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배경의 정물화. 체리와 라임 조각이 꽂힌 칵테일 잔과, 흰색 물질이 떠 있는 와인 잔이 놓여 있다. 해골과 보석 반지, 향, 풍경, 풀잎, 자홍빛 과일 조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보랏빛 거품과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뒤섞여 흩날린다.

시온이가 죽기 직전 농담을 했는데 차영이는 웃느라고 그 애가 뭐라고 했는지 까먹어버렸다. 단번에 알아듣고 웃었으니까 둘이 평소에 나누었던 농담이겠지? 그리고 어려운 농담은 아니었을 것이다. 차영이는 평소에 머리를 잘 안 쓰니까.
  차영이는 사실 웃기 싫었다. 시온이가 한 말 까먹을까봐. 그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시온이가 슬퍼할까봐. 웃지 않는 차영이 얼굴 보고. 웃는 차영이 얼굴도 못 보고 시온이가 숨을 거두었으니까 차영이는 아 괜히 웃었나 싶었다. 그리고 눈 감은 시온이 얼굴 내려다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또 한발 빠르군. 잠시 뒤에 또 생각을 했다. 또 한발 느리군. 늘 시온이가 먼저 걷고 차영이가 뒤따라 걷고. 시온이가 먼저 늙고 차영이가 뒤따라 늙고. 너의 머리통이 반 조각나면 나의 것도 그렇게 할까? 이런 농담도 시온이가 먼저 하고 차영이가 뒤따라 하고. 아냐, 나의 머리통이 반 조각나면 너의 것을 그렇게 해줄게. 그러면 시온이가 먼저 웃고 차영이가 뒤따라 웃고. 이 둘 사이에는 언제나 이런 순서가 정해져 있던 것이지.
  시온이는 언제나 먼저 잠에 들었고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 시온이와 차영이가 각각 다른 집의 맏이이자 막내로 태어나기 전에도 그애들은 함께 살았다. 밤이 일 초만큼 짧고 낮에는 발아래까지 납작한 빛이 무성한 곳에서. 그 당시 시온이와 차영이는 우묵한 유리잔 형태의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다. 뒤집어엎어 놓으면 볼록한 유리종 형태가 되는. 빈 얼굴끼리 부딪치면 댕 댕 댕 맑은 소리가 나고 몸에서 빛이 일렁이는 것이 좋아서 그런 놀이를 댕 댕 댕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많이 하면 안 돼. 그런 것은 배우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만. 여느 쾌락적 행위가 그렇듯이 그만두기 쉽지 않았다. 유리로 된 잔이나 종 시온이나 차영이는 그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나 신이 되고. 얇은 유리의 안과 밖이 같은 풍경을 통과하는 잔과 종의 세상.
  차영이는 식탁 위에 물 잔을 내려놓고 약도 한 번에 잘 삼켰다. 그러고는 침대로 가서 이불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아 아 아 얼굴의 울림도 잘 들었다. 시온이가 죽고 나서 차영이는 그 애의 내부를 너무 많이 생각했다. 시온이가 죽은 이유는 그 애의 내부에 있다. 시온이에게 내부가 있기 때문에. 시온이는 몸을 뒤집어 내장을 밖으로 벗어두고 빛을 쪼이고 싶다고 했다. 한여름에 땀에 젖은 티셔츠를 뒤집어 벗어놓듯이.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서 어둡고 병든 내장을 가지고 죽었다. 차영이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을 했다. 시온이가 벗을 수 있는 내장에 대해. 차영이가 쥐고 흔들어댈 수 있는 시온이의 내장. 아니면 시온이의 농담. 그래…… 그 농담 대체 뭐였을까…… 그런 식으로 머리를 너무 쓰다가 차영이는 그만 두통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차영이는 평소에 머리를 잘 안 쓰니까.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무렵에는 차영이의 왼쪽 귀 뒤가 가볍게 욱신거릴 뿐이었고 어느 때든지 아프다는 사실을 손쉽게 까먹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증이 강해지고 지속 시간이 길어져 차영이는 얼굴 안쪽의 어둠을, 그림자를 골라낼 수 없을 정도의 또렷한 어둠을 계속 인식하면서 생활을 해야 했다. 차영이는 이제 약 없이는 잠을 못 자게 되었고 또한 잠 속에서도 약 없이는 깰 수 없게 되었다. 차영이는 잠 속에서도 방 하나짜리 집에서 깨어났다. 집이라기보다 그저 방 하나에 가까운 작은 서랍 같은 공간. 그곳에서 차영이는 언제나 앙증맞은 유리잔 하나를 만나게 된다. 차영이는 앙증맞은 유리잔 시온이에게 부탁한다.
  내 얼굴 안쪽 좀 핥아줘.
