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되었을 때 자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홀에서 자두 농장에 대해 떠드는 것이었다. 홀은 좁았고 템파레이의 음악이 들렸고 술기운에 알딸딸한 사람들은 춤을 추었다. 자영이 혼자 분주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두 농장이란 그저 허허벌판, 장마철이 되면 비냄새와 농약 냄새에 이끌려 달려온 정신이 요상한 아이들이 허어, 하고 멍하게 양손을 들고 흔들며 노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갖 냄새가 뒤섞여 있고 열매가 잘 여물지도 않고 병자들의 은신처라고 해서) 자영의 자두 농장이 크게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농장은 비록 적은 양이었어도 해마다 열매를 보았고, 삽으로 팬 구덩이가 많아 곳곳에 맑은 물이 고일 수도 있었으며, 어떤 동물이라도 즐겁게 달릴 수 있을 만큼 드넓고 넉넉했다.
  내가 계속 농장을 돌보고 있었어.
  자영이 말했다.
  탄 맛이 나는 계피 막대를 씹으며 자영의 말을 듣고 있던 자영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네가 계속 그 농장을 돌보고 있었지.
  자영은 동료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고 동료들도 그랬다. 이들은 모두 농부였고, 지금처럼 가끔 약속을 잡아 같은 장소에서 메뉴가 다른 음식을 주문해 나누어 먹었다. 무언가를 입안 가득 집어넣은 채로 한낮에 만나는 경우에는 한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머무는 자연의 햇빛을, 저녁에 만나는 경우에는 실내 한편에 납작하게 고여 있는 네온사인 불빛을 구경하곤 했다.
  오전 6시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주말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밤새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세수를 하고 속을 조금 게워낸 뒤 출근을 준비할 것이었다. 홀의 주인은 모든 사람을 배웅해주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은 가게 휴무입니다. 냉수기가 고칠 수도 없이 굳어버렸어요.
  사람들은 주인의 사정을 이해했다.
  자영은 이처럼 기계가 완전히 고장나 홀이 영업하지 못하는 날이 있듯이 자신의 농장도 그럴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농장에는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릴 수 있는 커튼도 셔터도 없는데…… 무엇보다 자영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자두 농장은 고칠 수도 없이 완전히 고장나는 법이 없었다.
  튼튼한 농장. 튼튼한 나의 자두 농장.
  자영은 쓸쓸하게 웃었다.

쓸쓸하게 웃는 법: 쓸쓸하게 웃는다.
  자영은 집으로 돌아와 노트에 글씨를 적었다. 첫 줄에는 아무거나 떠오르는 것을 먼저 적었고(쓸쓸하게 웃는 법: 쓸쓸하게 웃는다), 그 아래에 해야 할 일을 이어 적는 방식이었다(포대 치우기, 잡초 뽑기, 창문 열기, 새 구경, 돈 벌기). 올여름에 자영은 농장에서 자두 따기 체험 행사를 열어 돈을 벌어볼 요량이었다. 번성한 자두 농장의 수확량이라고 한다면 나무 한 그루에서 약 스무 박스가량의 자두를 수확할 수도 있겠지만 번성하지 않은 자영의 자두 농장이라고 한다면 나무 한 그루에서 그것도 작은 박스로 네 박스에서 다섯 박스가 고작일 것이었고(자영이 그렇게 예상했다), 그것도 많다면 많았다.
  그치만 그 정도여도 되잖아.
  자영이 말했다.
  자영의 말이 맞았다. 그 정도여도 되었다.
  자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거실의 유리 통창 너머로 저 멀리 솟은 교회 탑과 산등성이와 자두 농장이 보였다. 자영이 살고 있는 집은 농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흙과 돌을 쌓아올려 지반을 높인 곳에 세운 조립식 주택이었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다. 거위나 산양떼, 노루와 같은 야생동물들의 침입이 없지 않아 현관에 엽총을 세워두어야 했다. 실제로 동물을 쏘아 죽인 적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다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뭐야. 저리 가. 멀리 가. 그쪽은 내 농장이야, 망가뜨리지 마……
  정말로 무언가를 쏘려고 마음먹었을 때 자영은 총의 반동에 밀려 뒤로 세게 넘어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총소리에 귀가 얼얼했고, 사방으로 날리는 화약 가루에 눈과 코가 매워 엉엉 울면서도 와하하하, 어쩐지 신이 났었다.
