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미술 영어와 기계번역은 전복을 꿈꿀 수 있는가?
레바논 출신 번역가 리나 문제르는 에세이 「트래시 토크: 쓰레기를 번역하기」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미술 텍스트 번역의 웃픈 현실을 상세히 묘사한다. 거창하지만 공허한 문장, 사회적 가치보다는 트렌드에 따라 오고가는 관념, 어색한 원문에 충실하기도 윤문을 시도하기도 어려운 딜레마……(미술 텍스트는) 문학과 흡사하다고도 할 수 있으나, 대부분 최악의 문학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자기만족을 뿜어낸다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미술 텍스트는 으스대고, 자신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단어를 남용하며, 끊임없이 유명한 누군가의 이름을 들먹이고, 문장마다 당신을 가스라이팅하며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글이 아니라 당신의 문제라고 믿게 만든다.”1)
문제르가 헐뜯는 즉 ‘트래시 토크’를 하는 대상인 ‘미술 텍스트’는 바로 나의 전문 틈새시장이기도 하다. 약 이십 년간 틈틈이 번역을 해왔는데 최근 십 년가량은 주로 현대미술 분야에서 작가의 말, 비평문, 전시 서문, 작품 캡션, 영상 자막 등을 맡았다. 번역은 내 첫 직업이면서 언제나 부업이었고, 적극적으로 영업하는 일 없이 기존의 관계에서 이어지는 의뢰 위주로 일을 맡는 편이다. 그 덕분에 문제르가 묘사하는 것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지는 텍스트를 자주 접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 역시 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 문제르가 묘사하는 것이 잘 못 쓴 글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미술 텍스트에서 전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쪼’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주로 한영 번역을 담당하는 편이다. 이 과정에서 주로 골머리를 앓게 되는 문제는 위와 같은 ‘쪼’를 번역하는 일이다. 골치 아픈 과업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내 특기 분야라고도 할 수 있다. 기계번역의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요즘도 좀처럼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나의 ‘믿을 구석’인 셈이다.
이러한 번역 작업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연유로는 그간 작업한 이력 등 개인적 사유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술 텍스트를 영문으로 번역하려는 수요가 지속된다는 배경을 빼놓을 수 없다. 미술 분야에서 영문 텍스트는 왜 필요한가? 단지 개별 미술 관람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영문 텍스트를 갖추는 것이 미술 제도의 사실상 표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배경과 위에서 말한 것 같은 미술 텍스트의 특징은 무관하지 않다.
‘국제 미술 영어’와 전복에의 기대
알릭스 룰과 데이빗 러빈은 미술 텍스트 특유의 영어를 이른바 ‘국제 미술 영어’(International Art English, 이하 IAE)라고 명명한 바 있다.2) 동명의 에세이에서 그들은 이플럭스(e-flux) 보도자료 십삼 년 치의 통계를 살펴 IAE의 특징인 거창한 어휘와 만연한 문체를 분석한다.
예컨대 IAE에서 “예술가의 작품은 언제나 의문을 던지고(interrogate), 문제시하고(question), 부호화하고(encode), 변형하고(transform), 전복하고(subvert), 포개고(imbricate), 대체하며(displace), 그냥 그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할을 하거나(serve to), 기능을 수행하거나(function to), 그러는 듯하다(seem to).” IAE는 새로운 명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어 시각적인 것은 ‘시각성’이 되고, 세계적인 것은 ‘세계성’, 잠재적인 것은 ‘잠재성’, 경험은 ‘경험 가능성’이 된다. IAE는 부사(”유희적이며 전복적으로 역전시킨다”), 대구법(”내적 심리와 외적 현실”), 종속절에 진심이고 언제나 적은 단어보다는 많은 단어를 선호한다.
이러한 경향은 부분적으로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고답적 언어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IAE에서 이론은 얼마간 ‘미학적으로’ 차용되기에 (예컨대 ‘횡단성’ ‘사변성’ 같은) 분석적 개념 또한 심상을 나타내는 데 쓰이거나 일종의 마케팅 용어로 기능하곤 한다. 룰과 러빈은 IAE의 기저에 미술계 엘리트 언어와 유사한 언어를 차용함으로써 권위를 수행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다고 지적한다.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모종의 낯섦 및 거리감을 형성하고 엘리트 언어에 대한 친숙함을 기반으로 위계를 작동시키는 양태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IAE라는 현상의 배경에는 인터넷을 통해 어느 전시 소식이라도 국제적으로 퍼질 수 있게 된 매체 환경 변화가 있다. “지난 십 년 동안 현대미술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인터넷의 파놉티콘 효과다. (…) 예술계에서 언어는 그 언제보다 막강하다. 수많은 비엔날레가 무색하게도, 예술계의 관심 대부분은 거의 언제나 온라인에 쏠려 있다.” 예술계 엘리트의 언어는 갈수록 더 많은, 다양한 배경의 사용자를 획득하고 있으며 이들 새로운 사용자들이 생산하는 수많은 텍스트를 통해 IAE는 더욱 확장한다.