  시온이는 핥아주지 않는다.
  되먹지 못한 유리잔 같으니.

차영이는 깨어났고, 혼자되었다.
  그렇다고 해도(하나뿐인 친구이자 애인이 죽어 버리고 두통을 달고 살아가야 하는 와중에 죽은 그애가 핥아주지도 않는다 해도) 차영이는 매일 침대에 틀어박혀 아 아 아 하고 눈물을 흘린다든지 끼니를 거른다든지 우울한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영이는 새벽 다섯 시 반쯤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물을 한 잔 마신다. 흐린 김이 피어오르는 흰 밥과 멸치볶음을 든든하게 먹고 입안의 것을 다 삼킨 뒤 설거지도 한다. 세탁기를 돌릴 때는 티셔츠를 뒤집어서 넣고 빨래를 널 때는 다시 티셔츠를 뒤집어서 넌다. 티셔츠를 뒤집을 때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니까 차영이의 하루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공간은 아주 좁다. 차영이의 가슴이 들숨으로 부풀 때 시온이가 꼭 껴안을 수 있는 몸통만 한 공간.
  시온이가 꼭 껴안아주었던 차영이의 몸통. 이상하지, 어째서 떨어지고 난 뒤에도 차영이의 몸은 미미한 따뜻함을 유지하는 걸까? 차영이는 시온이와 꼭 껴안고 혼자 집을 나설 때마다 이 질문을 떠올리고는 했다. 췌장암으로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온이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아이들이 집으로 수업을 들으러 오면 차영이는 시온이와 꼭 껴안고 혼자서 집을 나서야 했다. 그 당시 차영이의 일과는 이러했다. 월요일에는 청년센터 휴게실 소파에 누워 언제든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 있는 꿈을 꿨다. 수요일에는 천장이 낮은 영화관에서 잠들었다가 상영 종료를 알리는 부드러운 불빛에 거리로 떠밀렸다. 금요일이 되면 또다시 혼자서 집을 나서야 했지만. 그렇지만. 차영이는 그 일과를 쓸쓸하다 느끼지는 않았고 그저 얕은 잠 속을 어슬렁거리는 산책쯤으로 여겼다.
  시온이는 언제나 먼저 잠에서 깨어났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 시온이를 뒤따라 죽기 전까지, 차영이는 그애를 대신하여 공부방을 운영할 것이다. 차영이는 시온이에 비해 나은 선생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성적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그리고 대학도 중퇴했고…… 하지만 아이들을 앉혀놓고 떠드는 짓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잖아. 차영이는 그렇게 믿었다. 수업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니고……
  농담이야.
  두말할 것 없이 농담이지.
  차영이는 시온이가 그러듯 농담이야 말하고 두말할 것 없이 농담이지 하고 맞장구쳤다. 하지만 농담에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아이가 있어 수업이 끝나면 차영이는 얼마간 부끄러움에 시달렸다. 웃지 않는 아이의 뚱한 표정을 따라 해보면서. 한 번쯤은 웃어줘도 됐잖아…… 투덜거리면서. 차영이는 이따금 이렇게 중얼거린다.
  얘들아, 들어봐.
  ……
  이거 농담이야.

얘들아, 들어봐.
  ……
  어떤 과일이 살았어. 살아 있는 과일이. 그 과일은 싱싱한 과육을 가지고 있었고 눈알만큼 작았어.
  선생님.
  왜?
  눈알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커요.
  그렇구나……
  네.
  그러면 그 과일은 눈알만큼 컸어. 가시풀이 이리저리 자라나 있는 강원도의 캄캄한 풀숲에서 자랐지. 나무 몸통 사이를 굴러갈 때 부재하는 생물의 소리가 들려오고 다시 뒤돌아보면 검은 숲. 넓은 잎을 길게 베면 빛이 줄줄 흘러나올 것 같은 검은 숲. 길을 데굴데굴 구를 때마다 바닥에 누운 잔가지들이 부러지고. 자신이 부러뜨린 가지를 몇 번이고 다시 부러뜨리며 영원히 구르게 될 것만 같은 검은 숲. 그러던 어느 날 과일은 거기서 개 한 마리를 마주하게 돼. 과일과 개는 사랑에 빠졌고 정말이지 뽀뽀가 진짜 하고 싶었어. 근데 그러지를 못해서 애가 탔지. 그리고 아주 서글펐어. 개는 주둥이가 넓고 또 긴데 과일의 꼭지는 좁고 또 짧거든. 그리고 과일의 꼭지는 꼭 입이라고도 할 수가 없거든. 개는 과일의 얼굴을 핥아주고 싶어서 기꺼이 그렇게 했어. 일단 꼭지부터. 그런데 실은 말이지. 개 입장에서는 거기가 얼굴인지 가슴인지 엉덩이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까. 어디든 다치지 않게 공을 들여 살살 잘 핥아주어야 했어. 그 일에 온 신경을 끌어다 쓰고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개는 진이 빠져서 그날은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어. 그런 식으로 개는 과일을 혀로 핥으며 때로는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며 그러나 껍질을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침을 질질 흘리며 행복하게 살아갔어.