  자영이 그때 무엇을 쏘려고 했는지 헤아려보자면 대강 보이는 희뿌연 안개, 아니면 밤. 왜 그것을 쏘려고 했는지 이유를 헤아려보자면 더 큰 어둠을 대비하고자 했거나 아니면 무서워서?
  그런 것은 자영도 잘 몰랐다.

자영은 농장 일을 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농장에 나왔다. 구름의 모양과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을 관찰하여 바람의 세기를 가늠해보았다. 바람이 적당했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깨끗했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오늘 하루 동안 날씨가 줄곧 좋을 것이었다. 자영은 햇볕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잡초를 뽑고 땅을 다지기로 마음먹었다. 자두나무 아래, 그늘진 자리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잡초를 정리하지 않으면 나무에 가야 할 부드러운 흙의 자양분이 모조리 잡초에 간다고 자영은 배웠다. 잡초에 양분을 빼앗긴 나무는 시들시들해져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는다고.
  농사가 망하는 거야. 열매가 열려도 다 같은 열매가 아니란다. 모양이 미운 건 뚝뚝 따서 버려야 건강한 농장을 돌보는 건강한 농부가 될 수 있지.
  언젠가 자영의 엄마는 말했다. 자영의 자두 농장은 자영의 엄마가 물려준 것이었다. 자영의 엄마는 자영에게 자두나무가 여럿 심긴 농장을 물려주고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 변덕을 부려 다른 이의 농장을 대신 돌봐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남몰래 손목을 깨물어 죽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영은 종종 엄마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상상 속에서 엄마는 손가락에 물을 묻혀 성호를 긋기도 했고, 말없이 조용하거나 엉망으로 취해 있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까지 나아가, 내내 소식이 없던 엄마가 눈 온다, 하고 말하며 정면으로 걸어오는 장면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희고 둥근 눈송이들. 호렴. 억새잎 모양의 눈썹. 폐를 가득 부풀게 하는 숨과 구유 장식, 부엉이 울음소리. 아가야, 저기를 아직도 저렇게 놔두면 안 되지.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까맣고 보기에도 나쁘잖아.
  자영은 보폭을 크게 하여 농장을 한 바퀴 돌았다. 엄마의 말처럼 저기에, 한겨울에 가지치기를 해둔 나뭇가지 더미가 마치 봉분처럼 새까맣게 쌓여 있었다.
  괜찮은데……
  자영은 중얼거렸다. 뭐가 나빠?
  자영은 빈 포대를 돌돌 말아 발로 밀었다. 작은 삽을 손에 쥐고 잡초를 뽑았다. 땅을 다졌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여 계획한 잡초 뽑기를 무사히 끝냈다. 어느덧 정오에 가까웠다. 헛간 창문을 열었다. 터진 문간에 기대앉아 새 구경을 했다. 새의 종(種)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땅에 떨어진 자두를 한 개 주워 동강냈다. 동강낸 자두 반쪽을 새에게 주었다. 새는 농장 땅을 밟으며 도랑 가까이 돌아다니기만 했다. 여기 새 하나. 인간 하나. 자영은 앉은 자리에서 잠깐 졸다가 두어 차례 발을 굴렀다. 발소리에 놀란 새가 동쪽으로 멀리 날아갔고 나는 안 따라가. 여기에 있어, 나는 그냥 손이 너무 끈적거려서…… 새의 발자국을 가볍게 지워낼 듯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자, 농장을 둘러싼 가시덤불 울타리 너머로 여덟 명의 클로버 병정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희고 눈부신 모습이었다.
  햇빛 때문에 어지러웠다.
  또 왔구나, 하고 생각하기 전에 자영은 모른 척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여덟 명의 클로버 병정들이 우리는 자영이의 친구인데요, 하고 대답할 거야.
