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컬렉티브 투는 미국의 대형 출판사에서 상업적으로 출간하기에
너무 도전적이거나 혁신적이거나 비정통적인 소설을 출간하는 일에 전념하는
소수의 대안 출판사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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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소설은 미국의 소설가 랜스 올슨(1954~2024?)의 삶과 인터뷰를 토대로 쓰였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다. 다만 랜스 올슨 스스로 인터뷰에서 말했듯 그의 삶은 때때로 픽션으로 여겨졌다.


1. 나지힌(naziheen), 추방된 사람들

대부분의 이름이 예상치 못한 경로에서 튀어나오고 쏟아지고 우르르 굴러다니지만, 그래서 시작점은 늘 불분명하지만 랜스 올슨의 경우는 아주 명확하다.
  2019년 가을 동안 나는 파리에 머물렀다. 문학 레지던스 프로그램 때문이었는데 관련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현지 일정을 맡은 모더레이터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그는 나를, 나는 그를 버려뒀다. 덕분에 나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파리지앵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고 많은 시간을 산책에 투자했다. 산책 코스에는 종종 서점이 포함됐다. 당시 내가 관여한 한국의 서점이 전시를 준비 중이었고 아트북이나 초판본 등의 책을 수집해야 했다. 여러 서점을 오가며 주인이나 점원, 손님들의 인상을 살피고 가구와 책커버를 만지작거리는 일은 즐거웠다. 고서점이나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서점, LGBTQ 서점, 건축 전문 서점, 그림책 서점, 관광지가 된 서점, 그냥 서점, 프랜차이즈 서점 등등 서점이란 서점은 다 갔다. 마레 지구의 몇몇 서점은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간혹 서점원과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의 대화는 서로의 바람과 지식의 차이로 어긋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그 편이 나았다.
  ‘After 8 books’는 그러던 중 알게 된 서점이다. 어지간한 서점은 다 가본 나는 생마르탱 운하를 건너 평소보다 먼 길을 걸었다. 구름이 비를 뿌리고 회백색 도시 너머로 물러났다. 빛이 젖은 건물벽을 타고 내려와 좁은 인도에 드리웠고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문가와 테라스에 서서 열띤 대화를 이어갔다.
  10지구 끄트머리, 저렴한 뷰티숍과 아프로헤어 전문숍이 늘어선 북역 뒤편의 낡고 어수선한 거리에 애프터에잇이 있었다. 파리를 낭만적인 도시라고 생각하는 관광객은 오지 않을 위치였다. 불행한 외판원이나 면접을 기다리는 실직자가 마지못해 숙박을 하는 한 싸구려 호텔이 서점과 같은 건물을 썼다. 단조로운 외관의 서점은 안이 훤히 보였다. 손님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프터에잇의 주인인 폴과 나흐메도 호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원래 벨빌에서 ‘section7’이라는 이름의 대안공간을 운영했던 예술가 커플로 재개발 때문에 쫓겨난 뒤 수년간 유럽을 떠돌며 난민 구제활동을 하고 돌아와 서점을 열었다고 했다. 애프터에잇은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급진적인 책을 취급했다. 쉽게 말해 아마존에서 안 팔 것 같은 책들. 왜 ‘like’를 붙였냐면, 팔지도 모르니까, 라고 나흐메는 덧붙이며 그러나 아마존에서 판다고 해서 아마존 이용자들이 그 책을 사진 않을 거라고 말했다.
  폴과 나흐메는 빈티지를 찾는 내게 캐시 애커의 Low: Good and Evil in the Work of Nayland Blake를 추천했다.
  빛바랜 주홍색의 자그만한 책인 『로우 Low』는 1990년 10월 뉴욕 피츠버그 갤러리에서 열린 네일랜드 블레이크의 전시를 위해 출간된 책이다. 캐시 애커는 블레이크가 창조한 사악한 사도마조히즘 동성애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헨젤과 그레텔을 뒤튼 이야기를 썼고 독일 출신의 구체시인이자 인쇄업자, 디자이너인 한스외르그 마이어에게 디자인을 맡겼다.
  “『로우 Low』는 100부 한정으로 출간됐어. 전 세계의 콜렉터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책이지. 너한텐 특별히 100유로에 팔게.”
