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13회 [연결 10]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했던
기획의 말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상자에 넣어 고이 보관했다가 시간이 흐른 후 그 상자를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느낌이었다. 연대의 경험을 글로 써달라는 메일을 읽고 나서 든 느낌이 그랬다. 돌이켜보니 6.9 작가선언 합류를 기점으로 나는 남일당과 두리반, 강정과 낙동강, 85호 크레인과 평택의 와락, 팽목항과 광화문광장 등 그러니까 상처의 장소이자 상처 치유가 시도되었던 장소들의 어느 지점, 어느 시간에 드문드문 개입했었다. 그렇다, 드문드문.
아주 잠깐, 겨우 잠깐 머물렀던 장소에서 낯선 이들과 나눴던 친밀함의 경험은 상당 기간 나를 경험 이전과는 제법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도록 작용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이전의 내향적인 나로 거의 회귀하고 만 듯하다. 실제로 개인적 문제로 인하여 2015년 가을 이후 나는 연대의 장소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몹시 멀어져 있다. 그러므로 청탁 수락은 가당치 않았다. 마침 손목에 탈이 나 있던 상태였다. 건초염. 그래서 ‘사정이 있어 다음 기회에 언젠가’로 쓰기를 미루겠다는 답메일을 발송한 후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H시인의 전화 요청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거절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에 휩싸여 파편적인 기억을 소환해보았다.
6.9 작가선언에 합류한 계기는 선배 K시인이 보낸 문자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들러 확인해보았더니 내가 온라인 카페 ‘??문학 모임’에 가입한 날짜는 2009년 6월 2일로 6.9 작가선언이라는 이름이 확정되기 전이었다. 카페 개설일이 그보다 며칠 앞선 5월 28일이었으니 비교적 초반에 모임에 합류한 셈인데, 합류 초반 내가 한 일은 스스로를 심부름꾼 혹은 일꾼이라 칭한 작가들이 올린 글들을 정성 들여 읽은 것과 일꾼들이 가능한 한 모두의 의견을 세심하게 반영하려고 애쓴 결과 이끌어낸 결정에 공감하며 고심 끝에 한 줄 선언을 작성한 것, 선언 당일 정동 프란체스코교육회관과 대한문에 모인 작가들의 뒷줄에 서 있던 것 정도였다. 실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다. K시인의 문자에 무척 머뭇거렸다는 것. 등단한 지 만 3년이 돼 가던 무렵이던 그때까지도 나는 스스로를 작가라기보다는 주어진 일과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생활인, 직장인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시인이나 작가로 불릴 때면 남의 이름으로 불린 것처럼 영 불편했다. 그때 K시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작가로서의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아닌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2008년 초로 기억하는데, 한국작가회의 가입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가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옳은가 머뭇거렸다. 그런데도 단체에 가입서를 내밀었다. 외롭고 불안해서. 여하튼, 국민으로서의 정당한 발언과 요구를 막무가내로 막아선 컨테이너산성, 불타오르는 망루와 희생자들, 정치적 탄압의 결과로 벌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등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자폐적인 문장들을 끄적거리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작가로서든, 시민으로서든 내면의 태도를 외부로 표출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에 K시인의 문자를 받았던 것이다.