룰과 러빈은 모방과 구별짓기라는 권위의 이중 작용을 특징으로 하는 IAE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던진다. 이 에세이는 2012년 발표 후 화제를 모으며 일련의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히토 슈타이얼은 (분석 대상인 이플럭스 보도자료의 텍스트 패턴을 영국 국립 말뭉치와 대조하여 IAE의 오류를 부각하는) 저자들의 분석이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3)슈타이얼이 보기에 IAE는 오늘날 예술계가 담고 있는, 언어를 둘러싼 사회적/계급적 긴장을 정확히 드러낸다. 그렇기에 억압과 착취에 복무하는 언어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가 그러하듯) 계급적/지리적 이동성을 가능케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반체제 인사, 이주민, 이탈자의 언어이기도 한 IAE는 부족할지언정 권력 위계를 전복하려는 시도이기에, 오히려 그것을 더욱 낯설게 만들고 영미권 엘리트의 언어 같은 어떤 기원(origin)으로부터 단절시켜야 한다고 슈타이얼은 주장한다. 이를 통해 제국주의 및 글로벌 기업의 질서에 지배되지 않으며 사치재가 아닌 선물로서의 언어를 촉구한다. IAE의 전복적 가능성에 대한 슈타이얼의 기대는, 호미 바바의 문화번역 이론에서 탈식민적 저항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흉내내기(mimicry)와 그것을 통한 혼종성(hybridity) 생산 논의를 계승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IAE의 동기가 ‘구별짓기’에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포용적인 언어로 규정할 수 없다고 보는 룰과 러빈의 진단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기계번역과 (탈)식민성
인터넷 환경을 배경으로 성장한 IAE에서 ‘사치재’가 아닌 전복적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AI 기술 기반 기계번역의 보편화 속에서도 혹시 유사한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기계번역은 계급적, 문화적 자산에 따른 언어 활용의 장벽을 크게 낮춰주며 그런 점에서 사치재로서의 언어에 대항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김성우가 지적하듯 “기존에 영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의미를 기계번역의 도움을 통해 표현할 수 있게” 되고 “한국어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만큼 영어로 표현이 가능”하기에 그만큼 “사회문화적 자본이자 변별의 도구로서 기능하던 영어”의 위상 조정 또한 기대해봄직하다.4)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은 이러한 기계번역의 작용에서 탈식민적 저항을 읽어낼 수 있는 한 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그의 번역론에서 번역은 (통념과 달리) 원언어의 의미나 정보를 번역어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번역은 단일한 언어가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개별 언어 속에 감춰져 있는 순수 언어를 모색하는 작업이다. 윤조원이 테자스위니 니란자나의 논의를 빌어 설명하듯 “번역이 식민지배의 중심적 기술이 되는 이유는 두 문화가 접촉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상호작용이 상이한 언어, 문화 사이에 위계질서를 생성하여 작동시키고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 일방적 특권화의 구도를 벗어나는 대안적 번역을 꾀하는 과정인 문화번역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를 해체하는 문화적 소통을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이다.”5) 그런데 “벤야민의 번역론은 원언어의 의미작용을 더 근원적인 것이나 더 우월한 것으로 설정하지도 않”기에, “이질적인 문화들 사이에서 권력의 불균형이 자아내는 위계질서의 문제들에 저항하는 문화적 실천의 가능성이 벤야민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재현은 벤야민의 ‘순수 언어’의 가능성을 기계번역에서 찾으며, 특히 인공신경망 기법 적용으로 직접적 번역 예시 없이 ‘제로샷 번역’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구글 번역 시스템 사례에 주목한다. 단순화하자면 한국어-영어 번역 예시와 일본어-영어 번역 예시로만 훈련받은 기계번역 시스템이, 학습되지 않은 한국어-일본어 사이의 번역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기계번역 시스템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문장들을 언어와 무관하게 동일하게 표상하는 일종의 ‘공통의 표상’을 학습”하고, 이재현은 이것을 “‘순수 언어’와 유사한 ‘가상적 네트워크’”라고 규정한다.6) 도혜린은 벤야민을 매개로 이재현의 기계번역 분석과 문화번역 이론을 연결하는 논의를 전개하며 “문화적 통행의 방향을 여러 갈래로 확대”하고 “권위와 위계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 인공지능이 대규모 데이터셋들을 혼종화시키면서 문화 번역의 실천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제시한다.7)
그러나 AI 기술의 탈식민적 가능성이라는 실천적 지향점의 중요성과 별개로, (도혜린도 위 논문에서 묘사하듯)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AI 기술과 데이터를 매개로 강력하게 일어나는 식민주의적 작용에 가까워 보인다. 슈타이얼의 입장에서 IAE가 권력 위계를 전복할 잠재력을 가졌지만 동시에 억압과 착취에 복무하는 언어인 것과 유사한 긴장 관계다.
