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화에 이어서)


5. 당사자, 당사자성, 당사자성 글쓰기에 대하여


소영현(사회, 본지 편집위원) : 문제를 좀 좁혀보려고 합니다. 결국은 또 겹치는 이야기예요. 조금 더 본격적으로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라는 것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조우리 :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라는 표현에 대해서 좌담을 마련해주신 소영현 선생님께서 설명을 좀더 해주셔야 된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포괄적인 표현이라서 어떤 면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지 궁금했습니다.

소영현 :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라고 명명은 했는데요, 소수자 재현의 문제라고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수자 재현과 쓰기의 문제를 둘러싼 변화를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의 부상으로 명명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문학 전반에서, 대표적인 예로 일본군 ‘위안부’ 재현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수자와 타자의 재현, 폭력의 재현 등을 두고 재현 원리나 윤리에 대한 고민들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해왔는데요. 최근의 사건들로 우리가 가진 문학에 관한 상식을 되묻는 시간을 맞이한 게 아닌가 싶어요. 소수자나 타자는 문학적 재현을 통해 문학적 주체나 주제가 되지만, 문학과 현실의 관계 재편 속에서 정치적 주체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소수자의 자기발화의 의미가 커지면서 ‘누구를/무엇을’ 쓰는가와 함께 ‘누가 쓰는가’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것 같아요. 이런 쓰기 방식에 대한 요청이 강화되면서, 쓰거나 읽는 것에도 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른 문제들도 생긴 것 같습니다. 소수자와 타자를 재현하는 것이 누가 써야 하며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새롭게 환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런 점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요청은 저자는 말할 것도 없이 재현을 포함한 문학 개념 자체를 질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좁게는 창작 방법에 대한 근본적 재편 요청으로 생각되고요.

강성은 : 시와 소설은 다른 것 같아요. 소설 같은 경우에 당연히 허구라는 인식이 독자들에게 있을 텐데 시와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화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가 거의 없다고 느낄 거예요. 그래서 사실 시 같은 경우는 시인 자신이 겪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 첫 시집에 남편이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제 얘기인줄 아는 분들이 있어서 좀 놀랐는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소설은 일단 어떤 식으로든 지어낸,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시나 에세이나 소설이나 모두가 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잖아요. 실재하는 것에서 출발할 텐데 소설만 상상력의 영역이라고 생각을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퀴어 서사든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에서도 좋은 퀴어 작품들이 많고 소설보다 더 화자와의 거리가 가깝지만 당사자성이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정용준 : 당사자성을 방금 검색해봤는데 사전에도 등재가 안 되어 있네요. 저 역시 소설을 쓰고 배울 때, 등단하고 한참 이후까지도 그 단어를 몰랐습니다. 단어가 지시하고 의미하는 지점에 대한 고민은 소설을 쓸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지만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논리로는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인식과 용어는 그 자체로 인식의 도구이고 사고를 작동시키는 매커니즘이 됩니다. 때문에 ‘당사자성’이란 용어는 다른 많은 창작자들처럼 저에게도 화두였습니다. 저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됐고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지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용어가 소설 쓰기, 혹은 소설의 원리 그 자체를 고민하게 했고 주저하게 하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소설은 픽션입니다.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현실을 비추기도 하고 현실을 은유하거나 상징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허구이고 그것은 가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쓰는 작가에게도 이야기 속 인물에게도 당사자성은 복잡한 문제로 작용합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쓸 수 없는 작가. 현실의 누군가와 닮을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인물. 둘 모두 작가에게는 어려운 존재입니다.

