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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회 폰은정이 어느 날 한국소설이 싫다고 말했다
나는 딸이 있고 이름은 폰은정이다. 그녀는 내가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폰은정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한국소설 배웠는데 정말 싫었어. 재미도 없고 기분 나빠.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 서귤로 말할 것 같으면 생후 6개월, 부친이 사놓고 한 번도 펼치지 않은 박경리의 『토지』 전집을 물어뜯으며 이앓이를 했던 자칭 타칭 한국문학 베이비, 한국소설의 척척박사가 아닌가. 그런 서귤의 딸이 한국소설을 싫어한다니 참담한 일이로다. 고민 끝에 나는 딸의 마음을 바꿀 만한 한국소설을 추천하기로 했다. 폰은정아, 이 소설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너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할 수도 있고 꽤 싫어할 수도 있지만, 장담하건대 재미없다고는 말하기 힘들 거야. 많은 서사 콘텐츠들이 텍스트와 영상을 오고가면서 매력을 뽐내고 있고 나는 그것들을 매우 좋아하지만, 어떤 서사는 그저 텍스트의, 텍스트에 의한, 텍스트를 위해만 존재하고 나는 이 작품이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상상의 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놀랄 만큼 짜릿하고 주체적인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무슨 내용이냐고? 지금부터 스포 들어간다, 눈 열어라. 가난하고 못생겼다며 갖은 멸시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가 그 돈 때문에 죽은 노파가 악귀가 되어 나타나서는 화재가 난 영화관의 문을 잠가 팔백 명을 죽게 만들고, 그 영화관의 사장은 남자들을 미치게 하는 ‘냄새 아닌 냄새’로 갖은 고생을 하다가 타고난 사업 머리로 돈을 긁어모으던 중에 남자로 성이 바뀌어 절세 미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업가의 외동딸은 키가 백팔십 센티미터,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고 힘이 어마어마한 장사인데 노란 원피스를 입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이 노란 원피스를 도와준 여자는 처음 나왔던 악귀의 딸인데 어릴 때 양봉꾼에게 팔려 떠돌다가 엄청난 수의 벌떼를 거느리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돼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란다. 재밌겠지?
이번엔 사랑에 대한 책을 소개할게. 엄마는 있지, 이 책을 처음 읽고 생각했어. 나중에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 우울한 면, 모자란 면까지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어지는 그런 존재가 나타나면, 이 책을 선물로 줘야지.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온 것 같구나. 아이 선물 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어둠을 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지.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고 서로를 지지해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란다. 서스펜스나 몰입감, 속도감을 가진 작품은 아니라서 네가 조금 무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심심함이 나에겐 더 진실되게 느껴졌어. 엄마는 폰은정 네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네 삶의 행복과 즐거움 사이에 끼어 있는 불행과 우울함까지 함께해주는 너그러운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런 사람이 생기면 폰은정아, 이 책을 선물로 나누길 바란다.
미리 말하는데 이 소설은 괴로워. 너를 불편하고 찝찝하게 만들 거야. 여기엔 한 어린 영혼이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과정이 담겨 있거든. 그렇다면 폰은정 너는 묻겠지. 엄마, 내 삶도 지금 충분히 힘들어. 왜 내가 남의 고통을 굳이 찾아서 봐야 해?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읽지 않으면 된단다. 침을 뱉고 욕을 하고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아도 무관하단다. 돌이켜보면 내가 폰은정 너의 나이였을 때 말이야, ‘필독 도서’와 ‘수능 기출’이라는 이름의 대단한 소설과 시들을 통해 나는 문학에 대한 혐오를 체득했다. 그건 알고 싶지 않은 수학 공식과 이해할 수 없는 전자기의 흐름보다도 훨씬 더 나를 고통스럽게 했어. 그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 다시 문학을 사랑할 때까지, 정말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어. 너에게 그런 고통을 강요하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만약 살다가 네가 모종의 의구심이 든다면 말이야, 이를테면 이 세상이 노력, 꿈, 성공, 재능 같은 아름다워 보이는 단어들을 통해 어쩐지 너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럴 때 엄마가 이 소설을 추천해줬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겠니? 그리고 만나길 바라. 세상이 기어코 숨기고 싶어하는 응달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우미, 『새』 의 주인공을.
