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y
8회 저마다의 코로나
중국 우한에서 첫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발생한 것은 2019년 12월 12일이었고 국내에서 첫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2020년 1월 8일이었다. 삼십대의 중국 국적 여성이었다. 이윽고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3월 11일, 전염병 경보 단계 6단계 중 가장 높은 등급인 ‘팬데믹’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일 뿐, 정작 개개인에게 코로나가 시작한 날은 저마다 달랐다. 그러니까 각자의 몸과 마음이 실질적으로 ‘체감’한 것 말이다. 나에게 그날은 정확히 2020년 3월 25일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었다. 낮에는 장편소설 원고를 수정했고 저녁에는 아이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저녁식사를 차렸다. 일상은 그대로 유지하되 뉴스만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한데 그날 밤 자기 전, 평소처럼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는데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갑자기 미칠 듯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안에서 뭔가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원래라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터, 나는 어느덧 입고 있던 실내복 그대로 위에 외투만 걸치고,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서 무언가에 홀린 듯 현관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코로나의 기운이 가득찬 텅 빈 한밤중 광화문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힘껏 달리는 일은 고등학교 체육 시간 이래 처음이었다.
달리는 동안 대구·경북 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기 바로 직전에 공교롭게도 대구에 내려간 후배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국내 코로나 확진자의 8할이 대구·경북 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그 시절, 후배는 의료용 마스크를 사러 대형마트 앞에서 줄을 두 시간 넘게 섰던 일, 서울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혹시 다시 서울에 올라오는 건 아니지?’라는 배척의 말을 들었던 일. 부조리한 차별과 혐오의 언어, 위기가 닥치면 비루한 민낯을 드러내는 인간의 암울한 본성 따위를 생각하며 달의 기운을 받아 미친 사람처럼 의미 없는 소리를 중간중간 질러댔다. 나는 그날 밤부터 더이상 코로나를 외면하지 않고 현실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불어 그날은 ‘달리기’라는 새로운 루틴(routine)이 생긴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7월. 나는 대구에서 보낸 여름날 오후의 공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한낮의 습기는 비단 대구의 유명한 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코로나의 심각성이 한결 완화되었을 그 무렵, 나는 대구의 한 독립서점에서 북토크 행사 중 엉겁결에 ‘지난봄에 많이 힘드셨죠?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라는 말을 하다가 그만 울컥해버렸다.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자 열이 머리로 올라갔고 나는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작년 초 대구 시민들이 코로나로 겪었을 고립과 차별이 상상이 되어 눈물이 고였다. 애꿎게 눈물도 전염성이 있는 건지, 내 앞의 서른 명 독자들도 하나둘 울먹울먹하더니 이내 서점 안은 거대한 눈물바다로 변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울었다. 다행히 울음은 점차 미소로 바뀌어갔지만. 고통스러운 세월을 관통하고 나면, 거기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이 어느덧 펼쳐졌다.
한 달 후 8월 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이번에는 수도권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2.5단계로 상향 조정되고 실질적인 경제활동 중단을 의미하는 ‘봉쇄(lockdown)’는 더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게 되었다. 새로운 일상에 겨우 적응해가고 있었는데 다시 새로운 장벽을 마주한 기분. 과거 갑상선암의 재발 판정을 다섯 차례 받았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제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나 싶었는데 다시 또 병이 찾아왔을 때는 아예 그 익숙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한편, 아수라장이 된 서울을 떠나 지역 도시로 향하려는 이들을 향해 한 대구 시민은 울분을 터트렸다.
“서울 사는 사람들, 서울에서 나오지 마세요. 서울 위험하다고 꾸역꾸역 지방으로 내려오지 마세요. 대구가 코로나 심했을 때는 대구 봉쇄하고 가게에서도 <대구출신 입장 불가> 이런 거 붙이지 않았나요? 왜 그때 당했던 대로 똑같이 말하면 안 되는데요? 대구는 ‘지방’이라 괜찮고 서울은 ‘수도’이니까?”
비수로 찔린 듯한 예리한 아픔을 느꼈다. 우리는 겨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봐야 비로소 깨닫는 아둔한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코로나 초기, 신생 바이러스와 함께 갇혀버린 중국 우한 시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봉쇄정책으로 하루아침에 거대한 유령도시로 돌변한 그곳. 집 안에만 갇혀 있는 우한 시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한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세상에 알렸고 우리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내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 ‘내 일처럼’ 안타까워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것이 ‘남의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급박했던 그 시절, 나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팬데믹’ 같은 상황을 마주했다. 거스를 수 없는, 몸의 예민한 변화였다. 산부인과에서 조직 검사와 수술을 받기로 했다. 검사 당일 금식 상태로 병원에 도착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대기실 겸 회복실로 안내받았다. 내 몫의 침상에 누워 차례를 기다리며 전신 수면 마취를 열 번쯤 경험한 자로서 오늘의 수면 마취는 어느 구석으로 훅 치고 들어올까 상상했다. 나란히 놓인 다섯 개 침상에는 시험관 시술을 비롯 저마다 다른 수술이나 시술을 받기 전과 후의 여성들이 흰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팔에 링거주사를 매달고 있었다. 이 기묘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인간은 또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전염병이 돌아도, 누군가는 열심히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누군가는 열심히 병과 싸운다.
씩씩했던 것은 그 방의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누워 있는 여성들이 ‘기쁜 일’로 누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다정하고 일에서는 유능했다.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누워 있던 환자분이 간호사 선생님을 찾았는데 시술 후라 목소리가 잠겨서 문밖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목청껏 간호사 선생님을 불러드렸다. 불안과 고립의 시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과 온기와 힘을 나눌 수 있다고 믿기에.