소영현 : 잠깐 덧붙이자면 오토픽션이나 1인칭 소설로도 명명 가능하지만 그 말들이 불러오는 다른 논의들이 있어, 여기서는 당사자성 글쓰기로 명명하려고 한 것인데요. 당사자성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가 생각하는 당사자성의 함의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두고 얘기를 나눠야 의미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미정 : 당사자, 당사자성을 소수자 재현 맥락에서 이야기 나누자고 하셨는데, 사실 그렇더라도 위안부나 5월 광주 등의 역사 속 소수자 재현/ 퀴어 재현/ 장애 재현/ 비인간동물 재현 등마다 당사자, 당사자성 문제는 조금씩 다르게 놓여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그게 단지 작품 속 재현 쪽일지, 표절 문제 속 재현일지 등, 교차하고 중첩되는 요소가 무엇이냐에 따라서도 당사자 이야기가 너무 달라지고요. 예를 들어 퀴어 재현에서의 당사자 논의가, 표절 문제와 만났을 때는 맥락이 많이 달라지겠고요. 당사자나 당사자성을 일률적으로 생각하면, 이쪽에서는 잘 통용되던 이야기가 저쪽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고 그런 식인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어떤 느슨하나마 공유할 지점에 대해서는 말씀대로 이야기 나누는 게 좋을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최근 당사자나 당사자성이라는 말이 좀 많이 오해되는 면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원래 당사자성이 실제 영어 단어로도 없고 한국하고 일본에서 주로 쓰는 말인데 장애운동에서 시작한 거잖아요. 스스로가 운동의 주체가 되기 어려운 상황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부상한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앞서 정용준 선생님이 학생들 만나면서의 고충을 얘기하기도 하셨지만, 실제로 최근 좀 한 방향으로만 이야기되는 측면도 큰 것 같습니다. ‘진짜 내 얘기여야 한다, 그 자격을 가진 사람만 말할 수 있다’라는 식의 개체, 개별자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분위기 같은 것이요. 저는 이런 것을 재현이나 문학의 문제로만 국한하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는데요. 그렇게 말할 때, 나와 너의 명료한 구획을 실정화하는 효과가 깔리게 되고, 의도치 않았다 해도 연대를 불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생깁니다. 그리고 예전에 오혜진 평론가가 퀴어 재현에 요구되곤 하던 당사자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한 글들도 떠오르는데요. 지금은 오히려 당사자라는 말이 말하는 것뿐 아니라 그 말 너머에 놓인 것들을 더 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당사자성을 개인의 것 또는 개체의 것으로 한정짓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알게 모르게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으로 적극 전환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로 환원될 수 없는 각각의 상황들에 같은 원리나 잣대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죠. 그렇더라도 느슨하게라도 바라는 것인데요. 당사자성이 ‘자기경험의 특권화’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자꾸 연결되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런 생각이 당장의 뾰족한 답으로 연결되기 어려울 수 있겠죠. 하지만 결국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가짐 혹은 태도를 전환시킬 용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보통 ‘이건 내 소유의 경험이다, 내 이야기다’라고 하는 감각이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이건 내가 연루된 사람들의 이야기고, 나와 연루된 세계의 이야기다’라는 식으로 주어를 바꿔서 생각하는 회로에서는 다른 게 나올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재현과 당사자 문제가 윤리의 문제나 문학의 문제로만 수렴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존재나 세계에 대한 상상의 단위를 바꾸는 용기나 결단력 같은 게 지금 세계의 많은 딜레마 장면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져요.

조우리 : 저는 정용준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당사자성’이라는 말을 의식하는 경우는 매우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하고요.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어디까지가 완벽한 당사자성이고 어디부터는 대상화인지 구분할 수가 있나 싶거든요. 소설은 픽션이고, 작가의 의식은 창작물 안에서 혼재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엄밀하게는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거든요. 제가 앞서 ‘당사자성’을 어떤 식으로 보고 싶으신 건지 여쭤봤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최근에 문제제기가 된 작품들을 사례로 ‘퀴어 당사자성’에 대해 논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퀴어를 다룬 소설이어서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제기된 작품들이 퀴어를 다루고 있었던 거잖아요. 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문제제기 되었던 부분이 그것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여러 제기된 문제 중에 퀴어 재현의 문제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고요. 최근 퀴어를 다루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있는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재현, 그중에서 퀴어의 재현 문제에 대한 모든 작가들의 윤리 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왔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정용준 : 왜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실제로 어떤 작가의 어떤 창작물로 인해 독자 혹은 작가의 가까운 사람이 피해를 입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안이 생길 때마다 담론은 소설의 원리와 작법,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그것이 범주가 너무 넓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경우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런 방식은 문학적 담론으로서 의미가 있고 경우에 따라 비판의 정당한 논리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그런 접근 방식이 아이러니하게도 실질적인 피해와 개별 사안들을 예리하게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영현 : 소수자 문학과 재현 당사자성에 대해서 제일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진송 평론가님이 말씀 안 하실 순 없을 것 같아요.