  그러면 무엇이든 처음인 것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자영이 친구들이라고? 반가워. 내 친구들이구나. 내가 자영이야. 나는 농장을 돌보며 지내. 봐봐, 이 땅이 다 내 거야. 신기해하기도 하고 겁내기도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눌 거야. 처음이니까. 익숙하지 않을 거야. 그게 처음이라는 거잖아. 잘 모르는 거. 지겹지 않은 거. 배신하기도 쉬운 거. 하지만 가능하지 않을 거야. 실은 나는 새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내 정신이면 몰라도, 이렇게 사는 게 몸에 배어 있으니까. 내가 너희를 알고 있고 너희가 나를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잘은 모를 거야? 나는 되는대로 매일 눈을 감을 거고 잠들 거고 깨어날 거야. 여름풀에 팔다리가 온통 베어지고, 토양의 일부분이 살아 움직이는 생기 있는 꿈을 꿀 거야. 자영은 평소와 같이 이런저런 생각을 멈추기가 어려워져 또 왔구나, 하고 마침표를 찍듯이 서둘러 생각해버렸다.
  또 왔구나.
  그러고 나서 방금까지 떠올렸던 이런저런 생각들로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야 그래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했다.

여덟 명의 클로버 병정들은 몸집이 작고 통통한 파수 병정들이었다. 자영의 절반만 한 크기였지만 자영의 외양과 거의 같았다. 누군가 양쪽을 번갈아 베어먹은 듯한 잎새 모양의 머리통과 식물처럼 보이는 피부는 그 생김새가 달라 눈에 띄었다. 벌목된 나무 밑동 아래서 자영이 처음 그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지금처럼 걷거나 뛰지 못했고, 나뭇가지로 된 총대를 메고 있지도 않았고, 마치 한 닢의 잎사귀처럼 순하고 납작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나비 모양의 흰 꽃이 피고 진 자리에서 동시에, 한 다발로 태어났다.
  한 다발로 태어난 여덟 명의 클로버 친구들이 나름의 대열을 만들어 걷다가 뛰다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며 무방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홉 명은 너무 많고 열 명은 너무 적어 그러면 여덟 명은? 여덟 명은 충분하지 아니야 것도 조금 모자라지. 첫째가 맨 앞에 서는 걸로 해볼까나 선두에 말이야 좋아, 첫째가 어디 있어? 첫째야 저기 가서 가슴 펴고 당당하게 서봐라 사진 찍어줄게 말투 뭐야 실례잖아 지금 노래를 불러도 되려나 아이 안 돼 나 기분 나빠져…… 너희 방금 누굴 첫째라고 부른 거냐고? 그야 나지 나야 바로 나 자신. 그들은 모두 첫째가 되고 싶어했는데, 당연하게도 누가 첫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왼발, 왼발, 왼발, 둥근 원을 그려보자 전진 금지 제자리에 서!
  그들이 농장 한가운데로 가로질러 들어와 제식훈련을 위해 두 발을 움직일 때마다 대열의 질서가 도리어 흐트러졌다.
  이래서는 전투에 나가면 우린 다 죽겠다.
  저번에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책에서 읽었어. “죽고 말고요.”
  죽어도 산 것처럼 굴 수 있을 거야.
  죽기는 한다는 거잖아. 온갖 고통을 겪게 될 거야. 무서워.
  너는 어때?
  왜 물어봐? 무서워. 무서워.
  그게 다야? 그 표정은 뭐야?
  자영은 병정들에게 언어를 가르쳐준 것을 후회하곤 했는데 지금이 그랬다.
  조용히 좀 해. 시끄럽게 굴면 쫓아낼 거야.
  자영의 말을 들은 병정들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웃었다. 병정들의 작은 웃음소리 사이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골짜기 아래 네 갈래로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이어졌다. 자영은 병정들을 노려보았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다. 병정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흔들 즐거워하며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바지 주머니에 돌을 주워 담고 있었다. 그치만 자영아,
  병정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를 못 쫓아내.
  그래, 구름이 빠르게 흘러 태양을 비껴갔다…… 병정들의 열린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아무렇게나 빛났고, 아름다웠다.
  나도 알아, 중얼거리는 자영의 대답과 대답을 듣지 못한 병정들의 도톰한 귓바퀴, 솜털, 여덟 개의 머리꼭지. 사냥용 올무. 풍선 끈. 당근 조각. 새덫. 방공호. 마른 우물. 건너편 포도밭의 열매 송이들. 천사들. 모든 것이 대낮의 뙤약볕에 또렷하게 잠겨 있었다. 여덟 명의 클로버 병정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터벅터벅 땅 위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볕이 드는 자리에서 볕이 드는 자리로, 타르처럼 끈끈한 그림자를 나무 그늘에 빼앗기지도 않고서 생생하게.