  그거 선생님 얘기예요?
  뚱한 표정의 아이가 물어보자 다른 애들이 헤헤헤 웃었다.
  그만 웃어.
  헤헤헤.
  차영이는 헤헤헤 하는 웃음을 헤치며 아이들을 내보냈다. 그거 선생님 얘기예요? 물음에 차영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수학 문제를 질문하면 차영이는 어떻게든 대답을 한다. 열 문제 중 하나는 푸는 데 애를 먹지만. 하지만 아이들이 선생님에 대해 물으면 차영이는 대체로 대답을 못 한다. 차영이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신, 아니면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좀처럼 생각을 안 하고 거울을 보는 것도 귀찮은 일로 여기니까. 차영이는 거울 대신 아무것도 반영하지 않는 창문을 활짝 열어 얼굴에 바람이 들이치게 두었다. 차영이는 자신에게 있는 꼭지 아니면 주둥이 아니면 엉덩이 아니면 가슴…… 그런 것들이 보기에 서글픈가 아닌가 살피다가 누군가 현관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차영이가 문을 열자 뚱한 얼굴의 아이가.
  그거 우리 외삼촌 얘기예요?
  차영이는 으응 너희 외삼촌이 누군데…… 하면서 아이를 집으로 들이고는 식탁에 앉혔다. 차영이는 냉장고에서 표면이 반질반질한 사과 반쪽을 꺼내 껍질을 벗겨서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갈변한 사과를 느긋하게 씹어 먹었다. 그리고 사과 세 쪽을 착실히 해치운 뒤 외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는 사람들이 많이 죽은 사고로 엄마를 잃고 외삼촌이랑 함께 살고 있었다. 외삼촌과는 원래부터 가까웠던 사이는 아니지만 함께 살면서 가까워져 보려고 아이는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삼촌은 너무 슬픈지 그래서 정신이 나갔는지.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자 하는지 자기가 들개라느니 이상한 소리를 하고. 쉬는 날에는 밖에 나가서 뭘 하는지 돌아오지도 않고. 선생님 있잖아요 외삼촌이 머리가 좀…… 아무래도 엄마가 그렇게 돼서…… 중얼거리면서 아이는 차영이의 공책에 연필로 또박또박 글씨를 적었다. 그것은 시온이가 입원해 있었던 종합병원의 이름. 그리고 상우의 전화번호였다.
  개와 과일 이야기는 실로 상우의 것이었다. 상우는 시온이가 입원했던 병동의 간호사로, 차영이와 함께 시온이의 임종을 지켰다. 시온이가 농담을 했을 때 차영이가 웃었고 상우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온이가 그 순간 난데없이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상우는 꼼짝없이 웃으면서 그애의 임종을 지켜야 했던 것이지.
  외삼촌의 머릿속을 좀 알고 싶어요.
  아이는 차영이 쪽으로 공책을 슥 밀었다. 공책을 한 번 더 슥 미는 아이의 고집스러움에 차영이는 그만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알게 되면 이야기를 해줄게.
  아이의 말대로, 상우는 종종 자신이 전생에 들개였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차영이는 그를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 상우에 따르면 그는 들개 시절 무언가와 사랑에 빠졌지만 종(種)이 달라서 가정을 이루고 자손을 두지는 못했다. 차영이는 자신의 전생은커녕 생이라는 개념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상우 씨는 머리를 많이 써서 저렇게 아이구 참…… 생각하다가도 그런 생각도 금방 관두기는 했다.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차영이는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눈을 감아 머릿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차영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자신의 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자신이 전생에 유리로 된 잔이나 종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조차도 잘 모른다. 유리로 된 잔이나 종 시절의 기억은 태어나면서 잃어버린 첫번째 것. 차영이는 첫번째로 태어났고 그뒤로 동생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 없어졌다. 모두 없앴지 뭐.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차영이는 식탁에 얌전히 앉아 사과를 씹어 먹고 있었다. 모두라니 몇 명이나요? 차영이는 그렇게 물어보지는 않았고 머릿속으로만 없는 동생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차영이는 당시 소아 실어증을 앓고 있었다. 네가 불행하게 살지 않으려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니? 엄마가 말했을 때 차영이는 일곱 살이었고, 고모네 집에서 조금 길러졌다가 또 할머니네 집에서 조금 길러졌다가…… 하여튼 관리가 까다로운 식물처럼 대해지면서 이집 저집 전전했다. (기실 차영이는 조용하고 주는 대로 먹으니 참 키우기 좋은 애였지만.) 그래도 차영이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차영이는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서글퍼하지도 않았다. 차영이는 언제나 그애를 둘러싼 가벼운 침묵과 함께 그냥 거기 있을 뿐이었다. 차영이가 놓여진 곳에.