진송 : 저는 당사자성이 퀴어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유주 작가님이 세월호 사건이 있은 이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반면 김봉곤 작가의 「Auto」라는 소설을 보면 세월호에 대한 글을 1인칭으로 작성하라는 요청에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와요. 두 발언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영현 : 덧붙여, 당사자와 당사자성이 다르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어요. 당사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인지 그인지 너인지 알 수 없지만, 당사자가 있다면 당사자는 어떤 사건을 사람화한 개념인 것 같아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과 관계되어 있는 피해자/가해자의 문제로만 보기 때문에 당사자라는 말이 협소하게 쓰이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건 피해자의 옆에 서 있는 피해자이건 피해자의 옆에 서 있는 가해자이건 간에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당사자인 것인데 당사자란 말과 피해자/가해자란 말을 겹쳐서 쓰는 상황이 점점 더 오해를 불러오는 것 같아요. 문학 경향과 현실 경향과 한국문학에서의 2015년 이후의 경험 등이 응축되면서 여러 의미가 덧붙어 어렵고 힘든 용어가 되어버렸는데 해체하면서 흐트러뜨리고 복원하면서 쓰거나 바꿔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6. 문학과 비문학, 픽션과 논픽션의 교차로에서


소영현 : 당사자성 문제가 퀴어와 함께 거론이 됐다고 했을 때 퀴어의 당사자성이 문제가 됐다기보다는 문학의 진실성이 문제가 된 것인데요. 이런 의미로 보자면 1980년대에도 노동자 당사자의 글쓰기가 요청되었다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 않지만) 이른바 ‘본격문학’ 안에서의 퀴어와 장르 영역에서의 엄청나게 많은 소수자와 퀴어 관련된 창작물들, 예를 들면 BL과 같은 것에 대해 사생활의 침해나 착취라거나 소수자 착취라거나 하는 얘기를 그렇게까지 많이 하지 않았는데요. 곧바로 비교할 수 없지만 페미니즘적, 퀴어적 정체성이 다루어지는 문학을 두고 여러 논의들이 폭발하게 된 점에 대해서는 짚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BL에도 재현 관련하여 많은 논점들이 있잖아요.