너는 왜 네가 굳이 남의 고통을 봐야 하냐고 물었지? 이제 대답할게. 나는 우미가 나라고 느꼈어. 그건 남의 고통이 아니었어.
궁금하구나. 폰은정 네가 우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우미를 너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조금은 반갑기도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미안하고 또 많이 슬퍼질 것 같다. 나는 네가 나보다 더 평온한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하지만 아마 그때부터 우리는 모녀가 아닌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누군가 나에게 인생 소설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말하면 말이야, 일단 어째서 꼭 하나만 추천해야 하는 건지 되물어보겠지만, 그래도 진짜 꼭 반드시 무조건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말이야, 이 소설을 선택할 것 같아. 처음 이 심심한 제목의 소설을 집어든 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동네 도서관의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 꽂혀 있던, 노란 도형들이 각자의 꼭짓점을 다정하게 맞대고 있던 푸른 배경의 표지. 내 앞에 펼쳐질 그 처절하고도 환상적인 세계를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무감한 표정으로 첫 장을 넘겼던.
이 소설에 대해 어떤 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이건 우리 자신의 이야기.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애증의 서사. 감히 단언하건대 나는 이 소설이 21세기의 고전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의 딸인 폰은정 너에게, 그리고 너의 딸에게, 다시 그 딸의 딸에게 이어질 소설이라는 문화유산의 정수. 우리가 언젠가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지금의 육체가 아닌 다른 형체를 지니고 떠돌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 책에 수놓인 눈부신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자.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서 너를 사랑하고도 모자라, 다음 세상에서 너를 만나 끝나지 않는 수다를 떨고 싶어. 나의 사랑하는 딸, 폰은정. 내 모든 것을 줘도 더 주고 싶은 너와.
천명관의 『고래』(문학동네, 2004)
너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할 수도 있고 꽤 싫어할 수도 있지만, 장담하건대 재미없다고는 말하기 힘들 거야. 많은 서사 콘텐츠들이 텍스트와 영상을 오고가면서 매력을 뽐내고 있고 나는 그것들을 매우 좋아하지만, 어떤 서사는 그저 텍스트의, 텍스트에 의한, 텍스트를 위해만 존재하고 나는 이 작품이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상상의 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놀랄 만큼 짜릿하고 주체적인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무슨 내용이냐고? 지금부터 스포 들어간다, 눈 열어라. 가난하고 못생겼다며 갖은 멸시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가 그 돈 때문에 죽은 노파가 악귀가 되어 나타나서는 화재가 난 영화관의 문을 잠가 팔백 명을 죽게 만들고, 그 영화관의 사장은 남자들을 미치게 하는 ‘냄새 아닌 냄새’로 갖은 고생을 하다가 타고난 사업 머리로 돈을 긁어모으던 중에 남자로 성이 바뀌어 절세 미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업가의 외동딸은 키가 백팔십 센티미터,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고 힘이 어마어마한 장사인데 노란 원피스를 입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이 노란 원피스를 도와준 여자는 처음 나왔던 악귀의 딸인데 어릴 때 양봉꾼에게 팔려 떠돌다가 엄청난 수의 벌떼를 거느리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돼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란다. 재밌겠지?
폰은정 : 뭐라고?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창비, 2010)
이번엔 사랑에 대한 책을 소개할게. 엄마는 있지, 이 책을 처음 읽고 생각했어. 나중에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 우울한 면, 모자란 면까지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어지는 그런 존재가 나타나면, 이 책을 선물로 줘야지.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온 것 같구나. 아이 선물 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어둠을 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지.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고 서로를 지지해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란다. 서스펜스나 몰입감, 속도감을 가진 작품은 아니라서 네가 조금 무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심심함이 나에겐 더 진실되게 느껴졌어. 엄마는 폰은정 네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네 삶의 행복과 즐거움 사이에 끼어 있는 불행과 우울함까지 함께해주는 너그러운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런 사람이 생기면 폰은정아, 이 책을 선물로 나누길 바란다.
