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덜어내기로 했다.
  본래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부터 푹 빠져 있는 푸른발부비새 영상을 재생했고 알고리즘은 정리의 신 ‘푸른발’의 계정으로 안내했다. 영상 속에서 푸른발은 파란 양말 신은 두 발로만 등장했다.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물건들로 꽉 찬 집들을 방문했다. 그의 발길이 닿자 비좁았던 방은 넓어지고 환해졌다.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비운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옵니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별것도 아닌 평범한 그 말이 왜 갑자기 와닿았는지는 모르겠다. 현관 입구에 허물처럼 벗어둔 외투와 양말, 함부로 던져놓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옷장 안은 포화 상태로 자리가 없었다. 거실과 침실 바닥은 옷과 잡동사니 들로 뒤덮여 있었다. 현관에서 침실까지, 침실에서 화장실까지, 화장실에서 주방까지 세 갈래 오솔길로만 오고갔다.
  연말을 앞두고 받은 일주일의 휴가가 내일부터 시작이었다. 강제 연차였다. 여행을 갈 돈도 없었고 약속도 없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부터 버리세요.”
  푸른발의 정리 원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너무도 많았다. 한동안은 겨울 외투를 사는 데 골몰했다. 따듯해질 것 같아서. 다도 세트도 구매했다. 차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건강해지려고 그리크 요구르트 메이커를, 커피값을 아끼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다. 손으로 만든 것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코바늘과 뜨개실을, 성실한 사람이 되려고 다이어리를, 자연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캠핑용품을 주문했다.
  “설레지 않는 물건도 버리세요.”
  그 물건만 있으면 변할 것 같은 마음은 채 며칠을 가지 못했다. 설레는 것은 물건이 택배 상자 안에 들어 있을 때였다. 뜯는 순간 사라졌다. 야근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상자를 뜯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두기도 했다.
  대형 쓰레기봉투를 구입해 발길에 차이는 잡동사니들을 쓸어 담았다. 몇 번 쓰지 않았거나 아직 쓸 만한 물건들은 사진을 찍고 소개 문구를 적어 당근에 등록했다. 읽지 않는 책들은 상자에 넣어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빌라 엘리베이터 앞에 두었다. 거래 알림이 오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다왔다.
  이틀이 지나자, 바닥이 보였다. 사흘째가 되자 식탁이 나타났고, 나흘째에는 거실 창문 앞에 놓아둔 책상이 드러났다. 책상 앞에 앉은 게 언제였더라. 그동안 물건과 옷가지를 올려두는 선반처럼 사용했다. 큰 서랍이 여섯 개나 달려 있었다. 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물건이 있을지. 한숨이 나왔다.
  푸른발 계정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정리를 모두 마친 사람들은 울었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버린 것이 후회가 되어서일까.