진송 : BL 관련해서는, BL이라는 장르에 의미를 부여할 때 BL이라는 장르 전체적인 시각으로 접근을 많이 하다보니까 이 장르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러다보니까 거의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의미가 있다고?’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된 것 같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의식이긴 해요. 근데 확실히 BL에서는 여성이 주 향유자이고, 그들이 성적 욕망으로부터 굉장히 억압되어 있다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거기 등장하는 남성 성소수자가 대상화되고 있다거나 거기서 오는 안 좋은 영향은 문제가 크게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정용준 : 제가 우려하는 점은 재현의 공포와 걱정이 지나치면 소설은 더이상 그 어떤 인물의 삶과 사연도 다룰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재현의 문제와 고민, 그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더 열심히 쓰는 쪽으로 의견이 흘러가는 것은 좋습니다. 누군가를 상처주지 않기 위해 혹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쓰는 자들은 작의를 포기하거나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인물들과 소중한 사연을 서사로 만드는 것을 주저하거나 포기한다면 그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중하게 대해주고 그 사람을 아끼는 방법은 배려하고 주의깊게 다가가고 말과 행동을 가꾸는 것이지 그와의 만남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소설이 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의 사연과 마음을 조명해주는 서사라고 생각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러 서사 장르 중에서 소설을 가장 좋아합니다. 하지만 소설이 인물과 이야기에 겁을 내기 시작하면 1부터 5까지 다 써야만 하는 것을 2, 3, 4를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상처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당사자를 존중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의 개성과 사연을 일반과 보편 속에 편입시키게 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어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쓸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을 테고 점점 반드시 문학에서 다루고 조명해줘야 하는 인물들이 문학의 그늘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 『제인 에어』의 제인,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소설에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조우리 : 문학 중에서도 유독 동시대를 다루는 소설에서 재현의 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것은 결국 독자들이 그 소설 안에서 지금 현실의 누군가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재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텐데요. 소설 장르가 다른 장르보다 더 공감을 힘으로 가져가는 장르이기 때문에 더 많은 언어를 얻을수록 더 많은 불편함을 야기하는 위험도 같이 가져갈 수밖에 없죠. 저도 그 부분이 창작 과정에서 항상 고민이고 어쩌면 이 장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아까 정용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까지는 우리가 계속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한 작가의 작품이 문제가 제기됐다면 개별 작품이 아닌 창작관 전체를 검증하려고 하고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어떤 원리가 있을 것처럼 찾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맞나 싶은 거예요. 앞서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개별의 사건이 영원히 봉합되지 않기 때문에 답을 찾아보려고 하다보니까 어떠한 논리를 찾아보려는 시도만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정작 해결은 없이.

소영현 : 다른 이야기를 좀 덧붙이자면, 당사자성이라는 말 자체가 힘을 얻은 배경 중에는 글쓰기 장 안에서의 논픽션의 힘이 전반적으로 세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전 세계적인 문학과 문화의 다큐멘터리적인 경향화라든가 글쓰기 자체의 진실성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이 논픽션에 대한 요청과 만나는 지점이 있고,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아요. 앞서 애기한 것처럼 문학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현실이 문학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면서 좀더 강하게 진실성에 대한 문학적 요청을 하게 된 거죠. 논픽션적, 다큐멘터리적인 재현이라는 시대적 경향 속에서, 글쓰기라는 게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좀더 강하게 묻게 되자, 이 당사자성이 위험한 면모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향력 있는 말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김미정 : 이전에 많은 분들이 얘기를 좀 하셨던 것 같은데 2010년대 중반 전후, 예를 들어서 한참 위안부 서사가 등장할 때 뭔가를 자꾸 증명하려 하는 방법들이 꽤 눈에 띄었었지요. 무수한 각주의 김숨 소설, 미 하원 공식석상에서 직접 발화하는 씬이 상징적이었던 영화 〈아이캔스피크〉도 그렇고요. 당시 위안부 재현 방식의 유사성 속에서 어떤 사람은 미학적 후퇴를 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어떤 사정을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허용(승인)과 인정 구도의 덫을 읽기도 하고 그랬죠.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렇게 뭔가를 증명하려 하고 검증 앞에서 스스로를 통과시키려는 듯한 재현 방법들이 위안부 서사에서만 발견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방법, 내용, 맥락은 다르지만 2018년 칸에서 화제가 된 난민 제재 영화 〈가버나움〉이 그랬고, 2019년 영화 〈김군〉도 풀어가는 방법은 다르지만 유사한 설정을 공유했고요. 저는 이런 방식의 설득 혹은 증명의 재현 방법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2010년대 우리 세계가 처해 있는 상황 속 여러 곤경들을 아주 잘 환기시켰다고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2010년대 들어서 전 세계가 공유하게 된 분위기는 정치적으로는 극우보수이기도 했고, 실제로 그 효과가 대중들 사이에서 일종의 역사 부정, 약자, 소수자 백래쉬 등의 현상으로 회로화되었죠.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작정을 하고 어떤 사명감 같은 것으로 응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시대의 지배적인 공기가 어떤 식으로건 창작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대중적 회로가 갖추어진 채 부정되거나 백래쉬되는 대상을 창작자들이 다루어야 할 때 각별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요. 부정, 백래쉬하는 분위기에 어떻게 미학적으로 응수할 것인지도 의식해야 하고, 동시에 재현의 욕망이 넘지 말아야할 선도 고민해야 하고, 그러면서 진실에 닿을 방법도 고민해야 하고 등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사자성, 당사자에 대한 주제 역시, 이런 2010년대 이래의 분위기 자체와도 관련해서 생각할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네요.

