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플라스틱 방공호 / 모와 미
플라스틱 방공호
안전한 날보다 안전해 보이려고 노력한 날이 더 많았다
괜찮다고 대답하면 착각은 횡설수설
어깨 위로 떨어진 새들과 함께 묻어버린
어두운 절기 속의 나는
살아남은 나의 명복을 오랫동안 빌어줄 것이다
견고한 의자나 턱 괴기 좋은 식탁이 되는 것
한 사람이 정물이 되면 마주본 사람은 비로소 생물이 되는 것
어쩌면 어려운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죽은 괘종시계를 던지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들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슬펐던 날로 드문드문 날짜를 세고 있었다
언제나 일 년은 모자랐다
신의 과오로 인간사(人間事)가 번영하기 시작했고
의문은 금지된 찬사였다
멀쩡한 사람들이 가까이 모여 떠들기를
같은 지하실을 쓰는 이웃처럼 보인다고 말하면
어쩌면 비슷한 하수구 모양들
손에 쥔 재갈은 스스로 입에 물었다
듣고 싶은 말은 고백 어조가 아니었으니까
같은 장면에서 서로 다른 두 장르가 동시에 태어났다
상영 금지의 시네마는 자막 없이 흘러갔다
창밖의 호시절을 한때라고 부르는 마지막 연출이었다
투명하게 보려면 쏟아지는 빗금도 마주해야 했다
이게 비로소 단단하다는 것을 그렇게 깨달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였다
몇월 며칠인지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은 곰곰 생각했다
오늘은 아픈 사람이 없는 날이 아니다
오늘은 참는 사람밖에 없는 날이다
모와 미
두 사람은 서로 실화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온갖 허구를 동원해서, 소문을 연기하면서, 파문을 일으키면서. 모와 미는 세 사람이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일이다.
신장과 체중과 옷차림 모두 달랐지만 유행과 경향을 비슷하게 읽어갔다. 같은 분위기 아래 다른 맥주와 다른 상상을 했지만, 같은 것을 견디고 싶어했다.
알고 싶은 것보다 보고 싶은 것이 더 많았다. 모와 미는 서로의 정물화가 되었다. 모와 미는 서로 바뀐 줄도 모르고 살았다. 우리라는 영원한 착각 속에서 운동화를 고쳐 신었다.
언덕 위에 언덕을 쌓았다. 모와 미는 달라지고 싶었다. 같은 줄거리에 서로 다른 첫 문장을 선사하는 일. 끝나는 곳에 마중 나오는 일이 곧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일이 될 것을.
모와 미는 서로의 등에 몰두했다. 말없이 오래갈 수 있게 하는 주문을 쓰다듬었다. 인형 등에서 꺼낸 건전지처럼, 서로의 등 뒤로 허물어진 앞날을 문질러주었다.
모와 미는 아마도 헤어질 것이다. 모와 미는 강렬한 찰나를 갖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모는 미를, 미는 모를 걱정했지만 거짓 없이 실화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지 모른다.
모와 미는 네 사람이 되었다. 창틀에 걸터앉아 이야기할 때와 취침등을 끄고 누웠을 때, 손잡고 걸을 때와 잡화점에서 선물을 고를 때…… 침묵은 허기였고 동시에 허기를 달래는 건 갈등뿐이었다.
모와 미는 더이상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모는 미를, 미는 모를 떠난 적 없이 끝이 났다. 이 작고 가여운 서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과거를 선별하는 재판만 남아 있었을 뿐
모는 여름으로, 미는 겨울로 간 것 같다. ‘소식에 따르면’이라고 부를만한 소문도 남기지 않고. 모와 미를 묘사하는 사람은 모와 미가 보고 싶거나, 아마 모와 미를 잊어야 하는 사람일 것이다.
서윤후
엎드린 사람을 오래 보았다. 어깨와 등에 대해 생각했다. 엎드린 사람을 깨워 빛이 잘 드는 카페에 갔어야 했는데, 그대로 뒀다.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꺼내오지 못했다. 이 괴로움이 나를 쓰게 만든다면.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