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것이다. 급하게 먹은 음식은 체하고, 급하게 챙긴 짐에는 무언가 빠져 있기 마련이고, 급하게 죽어버리면 제대로 죽지도 못하니까.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어제 새벽, 나는 급하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이승을 떠돌게 되었다.

*


   비가 심상치 않게 내리던 새벽이었다. 나는 못 견디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저녁에 피워버리고는 나가기 귀찮아서 버티고 있던 참이었다. 참아볼까 했지만 새벽이 되자 더 견디기 어려줘 결국 우산을 집어들었다.
   편의점은 도보로 오 분 거리에 있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라고 생각해왔으나, 어제 같은 날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폭우로 인해 순식간에 옷이 젖었고 빗길에 자꾸만 슬리퍼가 벗겨졌다. 슬리퍼를 고쳐 신기 위해 멈춰 선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무언가에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환하게 불을 밝힌 편의점을 코앞에 두고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 차렸을 때는 사방이 새하얬다. 멍하니 서 있던 중 누군가 발밑에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깜짝 놀라서 내려다보니 회색 비둘기 한 마리가 있었다. 당신은 어제 새벽 1시 50분경 사망했습니다. 비둘기가 엄숙한 투로 나에게 말했다. 사인은 심각한 수준의 두부 손상. 폭우와 강풍으로 인해 떨어진 중국집 간판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습니다. 아아, 그 중국집.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어쩐지 나는 그 중국집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게 밖에 쌓아놓은 양파 더미를 쥐가 갉아먹는 모습을 본 뒤로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럼 저는 유령인가요? 내가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비둘기가 대답했다. 일반적으로는 사망과 동시에 이승을 벗어나지만, 급사한 경우에 한해서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제공된다고 비둘기는 설명했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 못한 나머지 이승을 떠나길 거부하는 유령들 때문에 만들어진 규칙이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24시간이 지나면 배꼽에 버튼이 생길 겁니다. 그것을 삼초 이상 누르면 언제든지 이승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을 때 누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100시간이 지나면 버튼을 누르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오시거나 평소 꿈꿔왔던 경험을 해보세요. 비둘기는 말을 마친 다음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여기는 천국인가요? 아닙니다. 사람 말은 언제 배우셨어요? 비둘기는 전서구로 일하다가 통신 발달로 인해 실직했었으나, 소식을 전한다는 특성을 살려서 저승사자가 되었다고 했다. 인간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때 생겼습니다. 비둘기가 대답했다. 비둘기는 재취업에 성공했구나. 나는 이 와중에도 비둘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해내지 못한 일을 비둘기는 두 번씩이나 해낸 것이었다.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더니 비둘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급사한 분들을 위해 제공되는 사후 서비스입니다.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싶을 때는 왼쪽 손목을 보세요. 그 말을 듣고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자 숫자 100이 쓰여 있었다. 시간이 줄어들수록 점점 투명해지다가 마지막에는 파바밧, 하고 사라지실 겁니다.
   사라진 다음에는 어디로 가나요? 내가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비둘기가 대답했다. 그런데요, 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 해 주신 설명 전부 이해가 가고, 듣다보니 제가 죽었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데요, 지금 바로 사라지면 안 될까요. 비둘기는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최소 24시간은 남아 있는 것이 규칙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장소에서 100시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국내라면 어디든지 가능합니다. 나는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정하기 곤란하시다면 죽기 직전 계셨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비둘기의 말에 나는 의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져서 고개를 들자 비둘기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고, 나는 좁은 골목길로 되돌아와 있었다.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그친 뒤였다. 죽은 지 24시간이 지났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다음날 새벽 1시 50분이겠구나. 손목을 내려다보자 남은 시간이 99:59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내가 죽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내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내 흔적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검은색 아스팔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뒤 내가 죽었던 자리 위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갔다. 나는 오토바이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빠르구나, 빨라. 서울에서 내 죽음이 잊히는 속도는 한밤중의 배달 오토바이만큼이나 빠르다. 하기야 서울은 사람이 아쉽지 않은 도시, 사람 하나쯤은 티나지 않는 도시이니까. 같은 이유에서 나는 서울을 좋아하기도 했다.

