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게 된 건 나를 분노하게 만든 역주 때문이다. 그 역주는 미국의 트랜스젠더 소설가 토리 피터스의 데뷔작 『디트랜지션, 베이비』 한국어판1)에 등장했는데, 나는 원서의 현란한 유머와 속도감을 감안했을 때 이 소설이 얼마나 번역하기 힘들었을지 알면서도 특정 영어 표현이 번역된 방식이나 퀴어 언어를 나름대로 정의하는 역주를 읽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른 퀴어 번역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퀴어 번역서를 즐겁게 읽는 일이 드물다. 한영/영한 번역을 하다보니 이 언어쌍에 속하는 번역문을 읽을 때면 늘 원문이 무엇인지 추측하게 되고, 나라면 어떻게 번역했을지 고민하며 읽느라 텍스트에 온전히 몰입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책이 퀴어와 관련된 번역서라면? 더듬이가 한층 더 꼬장꼬장하고 빳빳해진다. 피터스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디트랜지션, 베이비』는 트랜스 독자를 향해 쓴 책이기에 ‘트랜스젠더학 개론’을 건너뛰고 바로 이야기로 뛰어들어 내달리는 작품이다.2) 이는 작가가 비트랜스, 비퀴어 독자에게 낯설 수도 있는 퀴어 어휘―예를 들어 디트랜지션, 부치, 트윙크―를 설명하지 않고 독자가 문맥상 파악하게 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감각된다. 이런 책을 번역가(를 비롯한 출판관계자)는 국내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하기로 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본문 첫 페이지, ‘시스젠더’에 대한 긴 역주에서부터 찾을 수 있었다. 『디트랜지션, 베이비』 한국어판에서 역주는 페이지 하단이나 책의 말미에 기재되지 않고 해당 단어 바로 옆에, 본문보다 약간 작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다. 역주가 이렇게 배치되어 있으니 그것을 건너뛰고 읽는 방법은 없다. 역주가 기나길수록, 트랜스젠더 당사자인 나는 이야기를 일시정지시키는 이 텍스트가 퀴어성이 얼마나 한국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은유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어휘에 대한 역주 때문에 마음이 뒤틀린 건 아니다. 번역가로서, 책이 퀴어 언어에 익숙한 독자층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닿기 바라는 염원과 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지금 영한 번역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관련 책의 번역 원고에서 여러 비슷한 개념에 역주를 추가했다. 한영 번역가로서 국내 퀴어 작품을 영어 독자들에게 소개할 때면, 작품과 작가가 놓인 문화·정치적 맥락을 서술하는 커버 레터를 공들여 쓰곤 한다. 작품이 뿌리내린 지형을 모르는 이들이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소수자성을 지닌 작품을 옮기는 번역가의 업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충격을 준 역주는 이런 배경지식을 담은 부연이 아니었다. 그건 소설 속 주인공 중 하나인 트랜스여성 ‘리즈’의 신체부위에 대한 명명에 붙어 있었다.

리즈는 (…) 좁아터진 욕조에서 다리를 면도하면서, 면도 크림에 뒤덮인 클리토리스리즈가 자신을 여성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성기를 페니스가 아닌 클리토리스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를 하릴없이 문지르며 다시 한번 그 말을 내뱉었다.3)