  폴이 말했다. 나는 폴에게 건네받은 작고 비싼 책을 조심스레 넘겨보았다.
  “책은 재밌어?”
  “흠. 읽어보질 않아서……”
  폴이 대답했다.
  “100부 한정이니 뭐니 하는 말은 믿지 마. 구하기 쉽지 않지만 어렵지도 않아. 이베이에 있는걸.”
  나흐메가 말했다.
  폴이 어깨를 으쓱했다.
  “100유로. 그 이하는 안 돼.”
  애프터에잇의 벽에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가로로 긴 흑백의 사진 포스터.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저화질의 거리에 허름한 차림을 한 사내가 엎드려 물웅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오른쪽 귀퉁이에는 작은 폰트의 아랍어와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النازحون Naziheen
  폴은 나흐메가 팔레스타인에서 왔다고 말했다. 라말라에서 태어난 그의 부모는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을 다니던 중 나흐메를 낳았다. 그해, 제3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이 라말라를 점령했다. 나흐메의 가족은 팔레스타인계 추방 정책으로 카이로에서 쫓겨나 유럽과 중동을 떠돌았고 추방된 지 40여 년이 지나서야 라말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파리에서 유학하며 폴을 만난 나흐메는 부모와 함께하지 않았다. 나흐메는 말했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고향은 임시로 존재할 뿐이다. 추방과 망명은 그들 가족에 상흔을 남겼지만 나흐메는 어떤 면에서 다행이라고 했다.
  “덕분에 공식 문학에 아무런 애정도 없거든.”
  나흐메가 말했다. 주류 문화는 정의로울 때조차 배제하는 무언가가 있다. 배제해야만 성립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배제가 통합과 단일함을 유지한다. 나흐메는 일관성이 환영이라는 사실을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살바도르 달리처럼?”
  폴이 말했다.
  “윽.”
  나흐메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캐시 애커의 책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은 처음이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었고 내가 아는 누구도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번역을 진행중인 출판사도 없었다(그때만 해도 그랬지만 지금은 박솔뫼 소설가의 제안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을 준비중인 것으로 안다). 제국주의자들의 언어인 영어를 독해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한국어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논문 둘과 책 두 권을 찾았다. 두 권 중 하나는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숨을 참던 나날』로 본문에 캐시 애커에 대한 구절이 있었다.
  “나는 캐시 애커의 책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친구들을 걸러냈다.”
  뒤이어 이런 문장도 나온다.
  “이런 말을 해도 된다고? 이런 걸 써도 출판이 된다고?”
  『숨을 참던 나날』은 유크나비치의 자전적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책이다. 실패한 수영선수이자 약물중독자인 그는 오레곤 대학 시절 소설창작 워크숍에서 스타 작가인 이창래에게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반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이창래를 사정없이 뭉개는 꿈을 꾸던 리디아는 켄 키지의 공동 소설창작 워크숍에서 대마초를 빨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학의 세계로 입문한다. 소싯적 히피 버릇을 버리지 못한 켄 키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보드카와 처방약과 라구 소스를 위장에 쑤셔넣는 거구의 사내로 낭독회를 할 때마다 ‘퍼어어억, 퍼어어어어어어어억키이이이이잉지저스으’라고 속삭여 학생들을 열광시키곤 했다. 리디아를 포함한 키지의 열두 제자는 동굴같이 컴컴한 침낭과 키지의 거실 양탄자 위를 일 년 동안 뒹굴며 공동 창작, 공동생활, 공유 정신을 경험했고 그 결과 Caverns가 탄생했다.
  1989년 펭귄 북스에서 나온 Caverns는 물론 졸작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놀라게 하기 위해, 누가 정신이 더 이상한지 보여주기 위해 쓴 책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간혹 의미 있는 졸작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졸작은 뉴요커나 뉴욕리뷰오브북스나 뉴욕타임즈가 입을 모아 상찬하는 퓰리처 수상작 따위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 존재감은 인위적으로,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건 뭐랄까,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알아보는 것뿐, 절대적인 수동성,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수동성이랄까. Caverns를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
  비타협적 떠돌이였던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테드 강연으로 유명해졌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숨을 참던 나날』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하면서 무려 한국어로도 번역됐다. 나는 리디아가 캐시 애커와 수영과 성기 스팽킹을 즐긴 구절을 읽은 뒤 책을 훌훌 넘겨보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리디아가 정신‧언어적 샴쌍둥이로 추종하는 작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랜스 올슨. 리디아는 올슨에 대해 이렇게 쓴다.