*


   일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나는 유령인 채로 이승을 떠돌게 되었다. 언젠가 담배로 인해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게 이런 식일 줄이야. 사람 일은 역시 알 수가 없고 그것은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주어진 셈이었다. 공연으로 치면 커튼콜, 야구로 치면 연장전, 게임으로 치면 라스트 팡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것이었다. 100시간을 채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24시간이 지나서 버튼이 생기면 곧바로 눌러버릴 작정이었다. 나는 집으로 갈까, 하다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방을 떠올린 다음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중국집 사장 뒤통수를 한 대 때려줄까도 생각해봤지만 됐다, 됐어.
   어두운 밤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죽기 적당한 곳을 생각해보았다. 아니, 죽기는 이미 죽었으니까 완전히 사라지기 적당한 곳이 어디일까. 첫 번째로 떠오른 후보지는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성급 호텔이라도 종일 방에 갇혀 있는 데는 진력이 난 상태였다. 두 번째 후보지는 바닷가. 한적한 해변에 누워 있다가 사라지는 것도 좋을 듯했지만, 지금은 휴가철이어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후보지는 63빌딩이었다. 나는 아직도 좋은 곳이라고 하면 63빌딩이 떠오른다. 한때 온 국민의 자랑이었던 거대한 골드바. 하지만 이제는 애매하고 시시해졌다는 점에서 나와 일맥상통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63빌딩도 가고 싶지 않았다.
   한때는 나도 나의 자랑일 때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대학을 졸업했고, 수많은 아르바이트로 나를 먹여 살려왔으니까. 그러나 지난 이 년간 취업에 실패하면서 내 세계는 점점 좁아졌다. 좁아진 땅에 애인과 친구들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이 그들을 떠나보냈다. 안정된 주거가 사라졌고 균형 잡힌 식단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들은 갈수록 보잘것없어져서 나중에는 머리숱과 규칙적인 생리 주기, 주말 아침마다 보던 영화와 응원하던 야구팀이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지원서도 사라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지원서를 쓰지 않았다. 지원서 답변란에 욕설을 쓰다가 나중에는 유서를 적었다. 내가 죽던 날 밤에도 나는 유서를 쓰고 있었다. 그런 다음 한 뼘짜리 창밖으로 비 내리는 것을 구경했고, 옆방 소음에 귀를 기울였고, 담배를 사러 나간 길에는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누군가 내 노트북을 열어본다면 지원서 파일에 담긴 수백 장의 유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도착한 곳은 예전에 단골이었던 동네 카페였다. 사라지기 적당한 곳은 아니었지만, 떠오르는 데가 여기뿐이었다. 카페 문이 잠겨 있어서 나는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의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커다란 전광판이 빛나고 있었다. 새벽에도 전광판에서는 여러 광고들이 나오고 있었다. 탄산음료, 명품 가방, 곧 개봉할 영화 등등. 나와는 무관해진 것들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영화는 일주일 뒤에 개봉된다고 하는데, 그때쯤이면 나는 이곳에 없다.
   적어도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규칙은 이래서 생긴 거구나. 나는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언뜻 보면 100시간은 죽은 자들을 위한 배려 같았지만, 내가 더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쯤이면 내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을까? 가족들에게는 연락이 갔을까? 오래전에 연을 끊어서 번호가 없을 텐데.
   장례식은 산 사람들의 일로 미뤄둔 채, 나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막상 해가 떴을 때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지만. 밝은 햇빛 아래서 본 내 몸은 무채색이었다. 죽음과 동시에 몸에 있던 색들이 온통 빠져나간 듯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살갗에 비치던 핏줄도, 손가락에 있던 지문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죽긴 죽었나 봐.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주인이 도착했다. 나는 주인을 따라서 카페 안으로 들어가, 그가 테이블을 닦고 커피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한가한 시간에는 카운터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사람. 그가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카페는 여전히 좋았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덕에 마음 놓고 사람 구경을 할 수도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듣듯 카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러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사랑이나 적의, 죽음 충동 같은 사람의 감정들이. 내가 죽고 나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빠지고 있었고, 누군가를 미워했으며, 때때로 죽고 싶어했다. 그런 마음들은 어째서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이어지는 걸까. 그것을 생각하자 나는 그만 아득해져서, 이미 죽었는데도 죽고 싶었다.