  나는 불행 안에 놓여 있지는 않다.
  차영이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불행이 어떻게 생겨 먹은 공간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불행하지 않은데. 정말로 없는 동생들 덕분일까? 그렇다면…… 아쉽게 됐다. 차영이는 사과를 느긋하게 씹으면서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을 했다.
  생각을 했더니 외로워지는군……
  그날 밤 처음으로 없는 동생들이 찾아왔다.
  그애들은 우묵한 유리잔 형태의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다. 뒤집어엎어 놓으면 볼록한 유리종 형태가 되는. 빈 얼굴끼리 부딪치면 댕 댕 댕 맑은 소리가 나고 몸에서 빛이 일렁이는. 그런 놀이를 댕 댕 댕 몇 번이나 반복하며 헤헤헤 웃어대는. 맑은 소리가 자꾸만 어린 차영이의 머릿속을 헤집었으며 어느 날엔 차영이가 짜증이 나서 마음속으로 소리치기도 했다.
  너희는 다 죽었잖아!
  ……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그렇게 말해도 동생들은 늘 헤헤헤 웃고. 어라라 이거는 농담이 아닌데…… 말해도 웃음 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 순간, 차영이는 장장 석 달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뗄 수 있었다.) 동생들은 흙으로 가득한 토분을 가져와 창틀에 올려두고 갔다. 차영이는 그것들을 매번 쏟아버려서 엄마한테 혼이 났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흙은 따뜻해서 주워 담는 동안 아무것도 슬프지 않았지만. 차영이는 동생들을 따라 밤 산책을 나선 적도 있었다. 긴 행렬의 꽁무니에 따라붙어 걷다보면 언제나 차영이가 첫번째 아이가 돼. 아니면 마지막 아이라고도 할 수 있지. 밤에 태어난 차영이는 어두운 곳에서도 양 볼이 붉어질 때까지 잘 걸을 수 있다.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은 언제부턴가 차영이를 따라오지 못했는데, 차영이의 걸음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차영이의 머릿속이 너무 캄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없는 동생들은 차영이가 잃어버린 두번째 것. 그 아이들은 차영이가 어떤 아이인지에 대한 힌트였으며, 차영이의 살아 있음에 대한 강력한 암시였다.
  차영이는 지금은 명백히 혼자이지만, 애석하게도 언제나 혼자는 아니었다. 차영이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운 좋게 얻었다가 도로 잃어버렸으며, 지금과 같이 다시 혼자가 됐다. 차영이만 여기에 혼자 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 차영이가 머리가 (진짜로) 반 조각날 정도로 날카롭게 고민하게 된다면, 그애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우연이야.
  그렇지, 우연이지.
  닮은 유리잔 여러 개를 떨어뜨리더라도 어떤 녀석은 깨어지지 않고 우연히 살아남는 것처럼. 차영이는 튼튼하고 혼자된 유리잔이다.

차영이는 사람들의 얼굴 위에 빛이 머물렀다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병의 이름과 무관하게 종합병원에는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아프고 지친 사람들을 왜 자꾸 걷게 만드는 걸까? 차영이는 생각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잠시 웃어 보인 만큼 명랑해지고 윗몸일으키기처럼 한 번에 무너졌다. 차영이는 한 시간 가량을 로비 벤치에 앉아 잠자코 기다린 끝에 상우를 만날 수 있었다.
  상우는 사람으로서는 덩치가 큰 편이지만 개로 태어났다면 작고 겁이 많은 녀석일 것 같다. 차영이는 상우의 움직임과 눈동자를 살피며 생각했다. 상우는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흘끗댄다든지, 간호사복 밑단을 자꾸 만지작댄다든지, 여하튼 전체적으로 산만해 보였다. 무엇보다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눈동자가 너무 검었다. 상우씨는 혹시 개였다는 걸 기억하세요? 차영이가 농담처럼 물었을 때 상우는 잠시 놀랐고 이윽고 경계를 풀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그 귀여운 친구를 기억하세요? 우리한테 농담을 하고 나서 바로 죽어버렸잖아요. 그래서 그 친구가 죽을 때 우리 헤헤헤 웃었잖아요. 상우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원체 기억력이 좋지가 않아요.