이 장면에서 리즈는 자신이 부적절한 끌림을 느끼는 남성을 떠올리며 목욕을 하고 있다. 맥락상 독자는 리즈가 소위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임을 이미 안다. 그러므로 리즈는, 저자는, 리즈의 외부성기를 ‘클리토리스’라 부르는 것을 통해 의도적으로 젠더이분법을 교란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그렇다면 뭐 어떤가? 리즈가 자기 몸에 대해 말하겠다는데. 그렇지만 역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어긋난 기호가 등장하자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저자가 의도한 불투명성을 해소해버리고자 했다. 역자는 리즈의, 저자의 말을 정정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나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역자에게 묻고 싶었다. 선생님, 트랜스젠더는 언어로 재미 좀 보면 안 되나요? 나는 이 역주를 트랜스젠더 신체에 대한 침해이자, 저자의 저자성을 훼손한 행위로 감각했다.
  트랜스젠더성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갖춘 번역가였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은 이외에도 여럿이나,4) 나는 이 역주가 내가 퀴어 작품을 번역할 때 늘 하는 고민과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불투명한 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작업이라 생각하기 쉽다. 특정 언어로 쓰인 글을, 그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옮기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내가 퀴어 번역가로서 ‘투명하게 만들기’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투명한 것을 불투명한 대로 두기’다. 퀴어 연구자이자 번역가인 전혜은은 자신이 퀴어 이론을 번역하게 된 경위에 서술하며 “이해 불가능성을 차별과 배제로의 귀결이 아니라 각기 다른 현실을 인정하는 열린 결말로 안내해줄 언어를, 불투명한 것을 불투명한 대로 설명할 언어를 (…) 찾고 읽다가 여기까지 왔을 뿐”이라고 썼다.5) 불투명한 것을 불투명한 대로 두고자 하는 것은 내가 세계문학의 장에서 ‘코리안’이라는 상대적 소수자성을 가지고 한영 번역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원문을 온전히 재현하는 번역이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나는 때때로 한국어 표현을, 고유한 말-몸들을 영어로 옮기기를 거부한다. 차이를 ‘초월’하기를 거부하고, 일부 독자에게 ‘읽히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는 번역가의 윤리이자 미학이다. 풀어쓰지도, 해명하지도 않고, 작품이—그리고 나아가 독자가—팔레스타인 페미니스트 시인 파드와 투칸(Fadwa Tuqan)이 귀하게 여긴 “모호함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6) 번역가는 원문의 발화뿐만 아니라 그것의 침묵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올해 봄, 나는 연극 〈“뺨을 맞지 않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이하 〈뺨〉)을 한영 번역했다. 이 연극은 칠순을 앞둔 국내 1세대 트랜스젠더 퍼포머이자 배우인 색자의 삶을 담은 1인극인데, 색자와 이 극의 연출가인 구자혜 작가가 공동집필했고 텍스트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이루어져 있다.7) 따라서 한국어 화자인 관객에게도 이 극은 영어나 일본어 구사력에 따라 이해가 지연되거나 불가능한 지점들이 있으며, 한국어 부분에 국한하더라도 색자의 성장배경, 연령대, 그리고 말버릇 등을 반영한 대사는 100% 투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색자는 이 극에서 ‘레즈비언’을 자신의 고유한 표현 ‘라즈베리’로 지칭한다. 색자와 친밀한 사이라면 이 표현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공연에서는 맥락상 의미를 알아챌 수 있지만, 영어로 이 단어를 어떻게 옮겨야 할지 고민이었다. 〈뺨〉을 수어로 옮긴 명혜진 통역사는 이 표현을 인권단체 ‘한국농인LGBT+’(이하 ‘한퀴농’)가 만든 ‘레즈비언’ 수어로 옮겼다고 했다. 한국 ‘표준’ 수어에서 쓰이는 ‘레즈비언’ 수어는 퀴어혐오적인 표현이라 한퀴농에서 별도의 성소수자 관련 한국수어 어휘를 만들었는데, 이는 ‘표준’ 수어가 아니므로 어느 정도의 불투명성이 보장되는 선택인 것이다.8) 반면, 내가 ‘라즈베리’를 ‘lesbian’이라고 옮긴다면 색자의 언어를 지워버리게 되고, ‘라즈베리’의 원어인 ‘raspberry’로 옮긴다면 영어 독자들에게는 당황스러울 터였다. 한국어에서 ‘레즈비언’과 ‘라즈베리’는 그 소리가 가깝게 느껴지지만, 영어로는 훨씬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단어를 ‘lezberry’로 번역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퀴어 작품을 한영 번역할 때면 우리말 퀴어 어휘를 번역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뺨〉에서는 대표적으로 ‘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끼 떤다’ ‘끼가 난다/많다’ 등의 형태로 발화된다. ‘끼 떤다’는 맥락상 영어에서 그나마 어감과 의미가 유사한 동사 ‘kiki’로 번역할 수 있었지만, 명사 형태의 ‘끼’는 도대체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게다가 퀴어 씬의 ‘끼’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비퀴어 문화 맥락에서의 ‘끼’와도 닿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나에게 한국 퀴어, 구체적으로 게이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끼’는 여성성에서 우러나는 기운이자 기세, 달란트이자 태도, 신성하면서도 속된 특질이다. 〈뺨〉에서 색자는 첫사랑을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고 “나는 끼가 나고, 걔는 너무 잘생기고”라고 말한다. 퀴어 맥락에서 ‘끼’가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극을 관람하다 보면 ‘끼’가 무엇인지 그 향이라도 맡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체현성이 강하고 무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몸을 어떤 영단어로도 치환해 고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마르티니크 출신의 작가이자 이론가인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이 말했듯, 불투명성(opacity)은 축소하거나 변환할 수 없는(irreducible) 차이다.9) 이런 경우에 한영 번역가가 취할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는 음역이다. 끼를 ‘kki’로 번역하기, 또는 번역하지 않기. ‘I had plenty of kki, and he was so handsome.’ 탈식민 관점의 비판이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제국에서도 ‘다양성’을 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게 된 덕분에 최근 영어로 번역되는 문학 작품에서는 음역을 제법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끼를 ‘kki’로 넘겨버리면, 영어 독자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까? 나는 좀 더 친절해지기로 했다.
  영미권 밀레니얼이나 Z세대가 쓰는 퀴어 어휘는 물론 색자의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퀴어’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없었을 때 퀴어들은 자신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마침 읽고 있던 토리 피터스의 신간 『스태그 댄스 Stag Dance』의 표제작이 눈에 들어왔다. 이 소설은 19세기 미국, 불법 벌목으로 한탕 해보기 위해 서부로 떠나 겨우내 나무를 베는 남정네들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오늘날의 언어로 트랜스여성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캐릭터인데, 무지막지한 체격에 벌목꾼 캠프에서 위력이 제일가는 나무꾼이지만 자신이 인식되는 방식에 늘 어딘가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과 외모가 정반대인 인물, 깜찍하고 새침해 나무꾼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라이센’(Lisen)을 이렇게 묘사한다.