*

책상 두번째 서랍에서 만년필을 발견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푸른발에게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더이상 설레지 않는 물건은 정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는 물건은요?
  이내 답변이 달렸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물건을 말씀하시는 거죠? 신속하게 정리해야죠.
  고급 브랜드였고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다. 사진을 찍어 당근에 등록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잃어버리지 마. 이건 버리지 마.
  처음에는 유튜브 소리인 줄 알고 휴대 전화를 봤다. 영상은 정지 버튼이 눌려 있었다. 옆집에서 나는 소리일까. 벽에 귀를 갖다 댔다.
  화가 나도 버리지는 마.
  소리는 희미했지만 익숙했다. 너의 목소리였다. 만년필은 네가 준 것이었다. 공모전에서 상품으로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정치인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선거 결과에 열을 받아 떠들고 있는 나에게 네가 만년필을 손에 쥐어주면서 했던 말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에 귀를 갖다댔다.
  나한테 소중한 거야.
  너무 놀라 만년필을 손에서 떨어트렸다. 만년필이 또르르 굴러갔다. 최대한 만년필과 멀어진 뒤 푸른발 계정으로 들어가 질문을 했다.
  혹시 말을 하는 물건은요?
  정리의 달인이 되시려나봅니다. 귀를 기울여주세요. 물건이 원하는 일을 해주세요.
  푸른발의 답변은 신속하고 다정했지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물건이 버리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다시 질문을 입력하고 있는데 당근 알림이 울렸다.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도 만년필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잃어버리지 마. 이건 버리지 마. 화가 나도 버리지는 마. 나한테 소중한 거야.
  거래가 성사될까봐 조급해졌는지 더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죄송하다고 이미 거래가 완료된 물건이라고 답한 뒤 글과 사진을 삭제했다. 그러자 더이상 만년필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만년필을 서랍 안에 서둘러 집어넣었다.
  미련은 버리세요. 지금 쓰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쓸 일이 없는 물건입니다.
  그사이 푸른발의 답장이 달렸다. 푸른발이 겪어본 문제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동안 다른 물건들은 당근에 등록해도 아무 일도 없었다. 아직 거래되지 않은 그리크 요구르트 메이커는 여전히 잠잠하지 않은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당근에 올리기 애매해 상자에 담아 둔 물건들을 떠올렸다. 그중에 핸드크림 짜개를 꺼냈다. 사진을 찍어 당근에 올렸다.
  끝까지 짜서 쓰면 왠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분명 너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투명한 문진을 등록했다.
  혹시라도 날아갈까봐.
  놀리는 거냐고 화를 냈었지. 몇 번 사용했더라. 네가 잔뜩 사다준 칫솔이 생각났다. 상자째로 사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칫솔의 사진을 찍고 당근에 등록했다.
  부드러워서 다치지 않아.
  사용하지 않았어도 네가 준 물건은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다음 물건은 북스탠드였다. 오랫동안 충전을 하지 않았다. 충전기를 꽂고 스위치를 켜자, 주홍색 불빛이 동그랗게 퍼졌다.
  생일 축하해.
  너와 만난 뒤 첫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만년 달력을, 뽑기로 들고 온 인형을, 운동화를, 카메라를 차례로 등록했다.
  엄청나게 보고 싶었어. 다른 걱정 없이 글만 쓰게 해주고 싶어. 예쁘다.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사랑해.
  네가 준 것 중에는 에어팟도 있었다. 유일하게 지금도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완전 싸게 샀어. 잘 샀지. 당근에 저렴하게 올라왔다며 두 시간도 더 걸리는 도시에 가서 사왔다. 밤늦게 돌아온 너의 갈색 티셔츠는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서너 번인가 썼대. 너는 소독솜으로 몇 번 닦은 뒤 내 귀에 꽂아주고 음악을 재생했다. 잘 들리지? 언젠가부터 듣지 않았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더이상 들을 수 없어 당근에 올린 글을 서둘러 삭제했다. 다시 잠잠해졌다.

*

그때, 나는 뒤집힌 세상을 보고 있었다.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잡았지만 놓쳤다. 병원비가 부담되어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천변을 산책하다 거꾸리에 매달리는 일이었다. 거꾸리는 운동 기구 중 가장 귀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한적한 곳과 사람들이 오가는 천변 다리 밑, 오직 두 곳에만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천변 다리 밑에 사람이 많아 징검다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와야 했다. 십 분쯤 매달린 뒤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허리에 살짝 무리가 오는 느낌이 있었지만, 기구에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주변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도 땅 쪽에 머리를 두고 있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휴대전화를 넣은 가방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크게 소리칠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이대로 매달린 채로 생을 마감하는 걸까. 그저 누군가 나를 봐줄 사람을 기다렸다. 삼십 분 가까이 지나자, 온몸의 혈액이 모두 뇌로 쏠린 듯했다.
  “저기요.”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쳐 왔다. 너였다.
  “저기요.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너는 조금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나를 쭉 지켜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얼굴이 벌게진 채 울먹이며 말했다.
  “저 좀 일으켜주시겠어요.”
  너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뒤로 우리는 징검다리 근처에서 만났다. 내가 매달려 있을 때 지켜봐주고 다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너는 운동보다는 거꾸리에 매달려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당근에서 무료 나눔으로 나온 거꾸리를 발견했다고 보여줬다. 조건은 대신 직접 가지고 오는 거였다.
  “가져오려고요?”
  내가 묻자 너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 집에 살아서 둘 곳이 없어요.”
  내가 원한다면 옮겨다주겠다고 했다.
  “날도 추워져서 천변 바람도 세고요.”
  너는 친구 차를 빌려 거꾸리를 집까지 옮겨주고는 말했다.
  “그런데 혼자 내려올 수 있겠어요?”
  네가 책상 하나만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리를 좀 펴야겠어.”
  우리는 거실에 나란히 책상을 놓고 앉아 있다가 그 말을 신호로 해서 차례로 거꾸리에 매달렸다. 한 명이 매달리면 한 명은 바닥에 앉아서 바라봐주었다. 뒤집힌 세상이 아니라 서로를 보고 있었다. 종종 키스를 하고 발끝을 간지럽히는 장난을 치며. 세상이 뒤집혀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

