘공동’의 다른 가능성을 언젠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각자’의 방식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데에 지금은 인색해지지 말아야 할 시간일 것이다.
신해욱
시를 쓴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을 어려워하면서도 함께함에서 오는 충만함을 여러 번 누렸다. 그러므로 빚이 있고 빛이 있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