머뭇머뭇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전에 겁이 나서 하지 않았거나 몰라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6.9 작가선언의 4기 일꾼으로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고교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가톨릭 신자로 구성된 학생모임에 가입하였으나 대체로 수동적이고 주변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대학 때도 비슷했다. 나는 거의 매순간 내게 벌어진 문제에 골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6.9 작가선언을 통해 참사의 현장을 몸으로 느끼고, 희생자들의 장례행렬을 따르는 무리 어디쯤에 낮부터 섞여 어둑해지도록 걸은 이후로 두물머리, 두리반, 낙동강, 영도, 강정, 평택, 팽목항, 화랑유원지, 광화문광장에 가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상처의 장소에 힘닿는 데로 찾아가서 고통 받은 이들의 호소에 공감하며 서성거리는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용기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6.9 작가선언이 계기가 되어 2010년 가을 무렵 결성된 잡소한 문화집단 ‘1월 11일’ 동인의 일원이 되면서부터 동인들과 함께 두리반을 비롯하여 명동3구역, 콜트콜텍, 재능교육 투쟁의 현장에 가서 낭독회를 알리는 전단을 붙이거나 사람들 앞에서 글을 읽거나 그저 관객으로 앉아 앞에 선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거나 하는 일을 했다. 1월 11일 동인은 무겁고 진지한 마음을 내려놓고 잡다하고 소소한 일들을 재미있게 해나가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게 좋았다. 그 무렵으로 기억한다. J시인에게서 선언에 참여한 소감이 어떠하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 첫사랑에 빠진 느낌이라고 답했던 것 같다. 멋모르고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움직였기에 서툴고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그다지 선하지도 정의롭지도 용감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나의 움직임은 보잘것없는 하나의 점이 어느 자리에서 겨우 몇 밀리 이동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불킨낭독회, 말이낭독회지, 진숙씨네 토마토와 같은 낭독회의 이름들을 정하는 다정한 의견 개진의 과정, 언제 용역이 들이닥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장에 모여 앉아 노래를 듣고, 글을 읽고, 사람들의 생각을 들었던 시간들은 머뭇거리기만 하던 나의 발길을 다음 장소들로 옮기게 만들었다.
활동을 통하여 어떤 문학적 성취에 이르겠다는 목적의식 따위는 애초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나를 포함한 누구든 목메어 우는 사람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울어도 된다는 것, 울면 손 내밀어 눈물을 닦아줄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모든 순간에 항상 다정함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했던 시간들을 통과했다. 여전히 내가 작가로 불리는 것이 편치 않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2012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용산4구역 남일당 자리에 일부러 찾아갔던 때가. 불탄 망루 아래 슬픔과 분노에 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추모미사를 드리던 그 자리는 고작 주차장이 돼 있었다. 너무나 평평하고 단출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때 받은 충격을 시로 쓰려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쓰게 될 것이다. 직접적 표현으로든 간접적 방식으로든. 오랫동안 비어 있던 남일당 일대에 이제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고 한다.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상자에 넣어 고이 보관했다가 시간이 흐른 후 그 상자를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느낌이었다. 연대의 경험을 글로 써달라는 메일을 읽고 나서 든 느낌이 그랬다. 돌이켜보니 6.9 작가선언 합류를 기점으로 나는 남일당과 두리반, 강정과 낙동강, 85호 크레인과 평택의 와락, 팽목항과 광화문광장 등 그러니까 상처의 장소이자 상처 치유가 시도되었던 장소들의 어느 지점, 어느 시간에 드문드문 개입했었다. 그렇다, 드문드문.
아주 잠깐, 겨우 잠깐 머물렀던 장소에서 낯선 이들과 나눴던 친밀함의 경험은 상당 기간 나를 경험 이전과는 제법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도록 작용했지만 결국 나는 다시 이전의 내향적인 나로 거의 회귀하고 만 듯하다. 실제로 개인적 문제로 인하여 2015년 가을 이후 나는 연대의 장소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몹시 멀어져 있다. 그러므로 청탁 수락은 가당치 않았다. 마침 손목에 탈이 나 있던 상태였다. 건초염. 그래서 ‘사정이 있어 다음 기회에 언젠가’로 쓰기를 미루겠다는 답메일을 발송한 후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H시인의 전화 요청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거절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에 휩싸여 파편적인 기억을 소환해보았다.
