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큐레이션
여름 보관소
이미 여름에 죽은 것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김태희, 「풀버전 (full version)」 부분
―김태희, 「풀버전 (full version)」 부분
광기에 자신을 바치며 추는 거친 비바람 속에서의 댄스(소마이 신지의 1985년 영화 〈태풍 클럽〉), 사랑하는 이의 무덤 앞에서 추는 몸부림에 가까운 댄스(프랑수아 오종의 2020년 영화 〈썸머 85〉), 팔과 가슴을 맞댄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추는 포옹의 댄스(샬롯 웰스의 2022년 영화 〈애프터썬〉). 징그러울 정도로 역동적이거나 공포와 구별 불가한 떨림을 제공하는, 애정하는 영화 속 춤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떠올려봅니다. 죽음을 딛고 있거나 죽음을 예고하는 몸짓들. 공교롭게도 계절은 전부 여름입니다. 왜 어떤 것들은 이미 여름에 죽어있고, 왜 여름에 죽은 것들은 이미 돌아오기 시작한 것인지요. 왜 여름은 환생을 기다리는 온갖 것들의 묘지여야 하는지요.
이런 질문들을 다루는 소설에 관해 쓰고 싶었습니다. 아래의 소설들에서는 쏟아지는 땡볕에 가려진 어둡고 축축한 존재들, 호화로운 바캉스와 여름밤의 열기에 파묻힌 자기 연민과 수치 같은 감정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떠오릅니다. 더욱 처절하게 맞서 싸우기 위해, 더욱 불안하고 불완전해지기 위해 여름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요.
임선우의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의 화자인 ‘나’는 폭우가 내리고 강풍이 불던 어느 여름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후 다시 깨어납니다. 여름에 죽어 돌아온 이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급사한 자들에게는 마음의 정리를 위한 100시간의 유예 시간이 주어지고, ‘나’는 이승을 떠돌며 그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유령들을 만나게 됩니다. 죽어서도 지키고 싶은 꿈이 있는 유령 ‘이랑’은 죽어서도 다시 죽고 싶어 하던 ‘나’가 생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다시 찾게 만듭니다. 주말 아침의 영화, 응원하던 야구팀의 경기, 한때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타인처럼 이론상으로 죽어있는 ‘나’를 기어이 다시 살려내는 흰 빛들 말이죠.
“비가 심상치 않게 내리던 새벽”에서 출발해 “지나치게 맑은 하늘”을 보여주며 마무리되는 소설에서 슬픔도 후련함도 아닌 감정을 읽습니다. ‘나’와 ‘이랑’의 최후를 상상하기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오래도록 사랑해온, 그리고 사랑할 것들의 서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이들이 있기에 견딜 수 있었던, 아니, 이들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던 시절의 감각을 피부로 다시 느껴봅니다. 소설은 그렇게 기적을 약속하는 대신 생의 가장 찬란했던 한 자락, 이미 떠나온 지 오래지만 늘 그리워했던 존재들 곁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습니다.이랑은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전광판 안으로 뛰어드는 작은 영혼을 상상해보았다. 원이 커질수록 화면은 점점 환해졌고, 마침내 전광판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변했을 때, 나는 힘껏 박수를 쳤다.