천사처럼 매끈하고 하얀 얼굴에 커튼처럼 드리운 어두운 색의 머리칼이 절묘하게 곱슬거렸고, [부탁받은 물건을] 이것저것 가져와줄 때마다 입술을 비죽이는 모양이 saucy했다.10)

‘Sauce’라는 단어는 ‘양념’이라는 기본적인 뜻 외에도 근래에는 일종의 성중립적 카리스마를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하고 (“got the sauce”), 위 인용문에서처럼 앙칼지며 매콤달콤새콤한 태도를 묘사하는 형용사 ‘saucy’로 쓰이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시대나 지역, 계층을 아울러 널리 쓰이는 단어라, 이 정도면 ‘끼’가 무슨 뜻인지 힌트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은 ‘kki’에 두되 이해를 못 하는 친구들을 향해 너그럽게, 손을 한 번 뻗어주는 형태로 번역을 수정했다. ‘I had plenty of kki, that sauciness, and he was so handsome.’

‘끼’ 같은 순우리말도 있지만, 오늘날 자주 쓰이는 퀴어 언어에는 영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뺨〉의 맥락에서 내가 특히 중요하게 여긴 단어는 ‘젠더’였다. 색자는 결혼과 관련된 경험을 이야기하다 이렇게 말한다.

여자 이름으로 바꾸고, 주민등록 뒷자리 2로 바꿔서 남자랑 결혼 한 판 해? 내가 들어가고 싶은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야. (사이) 뒷자리, 앞으로도 안 바꿀 거야. 나는 젠더로 사는 게 편해. 좋아. 안 바꿔. 젠더라는 이름이 있잖아. 멋있는 이름.