  기억을 못 해서 미안해요. 상우가 사과했다. 차영이는 상우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상우의 눈은 막 생겨난 검음 같았고 특별히 더 어두운 부분을 골라낼 수 없을 정도로 균질하게 검었다. 슬퍼 보인다든지 정신 나가 보인다든지 죽음에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누나가 죽은 사람의 눈은 이러하군. 차영이는 생각했다.
  조카가 외삼촌에 대해서 걱정을 해요.
  저도 조카가 걱정이 돼요.
  쉬는 날에는 어디에 가시나요?
  상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차영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쉬는 날에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해요. 차영이가 덧붙였다. 상우는 여전히 산만하게 움직였지만 나름대로는 여유가 있는지 자판기에서 차가운 데미소다를 하나 뽑아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차영씨 안에는 평화가 있네요.
  상우는 일을 하러 가고 차영이는 벤치에 앉아서 데미소다를 다 마셨다. 평화.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차영이는 왜인지 모욕감이 들었다. 그런 일(하나뿐인 친구이자 애인이 죽어 버리고 신경성 두통을 달고 살아가야 하는 와중에 그애가 핥아주지도 않는 일)을 겪었는데도 사람이 평화로워 보이는 건 조금 수상하니까. 차영씨 그런 수상한 사람이네요. 그런 의도일 수도 있으니까. 차영이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차영이의 안에는 무엇이 멀뚱히 앉아 있을지. 멀뚱히 앉아 있는 너는 무엇을 보고 듣니.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숨어 있니. 거기는 눈을 닫아두었으니 어둡고 조용하겠지. 차영이는 검고 둥근 공간을 뱉어내듯이 중얼거려 보았다.
  평화롭다.
  그러게, 평화롭다.

시온이는 여름에 죽었고 그뒤로 여름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으니까 차영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는 백 번도 더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기회는 단 한 번뿐이어서 차영이는 아직 시온이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죽은 사람은 얼마나 헐렁한 몸을 가졌는지. 얼마나 산 사람에게 꼭 안기고 싶은지. 내가 그러한 마음이란다 하고 얼마나 전화를 걸고 싶은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차영이는 도통 가늠해보기가 어렵고. 몇 번의 여름이 지나도록 차영이는 시온이의 농담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가을 겨울 봄이 오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차영이는 선풍기에 투명한 비닐을 덮어 씌워 베란다 한편에 세워두었다. 베란다 문을 닫고 나니 이마에 땀이 맺혀 있어서 괜히 넣었나 도로 꺼낼까도 싶었다. 하지만 바닥에 스르르 엎드리자 찬기가 올라왔고 차영이는 도톰한 이불을 꺼내야겠다는 새로운 마음을 먹게 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무서웠던 여름은 끝났고 이제 선풍기가 없어도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으면 뒷목이 서늘해지는 계절. 여름이 서서히 말라가는 동안 차영이는 바닥에 누워 자신도 어딘가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평화로운 곳으로. 그런 생각은 처음이었다.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도 차영이는 잘 몰랐으니까.
  몸 아래 납작한 그림자를 의식하며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어보는데 갑자기 차가운 손이 차영이의 손을 덥석 잡아서 세게 당겼다. 차영이 또한 그 차가운 손을 잡아당겼다. 당기거나 당겨지는 힘. 이 힘으로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기세 좋게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욕이 차영이 안에서 솟아났다. 그 순간 누군가 차영이 몸 위로 풀썩 엎어졌고 곧이어 다른 누군가도 그 위로. 곧이어 다른 누군가도…… 너무 무거워! 차영이가 소리 지르자 일순 몸 위로 빛이 쏟아졌고, 마찬가지로 너무 무거웠다. 무거운 빛 아래 웅크려 차영이는 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온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경험은 단 한 번뿐이라서 우리들은 죽고 싶어 안달이 나 있어. 시온이의 목소리에 헤헤헤 웃으면서 잠에서 깼을 때, 일요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이었고, 차영이는 잠 속만큼 환하게 끓는 전등불 아래 누워 있었다. 차영이는 몸을 일으켜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상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일요일에는 어디에 가시나요?’ 차영이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답장을 하느라 죽겠다는 결심은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시온이가 안 죽었다면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겠지만. 시온이가 일찍 일어나 먼저 교회에 가고 차영이가 느지막이 일어나 뒤따라가고.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댕 댕 댕 울리는 길. 시온이가 다른 신자와 먼저 걸었던 길을 뒤따라 걷는 것이 차영이는 하나도 초조하지가 않고 좋았다. 교회는 1890년대 미국의 선교사가 설립한 곳으로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아름다운 건물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온이가 건물들을 보기에 아름답다고 여겨서 차영이도 그렇게 여겼다.