머뭇거리다
6.9 작가선언에 합류한 계기는 선배 K시인이 보낸 문자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들러 확인해보았더니 내가 온라인 카페 ‘??문학 모임’에 가입한 날짜는 2009년 6월 2일로 6.9 작가선언이라는 이름이 확정되기 전이었다. 카페 개설일이 그보다 며칠 앞선 5월 28일이었으니 비교적 초반에 모임에 합류한 셈인데, 합류 초반 내가 한 일은 스스로를 심부름꾼 혹은 일꾼이라 칭한 작가들이 올린 글들을 정성 들여 읽은 것과 일꾼들이 가능한 한 모두의 의견을 세심하게 반영하려고 애쓴 결과 이끌어낸 결정에 공감하며 고심 끝에 한 줄 선언을 작성한 것, 선언 당일 정동 프란체스코교육회관과 대한문에 모인 작가들의 뒷줄에 서 있던 것 정도였다. 실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다. K시인의 문자에 무척 머뭇거렸다는 것. 등단한 지 만 3년이 돼 가던 무렵이던 그때까지도 나는 스스로를 작가라기보다는 주어진 일과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생활인, 직장인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시인이나 작가로 불릴 때면 남의 이름으로 불린 것처럼 영 불편했다. 그때 K시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작가로서의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아닌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2008년 초로 기억하는데, 한국작가회의 가입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가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옳은가 머뭇거렸다. 그런데도 단체에 가입서를 내밀었다. 외롭고 불안해서. 여하튼, 국민으로서의 정당한 발언과 요구를 막무가내로 막아선 컨테이너산성, 불타오르는 망루와 희생자들, 정치적 탄압의 결과로 벌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등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자폐적인 문장들을 끄적거리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작가로서든, 시민으로서든 내면의 태도를 외부로 표출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에 K시인의 문자를 받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하다
머뭇머뭇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전에 겁이 나서 하지 않았거나 몰라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6.9 작가선언의 4기 일꾼으로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고교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가톨릭 신자로 구성된 학생모임에 가입하였으나 대체로 수동적이고 주변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대학 때도 비슷했다. 나는 거의 매순간 내게 벌어진 문제에 골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6.9 작가선언을 통해 참사의 현장을 몸으로 느끼고, 희생자들의 장례행렬을 따르는 무리 어디쯤에 낮부터 섞여 어둑해지도록 걸은 이후로 두물머리, 두리반, 낙동강, 영도, 강정, 평택, 팽목항, 화랑유원지, 광화문광장에 가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상처의 장소에 힘닿는 데로 찾아가서 고통 받은 이들의 호소에 공감하며 서성거리는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과 용기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6.9 작가선언이 계기가 되어 2010년 가을 무렵 결성된 잡소한 문화집단 ‘1월 11일’ 동인의 일원이 되면서부터 동인들과 함께 두리반을 비롯하여 명동3구역, 콜트콜텍, 재능교육 투쟁의 현장에 가서 낭독회를 알리는 전단을 붙이거나 사람들 앞에서 글을 읽거나 그저 관객으로 앉아 앞에 선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거나 하는 일을 했다. 1월 11일 동인은 무겁고 진지한 마음을 내려놓고 잡다하고 소소한 일들을 재미있게 해나가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게 좋았다. 그 무렵으로 기억한다. J시인에게서 선언에 참여한 소감이 어떠하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 첫사랑에 빠진 느낌이라고 답했던 것 같다. 멋모르고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움직였기에 서툴고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그다지 선하지도 정의롭지도 용감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나의 움직임은 보잘것없는 하나의 점이 어느 자리에서 겨우 몇 밀리 이동한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불킨낭독회, 말이낭독회지, 진숙씨네 토마토와 같은 낭독회의 이름들을 정하는 다정한 의견 개진의 과정, 언제 용역이 들이닥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장에 모여 앉아 노래를 듣고, 글을 읽고, 사람들의 생각을 들었던 시간들은 머뭇거리기만 하던 나의 발길을 다음 장소들로 옮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활동을 통하여 어떤 문학적 성취에 이르겠다는 목적의식 따위는 애초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나를 포함한 누구든 목메어 우는 사람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울어도 된다는 것, 울면 손 내밀어 눈물을 닦아줄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모든 순간에 항상 다정함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했던 시간들을 통과했다. 여전히 내가 작가로 불리는 것이 편치 않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2012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용산4구역 남일당 자리에 일부러 찾아갔던 때가. 불탄 망루 아래 슬픔과 분노에 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추모미사를 드리던 그 자리는 고작 주차장이 돼 있었다. 너무나 평평하고 단출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때 받은 충격을 시로 쓰려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쓰게 될 것이다. 직접적 표현으로든 간접적 방식으로든. 오랫동안 비어 있던 남일당 일대에 이제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고 한다.
이진희
주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틈바구니에서 머뭇거리며 간헐적으로 시를 쓴다. 시집 『실비아 수수께끼』 『페이크』
2021/07/27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