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너와 나의 시차
성연주
웹진 《비유》를 만들며 매번 가장 고심하는 것은 너와 나의 ‘시차’를 줄이는 일입니다. 68호 에디토리얼 「시차증과 문학」에서도 시차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때의 시차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 속에서 느껴지는 격차를 주로 말한다면, 여기서 저는 여러 다른 행위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간, 관점, 입장, 시각 차이로서의 시차를 소환합니다. 예컨대 특정 의도가 전제된 기획에서 필자가 찰떡같이 제 마음을 알아채고 그에 맞는 글을 보내주었을 때, 저와 필자의 시차가 줄어든 만큼 독자들도 줄어든 시차 속에서 글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받았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획 의도와 사뭇 다른 글을 통해 나의 입장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얻기도 하죠. 시차가 만들어내는 교묘하고 아슬아슬한 행간 속에서 저와 독자 모두 어딘가에 자신이 놓일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호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며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여러 차원의 시차를 다룬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선혜의 시 「모스맨 관찰기」는 펄럭대고 몸부림치는 모스맨과 ‘나’의 관계를 서로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정준호의 동시 「춥지법」은 아이들의 상상이 우리를 얼마나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민지인의 동화 「여름의 씨앗」은 가상 공간에서 자신만의 마을을 만들어가는 게임을 매개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가상과 현실 공간의 차이가 가능하게 한 그들만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최미래의 소설 「쉽게 잘 살고 싶다 33화」는 선주와 이채의 엇갈리는 욕망과 행동을 기술합니다.
연계/확장에서는 텍스트의 이동이 만들어내는 간격과 차이를 ‘번역’과 ‘협업’의 이슈로 설명하려 합니다. ‘비평 교환’의 문호영은 퀴어 번역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에 대해 논합니다. ‘언어로 고정될 수 없는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을 주장하며 투명성을 과하게 추구하다 텍스트의 고유한 모호성을 훼손하는 곤란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고아침은 미술 텍스트 번역의 경험을 토대로 기계 번역이 가진 식민주의적 성격에 대해 지적합니다. 두 사람의 글이 번역을 소재로 발생하는 차이에 주목한다면, ‘해상도 높은 장면’의 이윤정과 김시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메시지가 전달되는 ‘윙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집중합니다. 다른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소통의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른 것과 달리 윙크는 같은 순간 따뜻한 눈빛 하나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커뮤니케이션은 문학과 다른 장르가 만나 협업할 때 발생하는 간극을 세 명의 글로 풀어냅니다. 양종욱은 단편소설의 무대화를 시도하는 연극팀 ‘양손프로젝트’의 작업을 소개하며 소설의 문장을 ‘목소리’로 상정하고, 소리 내어 발화하는 배우의 몸을 ‘텍스트 연주’라고 명명합니다. 한유주는 「협업들에 대한 소고」에서 텍스트에 기반한 협업 프로젝트 경험담을 통해 협업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끊임없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는 짙은 회의감을 토로합니다. 양근애 또한 「점선과 부등호」에서 문학주간의 협업 프로젝트 기획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연극을 이어주는 점선의 역할과 문학과 연극 사이에서 부등호를 그리고 있는 속내를 고백합니다.
웹진 《비유》 소개글에는 ‘우리가 쓰는 것은 문학이고, 우리가 만드는 것은 문학과 연계하고, 문학을 확장하는 활동입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문학이 다른 무엇과 연계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차를 감수하게 됩니다. 텍스트가 이동하고 활용되며, 다른 장르의 문법 위에서 문학을 펼치고 재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서로 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차이가 만들어내는 모호함에 익숙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비유》를 통해 그런 모호함을 실험하고 새로운 시도를 지속하는 것이 기획자이자 독자로서 《비유》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호에서도 너와 나의 시차를 다양한 시선에서 발견하고 경험하며 모호함의 자유를 맘껏 누리시길 바라봅니다.
이번 호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며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여러 차원의 시차를 다룬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선혜의 시 「모스맨 관찰기」는 펄럭대고 몸부림치는 모스맨과 ‘나’의 관계를 서로 다른 공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정준호의 동시 「춥지법」은 아이들의 상상이 우리를 얼마나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민지인의 동화 「여름의 씨앗」은 가상 공간에서 자신만의 마을을 만들어가는 게임을 매개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가상과 현실 공간의 차이가 가능하게 한 그들만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최미래의 소설 「쉽게 잘 살고 싶다 33화」는 선주와 이채의 엇갈리는 욕망과 행동을 기술합니다.
연계/확장에서는 텍스트의 이동이 만들어내는 간격과 차이를 ‘번역’과 ‘협업’의 이슈로 설명하려 합니다. ‘비평 교환’의 문호영은 퀴어 번역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에 대해 논합니다. ‘언어로 고정될 수 없는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을 주장하며 투명성을 과하게 추구하다 텍스트의 고유한 모호성을 훼손하는 곤란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고아침은 미술 텍스트 번역의 경험을 토대로 기계 번역이 가진 식민주의적 성격에 대해 지적합니다. 두 사람의 글이 번역을 소재로 발생하는 차이에 주목한다면, ‘해상도 높은 장면’의 이윤정과 김시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메시지가 전달되는 ‘윙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집중합니다. 다른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 소통의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른 것과 달리 윙크는 같은 순간 따뜻한 눈빛 하나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커뮤니케이션은 문학과 다른 장르가 만나 협업할 때 발생하는 간극을 세 명의 글로 풀어냅니다. 양종욱은 단편소설의 무대화를 시도하는 연극팀 ‘양손프로젝트’의 작업을 소개하며 소설의 문장을 ‘목소리’로 상정하고, 소리 내어 발화하는 배우의 몸을 ‘텍스트 연주’라고 명명합니다. 한유주는 「협업들에 대한 소고」에서 텍스트에 기반한 협업 프로젝트 경험담을 통해 협업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끊임없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는 짙은 회의감을 토로합니다. 양근애 또한 「점선과 부등호」에서 문학주간의 협업 프로젝트 기획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연극을 이어주는 점선의 역할과 문학과 연극 사이에서 부등호를 그리고 있는 속내를 고백합니다.
웹진 《비유》 소개글에는 ‘우리가 쓰는 것은 문학이고, 우리가 만드는 것은 문학과 연계하고, 문학을 확장하는 활동입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문학이 다른 무엇과 연계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차를 감수하게 됩니다. 텍스트가 이동하고 활용되며, 다른 장르의 문법 위에서 문학을 펼치고 재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서로 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차이가 만들어내는 모호함에 익숙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비유》를 통해 그런 모호함을 실험하고 새로운 시도를 지속하는 것이 기획자이자 독자로서 《비유》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호에서도 너와 나의 시차를 다양한 시선에서 발견하고 경험하며 모호함의 자유를 맘껏 누리시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