  한 신자가 마른미역을 씹어 미미한 비린내가 나던 날. 그 무렵 발생한 참사에 대한 추모 예배가 있었다. 아멘. 차영이 뒤에 앉은 사람이 목사의 말씀을 받아 적으며 산발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멘. 도대체 어떨 때 아멘 하고 말하는 거지? 차영이는 고민했지만 머리가 아파서 금방 관뒀다. 아멘. 그 순간 차영이의 옆자리에서 무언가 일렁였다. 먼지 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지친 빛이 나뭇결 위에 길게 누운 채 쪼개어져 있었다. 시온이는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쪼개어진 빛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차영이도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다. 흰 로브를 입은 성가대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시온이가 조용히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차영이에게는 아멘이라고 들렸다. 아멘이라고 했어? 차영이가 묻자 시온이가 대답했다. 아니 슬프다. 시온이가 눈을 계속 감고 있어서 차영이도 눈을 감고 후주의 멜로디를 음 음 음 따라 했지만. 차영이의 마음 안에서 슬픔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상우와 차영이는 사람들의 행렬을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따라 걸었다. 어느 여름에는 믿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어느 해인지 차영이는 잘 몰랐다. 차영이가 아는 것은 이런 것.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군. 상우는 비번일 때 대체로 유가족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어딘가에 잠자코 서 있거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하고 이렇게 걷기도 하고. 뙤약볕 아래서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나누어준 간식을 빚진다는 마음 없이 넙죽 받아먹기도 하고. 하지만 아이들은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해요. 차영이가 말했다. 끄덕이는 상우의 얼굴 일부가 차영이의 눈에는 조금 흐리게 보였다.
  얼룩 개 한 마리가 행렬 뒤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도시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들개의 모습. 상우와 차영이는 얼룩 개 가까이 다가갔다. 얼룩 개는 상우를 경계하는 듯이 아니면 걱정이 되는 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얼룩 개를 겁먹게 하면서 아니면 걱정시키면서 다가가는 상우. 아니면 얼룩 개처럼 사람들과 얼마간 떨어져서 걷는 상우. 차영이는 문득 상우가 어떻게 전생의 일을 기억하는지 궁금해졌다. 살아온 날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상우는 기억력이 나빠서 지난날이 열화된 영사기가 비추는 영상 같다고 했다. 지루하게 반복되기만 하고 도저히 끝나지가 않는 짧은 영상.
  그래도 기억해보세요.
  차영이는 상우에게 한 번 더 기억해보기를 부탁했다. 그날 말이에요. 시온이가 식당에 가서 된장찌개를 먹고 와도 되냐고 물어봤는데요. 상우씨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시온이가 상우씨는 아침에 뭘 먹었냐고 물어봤는데…… 이야기하면서 차영이는 상우가 그날 아침으로 멸치볶음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자신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상우는 멸치볶음과 흐린 김이 피어오르는 흰밥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들어주다가 말했다.
  차영씨 안에는 평화가 있네요.
  상우는 이전에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잊었는지도 모르지.
  차영이는 이제 그것을 모욕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의문은 계속되었다. 왜 자신 안에 평화가 있는지. 그런 평화는 누가 차영이 안으로 데려왔는지. 차영이는 광장을 계속해서 걸으며 자신 안에서 자꾸 되풀이되는 흐릿한 영상을 떠올렸다.
  차영이는 어린 시절 엄마의 바이크를 타고 이 광장 주위를 뱅글뱅글 여러 번 돌고 돌던 적이 있다. 롯데리아와 조흥은행 간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차체 밑으로 쓸려 들어가고. 너무 빨라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보도를 걸어가던 같은 반 친구와 눈이 마주치고 친구가 어라 뭐야 하면서 손을 흔들면 차영이는 부끄러워져서 엄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를 들면 다가오는 바람이 차영이의 붉은 얼굴을 서서히 식혀 주고 또 한참 달리다보면 아까 인사했던 친구. 친구가 다시 손을 흔들지만 차영이는 역시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차영이는 엄마의 부드럽고 넉넉한 배를 감싸안고.
  광장에는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영이는 이 사람들을 언젠가 광장이나 광장이 아닌 곳에서 다시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차영이는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집중해서 보려고 했지만 왜인지 눈의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차영이는 저 멀리 솟은 고층 빌딩을 보았다가 다시 앞 사람의 등산용 배낭을 보았다. 오래 쓴 유리잔 한편에 얼룩이 생긴 것처럼 풍경의 일부가 흐릿하게 보였다. 등산용 배낭을 앞으로 멘 할머니가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차영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할머니가 걸음을 늦춰 차영이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할머니가 차영이의 팔꿈치를 살짝 건드렸다. 차영이가 뒤로 약간 물러섰고,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가 고프세요?
  네.
  이것 좀 드세요.