폰은정 : 선물할 거면 책 말고 문상으로 줘.
오정희의 『새』(문학과지성사, 1996)
미리 말하는데 이 소설은 괴로워. 너를 불편하고 찝찝하게 만들 거야. 여기엔 한 어린 영혼이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과정이 담겨 있거든. 그렇다면 폰은정 너는 묻겠지. 엄마, 내 삶도 지금 충분히 힘들어. 왜 내가 남의 고통을 굳이 찾아서 봐야 해?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읽지 않으면 된단다. 침을 뱉고 욕을 하고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아도 무관하단다. 돌이켜보면 내가 폰은정 너의 나이였을 때 말이야, ‘필독 도서’와 ‘수능 기출’이라는 이름의 대단한 소설과 시들을 통해 나는 문학에 대한 혐오를 체득했다. 그건 알고 싶지 않은 수학 공식과 이해할 수 없는 전자기의 흐름보다도 훨씬 더 나를 고통스럽게 했어. 그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 다시 문학을 사랑할 때까지, 정말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어. 너에게 그런 고통을 강요하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만약 살다가 네가 모종의 의구심이 든다면 말이야, 이를테면 이 세상이 노력, 꿈, 성공, 재능 같은 아름다워 보이는 단어들을 통해 어쩐지 너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럴 때 엄마가 이 소설을 추천해줬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겠니? 그리고 만나길 바라. 세상이 기어코 숨기고 싶어하는 응달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우미, 『새』 의 주인공을.
너는 왜 네가 굳이 남의 고통을 봐야 하냐고 물었지? 이제 대답할게. 나는 우미가 나라고 느꼈어. 그건 남의 고통이 아니었어.
궁금하구나. 폰은정 네가 우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우미를 너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조금은 반갑기도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미안하고 또 많이 슬퍼질 것 같다. 나는 네가 나보다 더 평온한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하지만 아마 그때부터 우리는 모녀가 아닌 친구가 될 수 있겠지.
폰은정 : 친구 자격시험이야 뭐야.
남우재의 『지문과 농담』(마음서가, 2019)
누군가 나에게 인생 소설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말하면 말이야, 일단 어째서 꼭 하나만 추천해야 하는 건지 되물어보겠지만, 그래도 진짜 꼭 반드시 무조건 하나만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말이야, 이 소설을 선택할 것 같아. 처음 이 심심한 제목의 소설을 집어든 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동네 도서관의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 꽂혀 있던, 노란 도형들이 각자의 꼭짓점을 다정하게 맞대고 있던 푸른 배경의 표지. 내 앞에 펼쳐질 그 처절하고도 환상적인 세계를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무감한 표정으로 첫 장을 넘겼던.
이 소설에 대해 어떤 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이건 우리 자신의 이야기.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애증의 서사. 감히 단언하건대 나는 이 소설이 21세기의 고전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의 딸인 폰은정 너에게, 그리고 너의 딸에게, 다시 그 딸의 딸에게 이어질 소설이라는 문화유산의 정수. 우리가 언젠가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지금의 육체가 아닌 다른 형체를 지니고 떠돌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 책에 수놓인 눈부신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자.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서 너를 사랑하고도 모자라, 다음 세상에서 너를 만나 끝나지 않는 수다를 떨고 싶어. 나의 사랑하는 딸, 폰은정. 내 모든 것을 줘도 더 주고 싶은 너와.
폰은정 : 오. 약간 감동. 읽어보고 싶네.
서귤 : 사실 이건 내가 만들어낸 가상 소설임ㅋ 근데 진짜 재밌어ㅋㅋㅋ
폰은정 : (이 사람 미쳤나봐)
서귤 : 사실 이건 내가 만들어낸 가상 소설임ㅋ 근데 진짜 재밌어ㅋㅋㅋ
폰은정 : (이 사람 미쳤나봐)
서귤
겨울이면 귤을 쌓아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애욕의 눈으로 한국소설을 다시 읽은 『애욕의 한국소설』을 출간했다.
2022/02/22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