인간이 현재 사용하는 언어는 약 7천 개로 추정된다. 이 중 2025년 8월 기준으로 구글 번역이 지원하는 언어는 249개이며, 번역 전용 서비스는 아니지만 번역용으로도 많이 쓰이는 챗지피티의 경우 59개 언어를 지원한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 언어 중 아주 적은 수일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언어 간에도 성능 차이가 현저하다. 비록 제로샷 번역이 가능하다 해도 텍스트 데이터가 적은 언어는 데이터가 많은 (예컨대 서구의) 언어보다 번역 성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기계번역에 있어 ‘순수 언어’의 가능성은, 현실의 기술상업적 구현에서 데이터양에 따른 편향이라는 한계를 만나며 이 한계는 지배적 언어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한다.
기계 생성 텍스트와 새로운 구별짓기
2024년 4월 벤처투자자 폴 그레이엄은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새로운 사업 제안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delve’라는 단어를 쓰더군요.”8) 이 글의 함의는 “delve(파고 들다)”라는 단어로 미루어 보아 챗지피티로 생성한 텍스트일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아마도) 해당 메일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해당 단어가 AI 생성 텍스트의 징후라는 근거는 예컨대 챗지피티 출시 전후로 생명과학 및 의학 분야 논문 중 “delve”를 포함하는 비율이 0.1% 미만(2022년)에서 0.5%(2024년)으로 급증했다는 관측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실증적 조사 이전에도 이용자들은 경험적으로 챗지피티가 특정 단어를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9)
챗지피티 같은 LLM(대형언어모델) 기반 시스템은 막대한 양의 인터넷상의 텍스트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그 패턴을 학습하는데, 왜 평균적인 경향성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delve’ 같은 ‘쪼’가 생겨날까? 학습을 마친 ‘날것의’ LLM은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결과물이나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을 내놓을 수 있기에 여러 한계를 지닌다. 이를 쓸만한 상용 서비스로 만들기 위해서는 LLM에 질문/지시를 던지고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을 통해 성능을 개선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를 RLHF(인간 피드백을 통한 강화학습)이라 부른다. 사람이 수행하는 이 과정을 AI 기업은 글로벌 남반구에 외주화한다. 예컨대 과거 영국 식민지로서 영어 구사자가 많은 저임금 노동시장이자, 업무 영어에서 ‘delve’ 같은 단어를 영국이나 미국보다 많이 사용하는 나이지리아 같은 곳에 말이다. 그렇다면 챗지피티가 뱉어내는 ‘delve’는 남반구가 AI 기업을 위해 수행한 노동의 효과이자, 식민주의 역사의 흔적을 반영하는 편향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의 식민 착취 구도에서 기인하는 챗지피티의 사투리는, 다시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언어 권력의 문제로 작용한다. 그레이엄이 사업 제안 메일에서 “delve”를 보고 챗지피티로 생성했다고 (따라서 무성의한 제안이라고) 판단하여 거절하는 기준을 세운다면, 이 기준은 나이지리아 출신 사업가의 제안을 더 높은 확률로 배제할 것이다. 챗지피티가 생성한 텍스트를 활용하여 구축한 AI 텍스트 탐지기는 나이지리아식 영어를 AI 생성 텍스트로 판정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런 탐지기를 사용해 학생 과제나 구직자 자기소개서를 걸러낸다면 데이터 편향이 특정 지역 출신자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효과를 만든다.10) 식민주의 역사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는 남반구 노동자가 싼값에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동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AI 시스템을 근거로 자신의 언어가 ‘AI 텍스트’ 취급(저평가)받는 이중착취 구조다.