   오후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 두 명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둘은 오늘 저녁에 있을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에 대해 얘기했다. 기회가 다시 오겠지? 단발머리가 물었다. 아니. 긴 머리가 대답했다. 죽기 전에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지금이라도 암표를 구해볼까? 백만 원이라던데. 그 말에 단발머리는 기운이 빠졌는지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그러고는 티케팅에 실패한 원인, 티케팅에 성공했더라면, 티케팅 성공 비결 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나는 음악에 별 관심이 없었고 공연장은 가본 적도 없었지만, 그들이 공연을 두고 실패와 성공, 단 한 번뿐인 기회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자꾸만 귀에 들어왔다. 그렇게 대단한 공연장에 가면 무언가를 해낸 듯한 기분이 들까? 한 번쯤은 그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 앉아 있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


   공연장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갔다. 유령이 되면 하늘을 날아다닌다거나 벽도 통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멋진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비어 있던 노약자석에 앉아서 편하게 갔다. 가는 동안에는 콜드플레이 이름이 간간이 들려왔고, 열차가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하자 대부분의 승객들이 내렸다.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출구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꺼내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통로를 걸을수록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지만 주변 사람 중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리 나는 곳을 찾아냈다. 소리는 통로 오른편에 있는 창고에서 나고 있었다. 창고 안을 확인해보자 청소용품들만 쌓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돌아서 나가려던 찰나, 구석에서 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기 누구야? 내 말 들려? 깜짝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고장이라고 쪽지를 써 붙인 대형 청소기가 있었다.
   이번에는 말하는 청소기구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말하는 청소기가 아니고 청소기 안에 갇힌 거야. 당황한 내가 유령이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 어쩌다 그 안에 들어간 거야? 유령은 어제저녁 역사 안을 걷다가 청소부를 마주쳤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지나가려던 찰나 청소부는 유령이 있는 쪽으로 청소기를 들이밀었고, 엄청난 흡입력에 의해 유령은 청소기 안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동시에 유령을 빨아들인 청소기는 작동을 멈췄다.
   얘기를 듣고 유령을 꺼내주려 시도해보았으나, 거대한 원통형의 청소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보다가 나는 청소기 옆에 주저앉았다. 안 열려. 내가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청소기가 대답했다. 그 안에서 아프지는 않아? 응. 청소기는 다만 정체불명의 휴지 조각들과 껌 종이, 머리카락 뭉치와 함께 엉켜 있는 것이 참기 힘들다고 했다.
   엊저녁에는 다른 유령이 왔었는데 시간 없다면서 그냥 가더라고. 청소기가 말했다. 남을 위해 쓰기에는 100시간이 짧잖아. 내가 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청소기는 그건 그러네, 하더니 나에게 공연 보러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게 아니면 유령들이 왜 이곳으로 모여들겠어. 나는 약간은 김이 샌 채, 사람들은 죽어서도 생각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봐,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청소기는 자신에게는 콜드플레이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무대에 서 보고 싶었어. 칠 년 동안 아이돌 연습생이었는데 데뷔도 못하고 죽었거든. 그 말을 듣자 나는 어떻게 해서든 유령을 꺼내주고 싶었다. 청소기를 열어보려고 다시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패했다.
   됐어, 너는 공연 보러 가. 청소기가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정 안 되겠으면 사라지면 되지. 청소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공연을 보지 못하는 건 크게 상관없었지만, 남은 시간을 창고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공연 끝나고 다시 올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대신 무대에 서 줘. 청소기가 말했다. 나는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한 뒤 창고 밖으로 나왔다. 손목을 확인해보자 남은 시간은 85시간. 24시간이 지나려면 아직 9시간이 남아 있었다.