―임선우,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부분
최진영의 「하와이」는 죽지도 않고 자꾸만 회귀하는 불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화자인 ‘재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남편 ‘주호’를 따라 하와이에 가지 못하기 때문도, 우연히도 그와 같은 시기 하와이로 떠나는 지인 ‘태주’와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와이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일, 무엇보다 현재 자신과 소리 없는 갈등을 빚고 있는 딸 ‘다해’와 영영 화해하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소설은 하와이 여행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도, 하와이를 부러 낭만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하와이는 쉬이 가시지 않는 여름의 습기처럼 소설 전체에 고르게 녹아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재희’의 무의식이자 소설의 무의식이고, 과거에는 충동적으로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기약 없이 멀어져버린, 그래서 극복 불가능한 슬픔을 그에게 안겨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이유 없는 오해와 미움에 대해 면역을 갖추지 못한 ‘재희’가 ‘다해’ 앞에서 끝내 무너져내릴 때, 소설 내내 공허한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하와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도피성 휴가에 최적화된, 일 년 내리 햇살이 비추는, 황홀한 지상낙원. 현실은 그보다 훨씬 열악해 손에 다 담기지 않고 세게 쥘수록 새어나가는 백사장의 모래를 더욱 닮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관계없이 언제든 뭉쳐지고 흩어질 수 있는 모래알 같다는 것을, 우리는 몇 번째 여름에야 알게 될까요.먼 곳으로 훌쩍 떠나서 그곳에 시간을 버리고 오는 것. 단절시키는 것. 조금은 다른 내가 되어 돌아오는 것.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 그렇게 꾸준히, 나에게 해로운 상황과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살아왔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불안에 빠트리는 존재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
―최진영, 「하와이」 부분
류한경의 「사과엔 자유형」에서는 여름의 수영장을 배경으로 오래전 인연과의 재회가 펼쳐집니다. 화자 ‘영희’는 저녁 직장인 수영반에서 다시 만난 대학 선배 ‘동엽’에게 모종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같은 동아리원으로 활동하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영희’는 자신이 ‘동엽’을 얼마나 한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었는지를 회상합니다. 정공법 이외의 수를 모르는 우직한 원칙주의자이자 역사학도로서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꿈꾸던 ‘동엽’. 이제 그는 수영 강사가 되어 한때 그가 선망하던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눈앞에 ‘동엽’이 다시 나타났을 때, 과거에 외면했던 수 갈래의 감정들이 ‘영희’에게로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소설에는 유독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글의 말미, ‘영희’는 다시는 수영 강습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는 자신을 알고도 모른척한 ‘동엽’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감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희’의 다짐은 뭍의 존재를 배우기 위해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는 ‘동엽’의 발언처럼 물 바깥의 더 넓은 세계로 스스로를 인도할 것을 예고합니다. 물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어디로 가는지와 상관없이 꾸준히 노를 젓는 행위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영희’와 ‘동엽’은 생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설은 ‘영희’의 오만함과 ‘동엽’의 열패감을 노 젓는 물살에 씻어내며, 이들의 사과가 상대를 지나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궤적을 그려냅니다.그렇게나 애쓰는 동엽의 모습을 보자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치밀어올랐고 결국엔 묻고 말았다. 그러는 선생님은 왜 수영 강사가 됐냐고, 대체 왜 수영을 하고 있냐고.
―류한경, 「사과엔 자유형」 부분
세 소설을 읽으며 여름에 기어이 돌아오고 만 것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몇 해 전 여름에 두고 온 것들이 모두 문장 안에 고이 박혀 있더랍니다. 이제 더는 즐겨듣지 않게 된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들, 악몽 같은 현실에 잠을 설치던 열대야의 시간들, 한순간 상해버린 기분에 밀치듯 놓고 온 손들. 마지막으로는 내가 두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여름 안에 두고 떠난 수많은 얼굴들. 더는 서로를 피할 길 없기에, 어쩌면 헤어지던 순간부터 서로를 만나기를 갈망했기에 우리는 돌고 돌아 다시 이 여름에 만나게 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여름 안에서 다시 만난다면, 그때 같이 춤을 추어요. 이번 여름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계절 내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바로 내가 피하려 했던, 피함으로써 만나려 했던 그것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1)
관련 작품 바로가기
① 김태희, 「풀버전 (full version)」click
② 임선우,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click
③ 최진영, 「하와이」click
④ 류한경, 「사과엔 자유형」click
임현영
평소 같으면 ‘미술 분야의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라는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했겠지만, 왠지 이번에는 좀 달라야 할 것 같다.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목표가 매일 달라지는 사람. 요즘의 목표는 쓰면서 너무 자주 좌절하지 않기, 사람을 조금만 덜 미워하기다.
2025/07/02
- 1
- 윤경희, 「묘지 박물학」, 『분더카머』, 문학과 지성사, 2021, 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