IAE와 AI 영어 사이에서
기계번역을 작동시키는 AI 모델을 만들 때 막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AI 기업은 인터넷에 누적된 인류 공동의 지식을 사유화하고 플랫폼을 통해 정보를 추출한다. 또한 이 데이터로부터 AI 모델을 도출하고, 만들어진 AI 모델을 작동시킬 때 엄청난 연산량이 발생한다. 연산을 담당하는 데이터센터 인프라는 각종 광물(반도체), 에너지(전력), 물(냉각용 담수) 등의 천연자원을 소모하며, 그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앞서 살펴본 노동의 층위까지, AI 기술은 노골적인 식민자본주의 기획인 셈이다. 이 거대한 기획이 서구 빅테크 기업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가운데 벤처자본과 각국의 산업정책은 흐름에 동참하느라 분주하고, 많은 사람이 AI 대전환을 확신하며 모두가 이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꼴사나운 광경이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나 역시 어떤 혁신을 도입해서 생산성을 높이거나 새로운 유형의 작업 가능성을 열어야 할 것만 같다. 어느 기업이 새로운 언어모델을 공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호기심이 동한다. Ollama(로컬 환경에서 LLM을 실행하는 툴) 웹사이트에 등재된 모델 목록을 살펴보며 내 컴퓨터에서 실행 가능할 정도로 작은 모델은 어느 것인지, 번역에 특화된 모델은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본다.11) 이런 모델 한두 가지와 오픈소스 UI를 적당히 조합하면 기계번역으로 잡은 초벌 원고를 내가 수정한 뒤 AI와 함께 교열하는 반자동 번역 환경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만든 환경은 상용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는 나만의 주체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이내 시들해진다. 나의 소소한 번역 업무에 그렇게까지 자동화를 도입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고, 기업 인프라에 의존하지 않고 내 장비에서 AI 모델을 실행한들 AI 모델 구축 과정에서의 구조적 착취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미묘한 심정으로 챗봇 어시스턴트를 실행한다. 기계번역 기능을 직접 이용하는 경우는 직장 동료와 참고자료를 공유하는 등의 상황으로 한정하고, 의뢰가 들어온 번역은 수작업으로 진행하지만, 대신 편집 보조용으로 언어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클라이언트의 원고를 상용 플랫폼에 넘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AI 기업에 어떻게든 덜 보탬이 되려는 심보도 있어 내 컴퓨터에 설치된 모델을 이용하기에, 응답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다. 퇴고 과정에서 문단 단위로 번역본을 입력하며 문법 오류를 찾고 ‘보다 잘 읽히는 문장’을 제안받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때 나는 언어 모델이 보다 매끄럽고 평균적인 문장을 내놓길 기대한다. 때로 미로 같은 미술 텍스트의 구문을 가급적 직역 위주로 작업하는 나의 초벌 번역문과, 확률적으로 정형화된 AI 산출물을 대조하며 1차 교열을 진행한다. IAE식으로 표현하자면, IAE와 ‘AI 영어’ 사이의 진자 운동(oscillation between International Art English and Artificial Intelligence English)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술 관련 전공자가 아닌 내가 미술 번역을 할 수 있게 된 데는 IAE와 그것이 참조하는 수많은 자료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준 인터넷 덕이 큰 것처럼, AI 기술 역시도 내 번역에 기여하는 셈이다. 물론 이때 AI 산출물은 진정한 의미에서 평균적이지 않고, 내가 이용한 개별 AI 모델의 편향을 담고 있는 언어다.You are a professional copy-editor and you will be given excerpts from an essay about an art exhibition. Correct grammatical errors in the provided text and, if necessary, rewrite it for better legibility. Only answer with the proofread text, and nothing else.
(당신은 전문 편집자로, 미술 전시 관련 글의 일부를 전달받을 것이다. 글에서 문법 오류를 정정하고 필요시 가독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윤문할 것. 교열한 글 외에 다른 내용은 답변에 포함하지 말 것.)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효용이 있다 해도, 거시적 흐름은 번역가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보인다. 편집 보조 도구로 AI 모델을 가볍게 이용하는 것 외에는 아직 번역가로서 기계번역/생성형 AI 도입에 따른 노동 변화를 크게 체감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내가 예외적 사례일 것이다. AI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은 번역가 이야기는 차고 넘치며, 완전한 대체가 아니더라도 많은 번역가가 작업 과정에서 기계번역을 활용하고 있거나 활용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12)
틈새시장이 언제까지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미 (미술은 아니지만) 문학작품 기계번역을 권당 100달러에 서비스하는 기업이 등장했다.13) 이들의 기술과 번역 품질이 그들 주장처럼 인간 번역가와 구분할 수 없는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저 적당한 수준의 번역 기술도 충분히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 나의 주 클라이언트인 예술 관련 기관에서도 번역 예산 책정 기준을 인간 번역자 말고 기계번역 서비스에 맞추어 예산을 절감하는 상상을 누군가는 하고 있을 것이다.