  자영에게는 지금 이 모든 것이 견딜 만했다.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영에게, 무언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상황을 나쁘게 만들어볼까. 자영은 생각했다. 나쁘게. 해롭게. 견딜 만하지 못하게.
  그치만 어떻게 해야?
  자영은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자영도 알고 있듯이, 자영의 시야가 이미 이 상황에 길들어 어느 것도 나빠질 만한 게 없었다. 자영의 질문은 잠깐 자영을 기다렸다가 더는 이어지지 않고 곧 그쳤다.
  아니야. 방법이 있을 거야.
  자영이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병정들이 다가와 대꾸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자영아. 너를 위한 방법이.

나를 위한 방법이.
  자영은 아이일 때 마을 교회에서 주최하는 여름 성경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성경에 순서라는 게 있어 그 순서를 배운다는 것이 좋았고, 아침 체조를 하기 전에 마시는 오렌지주스의 맛이 좋았다. 한밤중에 다 같이 이불을 깔고 누워 누군가에게 일어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엿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을 엿들으며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무엇이 있을지 헤아려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자영은 신을 믿었고, 신이 교회에 있다고 전해 들어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면 어째서인지 왜 너 혼자야? 생각하게 되곤 했다. 자영에게 신은 서너 명이었다. 한 명이 아니고 서너 명. 어쩌면 신은 서너 개의 기분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흘러 여름 성경 학교에 참가한 중등부 아이들에게 숭고에 대해 알려줄 때에도, 자영은 하나님의 숭고한 희생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복음에 이르는 이미 정해둔, 짧고 단순한 말씀을 전하라는 요구를 앞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맞다 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는데 내가 까먹어서 하질 못했고 그 대신 숭고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했다. 숭고란 뜻이 높고 고상한 것.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인간으로 하여금 우러러보고 본받아 따르고자 하게 만드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쉬운 죽음이 아닌 그럼에도 삶으로 향하는 인간의 의지적인 모습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지. 여기서 그렇다고들 하더라. 나도 동의해. 그치만 뜻이 천하고 고결한 것, 좋으면서도 나쁜 것,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내내 사는 것, 이런 것들을 절대라는 개념에 놓고 보자면 어느 쪽이며 내가 너희에게 무얼 전할 수 있겠니? 그렇게는 안 되지. 더구나 인간은 손쉽게 죽는다고 할 수도 없고 꽤 어렵게 죽잖냐. 얘들아, 그럼 숭고라는 게 뭐겠니 뭐가 뭔지 알 수 있겠니?
  알 수 있을걸요.
  어떻게?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요.
  누가? 하나님이?
  아뇨. 엄마 아빠가요.
  그런 대화가 오갈 때쯤 어디선가 골프공이 날아와 창문을 깼다. 누군가 창문을 깼기 때문에 창문이 깨어졌으며, 다친 사람은 없이 중간중간 혼란스러운 와중에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려왔던 것을 자영은 기억했다. 평범한 호두나무로 만들어졌고, 오른쪽 댐퍼 페달에 조그맣게 씨발놈들이라고 적혀 있는 오래된 콘솔형 피아노였다. 자영의 기억 속에 마련된 한 장소에 깨진 창문과 유리 조각, 조그만 씨발놈들, 피아노 건반 소리, 그리고 그해 여름 성경 학교의 슬로건을 새겨넣은 현수막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깨진 창문의 창틀 너머로 현수막이 바람을 받아 온화하게 나부끼고 있었고, 자영은 그것을 제대로 보았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러고 나선 무얼 보았더라? 그뒤로는 가물가물했다. 몇몇 장면들이 조금씩 기억나려다가 말았다.

하지만 오늘 같은 화요일, 또는 목요일이거나 일요일, 난데없이 병정들이 나타난 날들에 대한 기억이라면 얼마든지 흐릿하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과거가 내뿜는 뜨거운 아지랑이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왜냐하면 자영이 그것을 원하니까. 그것을 원하고 싶고, 원할 수 있으니까. 그래, 이게 전부 다 내가 원한 거라고…… 너 무슨 생각해?
