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쯤 들어온 손님이 가방만 두고 나간 채 들어오질 않는다. 삼십 분 후에 수연과 만날 약속을 했는데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 가게 앞 진열대에 놓인 빵들을 들여놓고 계산대만 끄면 바로 나갈 수 있게 다른 것들을 미리 정리해두었다. 11시 40분에 수연이 가게로 들어왔다.
   비가 오네.
   투명한 우산을 접으며 수연이 말했다.
   응, 나도 우산 있어.
   수연은 내 검은 우산 옆에 자신의 우산을 걸었다.
   천천히 해.
   수연이 말했고 나는 어차피 오늘은 토요일이라 지하철 역사가 닫기 전에 얼른 가게를 닫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네가 기다리는 것이 미안해서 서두르는 것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렇다고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내 마음은 지금 담담하고 이건 단지 내 일상일 뿐이야, 라는 뜻이었다.
   돌아온 손님이 주황색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빵 하나를 더 사갔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밖에 진열되어 있던 빵들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뭐 도와줄까?
   수연이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말한 뒤 하루 매출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여기 이 빵들은?
   아차, 마들렌과 양갱 같은 것들을 그냥 두고 갈 뻔했다. 나는 미처 들여놓지 못한 트레이를 들여놓고, 수연에게 줄 빵이 담긴 큼직한 봉투를 챙겼다. 문을 잠근 뒤 2번 출구를 향해 걸었다. 며칠 전에 처음 가본 술집에 갈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먹질 않았다. 저녁에 꽈배기를 하나 먹은 것이 전부다. 두 개 먹을 걸, 아무튼 돼지고기짜글이와 공깃밥 같은 것이 먹고 싶다. 계단을 오르며 수연이 말했다.
   대단하다.
   응, 뭐.
   응, 뭐, 라고 대답은 했지만 고마웠다. 정말 내가 대단해서라기보다는 힘든 것을 알아준 것 같아서다. 사 개월 동안 하루도 쉬질 않았다. 매일 12시가 넘어 지상으로 가는 이 계단을 오르면서 시간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행해서 힘든 것은 아니었고 버겁고 지친다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아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내가 재미로 하던 베이커리 카페 게임 말이다. 가게를 인수받으면서 가게 근처로 이사를 한 바람에 집에 가도 혼자였다. 다세대주택인데 다행히 다들 자유롭고 너그러운지 새벽 2시가 넘어서도 종종 시끄러워 나도 아무 때고 노래도 부르고 텔레비전 볼륨도 높이고 그랬다. 내가 외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녁은?
   내가 물었고 수연은 아직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난 아까 네가 ‘먹방’ 찍는 줄 알았어.
   편하게 말해버렸다. 수연은 오후 4시쯤 가게로 찾아와 옥수수콘치즈빵과 소시지페스트리, 고구마케이크 한 조각, 찰깨빵 한 개를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함께 먹었다. 전부 다 계산해달라고 했지만 커피값과 케이크값은 뺐다. 한 시간쯤 이런저런 빵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침 시계를 보니 찰깨빵을 구울 시간이 됐다. 내가 만들어 굽는다기보다는 완제품인 냉동 상태의 빵을 이십 분 정도 해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갓 구운 빵을 수연에게 건네며, 우리 가게 베스트야, 설명도 해주었다. 수연이 빵을 먹고 잠시 지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나는 식빵 끝에 버터마늘소스를 바르면서 바라보았다.
   내가 방해되는 것 같아, 갈게.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연이 와 있던 덕분에 화장실도 마음 편하게 다녀왔고 어떤 손님 둘은 가게 밖에 진열되어 있는 균일가 빵값 계산을 수연에게 하고 가기도 했다. 엄마가 매니저를 좀 해주고 와이프가 빵을 굽고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몇 번 한 적이 있던 터라 순간 기분이 좋았었다.
   이삿짐 정리도 해야 하고.
   수연이 돌아섰고, 나는 같은 동네 주민이 된 기념으로 괜찮으면 이따가 맥주를 한잔 하자고 말했다. 10시나 11시에 끝날 것 같다고. 결국 12시가 되어서야 이렇게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가고 있지만 수연은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아주 평온하고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예전엔 오 분만 늦어도 흡사 화산이 폭발하듯 화를 내곤 했었는데.
   망원슈퍼 괜찮아?
   내가 묻자,
   응, 어떤 덴지 모르지만 너 배고프니까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자.