한밤중에 잠이 깨어 옆을 보면 너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내가 물으면 너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무료 나눔을 하는 사람들 말이야. 돈을 받지 않아서라도 치우고 싶은 걸까. 그렇게 해서라도 버리고 싶은 걸까.”
  “버리는 게 아니야. 필요한 사람을 찾아주는 거지.”
  어떤 날은 고양이 밥그릇과 물그릇을 올린 글을 보여주며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또 대답해줬다.
  “새 그릇을 사줬을 거야.”
  낮에도 너는 수시로 당근에 게시된 글을 들여다봤다.
  “2인용 소파, 오른쪽 부분이 좀 꺼져 있지만 쓸 만합니다. 왼쪽에는 아무도 앉지 않은 걸까?”
  “다른 한 명이 무척 가볍나보지.”
  나는 열심히 대답했다. 그래도 너는 여전히 눈을 떼지 않고 게시판을 들여다봤다.
  그사이 내 디스크 상태는 호전되었고 직장에 자리잡으면서 거꾸리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너는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 혼자 매달리곤 했다.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너를 바라보러 거실로 따라나섰다. 그러다 하루의 피로를 이겨내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 따라나가지 않았다. 한참을 매달려 있다가 침대로 돌아온 너는 내 품에 파고들었다. 목덜미에 닿는 너의 눈썹이 젖어 있었다. 축축했다.
  “땀을 흘린 거야? 세수했어?”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 파고들기만 했다. 너의 유일한 해외여행은 캄보디아였다고 했다. 앙코르와트는 보지 못했고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찍은 사진들만 보고 왔다고. 가이드의 안내로 동굴에서 나오는 박쥐를 구경했는데 저녁이 되자 수십 분간 박쥐가 끊임없이 나왔다고. 네가 혼자 매달리려고 방을 나갈 때면 나는 그 박쥐를 떠올리다 잠들었다.
  내가 너에게 준 물건들도 말을 할까. 처음에 했던 말들만 기억하고 있다면 좋을 텐데.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쳐다보지 마. 숨이 막혀. 미안해. 남이 쓰던 거 그만 사. 거지 같아.
  네가 도로 책상을 들고 나가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도 한동안은 너처럼 종종 당근에 올라온 게시글들을 살펴봤다. 새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애정과 쓸모를 다한 물건들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고기를 먹을 사람, 고양이나 개를 봐줄 사람, 영화를 볼 사람을 구하는 글들을 살펴봤고 함께 매달릴 사람을 찾는 글을 올려볼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

본래 거실 한가운데 놓았던 거꾸리는 네가 책상을 뺀 자리에 두고 빨래 건조대로 사용했다. 지금도 눅눅한 옷이 잔뜩 걸려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내려놓자 거꾸리가 나타났다. 여러 각도로 정성스레 사진을 찍었다. 네가 준 물건들도 모두 꺼내 놓고 사진을 하나하나 찍었다.
  그리고 매달렸다. 기다렸다. 아직 남아 있는 유언 같은 말들이 들려오기를.
  버리지 마.
  만년필이 먼저 시작했다.
  버리는 게 아니야. 상황이 바뀌어서 지금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거야.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야. 이제 나는 거꾸리에서 혼자 내려올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쓰지 않으니까.
  우리, 허리를 좀 펴자.
  거꾸리의 말에 뜨거운 것이 눈썹을 적셨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곧 말라버릴 것이다.

정선임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집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있습니다.

이미 사라진 것과 앞으로 사라질 것,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쓰고 나니 다 버리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끝까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024/02/21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