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풍경이 등장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설렘을 느낄 틈 없이 어느덧 여름이 저무는 줄만 알았는데 다행히 늦여름의 더위가 계절을 붙잡는다. 그러니까 아직은 여름. 펼쳐든 책에서 이런 장면을 발견했다.

   “잠수하면 어떤지 알아?”
   할머니가 대답했다. “물론 알지. 다 잊어버리고 뛰어들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다리에 물풀이 느껴지는데, 밤색이지. 물은 맑은데, 머리 위는 환하고 공기 방울도 생기지. 미끄러져 들어가는 거야. 숨을 참고 미끄러져 들어가서는 몸을 돌려서 다시 올라오지. 밖으로 올라와서 숨을 내쉬어. 그러고는 물에 떠 있어. 그냥 떠 있는 거야.”
   ―토베 얀손, 「아침 수영」, 『여름의 책』(안미란 옮김, 민음사, 2019)


   ‘잠수’라는 단어를 말하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든다. ‘ㅜ’ 발음을 길게 빼서 말하다보면 잠수하듯 오랫동안 숨을 참게 된다. 수우우우우우우. 말할수록 점점 더 깊이, 더 아래로 침잠해간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잠수가 가능해졌다. 일상 속 잠수의 기술을 알려주는 몇 권의 그림책을 골라보았다.


   1단계 ; ‘숨 참기’의 이해




   『여름의 잠수』(사라 스트리츠베리 글, 사라 룬드베리 그림, 이유진 옮김, 위고, 2020)는 어느 여름의 서글픈 기억을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 소이의 아빠는 우울증 환자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 슬픔이 거대해지면 어떤 이는 죽음을 생각한다. 몹시 슬프다는 건 가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을까? 개가 있고 나비가 있고 하늘이 있는데. 어떻게 아빠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까? 내가 세상에 있는데.”
   잠수의 주요한 기술은 숨을 잘 참는 것이다. 참고 견디는 방법을 알면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 쉬는 것이 가능하고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있다. 아빠가 다른 세계로 떠나 있는 동안 소이는 병원의 다른 환자인 사비나와 친해지게 된다. 사비나는 항상 가운 안에 수영복을 입고 다니며, 언젠가는 태평양을 헤엄쳐 건널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소이와 사비나는 똑같이 빨간 수영복을 입고 초록 풀밭 위에서 수영 연습을 한다. 소이는 사비나를 통해 다른 세상으로 잠겨 들어가는 방법을 배운다. 아빠의 세계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소이는 그제야 아빠를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잠시 숨을 참고 견디면서 깨닫는다. 잠겨 있다는 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슬픈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잠수는 타인의 세계를, 고통을, 마음을 가늠해보는 일이다. 그런 잠수의 시간이 때때로 우리에겐 필요하다.


   2단계 ; 참지 않고 조금씩 숨을 ‘내뱉기’




   숨 참기를 통해 물속에서 견디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다음은 숨을 조금씩 내뱉으며 편안해지는 것이다. 더 깊은 잠수가 가능해지는 기술이다. 『바다에서 M』(요안나 콘세이요, 이지원 옮김, 사계절, 2020)은 불완전한 감정의 바다를 통과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이 책이 그리는 여름은 어쩐지 쓸쓸하다. 텅 빈 모래사장,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뒤지는 갈매기들, 물속에 담근 발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시린 기운까지.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해변의 풍경 가운데 바다처럼 깊고 푸른색 눈을 가진 소년 M이 있다. M은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한 아이다. 어떤 말이든 내뱉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고, 욕하고 싶지만 아무 감정도 끌어내 표현할 수가 없다. 반면 바다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파도를 보내고 제멋대로인 모습이다.
   가끔 M은 ‘내가 바다라면’ 같은 가정의 상상 속으로 빠진다. 같은 모양을 만들지 않는 파도, 격정적으로 보이는 거친 물살, 꽃밭같이 따뜻한 빛을 품은 윤슬까지. 바다는 한 순간도 똑같은 풍경을 만들지 않는다. 끝없이 바뀌는 모양처럼 소년의 마음도 그렇다. 이제 소년은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외친다. 거센 파도 같은 외침은 반대편의 누군가를 향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과도 같다. 소년의 은밀한 내면 속의 고독과 외로움, 슬픔이 드러난다. 불안하고, 화나고, 슬픈 감정의 물결들은 파도에 부딪쳐 뜨거운 여름을 부순다. 그러고 나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품은 바다를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숨을 참을 때 느끼는 가슴의 고통이 사라지고 물속에서 조금씩 숨을 내뱉는 게 자연스러워지듯 변덕스러운 파도 같은 소년의 마음도 점점 의연해진다. 소년은 그렇게 나만의 바다 앞에서 성장한다.


   3단계 ; 온몸으로 자유롭게 ‘즐기기’




   목욕탕의 잠수는 조금 특별하다. 수영복도 없이 발가벗은 채로 들어가야 하니까. 온전히 맨몸으로 자유롭게 즐겼던 잠수는 언제였던가. 『장수탕 선녀님』(백희나, 책읽는곰, 2012)은 그렇게 어린 시절의 나를 소환한다. 푸르스름한 새벽녘 엄마와 손을 잡고 갔던 오래된 목욕탕. ‘장수탕’에서 덕지는 자신이 선녀라고 하는 이상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덕지에게 폭포수 아래서 버티기, 바가지 타고 물장구 치기, 탕 속에서 숨 참기 등 냉탕에서 노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준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덕지와 할머니가 마주보며 서로의 손을 붙잡고 냉탕 속에서 잠수하는 모습이다. 목욕탕에서의 잠수는 냉탕에서만 가능하며 탕의 온도에 익숙해지면 물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같달까. 잠수의 마지막 관문은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며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손과 발이 쪼글쪼글해 질 때까지 목욕을 하고 나오면 달콤한 보상 ‘요구르트’가 주어진다. 덕지는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에게 양보한다. 덕분에 덕지는 감기에 걸려 열이 올랐을 때 물수건 대야를 통해 나타난 할머니의 손을 통해 차가운 기운을 선물 받는다. “덕지야, 요구룽 고맙다. 얼른 나아라.” 이토록 다정한 온기. 그리고 잃어버린 즐거움을 그림책의 세계에서 다시 찾는다. 몸을 감싸는 축축하고 따뜻한 공기와 특유의 쌉싸래한 목욕탕 냄새를 말이다.


   잠수에 대한 상상을 이어가는 동안, 영화 <워터릴리스>에서도 잠수의 장면을 마주했다. 한 소녀는 싱크로나이즈드 선수고 다른 소녀는 그런 소녀를 동경하며 지켜본다. 바라보기만 하는 소녀에게 싱크로나이즈드를 하는 소녀는 물속에서 보면 동작이 더 잘 보인다고 말한다. 그 말대로 지켜보던 소녀는 잠수를 하고 알게 된다. 마치 백조의 헤엄처럼, 물 위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물 아래에는 노련하고 치열한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걸.
   잠수는 한 세계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연결시키는 행위다. 세계가 연결되면 또다른 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잠수에 도전하려고 한다.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초처럼 부유하며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을 가능한 많은 당신들과 함께하고 싶다.


유지현

작고 여린 세계를 돌봅니다. 때때로 자주 가라앉고 싶다. 장래희망은 잠수를 잘하는 할머니.

2020/09/29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