갈수록 AI 기술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번역 프로세스 그리고 점점 취약해질 노동 조건의 전망 속에서, 나의 번역이 식민주의 기제의 일부라는 감각을 곱씹는다. IAE가 억압과 착취에 복무하듯 기계번역을 위시한 AI 기술 또한 자연-데이터-노동 각 층위에서 작동하는 식민주의 작용에 기여한다. AI 기술을 활용해 미술영어를 번역하는 일이 그 구조에 복무하지 않을 수 있을지 솔직히 의심스럽고,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라도 해보려면 번역의 안과 밖을 오가는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 안에서 틈새를 찾아내 ‘전복적으로 역전시키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 졸업전시 보도자료를 쓰는 미술 전공생과, 나이지리아에서 실리콘밸리 AI 기업을 위해 데이터 라벨링을 하는 외주 노동자가 연결되는 공간을.
고아침
인공지능을 둘러싼 기술정치와 윤리, 데이터 정의, 비판적 기술 실천에 주목하고, 디지털 기술에 대한 애정과 환멸 사이에서 양가성을 조율하며 시민으로 잘 살고자 한다. 『AI 윤리 레터』(바로가기)에서 운영진 겸 필진을, 디지털 시민 광장 빠띠(바로가기)에서 공익데이터 부문 활동가를 맡고 있다. 종종 번역가로 일한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원고를 쓰는 동안 계속 마음 한편에 걸려 있던 이미지가 있다. "매생이 전복죽" 아래 영어로 "(Every life is ruined)"라고 적힌 흰색 카드가 SW컨벤션센터 로고가 그려진 나무 블록에 꽂혀 있는 사진이다. (바로가기) 영어 문구는 ‘모든 삶이 망했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매생이 전복죽"을 기계번역하다 발생한 오역으로 추정된다. 출처가 불명확한 이 이미지는 2019년 말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에서 퍼지며 밈이 되었다. 이미지가 널리 퍼진 이유는 원문과 번역문이 황당할 정도로 거리가 있어서뿐만 아니라, 번역문의 강력한 메시지가 우연히 드러내는 시적 순간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덕이기도 할 것이다. ‘전복죽’이 ‘망했다’로 옮겨진다면, 역으로 ‘망했다’라는 감각이 ‘전복적’ 실천으로 연결되는 경로는 무엇일까?
2025/09/03
75호
- 1
- Lina Mounzer, “Trash Talk: On Translating Garbage by Lina Mounzer”, The Paris Review, 2019-07-08. 바로가기
- 2
- Alix Rule, David Levine, “International Art English”, Triple Canopy, 2012. 바로가기
- 3
- Hito Steyerl, “International Disco Latin”, E-Flux Journal 45, 2013-05-01. 바로가기
- 4
- 김성우,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 유유, 2024, 319-321쪽.
- 5
- 윤조원, “번역자의 책무—발터 벤야민과 문화번역”, 영어영문학 57권 2호, 2011, 217–235쪽. 바로가기
- 6
- 이재현, 『인공 지능 기술 비평』, 커뮤니케이션북스, 2019, 39-57쪽.
- 7
- 도혜린, “탈식민주의와 문화 번역의 실천으로서 인공지능 예술 연구”, 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202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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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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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AI 생성 텍스트 구별짓기 시도는 그러한 구별이 성공적인지, 구별의 근거가 타당한지와 무관하게 계속된다. 이러한 수요는 무수한 AI 텍스트 탐지기 서비스뿐만 아니라, 탐지기에 적발되지 않도록 AI 텍스트를 다시 수정(‘인간화’)해주는 AI 도구를 낳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접산업분야를 형성한다. 최근 화제가 된 챗지피티 사투리로는 줄표(em dash, “—”)가 있다. Miles Klee, “Are Em Dashes Really a Sign of AI Writing?”, Rolling Stone, 2025-04-01. 바로가기 흥미롭게도 delve와 줄표 모두 미술 영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혹시 AI 생성 텍스트 식별이 IAE에 대한 차별 대우로 이어질까?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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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Gerrit De Vynck, “Duolingo Cuts Workers as It Relies More on AI”, The Washington Post, 2024-01-10. 바로가기
- 13
- Ella Creamer, “AI Translation Service Launched for Fiction Writers and Publishers Prompts Dismay among Translators”, The Guardian, 2025-07-08.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