7. 남는 문제들


소영현 : 시간이 꽤 많이 지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소감이랄까 추가적으로 덧붙이고 싶은 문제제기가 있으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용준 : 말씀드렸듯 저는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녹지 않은 얼음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모두 여전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담론의 방식으로 다시 이야기하거나 비슷한 사안이 오면 함께 묶여서 떠오를 수도 있지만 자꾸 말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존재하나 존재하지 못하는 잊혀진 사물처럼 될 우려가 있습니다. 해결법을 찾으면 해결하겠다는 마음 이전에 해결되지 않았으니 계속 해결할 방법과 마음을 모아보자, 라는 쉬지 않는 말과 뒤를 돌아보는 살핌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제 책을 들고 와서 서명을 해달라고 할 때 “열심히 쓰세요.”라고 썼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자유롭게 쓰세요.”라고 씁니다. 그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학생이 무엇인가가 쓰고 싶어졌고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면 그 결과물이 반드시 어떤 독자를 상하게 하거나 고통을 주고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끝까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학생의 글을 읽고(학생과 제가 좋은 책을 만났을 때처럼) 기쁨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용기를 내고 일단 쓰세요.’ 우리의 모든 논의와 고민이 결국엔 작가는 쓰게 하고 독자는 읽게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김미정 : 앞에서 당사자성과 관련해서 했던 말이기도 한데요. 본래 세계가 그러한 것이지만, 최근 일률적 잣대나 원리로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창작자나 독자나 재현에 대해 그간 많은 고민 거듭해온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겠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최근에 예술 vs 윤리, 표현의 자유 vs 시민의 권리 식으로 프레이밍되는 분위기도 좀 느껴지는데, 옛날 방식의 논의가 반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강성은 : 저도 글을 쓰는 젊은 세대들이 지나치게 얽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전히 기성시인들 중에는 ‘젖가슴’이란 단어를 남발하는 시를 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떤 시인은 최근 분위기 때문에 젖가슴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어려워진 분위기를 개탄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어요. 저는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젖가슴’이라는 단어는 필요한 작품에 필요한 자리에 들어가도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젖가슴을 통해서만 이미지들을 불러오고 글을 쓰는 이미지조차 ‘백지의 젖가슴에 안겨 수유한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창작자로서 그러한 고민 없이 손쉽게 ‘젖가슴’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좁히고 언어적 한계에 갇히는 일로 보입니다. 합평을 하다보면 이 단어가, 표현이 여기서 꼭 필요했냐라는 얘기를 하게 돼요. 꼭 필요했냐라는 질문에 시인이 할 말이 있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어떤 단어, 표현이라도. 그래서 자유롭게 쓰라고도 말하고, 이런 점은 한번 생각해보라고도 말해요. 이런 표현을 써도 될까, 질문과 자기검열에 대한 인식을 수업에서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소영현 : 이상문학상 같은 경우도 김금희 작가가 수상 거부하고 나서 문제가 됐던 게 수상 거부보다도 오히려 표준계약서라든가 출판저작권이나 저작권 양도 혹은 작가의 노동권이라든가, 더 나아가서는 지면 부족이라든가 원고료라든가 이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매절하게 되거나 수상작을 싣거나 싣지 않아야 한다거나 하는 판단들과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잖아요. 이런 문제들까지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왔는데요, 논의를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강성은 : 여긴 모인 우리가 모두 입장이 비슷하다는 게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작가의 입장인 거죠. 그래서 제가 다른 분들 얘기를 듣다보면 대부분 공감이 가고 출판관계자나 독자들이나 다른 분들은 오늘 논의한 사안을 어떻게 볼까 궁금합니다. 저도 소설을 써봤거든요. 그런데 소설을 쓸 때는 제가 들은 얘기를 자꾸 쓰게 돼요. 제 친구가 경험했던 것도 쓰고 할머니 얘기도 쓰고. 왜냐면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제가 간직한 보석함 속에서 하나씩 꺼내듯이 했어요. 