  여덟 명의 병정들이 하는 일은 나타나기. 다시 나타나기. 나타나기를 해내기. 그것 말고도 자영을 돕거나 돕지 않기, 딱정벌레를 내쫓기, 물건의 배치를 바꾸기, 해바라기 등등 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고 한번은 연초에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술을 만들어와 자영에게 마셔봐, 하고 건네기도 했다. 그랬기에 자영은 그들이 때때로 싫거나 성가셔 신체의 가장 뽀얗고 연한 부분을 꼬집고 싶거나 아예 없어졌으면 싶으면서도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게 되었고 어느 때에는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하며 이게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 나가봐야 해.
  병정들이 서로의 손과 발에 난 상처를 갖고 놀다가 말했다.
  오늘은 눈 똑바로 뜨고 다녀. 알겠지.
  내가 언제 한눈을 팔았다고 그래.
  외부로부터 농장을 지키는 일은 병정들이 전방 주시라고 부르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병정들은 농장 주변에 수상한 상자나 식물들, 숯덩이, 나도는 소문들이 있는지 둘러보며 보초를 서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일을 방해하려고 하면 누구라도 공격할 기세였는데 언제나 이렇다 할 방해가 없이 순조로웠다.
  이번에는 자영도 함께였다. 자영이 함께하자고 했고 그러기로 했다. 자영과 병정들은 농장을 벗어나 원을 그리듯 그 일대를 걸었다. 병정들이 대열을 맞추어 걷고자 노력했지만 자영이라는 변수 때문인지 잘되지 않았다. 병정들은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듯한 이 좋은 날씨가 어느 날 늦지 않게 일으킬 우박이나 지진, 먼바다의 해일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보며 길가에 핀 물망초를 만져보았다. 병정들의 손가락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우박이 쏟아지면, 지진이 일어나면, 해일이 닥치면, 마음씨 착한 수목 옆에 몰래 뿌리를 내려야지 아이 안 지워지네. 병정들이 손을 문지르며 땀을 흘리는 동안 자영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 병정들도 자영이 올려다보는 하늘을 따라서 올려다보았다. 뭐 봐? 맑고 높은 하늘 아래에 서서, 자신들의 얼굴을 온전히 보여주었다.
  그때 배낭을 멘 어린 여행자가 숲이 있는 방향으로 모두를 앞질러 지나갔고, 자영과 병정들은 하늘에 내보이던 얼굴을 거두고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농장 주변을 정찰하며 돌아다니는 데에는 약 사오십 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새로운 두꺼비를 발견함. 햇무리를 구경하는 옛날 사람들(노인들을 의미했다)을 봄. 태양 아래서 영영 시력을 잃었다고 하였음. 농장 주변은 아무 문제 없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함.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병정들이 반듯하게 접어둔 종이 약도를 꺼내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산(△) 모양으로 표시해둔 한 장소가 있었다. 농장의 위쪽, 마른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 아까 여기를 그냥 지나쳤거든.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병정들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있어. 동물인지 식물인지는 몰라도 농장을 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위험 요소야. 병정들이 자영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너무 밝으니까, 이따가 밤에 다시 와보자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하고 자영이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거기에 정말로 뭔가가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하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그것을 물어보는 대신에, 자두 따기 체험 행사에 신청한 사람이 아직까지 아무도 없으니 돌아가서 함께 자두를 따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위쪽을 하고 너희가 아래쪽을. 자두 열매는 여름에 들어설 무렵부터 2주 동안만 수확할 수 있었다. 그뒤로는 나무가 알아서 전부 떨구어버렸다. 돌아가서 같이 자두를 따자고? 응. 그거 네가 다 해야지 왜 같이 하자고 해? 이렇게 더운데? 왜냐니? 그건 생각 안 해봤어.
  안 할래. 그 일에는 볼일 없어.
  병정들이 말했다.
  볼일이야 만들면 되잖아.
  자영이 말했고 안 해. 안 해.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을 때 하지 않게 냅둬.