“구글에 랜스 올슨을 검색해보면, 우리가 활동하는 부족적 반경에서 그가 록스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영원히 그를 지지하기로 작정한 이유는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의 언어 덕에 내 언어가 더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 안에서 내 머리는 터져버리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 랜스 올슨과 나 우리 두 사람은 언어의 강도다. 우리의 글쓰기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단어는 하나도 없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멍청하고 혁신적이란 말은 묘하게 잘난 척하는 것 같다. 캐릭터, 플롯, 줄거리 형성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전부 가져다가, 어린 시절 내가 바비 인형 머리에 폭죽을 넣어 폭파했던 것처럼 다 날려버리는 일을 설명할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2. 역사학적 메타픽션 (Historiographic Metafiction)
: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서사화되고 서사화되자마자 언어가 되고 언어가 되자마자 편집되고 편집되자마자 사건이 일어나고……

“석유. 제 인생은 석유와 함께 시작됐어요.”
  랜스 올슨이 예의 가늘고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랜디(랜스 올슨의 애칭)는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븐시스터즈로 악명을 떨친 슈퍼메이저 정유회사 로열더치쉘이 베네수엘라 시추를 위해 세운 자회사 카리비안에서 유조선 선장으로 일했다. 탄소자본주의의 개이자 미제국주의의 앞잡이, 주정뱅이 마도로스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몽상가였으며 아마추어 과학자였고 일찍이 화석 원료의 고갈과 기후 재앙을 예감한 방구석 선지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름도 외지 못하는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랜디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사람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단다. 선한 자와 악한 자, 그리고 바다로 나아가는 자.
  아버지가 걸음마를 시작한 랜디와 그의 여동생 아일라를 마라카이보 호수의 악명 높은 낙뢰 속으로 내보냈을 때, 그건 보호구를 테스트하기 위한 실험이자 지극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마라카이보 호수에는 한 시간 동안 평균 이백팔십 번의 번개가 내리쳤고 비바람과 돌풍의 전조가 드리운 보랏빛 하늘과 검푸른 대양의 몸부림은 지구의 행성적 규모를 실감케 하는 무언가였다고 랜디는 말하며, 그때 저는 인간은 바다가 아닌 우주로 항해를 시작하게 될 거라고, 그것이 또다른 전쟁과 지배의 시작일지 역사의 대전환일지 알 수 없지만 백 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아일라를 바라보며 최소한 우리는 여기에서 죽진 않을 거라고,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되뇌였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비록 그는 삼억 볼트의 번개를 연속으로 두 방 맞고 실신했지만 말이다. 번개는 보호구의 지퍼를 타고 지표면으로 흘러들어갔고, 랜디의 아버지에 따르면 번개의 상흔만이 심장 표면에 옅게 드리웠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것은 영광의 상흔, 비록 심장이식 수술을 하기 전까지 남에게 보여줄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지만 내면의 자긍심으로 간직하라고 랜디의 어버지는 말했다.
  이후 랜스 올슨의 가족은 뉴저지 북동부의 퍼래머스로 이사했고 랜디는 급우들에게 베네수엘라에서의 삶을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급우들은 랜디가 말재주가 있구나, 입만 열면 구라를 터는구나 생각했고 심지어 담임 교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번은 담임 교사가 방언이 터진 듯 베네수엘라의 삶에 대해 지껄이는 랜디를 참지 못하고 교장실로 보냈다. 랜디는 교장 선생님에게 맹세의 서약을 했다. 제가 말한 모든 것은 진실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아래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랜디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출해 사실을 확인했다. 랜디의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랜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가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 재끼더니 없는 일을 자꾸 지어내네요.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번개 밭에 내보내겠습니까.
  교장실을 나온 아버지는 랜스 올슨을 붙들고 말했다. 어떤 종류의 일은 진실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믿지 못하는 법이고, 그건 사람들이 아직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거란다.

그 무렵, 꽃의 시대가 저물고 검은 황금이자 악마의 똥, 아버지의 혈관에 흐르는 검은 피 석유가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석유. 제 인생은 석유와 함께 시작됐어요.”