   팔 년 만에 만난 수연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예전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우산을 쓰고 오 분 정도 골목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징어볶음하고 돼지고기짜글이 어때?
   내가 물었는데 대답이 선뜻 나오질 않는다. 뭔가 아니라는 뜻이다. 수연은 메뉴판을 바라봤는데 고르지는 못하고 있다. 아, 국물 종류를 하나 시켜야 하나? 나는 생각했고 어묵? 황태술국? 하고 묻자 그제야 웃으며 황태술국, 한다. 술은 셀프여서 나는 주문을 한 뒤에 소주 한 병을 가지고 왔다.
   지난가을, 우리는 팔 년 만에 서로의 목소릴 들었다. 연말에는 내가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여행 중이라고 했다. 어디냐고는 묻지 않았었다. 뒤늦은 나의 질문에 수연은 미국엘 다녀왔다고 했는데 내가 어땠느냐고 묻자 그냥 좋았다고 대답했다.
   대답이 뭐 그래.
   가기 전에 많이 힘들었거든.
   배는 고파 죽겠는데 뭐라 말해줘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작년에 수연이 겪은 일은 가을쯤 들었는데 나는 그저 얼른 이겨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느낀 수연의 여유랄지 하는 것들이 어쩌면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맨날 돈 없다고 하면서 여행 가는 사람들 보고 웃기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어. 여행을 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는 건가봐. 물론 전엔 정말 100만원도 없었긴 했지만.
   100만원이 뭐야, 너 10만원도 없었잖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연은 통장에 있는 돈 전부로 비행기 티켓을 샀고, 숙박비와 식비는 남자친구가 내주었다고 했다. 남자친구 역시 한 달을 벌어 집과 자신의 생활비를 쓰고 30만원짜리 적금을 내면 텅 비어버리는 월급을 받는 중소기업의 회사원이었지만 그래도 다녀와서 몇 달 허리띠를 졸라매면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보면 다행히 수연보다는 나은 삶이었다.
   술은 안주 나오면 먹어. 빈속이잖아.
   수연이 종이컵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물론 자신의 잔에도 따랐지만 원래 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 곧 오징어볶음이 나왔고 수연이 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너는 조금 더 이따가 마셔.
   원래 수연은 먹을 때는 참 다정했다. 음식은 나도 곧잘 만들어주곤 했었지만 수연이 내게 훨씬 많은 음식을 만들어주었었다. 음식도 음식인데, 예쁜 접시에 조금씩 깨끗하게 담아오는 걸 잘했고 설거지도 완벽하게 하곤 했다. 뭐 먹고 싶어?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면서 네다섯 가지의 음식 이름을 말하면 내가 고르곤 하는 식이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하면 아냐, 넌 쉬어, 라고 하면서 과일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를 주곤 했다. 저녁쯤 되어 내가 집으로 가면 수연은 그날 밤이나 다음날 메시지를 보내오곤 했었다. ‘아까 남은 거 먹어치웠어’라든지 ‘어제 남은 거 먹어치웠어’라는 메시지였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이제 마셔도 될 것 같아.
   우리는 잔을 부딪친 다음 술을 마셨다. 오징어볶음이 짜지 않아서 좋았는데 곧이어 황태술국이 나왔다. 젊은 남자가 사장이었고 음식들에선 집밥 같은 맛이 났다.
   요즘 오징어가 비싸서 못 사먹고 있었어.
   내가 말하자 수연이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맨날 시장에 가니까 알지.
   내가 말하자 수연이 웃었다.
   오픈은 매니저와 오전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기고 나는 낮에 시장에 들렀다가 오후에 출근을 한다. 2시쯤 나와야 마감을 하는 12시까지 견딜 수 있었다. 벌써부터 견딘다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모르겠다, 마감을 하고서 지하철역 계단을 오를 때마다 피곤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빵집을 하기 전엔 영화 일을 오래 했다. 물론 지금도 잠시만 쉬는 셈이지만, 아무튼 일을 한지 십 년 가까이가 되자 나는 어느새 사무실에 앉아 오더를 내리는 위치에 앉아 있었고 오늘은 별일 없이 하루가 갔네, 생각하면서도 때때로 불안했는데 그 불안 때문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한 거란 생각이 든다. 그저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불안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수연과 헤어지고서 만난 여자친구와는 결혼을 할 뻔 했다. 지난가을 수연과 통화를 하던 중 이야기가 나와 ‘사 년 정도 사귀었는데 어떻게 보면 너와 헤어질 때와 같은 이유로 헤어졌다’고 말했다가 수연에게 크게 빈축을 샀다. 그녀들에 말에 따르면 나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알면 뭐가 달라지냐! 묻고 싶지만,