  그래서 자영은 내버려두었다. 다시 농장에 도착하여 발을 들이자 켜켜이 쌓인 흙에서 올라오는 더운 열기가 단숨에 훅 끼쳤다. 자영은 차가운 물에 비료를 섞어 분무기 통에 담고, 끈을 조절해 어깨에 멨다. 그러고는 농장 곳곳에 가지를 뻗고 자라난 자두나무들과 맺혀 있는 열매들, 이미 죽은 나무들과 죽은 열매들, 잘라낸 줄기들, 식초병, 박엽지, 콩과자 한 봉지, 그것들을 전부 품고 있는 토양과 대기에 물을 흠뻑 뿌려주었다. 그것이 자영의 몸에 배어 있는 자영의 할일이었다. 곧고 힘있는 물줄기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병정들은 물줄기를 쫓아다니며 그 주위로 점점이 흩어지는 시원한 물방울을 맞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얄밉고 마음에 안 들어 자영은 병정들에게 직접 물을 쏘았다. 병정들은 곧바로 넘어지거나 발이 엉켜 물웅덩이에 떠밀렸다. 아파. 아파. 자영은 쏜 자리에 한 번 더 물을 쏘았다. 그만해. 너는 우리보다 크잖아, 비겁하게. 괴롭히지 마. 괴로운 듯이 찡그리고 있었지만 병정들의 물기 어린 얼굴에는 분명한 생기가 돌았고, 자영은 그것을 보았다. 병정들이 자영에게 보여주었다. 번성하는 여러 개의 생명력을.
  자영은 태양을 등지고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서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아마도 계속 모를 거야. 내 생각은 어렴풋하고, 노력을 하지 않거든…… 내가 왜 그랬을까? 자영은 한꺼번에 말을 쏟아내지 않기 위해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다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고 뭐야 몰라 부지런히 자두 열매를 땄다. 매 계절 농약을 사용하여 벌레 먹은 열매가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자영이 먹을 만한 열매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늘 그래왔기에 자영은 농장의 끝에서 끝까지 작업하는 동안 별다를 것 없이 허리를 펴거나 구부리고, 사다리 의자를 오르내리고, 끓는 듯한 더위에 이따금 저 멀리 시선을 던져둘 뿐이었다. 매일같이 지속되는 한낮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열매와 몹시 작은 열매, 드물게 잘 익은 열매가 볼풀처럼 뒤섞여 플라스틱 상자 안에 가득 담겼다. 노랗고 빨갛고 푸른, 자영이 재배한 자영의 열매들이었다.
  자영은 모아놓고 보니 뿌듯하여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병정들이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어떠한 암시도 슬픔도 아니었다. 뿌듯하고 기쁨. 그래서 환하게 웃음. 단지 그뿐이었다.
  자영은 자두 열매가 담긴 플라스틱 박스들을 한쪽에 쌓아 두고, 헛간에서 두께가 얇은 유리병들을 꺼내와 잘 닦은 뒤 햇볕에 말렸다. 자영은 해마다 먹을 수 있는 열매만을 모아 술을 만들었다. 열매와 설탕과 담금 소주, 식초, 그리고 조미료를 알맞은 비율에 맞추어 담그면 자두주가 되었다. 그중에 몇 개는 자영이 마셨고, 대부분은 장이 서는 날에 나가서 팔았다. 기온이 선선해지면 트럭을 몰고 도로변에 나가서 팔기도 했다. 차창을 내리고 시비를 걸어오는 운전자(주로 자영의 또래인 젊은 여자와 남자였다)가 있으면 맞서지 않고 딴청을 피우거나, 신고당할지도 몰라 순순히 자리를 옮겨 다시 팔았다.
  트럭을 몰고 도로변에 나간 여러 날 중에 한 날, 자영은 병정들과 함께이지 않고 혼자였다. 계세요, 하고 누군가 승용차에서 내려 다가오기에 트럭에서 내려 손님을 맞았는데 그게 아니고요 조금 전에 이 트럭에서 사간 술을 마시고서 배탈이 났거든요, 하고 말을 잇는 것이었다.
  오늘은 아직 한 개도 팔지 못했는데요. 자영이 대꾸하자 그는 조금 전에 산 게 아니고 저번에요, 하고 말을 바꾸었다. 거짓말에 익숙해 보이지 않아 거짓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영은 그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따져 묻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고집스럽게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차츰 짜증이 나 그래서 뭐, 하고 물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렇잖아. 그래서 뭐. 할말 있어?
  돈을 돌려받고 싶어서요.