  반둥회의를 이끈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둘 나세르와 베네수엘라의 석유장관 페레즈 알폰소가 주도해 결성한 민족주의적 카르텔 석유수출기구, 이른바 오펙(OPEC)은 아이젠하워의 석유 수입 쿼터제와 세븐시스터즈에 대항해 자국의 경제 성장과 세수를 유지하고 자원의 조기 고갈을 막을 목적으로 출범했지만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1969년 5월 팔레스타인의 한 저항 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중해로 석유를 나르는 트랜스아라비안 파이프라인을 파괴했다. 이 사보타주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분쟁이 발생해 석유 공급이 중단됐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분쟁으로 수에즈 운하가 봉쇄됐고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장악한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유전에서 채굴한 석유를 우회로를 통해 수출했다.
  1973년 10월, 아랍의 산유국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멈출 때까지 석유 공급을 줄이겠다고 선언했을 때, 오일쇼크로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미국은 이 사태를 기회로 여겼다. 정치와 에너지 문제를 결합하고 팔레스타인과 협력하는 중동을 고립시키며 석유 달러를 통해 세계 경제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수립한 금본위제를 폐기한 닉슨 정부는 대안으로 석유 대금을 오직 달러로만 지불할 수 있게 통제했고 막강한 힘을 거머쥐었다. 석유 매장량의 한계에 대한 공포와 에너지 위기는 미국 신경제질서의 정치적 수사로 활용됐다.
  랜스 올슨의 아버지는 석유 파동 배후에 도사린 악마에 현혹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중동이 장악한 석유를 구출하기 위한 영웅이 되길 자처했고 그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코널대 교수인 천체물리학자 토머스 골드의 심층 고온 생물권 가설(Deep hot Biosphere)이었다.
  왕립학회회원이자 존경받는 천체물리학자이며 칼 세이건의 스승인 토머스 골드가 망상에 빠진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과학 이론이 그렇듯, 과학자의 망상은 망상이 아닌 증명 가능한 가설 중 하나로 생각됐고 사람들을 현혹했다. 골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주를 바라보던 시선을 뒤집어 아래를, 심연을 바라봤고 그곳엔 지표면과 다른 경이로운 생물권이 존재했다. 별이 탄생한 이래 핵과 맨틀 사이에서 움튼 지하 세계의 창조물은 우주에 생명이 존재할 거라고 믿는 천체물리학자의 합리적이라고 오인된 추론에서 비롯됐다. 때맞춰 수소와 탄소의 결합인 탄화수소가 존재하는 천체가 발견됐고 골드는 가설을 진실로 확신했다. 골드는 주장했다. 문화권에 따라 지옥, 아수라, 악마의 군단이 지배하는 마계라고 믿었던 지하 세계는 실존한다. 다만 그것은 탄화수소를 먹고 자라는 박테리아의 세계이다. 지표 아래의 생물권은 이 세계보다 더 큰 질량과 부피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면, 화성에 정착하는 것만큼 경이로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진짜 관심을 가진 건 땅 밑에 박테리아가 산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골드의 가설이 맞다고 가정했을 때 발생하는 석유 매장량이었다. 골드는 유기물의 사체가 오랜 시간 압축되어 석유가 생겼다는 기존의 이론을 거부했다. 석유는 태곳적부터 존재한 지하 세계의 힘에서 기원한 것으로, 탄화수소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생성될 것이었다.
  토머스 골드는 심층 고온 생물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스웨덴의 실얀(Siljan) 호수 근처의 3억 6천만 년 된 충돌 분화구 탐사를 제안했다. 영원히 발굴되는 석유의 유혹에 넘어간 전세계의 기관이 앞다투어 골드에게 투자했고 그는 4천만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모았다.
랜스 올슨의 아버지는 진실의 구렁텅이로 지체없이 뛰어들었다. 스웨덴의 촌구석 마을 모라Mora로 이주를 제안했지만 어머니는 반대했고 랜스 올슨의 가족은 찢어졌다. 랜디는 어머니와 함께 뉴저지에 남고 동생인 아일라만 아버지와 스웨덴으로 떠났다.
  “밑에서 만나. Meet me in the Low.”
