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말한다. 직전에 챙겨준 책과 노트북. 숙소에 놓고 다니기 좀 그래서 들고 다녔다. 책과 노트북은 여행을 끝내지 못하게 할뿐더러 시작도 막았으며, 수십 계절을 흘려 수화물 추가 비용을 지불하게 했구나. 너희에게 말한다. 그래도 주지 않은 것보다 나았다. 더 주지 않았지만 덜 주지 않았다. 나는 너희와 같고 덜 너희와 같은 자들을 본 적이 없다. 너희에게 진심으로 말한다. 책에 쓰인 죄악 목록이 신을 열받게 하지 말라는 경고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단편영화의 알바생 역을 해내려고 카페에 취직한 여자애는 지금 빵집을 차려 아기를 낳고 옛 수도에서 혼자 잘 산다더군.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렇게나 무섭다.

  너희는 대답한다. 각자의 임무는 서로를 더 살게 하거나 덜 살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더군. 남의 필기 노트를 베껴 적고 대학에 못 가서 공기 좋은 마을의 훌륭한 어머니가 반쯤 되었다가 홀로 살아갈 여자애를 생각한다. 울고 있는 여자에게 물을 주어 더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냐? 손수건을 건네 닦아줄 것이냐? 신발을 신겨 떠나게 할 것이냐? 가장 좋은 방법은 열받게 하는 것인데? 우는 입에 차가운 고기를 넣을 것이냐? 안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과 너무 닮아 있어 너희에게 말한다.

허주영

2019년 《시인수첩》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올해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를 냈다. 덕분에 다들 모여 있는 데에는 절대 오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다. 요즘엔 하고 싶은 게 많다.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시 한 편을 굉장히 오래 쓰는 편인데 요즘엔 그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

2024/01/03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