  남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담근 술을 마시고 배탈이 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제가 지금 있잖아요.
  그렇긴 하네. 자영은 생각했다. 네가 있다고 하니까 여기 있네.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속아주기로 하고 남자에게 현금으로 만원을 주었다. 자영은 남자가 이렇게 말하기를 기다렸다. 겨우 만원짜리 가지고. 뭐 이런 걸 팔겠다고 나서서는…… 다 그만둬요. 시간 낭비예요. 누가 이런 걸 필요로 하긴 한대요? 그러면 자영은 모욕을 느끼고 손을 벌벌 떨면서도 기필코 남자를 트럭으로 들이받을 생각이었다. 엎어진 남자의 지갑에서 다시 만원을 꺼내가며 마지막으로 남겨둘 말도 생각해두었다. 그래서 뭐. 잘해보려고 그랬어 나도. 너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잘해본다는 게 뭔지 알아? 그러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차에 올라탔고, 사라졌다.
  사기꾼이었을 거야. 한 병에 만오천원인데. 봐봐. 만원만 받고도 돌아갔어. 원래 얼마인지도 모르는 거지. 낸 적도 없는 돈을 되받아 가다니…… 자영은 남자의 생김새보다도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공손하게 받아 가던 그의 두 손이 자꾸 떠올랐다. 굳은살로 지저분한 자영의 손과는 달리 손가락이 반반히 길고 손톱이 말끔하게 깎여 있는, 깨끗하고 고운 손이었다. 그 희고 고운 손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빼앗으면 얼마를 모을 수 있을까 이 개새끼 셈해보며 자영은 트럭을 그대로 세워두고 도로변에서 벗어났다. 굴다리 아래 자판기에서 껌과 물을 사먹고 바람에 물결치는 청보리밭을 지나며 가볍게 산책했다. 그러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짧게 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꿈속에서, 자영은 그가 감방에서 나온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가 말한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불길하다고 말해요.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들었을까? 잠에서 깬 자영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우선 나는 불길하다고 말하지 않았음. 누구도 자영의 꿈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기에 자영은 혼자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자영은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결론을 적어두었다. 내내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이제 농가에서 흙을 태우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곧이어 건조한 여름 기후로 인한 산불 대비 안내가 이어졌다. 자영은 시동을 걸었다. 열어둔 차창을 통해 녹지의 푸르른 냄새와 길가의 자갈 냄새가 드나들었다. 배롱나무 세 그루. 돌로 쌓은 축대들. 수돗가. 새 무리를 밟는 소리. 콜라 캔을 따는 소리. 드라이아이스 냄새. 유황 냄새. 깃털들. 뼈들. 고개를 흔드는 빛 그림자. 길 한복판에 놓여 있는 뱀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자영의 트럭을 돌아보았다.

약속한 밤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고 비가 내렸다. 자영은 비바람을 막아줄 만한 방수포 천막을 병정들에게 갖다주었다. 병정들은 난처해하지 않고 농장 한편에 천막을 높이 설치하고 그 안에 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무엇보다 거센 바람이 그만 멎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마치 소도구로 사용하는 의자가 된 것처럼 몸을 어정쩡하게 구부리고 있었다. 작은 의자 되기. 자영은 그 모습을 언젠가 그렇게 이름 지었고 여느 때처럼 하나씩 돌아가며 앉아보았다. 병정들의 몸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다만 축축했다. 천막 안에 세워둔 랜턴 불빛이 물기 어린 병정들의 몸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하기만 하여 빗소리와 숨소리가 자장가 소리처럼 들렸다. 낮과는 달리 농장의 풍경이 나른하고 지쳐 있었다. 자영은 의자가 된 병정들에게로 몸을 기울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반가운 듯 또는 배웅하듯 천천히 손을 흔들고 있으면 병정들이 서서히 잠드는 게 느껴졌다. 자영은 이것을 몰랐는데 알았고, 그것이 싫지 않았다.