  랜디는 아일라가 건넨 마지막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2년 후, 아일라와 아버지는 토머스 골드의 거대한 실패와 함께 사라졌다. 분화구의 수천 미터 아래에서 발견된 건 겨우 80배럴의 석유였으며 지하 세계가 지상의 것들을 집어삼켰다. 랜스 올슨은 아일라와 유년 시절을 보낸 리버엣지의 해컨색 강을 홀로 거슬러 오르며 스웨덴으로 갔어야 하는 사람은 아일라가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생각했다. 내 삶은 덤이야. 마라카이보에서 번개를 맞았을 때 이미 죽은 걸지도 몰라.

유년 시절 이후 랜스 올슨의 삶은 평이했다. 최소한 겉보기엔 그랬다. 위스콘신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의 삶이 자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취재 대상을 실제로 만나는 게 싫었다. 사건 현장에 가는 것도 싫었다. 아주 가끔 누군가와 접촉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최대한 접촉하지 않는 선에서의 만남이었다. 그런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보도로 이어지는지 교수나 동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랜디는 미련 없이 저널리즘을 때려쳤다.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좋았기 때문에 글을 계속 썼고 당시 그와 만나던 웨이터 쇼티는 “이건 소설이라고,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여지없이 소설이야, 고삐리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이런 물건을 본 적 있어.”라고 말했다.
  “그게 뭔데, 쇼티?”
  랜디가 물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쇼티가 대답했다.

“물론 쇼티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내용을 한자도 기억 못 했고 되블린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썼던 물건을 다시 보면 되블린의 모더니즘 걸작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하지만 그땐 몰랐어요. 그냥 개멋있다, 그런 제목의 소설이 내가 쓴 것과 비슷하다니 죽인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랜스 올슨이 예의 가늘고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쇼티의 엉터리 소감이 랜스 올슨을 이끈 곳은 아이오와의 작가 워크숍이었다. 유능한 작가를 포드 공장식 컨베이어 벨트처럼 매해 일정량 생산해내는 유서 깊은 작가 양성 기관으로 작가를 꿈꾸는 너드라면 누구나 한번은 거쳐가는 곳이었다. 랜디는 춥고 삭막한 아이오와 시티에서 거의 홀로 지냈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이오와는 누구나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슈퍼마켓 리얼리즘을 생산합니다. 슈퍼마켓 리얼리즘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어요. 익숙하고 편안하고. 힘들이지 않고 만족을 얻을 수 있죠. 하지만 팝타르트를 팔면서 고뇌에 몸부림치는 건 좀 웃기는 일 아닐까요? 그건 필요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다만 제 기준에선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1973년 아이오와에서 만난 전설적인 두 술꾼 존 치버와 레이먼드 카버가 랜디에게는 문학계의 팝타르트였다. 낡은 포드 팔콘 컨버터블을 타고 고속도로 외곽의 주류 매장에서 스카치위스키를 사는 자기혐오에 찌든 중년 남자들. 그들은 아이오와에서 교수로 지내며 수업도 엉망으로 하고 글도 안 쓰고 테이블 밑에 숨겨둔 술이나 퍼마셨다. 그들이 쓴 글을 보면 노력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은 게 빤히 보였다. 그러고도 감상에 젖어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둘 중 누구도 타자기 덮개를 벗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궁상이나 떨고 있으니 작가로서 좋아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랜디는 말했다. 랜디는 선배 작가들이 쌓아올린 둔감한 상아탑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자기파괴적인 반복 노동과 플롯의 벽장 뒤에 숨겨놓은 결말을 향해 에둘러 가는 에피파니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랜디는 왕따였고 아무도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대머리독수리 같은 외모 탓일까. 새된 목소리 탓일까. 랜디는 혼자가 익숙했고 조금 외로웠지만 오만과 저주를 무기 삼아 시더래피즈의 헌책방을 홀로 오갔다. 그런데 데이비드 실즈가 거기 있었다. 콜라주의 전도사, 문학의 역병, 데이비드 대머리 실즈. 그때만 해도 데이빗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 지망생이었고 말을 더듬었으며 머리털도 풍성했지만 이미 반골의 느낌이 가득했다. 제정신이 밝힌 작가가 되고 싶다면, 폴린 카엘과 뉴요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뒤 지성계에서 추방된 레나타 애들러를 읽어보라며 헌책방에서 찾아낸 빛바랜 Speedboat를 랜디에게 건넸다. 랜디는 이때다 싶어 그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하! 터, 터무니없이 가, 감상적이지.”