색자의 멋진 이름, ‘젠더’는 오늘날 더 나이가 어린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을 ‘트젠’이나 ‘트랜스’라 칭하는 것과 구분된다. 이 단어를 ‘gender’라고 옮긴다면 물론 영어 관객에게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trans’ 또는 ‘transgender’라고 하면 색자 특유의 말맛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를 ‘jenduh’로 음역했다. 맥락상 이 단어가 ‘transgender’를 뜻한다는 것을 파악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뺨〉을, 색자의 목소리를 번역하면서 나는 이 번역문이 어떤 형태로 독자를 만날지에 대해 상상했다. 연극을 번역하는 건 처음이었고, 이는 글이 완성 형태인 다른 작업과 달리 내 번역문이 그 나름의 완성작이 아님을 의미했다. 〈뺨〉은 색자가 현존하는 무대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영역된 희곡은 색자가 영어권 관객 앞에서 무대를 올리기 위한 보조기구다. 번역을 마치고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영어권 관객과 나눌 수 있을지 생각했다. 만약 이 작품이 연극이 아니라 소설이나 에세이, 시였다면 번역문을 문예지에 투고했을 것이다. 아니, 연극이더라도 작품에 따라 텍스트만이라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찾았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색자의 이야기는 색자 본인의 몸으로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은 보통 더 널리,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으로 여겨지지만, 번역이 되었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누구나, 어디서든 읽어서는 안 된다. 나는 창작진과 상의해 이 작품을 한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연극제에 투고했다. 연극제에 선정되면 〈뺨〉을 해외 무대에서 올릴 때 영역본이 자막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연극제에 선정되지는 않았으나, 나는 색자의 무대가 영어권 관객을 만날 기회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

혹자는 영미권과 한국에서 퀴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너무도 다르지 않냐고 할 것이다. 토리 피터스가 퀴어 언어를 설명하는 각주 없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사는 백인 여성이기 때문 아니냐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디트랜지션, 베이비』 한국어판이 트랜스젠더 독자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퀴어 어휘에 역주를 붙인 건 문제가 아니다. 나도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 중 트랜스젠더성에 관한 인문서, 캐머론 어쿼드리치(Cameron Awkward-Rich)의 『끔찍한 우리 The Terrible We』에 용어를 정의하는 역주를 여럿 추가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역주를 통해 내가 참고한 국내 자료를 밝히고자 했다. 어휘의 ‘정의’를 쓴다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거니와, 이미 많은 이들이 좋은 자료를 만들어 뒀고 책을 번역하면서 이를 참고했는데 독자와 나누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11) 소수자의 언어를 번역하다보면, 내가 최초인양 바퀴를 새로 발명하는 사태가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면 사실 굉장히 많은 이들이 이미 말해왔고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선례를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나는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함으로써 실질적인 도움과 형언하기 어려운 위로를 얻었다.
  나는 『끔찍한 우리』를 가장 먼저 찾는 독자가 다른 트랜스젠더와 퀴어, 페미니스트일 것이라 전제한다. 이들 중에서는 당연히 영미권에서 온 여러 용어와 서구 중심적 레퍼런스를 모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책이 다가갈 수 있길 바라며 나는 장벽을 낮추려 노력한다. 투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흥미로울, 어찌 보면 쓸데없는 정보를 자기만족적으로 덧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역사학자 수잔 스트라이커의 퍼포먼스 작품이 짤막하게 언급될 때, 역주로 퍼포먼스 당시 스트라이커가 어떤 의상을 입고 있었는지를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추가하는 식이다. 사실 역주를 비롯한 각주는 내가 책에서 가장 즐겨 읽는 텍스트다.
  이런 식으로 번역가는 원문의 불투명성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원문에 개입하고, 번역문을 원문보다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작가 매기 넬슨이 쓰고 이예원 번역가가 옮긴 『아르고 호의 선원들』(이하 『아르고호』)은 원문에 부재한 불투명성을 번역가가 존중하고, 덧댄 사례다. 모성의 퀴어성에 대한 대표적 자기이론서인 이 책에서 넬슨은 트랜스젠더인 파트너 해리 도지와 함께 생활하며 자신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몸의 변화를, 도지는 의료적 트랜지션을 거친 시기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아르고호』에도 각종 퀴어 어휘—부치와 펨 뿐만 아니라 보이boi, 앤드로패그andro-fag, 다이크, 드랙 퀸, 프로타주—가 나오지만, 이들에 덧붙인 역주는 없다. 드물게 적힌 역주는 주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미권 인물을 간략히 소개할 뿐이다. 이는 『아르고호』의 타겟 독자층이 『디트랜지션, 베이비』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아르고호』 번역의 퀴어성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가족 관계에 관한 번역어에서 더 뚜렷이 드러난다. 임신과 출산 또한 하나의 트랜지션임을, 모성의 퀴어성을 펼쳐 보이는 저자의 주장은 번역가가 관련 어휘를 번역하며 의도적으로 불투명한 단어를 택한 데서 이어진다. 저자는—번역가는—이렇게 묻는다.