   공연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긴 줄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간 다음, 난간에 기대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무언가를 해낸 듯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거대한 경기장이 사람들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현실감이 사라졌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각자 다른 낮을 보내고, 저녁이 되자 한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무대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 위로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스크린 속 숫자가 0이 되자 무대 조명이 켜지고 콜드플레이가 등장했다. 크리스 마틴이 손을 높이 들자 관객들 머리 위로 종이 눈이 내렸다. 함성과 함께 응원 불빛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흥분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가만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었지만 내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나거나 흥분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눈앞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서도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나는 온갖 색의 조명으로 물드는 무대와 관객들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팔을 천천히 앞으로 뻗어보았다. 조명에서 나오는 붉은 빛은 내 팔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다른 조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색의 조명이 닿아도 내 팔은 변함없이 어둠, 새까만 어둠이었다. 나는 어두운 팔을 바라보다가, 화려한 빛으로 물든 무대와 관객들을 바라보다가, 첫 곡이 끝나기 전에 공연장에서 빠져나왔다.
   기껏 찾아간 곳은 다시 지하철역이었다. 청소기에게 가려고 했는데 창고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통로 벤치에 앉아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청소부가 창고 문을 여는 틈을 타서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는 캄캄해서 색이 잘 구분되지 않았고,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청소부가 나간 다음에 청소기를 노크하듯 두드렸다. 청소기는 놀란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었다. 나야, 다시 오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빈말인 줄 알았지. 공연이 벌써 끝났어? 응. 나는 거짓말을 했다. 어땠어? 좋았어. 시끄럽고 화려하고. 청소기는 내가 얼버무리려 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물었다. 너 공연 안 봤지? 나는 봤다고 대답했다가, 이내 첫 곡 중간에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왜 그랬어? 그냥 기분이 이상했어. 거기서는 아무 생각도 말았어야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만 바라보았다. 청소기 말이 맞았다. 공연장에서는 아무 생각도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이, 그것도 지나치게 살아 있는 것이 무서웠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버튼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눌러버렸겠지.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청소기가 입을 열었다. 다음번에 문이 열리면, 그때는 여기서 떠나. 사실은 나 몇 시간 안 남았어. 그럴게. 내가 대답했다.
   작은 창고 안에서 알 수 없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마음이 끝없이 오르내렸다. 불안하다가도 안심이 되었고, 환했다가도 어두워졌다. 이럴 때는 역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나는 청소기에게 몸을 기대어 앉았다. 잠시 뒤 청소기는 다시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


   청소기는 소속사에서 십오 킬로그램을 빼야 데뷔시켜준다고 해서 죽어라고 살을 빼다가 죽었다. 죽은 청소기는 회사로 찾아가서 노래 부르는 연습생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고, 춤추는 연습생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살을 빼라고 말한 사장 얼굴에는 주먹을 날렸다. 정작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청소기는 이틀 내내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괴롭혔다.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고 청소기가 말했다, 내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안무를 새로 짜잖아. 5인 대형에서 4인 대형으로. 나는 청소기에게 괴롭히길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넌 살아 있을 때 무슨 일 했어? 청소기가 나에게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회사원이었다고 대답했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죽었느냐는 두 번째 질문에도 과로사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남 좋은 일을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해줬어. 그러게.
   이틀째 갇혀 있는데 답답하지는 않아? 나는 말을 돌렸다. 괜찮아. 나는 상상을 잘하니까. 청소기가 대답했다. 무슨 상상을 하는데? 무대에 서는 상상. 전에 소속사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받았었거든. 청소기는 무대의 분위기, 마이크를 쥐는 손 모양, 흘러내리는 땀방울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고 했다. 하도 오랫동안 하다보니 나중에는 눈만 감아도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어서, 청소기 안에서 버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왜 버티는 건데? 이제 공연도 다 끝났잖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실은 청소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어차피 사라질 텐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인 건지. 그렇게 버티어서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 청소기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가수가 되려고 지금까지 노력했는데, 버튼을 누르면 그게 다 무효가 될 거 아니야.