  할머니가 차영이에게 포장되지 않은 소보로빵 하나를 건넸다. 차영이는 소보로빵을 반으로 갈라 상우에게 건넸다. 상우와 차영이는 소보로빵을 씹으면서 옷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털면서 걸었다.
  몇 살이에요?
  할머니가 물었다.
  몰라요.
  상우가 대답했다. 차영이가 뭐라고요? 되묻자 상우가 말했다.
  어린 시절, 맞아 죽을 뻔한 적 있거든요.
  ……
  정신을 차려 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어요.
  누군가 나를 구한 거예요. 신 같은 사람이요. 상우는 우물거리면서 덧붙였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꿈속의 인물들처럼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농담했어요?
  차영이가 물었다. 상우는 이에 끈적거리는 것이 붙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할머니는 배낭에서 반으로 쪼갠 사과를 꺼내 상우에게 건네주었다. 상우는 반질반질한 사과의 표면을 왕 하고 깨어 물었다. 얼룩 개가 행렬 뒤쪽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군중 틈으로 쏙 들어갔다.
  그래서 기억이 안 나요.
  미안해요. 상우가 덧붙였다. 상우와 차영이는 행렬의 바깥으로 잠시 빠져나와 가지가 넓게 우거진 은행나무 아래에 섰다. 상우는 자신이 이미 한 번 베어 물은 사과를 차영이에게 건네주었다. 차영이는 껍질을 소매로 닦지도 않고 왕 하고 깨어 물었다. 차영이가 입안에 있는 것을 다 삼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상우는 차영이를 한번 가볍게 안아주었다. 차영이의 코가 상우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거친 섬유의 외투에서는 어린 개 특유의 기름진 털냄새가 났다. 상우는 행렬로 돌아가기 전에 차영이에게 당부했다.
  녹내장 검사 한번 받아봐요.
  상우와 차영이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영이는 개가 걷는 속도를 상상해보며 이 정도면 비슷하지 않을까 가늠하며 더 빠르게도 더 느리게도 걸었다. 보이지 않는 개의 발걸음을 맞추어보면서 차영이는 개와 서서히 멀어졌다. 멀어지는 도중에 한 번, 차영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개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왜인지 시야가 흐려서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개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은 차영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일지도. 개는 신난 듯 폴짝거리다가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만의 보폭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길 잃은 그림자 아니면 길 잃은 신이 그렇게 하듯이. 차영이가 잠시 멈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까보다 낮은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차영이가 아는 것은 이제 이런 것. 우리는 멀어지고 있어. 아까의 속도와 비교했을 때 절반 정도의 값이겠지. 지금 어디선가 누가 나타나 이 장면을 본다면 불과 잠시 전에 우리가 가볍게 안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거야. 우리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멀구나. 그런 사실. 그런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차영이는 다시 뒤를 돌아 천천히 걸어갔고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얘들아, 들어봐.
  어떤 신을 만났어.
  가마가 둥글게 나고 정수리에서 말린 자두 냄새가 나는. 내가 가볍게 안아보았으니까 알아. 여하튼 그 아이가 한적한 국도에서 히치하이킹을 했을 때, 나는 바이크를 세웠어. 내가 그 아이를 뒤에 태웠을 때 얼굴만큼이나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지. 아이는 나의 배를 꼭 껴안으면서 말했어. 누군가 엄마를 쏴버리고, 제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내리쳤어요. 아이는 몸을 떨고 있었어. 결국 자신이 죽임을 당할 거라고 했지. 하지만 뙤약볕이 내리쬐는 도로 위에는 작은 짐승 한 마리 없었어. 농담이니? 내가 물었지만 아이는 웃지 않았지. 나는 액셀을 돌렸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달렸어. 잠시 갓길에 바이크를 세운 뒤, 나는 그 작은 신의 얼굴에 난 열상을 치료해줬어. 탈지면에 에탄올을 잔뜩 먹여서 얼굴에 대었을 때, 그래서 그 아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소리를 질렀을 때, 나는 웃었고, 이렇게 말했어. 맞아, 넌 백 번도 넘게 죽을 수 있어.
  ……
  ……
  이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약간 상기되었다. 이야기 속 신이 어딘가 자기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었기 때문에. 차영이의 얼굴 또한 붉어지고 땀으로 약간 번들거렸다. 이야기 속 자신이 자기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기 때문에. 그거 선생님 얘기예요?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아서 차영이는 속으로만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느리게 순환하는 더운 공기 속에서, 아주 잠시간, 이 공간에 자신밖에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런가. 차영이는 생각했다. 이 이야기 속의 아이를 곤경에 빠뜨리고 또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은 잠자코 문제 풀이에 집중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도 뚱한 얼굴의 아이는 아아 선생님 근데 있잖아요…… 근데 그거 알아요…… 하면서 선생님이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주기를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뚱한 얼굴의 아이가 떠나기 전에 차영이는 아이의 팔을 슬며시 붙잡고 물었다.