  데이빗이 대답했다. 말더듬증을 치료하고 있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기계음처럼 높낮이가 단조로웠다. 랜디는 흡사 자기 목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고 이 거구의 사내가 아이오와의 고루한 전통을 박살 낼 거라고 믿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 데이빗과 랜디는 아이오와에서 술독에 빠지는 대신 어마어마한 양의 피자와 아이스크림에 빠졌고 석사 학위와 10킬로그램의 지방을 함께 취득했다.

총 563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데이비드 실즈의 『현실 갈망 Reality Hunger』 섹션 319에서 실즈는 랜스 올슨의 글을 인용한다.
  “재래식 소설은 독자에게 일관된 삶이 있다고 가르친다. 말끔히 포장된 진실을 파악하기 좋은 형태로 내밀면서. 하지만 길모퉁이에 서 있거나 TV 채널을 돌리고 웹서핑을 하고 관계가 엉망이 되고 가까운 친구가 어젯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번쩍이는 파편이 하나씩 날아드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데이비드 실즈의 자전적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도 랜스 올슨을 인용한 구절이 있다.
  “랜스 올슨의 소설 『회한의 달력』은 관광객, 여행자, 카페, 관음증, 예술의 유혹과 허상,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움직임은 글쓰기의 방식이다. 글쓰기는 움직임의 방식이다.’ 모든 주요 인물은 존재에서 (문자 그대로 혹은 비유적으로) 비존재로 움직이다. ‘내가 죽 두려워했던 것은 집에 도착했을 때 겪기 마련인 괴리였다. 내가 있는 곳과 내가 있었던 곳 사이에 온도 차이가 나는데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고 마는 것. 마치 어떤 병에서 회복하는 중인 것처럼. 그럴 때 나는 거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미국에 아방가르드는 없지만 언더그라운드는 있다 (There's no avant-garde in America, but there is an underground)

“이제 미국 문학에서 아방가르드는 완전히 사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벌써 이십여 년 전이죠. 애석하게도 조종은 문학계나 출판계 내부에서가 아니라 영화계에서 날아들었죠. 픽션 콜렉티브의 설립자이자 전위 문학의 선봉장이었던 조나선 바움벡의 아들인 노아 바움벡이 〈오징어와 고래〉라는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이 영화는 자기 연민에 빠진 소설가의 추한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이걸 보라고, 이게 바로 난해한 형식과 현학적인 언어 뒤에 숨어 있던 작가들의 본모습이라고. 문창과를 비롯한 소수의 글쓰기 교실에 웅크리고 앉아 젊은 여자애들을 보며 침 흘리고 쇠퇴하는 정력에 괴로워하며 아들과 경쟁하려 드는 백인 중년 남성. 로날드 수케닉과 레이먼드 페더만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여성혐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그들의 작품을 보면 참아주기 힘든 게 사실이죠. 저는 과거의 과오를 소급 적용하는 게 맞냐 아니냐를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고요.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방가르드와 백인 남성성이 연결되는 양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죠.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거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 둘을 연결하는 심리 배후에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내재되어 있지요. 다시 말해 엘리트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사람들은 백인 남성성과 아방가르드를 연결했습니다. 아방가르드는 오만한 엘리티시즘이고 엘리트들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삼단논법에 사람들은 쉽게 넘어갔어요.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성혐오는 주류 문화에 더 많았는데도 말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부장제와 가족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죠. 심지어 즐기기도 하죠. 누구를 예로 들까요? 조너선 프랜즌? 무라카미 하루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을 비판하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픽션 콜렉티브의 전통에는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는 힘이 있다는 점이에요. 우리는 우리에게 낯선 곳으로 갑니다.