   그러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끝까지 버티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은 것이 있는 마음은. 내가 계속 말이 없자, 청소기는 내가 자신을 한심하게 보더라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오히려 네가 부럽다고 말하자 청소기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어떤 점이 부러운데? 회사원이면 월급 받았을 거 아니야. 나는 평생 한 푼도 못 벌었거든.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겨? 청소기가 물었고, 나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고 대답했다. 웃는 도중에 배가 간질간질해서 만져보니 동그랗고 단단한 버튼이 손에 잡혔다. 내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청소기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버튼이 생겼다는 사실을 청소기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몇 시간 더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막차 시간도 지난 고요한 밤, 청소기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음음, 음음음. 무슨 노래야? 내가 물었다. 죽지 않고 살을 빼는 데 성공했다면 내 데뷔곡이 되었을 노래. 청소기가 대답했다. 가사는 없어? 아직 없어. 네가 가사를 붙이면 되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음음, 음음음.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희끄무레한 사람 형상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누구세요. 내가 소리쳤다. 주변이 어두워서 그것의 성별조차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들어왔어? 문 열리는 소리 못 들었는데? 청소기도 덩달아 놀랐다. 설마 해서 와봤는데 정말 유령이시군요. 희끄무레한 유령에게서 나이 든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심하세요. 저도 두 분처럼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나는 여전히 경계하며 물었다. 한 시간이 남자 몸이 희미해지더니 공기처럼 가벼워졌어요. 이제는 문이나 벽을 통과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그럼 청소기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나요?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 청소기 안에 유령이 갇혀 있거든요. 유령은 한 번 시도해보겠다면서 청소기 앞으로 다가갔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청소기가 안에서 소리쳤다. 지금부터 제 손을 잡고 나오시면 됩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한 다음 청소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벽도 통과할 수 있다는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청소기 안으로 남자의 손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잠시 뒤 남자는 힘주어 청소기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 역시 모든 힘을 끌어모아서 남자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줄다리기하듯 한참을 당기다보니 유령이 조금씩, 조금씩 끌려나오는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긴 호스를 지나 청소기 흡입구로 희끄무레한 반죽 같은 것이 쑥, 하고 빠져나왔다. 남자와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그것이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야위고 앳된 얼굴의 여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모두 감사합니다. 쓰레기에 파묻힌 채로 죽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청소기에서 나온 여자가 손으로 몸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저희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새벽 네 시에 지하철 창고에서 노래 부르는 게 산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았어요. 남자가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는 생전에 이곳의 역무원이었다. 그는 첫차가 들어오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역에 왔다가 노랫소리를 듣게 된 것이라고 했다.
   첫차를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문제는 여자와 내가 철문을 통과하는 일이 여전히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손목을 확인해보더니 자신에게 세 시간 반이 남아 있다고 했다. 겨우 청소기에서 나왔더니 이번에는 창고네요. 여자가 말했다. 곧 있으면 야간 청소가 끝날 시간이에요. 그때 다 같이 나갑시다. 역무원이 말했다.
   그러다 첫차를 놓치시면 어떡해요? 내가 묻자 그는 역무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두 분은 제게 역 이용객들이기도 하니까요. 무임승차자도 이용객으로 쳐줘요? 여자가 물었다. 그럼요. 결국 우리는 셋 다 바닥에 앉아서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까 부르고 있던 노래가 뭐였어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역무원이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는 순간 여자가 먼저 말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부른 거예요.
   십 분 정도 지나자 청소부 두 명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청소 카트를 정리하는 사이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첫차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같이 있어 드릴까요? 여자가 역무원에게 물었다. 역무원은 잠깐 망설이더니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나에게도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는 2호선 플랫폼으로 가서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고맙습니다. 실은 혼자 있기 무서웠거든요. 가운데 앉은 역무원이 긴장한 듯 몸을 살짝 웅크렸다. 첫차를 보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여자가 물었다. 용기가 필요해서요. 역무원이 대답했다. 그는 생전에도 마음이 무너질 때면 첫차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조용하던 플랫폼에 약속처럼, 마법처럼, 때로는 기적처럼 첫차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고.