그런데 시는 사실 그 얘기를 이미지화하거나 큰 덩어리에서 몇 단어와 문장 혹은 시간과 공간 온도와 분위기 같은 것이 중점적으로 남게 돼서 알아볼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소설은 긴 이야기니까 내가 아는 본 거, 읽은 거, 아는 거, 내 데이터에 쌓인 수많은 것들에 상상을 더해서 재구성되는 거겠죠. 그 과정에서 가끔은 ‘이건 픽션이니까!’하고 작가가 섬세하게 자기 작품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이기 때문에 도리어 사람들이 이걸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거나 내 안에서 이미 훨씬 실제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작가가 일종의 게으름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작가가 글을 쓰는 동안 발표할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좀 던져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소영현 : 강성은 선생님 말씀에 공감해요. 그런 의미에서 앞선 논픽션 경향에 대한 논의를 덧붙여보자면, 전 세계적인 논픽션의 분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있는 사실을 끌어와서 소설을 쓰려고 하는 작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진실을 그리려고 하는 시대요청 속에서 고통이나 폭력을 그릴 때 팩트라고 여겨지는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말씀하신 것처럼 책임회피를 하고 있는 면도 없지 않은 것 같고, 그런 지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김미정 : 지금까지와 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일 텐데요. 문학, 예술 모두 결국은 상상력 혹은 발명의 문제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지금 세계의 공기와 같이 당연히 여겨지는 것을 질문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걸 좀 넘어서는 상상이 좀 많이 궁금합니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예를 들어서 자본주의 아닌 세계에 대한 상상이라든지, 자본주의로 환원되지 않을 텍스트의 ‘다른 방법’ 같은 것인데요. 개인적으로 정치경제학적 맥락에서 자본주의가 싫은 측면도 있지만, 지금 세계 사람들의 상상을 결정적으로 제약하고 뭐든 자기화하는 블랙홀이어서 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조우리 : 저는 이 자리에 와서 여러 말씀을 듣다보니 우리가 한 번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벗어나는 경험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판결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회복, 봉합, 결론, 이런 것까지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아직도 못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그러기 위해서 뭐가 더 필요할까를 앞으로도 고민을 하게 될 것 같고 오늘의 대화가 그런 고민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진송 : 저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아주 기본적인 기준들부터 재검토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문제가 정확히 무엇이었으며 심지어 그것이 문제시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까지도요.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특히 이전에도 이런 사건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는 의견에는 공감하기 힘들었어요. 이전의 사건들과 달리 이번 사건이 왜 더욱 문제시된 것이며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시되었는지 등을 고민할 수 있어야 논의의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얘기를 세 시간 정도 했지만 여전히 이게 무슨 사건이었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르겠다는 상태로 집에 가는 것 같아요. 또하나 의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당사자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분히 비평에서 공유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퀴어와 페미니즘의 교차성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 그 얘기가 또 나오고 여전히 또 문제는 당사자성이라는 식의 논의가 반복되었는지. 왜 그렇게 비평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공유됐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 궁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미정 : 이야기가 이어지거나 축적되지 못한다는 말씀이겠죠?

진송 : 그런 것도 있고 얘기를 이미 했는데 왜 계속 문제가 되는지, 얘기를 했는데 그리고 그게 공유가 충분히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자꾸 이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지…… 그런 메커니즘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아요.

정용준 : 왜 논의가 있으면 계단처럼 빌드업이 안 되고 왜 다시 허물어지는 걸까요.