  배가 고프니?
  아니요.
  그러면 잘 가.
  뚱한 얼굴의 아이는 차영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난 뒤에 차영이는 흰밥을 따뜻하게 데워 깻잎볶음과 함께 먹었다. 양치를 하면서는 만족스러운 식사였지? 거울 속 차영이에게 물었고 대답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시야가 약간 흐렸고 얼굴 한쪽에 풀숲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또 눈 바깥쪽에는 눈부신 빛.

차영이는 녹내장을 진단받았다.
  차영이는 자신의 증상이 너무나도 섣부르다고 느꼈다. 차영이는 아직 따라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쨌든 차영이는 시신경 손상을 늦추기 위해 꾸준히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해야 한다. 약을 복용하자 두통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때가 되면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친구처럼 그렇게. 차영이는 잃어버린 두통을 의식하면서 광장을 걸었다. 여기 뭔가 있지 않았어? 머리를 흔들어보기도 하면서. 자신조차 또렷하게 볼 수 없는 자신의 얼굴을 남들에게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서. 자신의 발자국을 앞지르면서 걷다가 차영이는 저 멀리서 동생들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들은 유리로 된 잔이나 종이었고, 여전히 없었다. 빛을 씩씩하게 받아들이면서 걸어오는 동생들. 그뒤로 따라붙는 사람들의 행렬도 보였다. 그 사람들은 제각기 뭐라고 말을 하거나 먹다가 입에 묻은 것을 흘리면서 걸었고, 여전히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금세 동생들을 앞질렀다. 이윽고 그 사람들이 차영이와 가까워졌을 때, 차영이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강한 에너지를 느끼면서 차영이는 걸었다. 그 에너지 때문에 차영이는 특별히 슬픈 일도 없었지만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서 의식하지 못한 채 동생들의 뺨을 쳐댔다. 동생들의 머리에서 빵 부스러기 같은 크고 작은 입자들이 흩어졌다. 입자들이 빛을 난반사하며 차영이의 눈을 지치고 아프게 했다. 차영이가 동생들의 손을 잡아 행렬 밖으로 끌어내지 않는다면 그애들은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서 생명력이 강한 참새나 들개의 먹이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차영이는 동생들과 무관하게 얼마간은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아마 슬프고 서러울 것이다. 너희도 나도 그럴 것 같은데. 차영이는 생각했다. 차영이는 계속 생각을 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화가 나 있는지 서글픈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엉엉 울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차영이처럼 아무 말 없이 지치고 쓸쓸한 표정으로 걷는지.

차영이는 습관처럼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침대 위에 누웠다. 잠 속에서는 앙증맞은 유리잔 하나를 발견했다.
  내 얼굴 안쪽 좀 핥아줘.
  시온이는 핥아주지 않는다.
  되먹지 못한 유리잔 같으니.
  차영이가 시온이 위로 얼굴을 포개어 쌓았다. 유리잔 사이로 무성한 틈이 있어서 투명한 뼈를 갖기에도 충분했다. 빛만큼 무르고 환한 신경통 안에 잠겨서 서로의 골격을 허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차영이가 아 아 아 아파하고 말하면 시온이는 창밖을 내다보듯이 차영이를 매끄럽게 안아주는데. 종이 잔 안에 들어가거나 잔이 종 안에 들어올 때 빛이 그들을 움켜쥐고 일렁이면서 날카로운 기억이 구성되듯이. 유리잔이 잃어버린 시야 쪽으로 입을 벌리듯이.
  차영이는 일요일 저녁에 잠들어 월요일 새벽에 깨어났다. 월요일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하듯이. 차영이는 여전히 혼자였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집안일을 모두 해치운 다음 식탁 앞에 자신을 앉혔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농담을 떠올린 뒤에는 상기된 얼굴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어젖혔다. 날씨는 차영이의 시야와 무관하게 맑게 개어 있었고 가을이라 공기의 흐름이 빨랐음에도 조금 후덥지근했다. 월요일 아침이 조용히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동안 차영이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차영이가 놓여진 곳에. 주위가 충분히 환해졌다고 느꼈을 때 차영이는 땀에 젖은 티셔츠를 천천히 뒤집어 벗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어 맑은 공기를 몸 안쪽으로 초대했다. 그러자 차영이의 머릿속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얼굴이 둥실둥실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점점 또렷해졌는데, 그러다 마침내 얼굴 밖으로 나와 차영이의 얼굴을 대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과일의 껍질이 벗겨지고 전혀 다른 색의 싱싱한 과육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러니까 얼굴을 만져보지도 않고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

남의현

2025년 경향신문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2025/09/03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