  로날드 수케닉이 하나 옳게 본 것이 있다면 아방가르드에 대한 정의였어요. 그는 아방가르드를 지극히 유럽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그는 자신의 언어를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는 새로운 구분선을 긋습니다. 그가 저항했던 것은 이른바 ‘양질의 문학(Quality lit)’이었습니다. 논리정연하고 완성도 높은 양질의 문학과 자기모순적이고 가변적인 저질 문학(Low lit). 저질 문학의 역사는 로렌스 스턴과 라블레를 거쳐 로마와 그리스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대결입니다. 수케닉은 그 시초의 텍스트가 이소크라테스의 〈판아테나이〉라고 믿었어요. 〈판아테나이〉의 핵심 문장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비교하면 그 의미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죠. 여담으로 충만한 〈판아테나이〉는 시종일관 길을 잃고 산만하고 어수선하고 때때로 시시껄렁하지만 통렬하고 해방적이고 진솔하며 무엇보다 끝나질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질 문학적 흐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들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어디에서나 틈을 찾아 모습을 드러내고 싹을 틔웁니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신자유주의 내부에서, 민주주의 내부에서, 공산주의 내부에서, 구조주의 내부에서, 페미니즘 내부에서, 퀴어이론 내부에서,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내부에서 배제당하는 것들을 구제합니다…… 저질 문학은 일종의 안티테제, 반문화일까요. 지금 저는 지긋지긋한 이분법을 반복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저질 문학은 반대항이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반대의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양질의 문학, 우리가 주도적으로 경험하는 문화가 바로 반대항이라고요. 저질 문학이 자연의 질서고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여기에 저항해서 인간들이 세운 폭력적인 체계가 바로 지금의 문화인 것이죠. 아방가르드가 의미 그대로 문화의 미래, 앞, 선봉을 뜻한다면 저질 문학은 저 아래, 밑, 내부를 뜻합니다. 부디 제 얘기를 내면 또는 원시로 돌아가자는 식으로, 이반 일리치의 아류나 프로이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랜스 올슨에게 메일을 보낼 즈음 올슨은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픽션 컬렉티브 투의 이사직도 사임한 반쯤 은퇴한 노년의 작가였다. 스물한 권의 책을 냈지만 단 한 권도 베스트셀러나 그 비슷한 무엇도 되지 못했고(중쇄를 찍은 책은 단 두 권이고 그마저도 지원금을 덕분에 가능했다) 권위와 명성이 높은 상을 받지도 못했다. 몇몇 유명 재단의 보조금을 받았으나 한정된 서클의 아카데믹한 인정에 불과했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랜스 올슨은 자신의 삶과 작업에 의문이 생겼다. 예순이 넘어 돌아보니, 남아 있는 작가 대부분이 교수였고 글쓰기를 가르쳤으며 대동소이한 매체를 통해 비슷비슷한 말을 주워 삼키고 있었다.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작가들. 그가 평생을 바쳐 헌신한 문학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과거와 같은 빛은 저물고 김빠진 콜라처럼 미적지근한 단맛만 남았다. 그가 추구했던 도전적이고 혁신적이고 비타협적인, 내러티브가 아닌 언어 자체에,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중요성을 둔 문학은 백인 남성 엘리트의 자위에 불과했던 걸까. 랜스 올슨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쪽 바닥에도 여성 작가는 많았고 간혹 유색 인종, 제3세계 출신 작가도 있었다(비영어권의 작가를 모른다는 건 올슨의 아킬레스건이었으나 이 문제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선민의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픽션 콜렉티브 투에는 주류 시장에서 먹히는 상업적인 형식의 탈식민주의나 페미니즘을 회의적으로 보는 도전적인 작가가 즐비했다. 그러니 그가 느끼는 의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비롯됐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책을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매년 쏟아지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책은 사회가 정당화한 가치와 윤리에 관심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시늉, 변명을 위한 도구였다. 진정한 즐거움과 깨달음은 다른 곳에서 얻고 책은 의무감 때문에 읽을 뿐이다. 우리 세대는 우리가 만드는 종류의 예술을 보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게 우리의 문제였을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일까. 문학 내부에서 리얼리즘이니 정체성 정치니 실험이니 하고 다투는 동안 세계는 망했다. 그게 답이었다.
  나는 올슨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저 픽션 콜렉티브 투에서 내 소설이 출간될 수 있을지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올슨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영어로 번역된 나의 단편소설을 첨부했다.