   사라질 때 많이 아플까요? 역무원이 앞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프지 않을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역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에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전조등이 켜진 첫차가 들어오고, 수십 개의 출입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역무원은 작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불꽃이 타면서 파바밧,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비둘기가 파바밧, 사라진다고 했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 역무원이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다음 같은 것은 없고 이것이 끝이자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불꽃이 예쁘다는 시답지 않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넌 이름이 뭐야? 침묵을 깨고 내가 물었을 때 여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묻는 거야?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이랑이라고 대답했다. 이름 예쁘다. 진짜 이름이 아니니까. 데뷔하면 쓰려고 했던 예명이야. 나는 이랑에게 바깥에 나왔으니 하고 싶었던 것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뭘 해. 말하면서 이랑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랑은 역무원과 다를 바 없이 희미해져 있었다. 이랑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지만.
   이랑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랑은 죽고 나서도 무대에 서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는 주먹도 날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랑이 그런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마음을 잃는 것이 때로는 죽는 것보다 나쁘다는 사실은 내가 잘 알았다. 이랑을 생각하는 사이 두 번째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열차 밖으로 나오고, 열차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이랑의 귀에 대고 방금 한 생각을 말해주었다. 얘기를 듣고 나서 이랑은 크게 웃었다. 이랑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 열차에 올라타서 네 정거장을 지나 강남역에서 내렸다. 역사 밖으로 올라오자 환한 햇빛에 어지러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이른 시간에도 거리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피곤한 얼굴로 도시를 걷는 사람들 사이를 이랑과 나는 웃으면서 지나쳤다. 아무 일 없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지나치게 맑은 하늘, 시치미를 떼는 비둘기들, 이랑과 내 몸처럼 칙칙한 색깔의 건물들까지, 모든 것이 우스웠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이랑은 내 손을 잡았다. 세게 쥐면 흩어질 것만 같으면서도 따뜻한 이랑의 손. 이랑과 손을 잡자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이랑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은 회사원도 아니고 과로사한 것도 아니야.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가다가 떨어진 간판에 머리 맞고 죽었어. 그러자 이랑은 또다시 웃으면서, 그렇게 죽은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해주었다. 죽을 때 많이 아팠어? 이랑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이 잘 안 나.
   걷는 동안에도 이랑은 조금씩 더 환하고 가벼워졌다. 공기처럼, 바람처럼. 나중에 이랑은 내 손을 잡고서도 둥둥 떠다니듯 걸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지자 우리는 그들을 피해 뛰어다녔다. 아무리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다. 달리는 와중에도 나는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눈에 담았다. 안녕, 지긋지긋했던 서울. 안녕, 지저분한 간판들. 안녕, 정류장 벤치에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 컵들. 모두 안녕, 안녕, 안녕.
   이랑과 나는 마침내 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가 좋을 것 같지? 이랑이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희미해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갈게. 이랑이 인사했다. 이따 봐.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빈말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이랑이 조용히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랑은 계단을 걸어내려갔고, 나는 옥상에 혼자 남아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때 시각은 오전 6시 51분.

*


   같은 날 오전 7시 13분, 강남대로변에 위치한 초대형 옥외 전광판은 3분 21초 동안 오류가 났다.
   출근길 도로 위에 갇힌 사람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명품 정장 광고가 흘러나오던 전광판이 별안간 꺼져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화면의 정중앙에는 작은 흰색 원이 생겼다. 그 원이 서서히 커지는 모습을 사람들은 지켜보았고, 그들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랑이 해냈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하철 역사 안에서 내가 이랑의 귀에 대고 속삭였던 말은 데뷔 무대에 서보라는 것이었다.
   3분 21초.
   노래 한 곡이 온전히 흘러가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이랑을, 그 눈부신 데뷔 무대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랑은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전광판 안으로 뛰어드는 작은 영혼을 상상해보았다. 원이 커질수록 화면은 점점 환해졌고, 마침내 전광판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변했을 때, 나는 힘껏 박수를 쳤다. 그러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수많은 얼굴을, 주말 아침의 영화를,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던 야구공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것들을 마지막으로 떠올려보기 위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임선우

소설을 쓰는 동안 NBA를 열심히 챙겨 보았습니다. 성적이 영 좋지 못한 팀의 팬이 되면 자꾸만 기적과 요행을 바라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멋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체념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을 향한 제 마음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응원하다 보면, 클리퍼스가 50년 만에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듯, 멋진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2021/07/27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