조우리 : 개개의 지면에서 논의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충분한 논의일까요?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문예지를 다 찾아보는 작가가 있을까요? 저는 사실 계절별로 꾸준히 챙겨보는 문예지가 한 권도 없는 상태거든요. 독자들에게는 문예지가 더더욱 접근성이 높은 매체는 아니죠. 대중성과 멀어져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딘가에선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잘 와닿지 않는 거죠. 때문에 개개로 진행되는 논의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 하고 여기서 하고 산발적이다보니 논의가 발전되어갈 수가 없고요. 어떤 부딪침 속에서 확장되는 것이 있을 텐데 개별적으로 흩어진다고 할까. 오히려 시간이 오래 지난 문제들에 대해서는 연구가 되어서 참고 문헌으로 모아 볼 수가 있는데, 동시대의 논의를 따라가는 게 더 어렵다고 느껴져요. 개별의 논의에 참여하시는 분들도 이전의 자료들을 다 알고 계시는지 의문이 들고요. 이 의문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하는 말들에 대한 자기반성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문학장의 논의들이 아카이빙 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 단추일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도대체 이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는 의심에서 정보의 공유와 사유의 확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송 : 그렇다고 해도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됐던 부분은 뭐냐면 퀴어, 특히 김봉곤 같은 작가들은 특정 평론가들이 약간 전담하듯이 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축적이 안 된다고 느껴질까요. 그리고 또 처벌, 법 이야기가 나왔는데 법으로 해결하는 게 오히려 더 처벌 받는 사람과 예를 들어서 승소한 사람과 패소한 사람 이렇게 나뉘면 오히려 그게 더 고정시키는 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답이 내려지는 것보다는 이게 잘 해소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훨씬 많이 들어요.

김미정 : 개인적으로 진송 평론가님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보고 싶었는데 궁금한 것 조금 여쭙고 싶어요.(웃음) 제가 고민하는 것이기도 해서인데요, 진송 평론가가 생각하시는 평론의 일에 대해서도 조금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진송 : 재현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해도 그게 읽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읽는 게 가능한지를 함께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퀴어 서사에서 읽히는 것의 불가능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은데요. 퀴어들이 숨겨진 동시에 드러나야 하는, 또 구별되는 동시에 동일시될 수 있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음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단 퀴어뿐만 아니라 규범 밖의 존재들 혹은 이야기들에 모두 적용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런 지점에서 평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영현 : 저도 진송 평론가님 말씀을 더 많이 듣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논의의 진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선생님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담론의 자리에서 깊어진 논의들이 창작자-독자-작품-출판사-비평의 복잡한 관계망 전반에서 공유되거나 깊이 내면화되어 공동의 논점으로 다루어진 적이 과거에 있었나, 거꾸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가 반복적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오늘 진전된 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해도, 수면 아래로 잠겨버린 문제를 공적 자리에서 함께 모여 논의하기 시작한 것 자체에 의미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좌담을 또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아서 오늘 다루었던 여러 문제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논의 자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논의가 또다른 자리에서 있어야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는데요. 수고하셨습니다.

*본 좌담은 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오후 2시 연희문학창작촌(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에서 진행했습니다.

사회자 및 패널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성은, 김미정, 소영현, 정용준, 조우리, 진송

강성은 : 죽기 전에 쌓인 책들을 다 읽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고 오늘도 책을 사는 사람.
김미정 : 여러 모로 심기일전 중이다. 최근 《뉴래디컬리뷰》라는 잡지를 꾸리며 다양한 분야의 분들과 비평적 사유와 실천에 대해 고민 중이다.
소영현 : 비평을 한다. 비평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날들이다.
정용준 : 소설을 쓴다. 읽기와 쓰기를 계속 좋아하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과 노력을 하며 산다.
조우리 : 다음은 이전과 달라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소설을 쓴다.
진송 : 연결되고 싶다. 연결하고 싶다.

2021/11/09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