  미국 시간으로 새벽 3시쯤 보냈는데 올슨은 삼십 분 만에 답장을 했다. 답장은 간략했다. 그는 이제 더이상 픽션 콜렉티브 투와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학은 거의 끝물이지만 그래도 남은 단물이라도 빨고 싶으면 여기가 아니라 크노프나 랜덤하우스 같은 곳에 투고하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니면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역사 소설이나 필굿 소설을 쓰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제 말에 조롱의 의미는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죽어가고 있고 남을 놀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에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랜스 올슨이 메일의 마지막에 덧붙인 건 유튜브 링크였다.
  결국 미국의 마지막 아방가르드도 유튜브인가 하는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유튜브 링크는 처음 보는 영화의 예고편으로 연결됐다. 제목은 ‘How We Got Here: Melville Plus Nietzsche Divided by the Square Root of (Allan) Bloom Times Žižek (Squared) Equals Bannon’으로 대충 번역하면 ‘우리는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나: 허먼 멜빌, 니체, 앨런 블룸, 슬라보예 지젝 다 거쳐서 결국 스티브 배넌?’. 데이비드 실즈의 신작 영화였다.
처음 알게 된 소식이었다. 랜스 올슨의 단짝이자 라이벌인 데이비드 실즈는 2019년부터 에세이 필름을 찍고 있었다. 첫 작품은 〈린치: 역사 Lynch: A History〉. 미식축구 선수 마숀 린치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실즈가 스포츠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식축구 선수에 대한 에세이 필름은 다소 뜬금없고 황당했다. 유튜브에 예고편이 있었다. 예고편은 단순했다. 로커 룸에서 이루어진 실제 인터뷰 자료 영상에 힙합 음악을 깔고 앞뒤로 자막을 단 게 다였다.
거구의 흑인 마숀 린치는 검은색 바라클라바를 쓰고 앉아 있다. 스포츠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열띤 음성으로 경기를 치른 소감을 묻는다. 마숀 린치는 어떤 질문에도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I’m thankful.”
  “I’m thankful.”
  “I’m thankful.”
  검색해보니 마숀 린치는 미식축구의 전설적인 플레이어였다. 특히 2010년 NFL 플레이오프에서 뉴올리언스 세인츠를 상대로 한 터치다운, 일명 ‘비스트 퀘이크(Beast Quake)’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득점으로 꼽힌다. 린치는 아홉 개의 태클을 피해 67야드를 질주했다. 그가 시애틀의 루멘 필드를 가로지르는 동안 관중들은 열광을 넘어 실신 지경에 이르렀고 인근의 퍼시픽 노스웨스트 지진 관측소의 지진계는 진도 2.0을 기록했다. 팬들은 린치의 별명 비스트 모드(mode)와 지진을 합쳐 이 위대한 터치다운에 비스트 퀘이크라는 명칭을 수여했다.
  하지만 실즈가 마숀 린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플레이 때문이 아니었다. 린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는 걸로 유명했다. 2013년에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고 NFL은 그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미식축구 팬들은 마숀 린치가 거만하고 어린애 같으며 팬들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스포츠 스타라면 그에 합당한 매너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다음 인터뷰에서 린치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문제는 모든 질문에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팬들은 그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고 구단은 더 큰 벌금을 부과했다. 이쯤 되자 린치를 옹호하는 팬들도 나타났다. 린치에겐 침묵할 자유가 있다! 그들은 벌금을 대신 내주기 위해 모금 캠페인을 벌였다. 린치는 받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린치: 역사〉는 84분이며 700여 개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숏은 인용된 것이며 영화에는 나레이션도 자막도 없다. 제작 기간은 사 년이며 다섯 시간짜리 버전과 이십 시간짜리 버전도 있다.
  데이비드 실즈는 〈린치: 역사〉를 암스테르담, 비엔나, 런던, 스톡홀름에서 상영했고 미국 전역의 군소 영화관을 돌며 상영회를 열었다. 스포츠 다큐를 보러온 관객들은 상영 도중 실즈에게 욕을 퍼붓고 나갔다. 한번은 영화 상영을 끝내고 나왔는데 머리를 짧게 자른 육중한 체구의 백인 남자가 실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실즈에게 물었다. “대체 이 영화로 말하고 싶은 게 뭡니까?”
  실즈가 대답했다.
  “이 영화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지돈

소설가. 에세이, 비평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쓴다.

2024/04/17
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