  소나기였는지 비는 곧 그쳤고 바람은 아직 남아 좀더 기다림. 자영은 병정들을 깨우지 않고 천막 주변에 가는 선으로 향 가루를 뿌려 모르는 영혼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아는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님). 그러고 나서 남은 향 가루로 산 모양을 그려보며 혼자 놀았다. 자영이 혼자 놀고 있는 동안 크고 작은 아이들이 와르르 농장에 찾아와 향 가루를 피하며 뛰어다녔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무언가 의논하다가 달아나듯 다시 나갔다. 아이들이 스스로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아이들이 스스로 대답한다. 그런 작은 일은 어쩔 수 없다.
  뭐 때문에 왔는지 모르겠네. 자영은 아이들이 농장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렸고, 아까 낮에 보았던 약도를 떠올렸다. 농장의 위쪽, 마른 우물 근처에. 어쩌면 그곳에 엄마의 시체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자영은 생각했다. 어느 때고 검은 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검은 물에 홀려 깊고 캄캄한 우물에 몸을 던졌는데 알고 보니 물이 한 방울도 없었던 거지. 그대로 머리가 깨진 거다. 펑 하고 터진 거다. 자영은 이 허구의 작은 마을에서 누군가 급류에 휩쓸렸다는 소문이 들리거나, 누군가 내던진 작은 불덩이가 원인이 되어 숲에서 큰 화재가 일어날 뻔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곳에 찾아가 정말인지 확인하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진짜인지 아닌지. 자영에게는 그것이 중요했고, 그 중요함은 선했다. 그리고 그 선함이 때때로 자영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서 가봐야겠다. 그치.
  병정들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말했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짙어 눈을 감아도 떠도 똑같은 농도의 암흑이었다. 어둠이 윙윙거렸고, 윙윙거리는 어둠을 가로질러 농장을 빠져나왔다. 그 위쪽으로 걸었다. 자영은 혼자 동떨어져 걷는 기분으로 병정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어둠에 곧 익숙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눈에 보이는 것이 생겼지만 볼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아까 말이야, 병정들이 아까 잠든 사이에 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 사실은 꾸고 싶은 꿈이 있었다며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꿈이었을 거야 뭐냐면, 우리가 너를 잃어버리는 꿈이거든.
  그런 꿈을 꾸게 되면 우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사이에 시간이 계속 가는 거야. 물론 너는 계속 움직여야지. 그런 꿈을 꾼 건 네가 아니니까. 그러다가 우연히 너를 되찾는 꿈을 꾸게 되면 우리가 다시 또 움직이고, 움직여서 너를 찾아가면, 너는 옛날 사람이 되어 있어.
자영은 그 꿈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잘 몰라. 의미는 어쩌다가 생길 수도 있고. 만약에 생기면 알게 될 거야. 자영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알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었다. 자영이 병정들을 재우는 법을 알게 된 적 없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병정들은 자영을 깨우는 법을 알게 된 적 없이 알고 있었다.
  자영과 병정들은 교대하듯 앞으로 뒤로 움직이며 걸었다. 이따금 마치 한 사람처럼 보이는 일은 없었다. 얼굴 위에 드리운 얼룩덜룩한 잎 그림자가 물러나고, 낮게 뜬 보름달이 나타나 주위를 하얗고 맑게 쪼개어 비추었다. 밝은 빛과 바람을 맞으면서 자영은 병정들이 숨을 내쉴 때마다 그들의 머리꼭지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회오리 모양의 가마가 작아서 귀여웠다.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거기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지?
  없는 거지.
  그래도 뭐가 있으면 좋을 거야. 뭐라도 말이야.
  그걸 맨 처음 보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
  부―부―부.
  아니면 맨 처음 보이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양손을 맞잡고 기도라도 해봐.
  이어지는 병정들의 말소리에 자영은 맞아, 맞아, 하고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래. 거기에 죽어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 끝을 보여주는 거라면 좋겠다. 그러면 그만 용서해야지 생각하면서.


김채원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밀란 쿤데라의 책에서 한 아이슬란드인의 우정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의 이름은 엘바르 D로, 그는 쿤데라와 함께 묘지 안을 산책하다가, 죽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어떤 비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알려고 하지 않아 영영 알게 되지 않은 친구의 비밀에 대해,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척 어린나무가 심겨 있는 무덤 앞에서. 나는 우정이라는 것을 잘 모르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 자영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숨기려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가 보여주는 것만을 보며 굳게 잠긴 비밀의 문 앞을 지키고 선 문지기가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기를 바란다.

2023/11/01
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