배태도 자체적으로 퀴어한 면을 품은 건 아닐까? 한 사람의 ‘정상’ 상태를 깊숙이부터 변동시키고 자기 몸과 뿌리로부터 친밀해지는 과정을—또한 몸에서 뿌리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야기한다는 점에서? 이리도 심층부터 낯설고 거침없는 야생성을 띠며 사람을 탈바꿈하는 경험이 어떻게 그와 동시에 궁극적 순응을 상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거지?12)

표준국어대사전은 배태(胚胎)를 “1. 아이나 새끼를 뱀” 그리고 “2.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발생하거나 일어날 원인을 속으로 가짐”으로 정의한다.13) 1번 정의는 같은 사전에 실린 임신(妊娠)의 정의와 동일하다. 그러나 영어 원문의 ‘pregnancy’를 ‘배태’라는 다소 낯선 단어로 마주하면서, 우리는 ‘임신’이라는 단어의 일상성 뒤로 가려지는 몸의 변화를 상기하게 된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휘고, 내장이 밀려나는 수개월. “아기가 팔인지 다리인지를 삐죽 뻗어 내 배를 텐트로 만들어 놓”는 순간들.14) ‘胚’와 ‘胎’는 모두 “육달월(⺼(=肉) ☞ 살, 몸)”을 부수로 삼고 있다.15)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을 비일상적인 단어로 맞닥뜨렸을 때, 독자는 그것을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마주한다. 그 씨앗을 배태할지는 독자의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번역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에 대한 담론은 사실 수없이 많다. 물 흐르듯 술술 읽히는 번역은 기득권자의 입장에서나 읽기 쉬운 번역이며, 언어 간 ‘일치’라는 건 없다고, 가장자리를 보듬는 번역론은 말한다. 그러한 번역론에 나도 힘을 얻어 좀 더 울퉁불퉁하고 불투명한 번역을 할 용기를 내고 있다. 동시에 원문에 딱 맞는 번역어를 찾아냈을 때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다시 그렇게 벼락 맞을 가능성을 찾아, 환상 속의 일치를 찾아 헤맨다. 미국의 시인이자 번역가인 사와코 나카야스의 아름다운 번역론-단상에서 “어슬렁거리는(errant) 번역가”는 어둠을 배회하고, 빛으로 끌고 와봤자 읽기 어려운 번역문을 짓지만,16) ‘안 읽히는 번역’ 또한 언어에 대한 일종의 지배력(mastery), 유창함(fluency)을 바탕으로 어떤 어긋남이 아름답고 시적인지 알아야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는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저는 이런 것도 번역할 수 있어요!’라고 외치며 기술을 선보이는 동시에, 불투명함을 존중하자고 또다른 기준을 제시하는 나 자신이 지겹다. 번역이라는 ‘실무’를 하는 모두는 불투명하고도 투명한, 투명하고도 불투명한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닿거나 닿지 않고 싶은지 아닐까? 앞서 『디트랜지션, 베이비』 한국어판을 비판하긴 했으나, 번역가(로 대표되는 여러 출판관계자)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독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 그 책뿐이겠는가. 퀴어들은 언제나 실망스럽고 우리를 배제하는 텍스트에서도 자신을, 동료를 발견해왔다.
  이 글을 좀 더 점잖게 시작하는 방법은 토리 피터스가 그의 두번째 책, 앞서 언급한 『스태그 댄스』를 쓸 때 적용했다고 하는 ‘전략적 불투명성’(strategic opacity)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피터스는 『디트랜지션, 베이비』를 쓰던 시기, 주인공의 동기를 설명해달라는 피드백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트랜스여성인 리즈는 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나요?’ 이에 피터스는 ‘트랜스가 아닌 여자들은 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라고 응수하고 싶었으나, 요청에 부응해 작품에 리즈의 성장과정을 추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는 오히려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입체적이고 매혹적인 인물을 창조할 수 있다. 이를 피터스는 셰익스피어 연구자 스티븐 그린블랫의 개념을 빌려 ‘전략적 불투명성’이라 부른다.17) 생각해보자. 현실에서도 우리는 타인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행동하는지 모르고, 우리 자신도 자주 스스로에게 불투명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종종 인물의 본질을 깊숙이 드러내곤 하며, 관찰자의 호기심을 길어올리기도 한다. 피터스는 ‘왜?’를 비워둠으로써 자신이 쓸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숭고한(sublime)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언어로 고정될 수 없는 빈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창작자가 독자를 초대하는 방법이 아닐까?

