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각자의 정부

   모임이 처음 만들어질 무렵, 온라인 카페에 ‘이런 정치적인 일로 각자가 정부인 작가들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각자가 정부’인 ‘작가들’이라니!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더라도, 당시의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뿜어대는 절박한 분노와 열기, 그 사이로 딱 그만큼의 농도로 스멀스멀 퍼지던 어색한 분위기를 이처럼 잘 담아낸 말은 없어 보인다.
   2009년 초여름, 작가들이 온라인상에서 모였을 때 지구상에 존재하는 정부의 개수만큼이나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이 오갔다. 말하자면, 총론은 같았으나, 각론은 모두 다른 형국이었다고 해야 할까.

   N개의 각론들

   대략 두 가지가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나는 ‘작가’의 정치성에 대한 각자의 입장차였다. 지배담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대항과 그 실천적인 ‘운동’을 ‘정치성’의 핵심으로 보는 작가들 쪽에서 보면, 이 모임의 구성원들 중에는 그 마음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작가들도 분명 있었으리라. 온라인상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어서 딱히 누구를 겨냥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우리 내부의 어떤 자의식과 괴로움을 찌른 것은 분명하다. 우리 중 누군가―오래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역시 내가 올 자리는 아니었어.’라고 발길을 돌린 사람도 있었으니.
   더 본질적인 고민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작가로서 우리가 모였는데 그렇다면 시민으로서 모인 것과는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등등 작가에 대한 특권적이고 예외적인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현대 이후, 내내 문학을 따라다닌 질문이 바로 이 자리에서도 소환되었다.
   어쩌면 멋진 각론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문자 작가가 아니라 소문자 작가들이 각자의 실천 속에서 실험해야 할 영역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은 당면 과제에 집중하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그것이 내적으로 잘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위계 없는 익명의 모임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각자가 가진 재능의 크기로 사회적 포지션이 결정되는 문학사회의 특성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웠는지에 대해서도.

   쓴다는 것

   내가 겁이 더럭 나기 시작한 것은 미디어에 용산참사에 대한 기고문을 쓰기로 한 이후부터이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와 같은 그럴싸한 존재론적 뇌내(腦內) 망상이 싹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감 날짜가 촉박한 상태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고민은 “무엇을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거듭났다. 사진이나 그림과 같은 이미지 예술의 ‘재현’과는 달리 언어를 매체로 하는 글쓰기는 사건에 대한 해석과 첨언이라는 간접화의 방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용산의 남일당 현장에서 유가족을 만나고 나서, 여섯 달째 영안실 냉동고에 보관된 채로 묻히지 못한 시신의 천구식날 순천향병원에 있으면서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습관처럼 슬픔을 과장하려는 태도와 자꾸 아름다워지려는 나의 언어들에 대해. 그리고 관찰자 시점의 글쓰기가 갖는 절반의 자기 위안과 절반의 무력감에 대해. 훗날 단원고 학생의 생일시를 쓰면서 나는 나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는 이런 시를 쓰면 안 되겠구나.’ 최선을 다해 쓴 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을 다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는 계속 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리반 불킨낭독회’에 있던 날이었다. 동료의 시는, 아름다움 안에 강인한 뼈대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단 한 사람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쓴 시가 만인의 마음을 요동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장 유약한 언어가 그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다른 세계로 세차게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느덧 공동체는 희미해지고, ‘듣기의 공동체’ 안에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익명의 독자로 앉아 있었던 그 순간이 분명히 떠오른다.

   광장에서

   참사가 있은 지 1여 년 후, 서울역 광장에서 영결식이 이루어졌다. 그때 우리가 어떤 깃발 아래 있었는지, 아님 깃발 없이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보다 한 뼘은 큰 A가 내 정수리와 귀밑 흰 머리를 보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내 친구들이 어느덧 늙었구나.” “그럼, 이제 우리도 마흔이 되었는걸.” 취재 온 신문사 기자가 나와 내 옆에 있던 B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는 아마도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었는지를 묻는 것이었으리라. “저는 A시에서 온 K씨에요.”라고 말했고, 내 옆에 있던 B도 “C시에 사는 B씨”라고 짧게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빙그레 웃었다.
   당시에 작가들이 쓴 시와 에세이, 기고문에서는 ‘부끄러움’ ‘무력함’ ‘부질없음’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아마도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러 그 단어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나의 복잡한 내면을 건너고 싶었던 거겠지.
   여하튼 서울역 광장에서 나는 어쩌면 다음번에는 나와 B―우리, 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유일하게 우리가 같이 있던 시간은 그때뿐이었다. 그후에도 우리는 간간 스쳐갔지만 반갑게 인사할 뿐 서로 연락처도 모르는 깍듯한 사이가 되었다.

   선언이라는 무게

   선언이라는 결연한 형식이 주는 무게에 나는 지레 짓눌려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시절에 카프 시를 읽으면서, 나는 작가들의 공동체가 으레 존재하며, 이상적 형태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총론이 있다면 마땅히 각론은 뒤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총론도 각론도 없다. 다만,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내부의 다양한 불화를 품은 형태로 존재할 거라고, 그래야만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현실과 부딪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하고도 막연한 생각만 든다.
   이 지면이 주어져야 마땅한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적인 이유들로 문학 바깥으로 떠난 망명 정부들의 이름과 함께.


김경인

2001년에 《문예중앙》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전쟁기에 출간된 잡지 읽기가 요즘의 관심사이다. 시를 쓸 때마다, 내일부터는 열심히 시를 써야지, 그래서 좀더 나은 시인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좀더 나은 시인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다보니, 생각은 많고 시는 잘 못 쓴다. 내일부터는 열심히 시를 써야지.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