“일상을 성실하게 재생산하고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해낼 힘이 남아 있으면, 어지간한 좌절과 슬픔은 견딜 수 있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되어 수술실로 옮겨지면서 좋아하는 작가가 썼던 문장을 나는 떠올리고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었다. 낮에는 장편소설 원고를 수정했고 저녁에는 아이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저녁식사를 차렸다. 일상은 그대로 유지하되 뉴스만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한데 그날 밤 자기 전, 평소처럼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는데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갑자기 미칠 듯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안에서 뭔가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원래라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터, 나는 어느덧 입고 있던 실내복 그대로 위에 외투만 걸치고,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서 무언가에 홀린 듯 현관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코로나의 기운이 가득찬 텅 빈 한밤중 광화문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힘껏 달리는 일은 고등학교 체육 시간 이래 처음이었다.
달리는 동안 대구·경북 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기 바로 직전에 공교롭게도 대구에 내려간 후배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국내 코로나 확진자의 8할이 대구·경북 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그 시절, 후배는 의료용 마스크를 사러 대형마트 앞에서 줄을 두 시간 넘게 섰던 일, 서울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혹시 다시 서울에 올라오는 건 아니지?’라는 배척의 말을 들었던 일. 부조리한 차별과 혐오의 언어, 위기가 닥치면 비루한 민낯을 드러내는 인간의 암울한 본성 따위를 생각하며 달의 기운을 받아 미친 사람처럼 의미 없는 소리를 중간중간 질러댔다. 나는 그날 밤부터 더이상 코로나를 외면하지 않고 현실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불어 그날은 ‘달리기’라는 새로운 루틴(routine)이 생긴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7월. 나는 대구에서 보낸 여름날 오후의 공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한낮의 습기는 비단 대구의 유명한 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코로나의 심각성이 한결 완화되었을 그 무렵, 나는 대구의 한 독립서점에서 북토크 행사 중 엉겁결에 ‘지난봄에 많이 힘드셨죠?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라는 말을 하다가 그만 울컥해버렸다.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자 열이 머리로 올라갔고 나는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작년 초 대구 시민들이 코로나로 겪었을 고립과 차별이 상상이 되어 눈물이 고였다. 애꿎게 눈물도 전염성이 있는 건지, 내 앞의 서른 명 독자들도 하나둘 울먹울먹하더니 이내 서점 안은 거대한 눈물바다로 변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울었다. 다행히 울음은 점차 미소로 바뀌어갔지만. 고통스러운 세월을 관통하고 나면, 거기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이 어느덧 펼쳐졌다.
한 달 후 8월 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이번에는 수도권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2.5단계로 상향 조정되고 실질적인 경제활동 중단을 의미하는 ‘봉쇄(lockdown)’는 더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게 되었다. 새로운 일상에 겨우 적응해가고 있었는데 다시 새로운 장벽을 마주한 기분. 과거 갑상선암의 재발 판정을 다섯 차례 받았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제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나 싶었는데 다시 또 병이 찾아왔을 때는 아예 그 익숙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한편, 아수라장이 된 서울을 떠나 지역 도시로 향하려는 이들을 향해 한 대구 시민은 울분을 터트렸다.
“서울 사는 사람들, 서울에서 나오지 마세요. 서울 위험하다고 꾸역꾸역 지방으로 내려오지 마세요. 대구가 코로나 심했을 때는 대구 봉쇄하고 가게에서도 <대구출신 입장 불가> 이런 거 붙이지 않았나요? 왜 그때 당했던 대로 똑같이 말하면 안 되는데요? 대구는 ‘지방’이라 괜찮고 서울은 ‘수도’이니까?”
비수로 찔린 듯한 예리한 아픔을 느꼈다. 우리는 겨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봐야 비로소 깨닫는 아둔한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코로나 초기, 신생 바이러스와 함께 갇혀버린 중국 우한 시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봉쇄정책으로 하루아침에 거대한 유령도시로 돌변한 그곳. 집 안에만 갇혀 있는 우한 시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한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세상에 알렸고 우리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내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 ‘내 일처럼’ 안타까워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것이 ‘남의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급박했던 그 시절, 나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팬데믹’ 같은 상황을 마주했다. 거스를 수 없는, 몸의 예민한 변화였다. 산부인과에서 조직 검사와 수술을 받기로 했다. 검사 당일 금식 상태로 병원에 도착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대기실 겸 회복실로 안내받았다. 내 몫의 침상에 누워 차례를 기다리며 전신 수면 마취를 열 번쯤 경험한 자로서 오늘의 수면 마취는 어느 구석으로 훅 치고 들어올까 상상했다. 나란히 놓인 다섯 개 침상에는 시험관 시술을 비롯 저마다 다른 수술이나 시술을 받기 전과 후의 여성들이 흰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팔에 링거주사를 매달고 있었다. 이 기묘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인간은 또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전염병이 돌아도, 누군가는 열심히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누군가는 열심히 병과 싸운다.
씩씩했던 것은 그 방의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누워 있는 여성들이 ‘기쁜 일’로 누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다정하고 일에서는 유능했다.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누워 있던 환자분이 간호사 선생님을 찾았는데 시술 후라 목소리가 잠겨서 문밖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목청껏 간호사 선생님을 불러드렸다. 불안과 고립의 시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과 온기와 힘을 나눌 수 있다고 믿기에.
“일상을 성실하게 재생산하고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해낼 힘이 남아 있으면, 어지간한 좌절과 슬픔은 견딜 수 있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되어 수술실로 옮겨지면서 좋아하는 작가가 썼던 문장을 나는 떠올리고 있었다.
임경선
소설과 산문을 씁니다.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려고 하고, 기왕이면 그것들을 잘하려고 애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2021/03/30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