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접속〉은 1997년에 개봉했다. 전도연과 한석규 주연으로 PC통신으로 대화를 나누던 남녀가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집엔 컴퓨터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전문가나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신문물이었다. 말하고 나니 내가 퍽 옛날 사람인 것 같아 멋쩍지만 그땐 그랬다. 2000년을 몇 해 앞둔 세기 말의 술렁이던 분위기, 기계를 매개로 ‘접속’이란 말의 찬 어감과 ‘사랑’의 속성이 묶일 수 있다는 데 놀라워 한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접속〉의 이야기를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다. PC통신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은커녕 집에 컴퓨터도 없었으니까. 기기에 접속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고는 믿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는 집집마다 한 대씩 놓이는 보급형 기기가 되었고, PC통신 전용선이 개발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채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처럼 ‘이미지’ 중심으로 소통하고 어디에서든 실시간으로 방송을 할 수 있으며, SNS 등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을 볼 수 있게 되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던 때다.
   내 상상으로 당시 우리의 ‘접속’은 통신 회로망을 손에 쥔 거인이 이쪽과 저쪽을 잠깐 이어 붙여놓은 ‘순간’처럼 느껴졌다. 거인이 손을 놓으면 연결고리가 후드득 끊어져 저쪽을 그리워하게도 되는…… 기술문명에 무지하고 허황된 생각을 하던, 내 옹색한 상상력이 그랬다. 전화망을 빌려야 했기에 통신망에 접속하면 집 전화는 불통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부모에게 욕을 먹고 등짝을 맞았던가. 비싼 전화비에 분통을 터트린 학부모가 통신망 선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일도 흔했다. 그러나 그때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여건을 만들어 접속했다! ‘접속’을 위해 늦은 밤을 기다리고 새벽을 다 썼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24시간 내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바라보면 우스운 이야기인가?

   한석규와 전도연이 나온 1997년의 〈접속〉과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열렬해진(?) 2020년의 ‘접속’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2020년은 ‘행동이 가난했던 해’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전염력이 강한 ‘코비드19’ 대유행으로 사람 간의 만남과 사회활동이 저지되던 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어 지겹도록 듣던 해. 아기부터 노인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거리를 다니지 못하던 해.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각자의 방으로 칩거해야 했던 날들로 기억되리라.
   물론 우리는 접속했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말을 걸고, 영상을 보내고, 이미지를 클릭하고,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더 열렬히 만나고 엮이었다. 그러나 이런 ‘접속’을 접속이라 할 수 있을까? 이어져 닿을 필요 없이, 늘 가동되는 상태라면? 일상이라면? 오히려 대면 만남이 접속 상태고, 인터넷 연결은 명멸(터치로 스마트폰의 켜고 꺼짐을 상상해보라)의 지속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지속되면, 명멸은 명멸이 아니다. 명멸에 속도가 붙으면 영원히 켜지거나 영원히 꺼진 상태와 같을 게다. 무엇이? 접속이.

   집에 앉아 온라인으로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을 해결하다보면 내가 ‘보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삶이 아니라 보는 삶. 친구들의 일상을 보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보고, 사야 할 물건을 보고, 누군가 음식을 먹는 모습, 여행하는 모습, 동물을 키우는 모습도 보고, 사람들이 댓글을 통해 논쟁하는 현장도 본다. 한곳에서 이 많은 것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다.

   산 적 없이 살았던 듯하다. 삶의 겉을 핥는 동안, 삶속으로 들어가 움직이고 펄펄 나는 시간을 꿈꿨다. 꿈만 꿨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어느 팟캐스트에서 “꿈속에서도 마스크를 쓴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나는 아직도 마스크 챙기는 걸 잊어 현관문을 나서다 다시 들어와 마스크를 챙긴다. 오늘도 그랬다. 이 모든 게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하다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를 하는 순간 옷소매로 입과 코를 막는다. 주위에 누가 없는지 눈치를 본다. 어느 나라에선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상대를 향해 “bless you.”라고 말하며 축복을 빌어준다는데. 달라졌을까. 축복을 빌어주는 대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을까.

   상상해본다. 멀지 않은 미래에 모든 인간이 각자의 방에서 인터넷과 AI를 통해서만 타인과 ‘접속’해야 한다면,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대면이 허락된다면? 그땐 만나는 일이 정말로 ‘접선’이 되어, 목적과 이유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화면을 통해서만 당신을 봐야 하고, 드물게 한 번씩 복잡한 심사를 거쳐야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의 기본 정서는 그리움이 될 수 있을까. 그리울 때마다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커서처럼, 혼자 방 안에 뜬 화면을 바라봐야 한다면. 아아, 인류는 어떻게 될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간다. 이쪽에서 저쪽을 건너보듯 그들을 바라보다, 나 역시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채 그들과 합류한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 이파리들이 물음표처럼 후드득 떨어지고, 2020, 오늘의 접속을 생각한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깨운다. 접속. 친구를 만나는 일보다, 친구를 (건너다) 보는 일이 많아진 날들.


박연준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다 캄캄해지는 사람. 캄캄해진 뒤에는 환해지려 노력하는 사람.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