문호영

한국어와ᅠ영어를ᅠ오가며ᅠ번역하고ᅠ글을ᅠ쓴다. 황인찬, 한정현, 이반지하, 이랑, 김사월 등의 글과 노랫말을 영어로 번역했고, 영한 번역서로 책ᅠ『남은ᅠ인생은요?』(성ᅠ지음)이 있다.ᅠ산문집 『전부 취소』를 썼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2025/09/03
75호

1
토리 피터스, 『디트랜지션, 베이비』, 이진 옮김, 비채, 2025.
2
Carter Sickels, “Writing for a Trans Audience: Talking with Torrey Peters”, The Rumpus, 2021-01-18. 바로가기
3
토리 피터스, 『디트랜지션, 베이비』, 이진 옮김, 비채, 2025, 94쪽.
4
가장 간단한 예시로 ‘시스젠더’를 반복적으로 ‘이성애자’라 오역한 것을 들 수 있다(55, 66, 72, 83, 141쪽). 또한, 소설 초반 리즈의 몸에 관한 묘사 중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리키는 영단어 ‘full-figured’가 “체격이 좋은”으로 오역되었다(13쪽). 제목에도 등장하는 단어 ‘detransition’은 본문에서 ‘환원’으로 번역되었다(19쪽 외 다수).
5
전혜은, “한국에서 퀴어 이론/번역하기: 경계적 존재가 살아남고 살아가는 그저 한 가지 방법”, 《도착》, 2025년 6월호. 바로가기
6
Emaleah Shackleton, “Fadwa Tuqan: A Romantic Feminist Poet and Reluctant Political Witness”, Al Jadid Magazine Vol. 9, No. 45, Fall 2003. 바로가기
7
초연은 2024년 8월, 제6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이뤄졌으며, 2025년 3월 7일부터 13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재연되었다. 연극협력체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주최/주관으로 상연되었다. 바로가기
8
명혜진 통역사는 “[이 공연을] 보러오는 농인이라면 이 수어를 알 것이고, 모른다면 주변 다른 관객에게 물어볼 거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9
Édouard Glissant, “For Opacity”, Poetics of Relation, trans. Betsy Wing,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7. 바로가기
10
Torrey Peters, Stag Dance: A Novel & Stories, New York: Random House, 2025, 전자책 열람.
11
그러한 자료 중 하나로 박한희 변호사의 글, “트랜스젠더 트랜지션 의료의 건강보험 보장에 대한 소고”, 《공익과 인권》 제18호, 2018을 추천한다. 바로가기
12
매기 넬슨, 『아르고호의 선원들』, 이예원 옮김, 플레이타임, 2024, 24쪽.
1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배태”. 바로가기
14
매기 넬슨, 같은 책, 141쪽.
15
배(胚). 바로가기. 태(胎). 바로가기
16
Sawako Nakayasu, “The Errant Translator: Field Notes”, Words Without Borders, 2024-01-09. 바로가기
17
“Torrey Peters on Strategic Opacity”, Between the Covers Podcast, Tin House Live, 2024.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