   내가 무언가를 아주 깊이 생각했다면 후회할 선택 같은 걸 안 했을까?

   요즘 나는 내 인생이 애매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드라마틱한 인생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열심히 산다고 산 것 같은데 어쩌면 늘 문제의 언저리만 생각하고 살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결정의 순간이 왔을 때 고려해야 할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아무튼 수연과 사귈 당시에도 나는 나의 결정을 수연에게 통보하는 식이었지 같이 고민을 나누는 식은 아니었다. 수연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학연수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할 때도 수연은 어학연수는커녕 어학원도 다닐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그런 수연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마다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수연의 표정을 읽고 내가 왜, 라고 물으면 수연은 그저 그냥, 그냥…… 하며 말꼬리를 흐렸었다. 수연이 그냥, 이라고 말하면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는 결국 서로를 향해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한 뒤 헤어졌다.
   지난가을 내가 수연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한 끝에 미안했다고 하자 수연은 내게 웃기고 있네, 라고 말했었다.

   식당엔 우리 말고 두 테이블이 더 있었는데, 1시쯤 되자 다 나가고 우리만 남았다. 2시까지만 하는 곳이라 우리도 한 병만 더 마시고 일어나야 했다. 수연은 오징어볶음과 황태술국을 맛있게도 먹었다. 내가 주문한 공깃밥 한 그릇도 둘이 나눠 먹었다.
   짐 정리는 다 했고?
   응, 다 하고 조금 누워 있다가 나왔어. 넌?
   나는 집이라기보단 방인 나의 집 사진을 찾아 수연에게 보여주었다.
   와, 깔끔하다. 내 방은 엉망인데.
   아냐, 깔끔하긴.
   수연의 칭찬에 나는 멋쩍게 대꾸했다. 우리는 둘 다 방이 두 칸인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는데 나는 작은방에 옷과 책상을 두고 큰방에 침대와 소파 등을 두었지만 수연은 작은방을 완전히 창고로 쓰고 있다고 했다. 정리가 안 돼, 수연이 말했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나는 전세고 수연은 월세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왜 나보다 수연이 편안해 보이는 것일까? 나는 설사 그것이 정말 체념이라고 해야 할까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야 할까(그게 그건가), 아무튼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나의 모습보다 훨씬 좋아 보였고 그래서 부러웠다.
   남자친구랑 결혼 얘기 해?
   아니.
   왜냐고 묻지 못했다. 그것보다 수연은 최근에 읽은 책이라든지 앞으로 시작할 작업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라는 시집을 읽었는데, 까지 듣고 내가 웃었더니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웃겨?
   응, 웃겨.
   왜? 난 제목만 보고 왠지 슬펐는데?
   아니, 내가 요즘 벽에 붙어 자거든.
   오징어가 비싼 줄만 알면 뭐해. 넌 역시……
   또 한번 수연의 빈축을 샀다. 너도 오징어값 모르잖아! 말하고 싶었지만……

   작년, 그러니까 서른다섯이 되던 해 가을, 나는 내가 가진 것보다 많은 것을 바랐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때마침 영화를 끝낸 직후였고 내게는 사 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계획해두었던 해외여행 대신 빵집을 인수했다. 인수를 하기 위해 상담을 할 때 전 주인은 내가 늘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도 걱정 없다고, 오토로 돌릴 수 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나는 전날 남은 빵을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구정 당일에도 혼자 지하철 역사로 걸어 내려와 빵집 문을 열었다. 나중의 삶을 걱정하다가 지금의 삶을 걱정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적당히 하려고 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론 적자를 면하지 못하니까. 은퇴 후에 빵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막연한 마음이다.

   작업을 하려고 일을 줄였어.
   화장실에 다녀온 수연이 말했다. 안 그래도 적게 일하는 편이었는데 더 줄이다니. 난 늘렸는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달라져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많이 다르다는 것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칠 년이나 사귀고도 잘 안 맞아서 헤어졌는데, 우리가 잘 안 맞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나는 내가 어떤 면에서 자꾸만 공통점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속으로 다짐했다. 담담해져야해, 내 앞에 있는 사람처럼.
   아, 맛있다.
   수연이 말했다. 맛있는 걸 먹고 있으면 맛있다고 느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나는 왜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이상한 잡생각들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심플하고 그런 성격인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내가 말했다.
   빵집이 아니라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
   내가 말했고,
   시간을 돌릴 수가 없잖아.
   수연이 말했고,
   응, 그래서 신혼여행을 좀 길게 가려구.
   결혼할 사람도 없으면서 나는 또 이렇게 나중 일이나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잔을 부딪쳤고 나는 술을 한 잔 마셨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늘 안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수연은 나의 안정된 환경과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들을 좋아했고 응원해주었었다. 무언가를 선택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 수연은 자신이 어떤 시기에 닥친 많은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할 뿐 삶에 대해 능동적이거나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수연을 두고 기특하다거나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수연은 가끔 내게 속을 털어놓곤 했었다. 기특하면 뭐해, 내 인생은 그럼 이게 다야? 다른 게 뭔가 있을 거 아냐. 이렇게 말하고 술을 한 잔 하고 내 어깨에 기대고 설거지를 한 뒤에 나에게 말했었다. 잠은 집에 가서 자라.
   마지막 잔을 마시고 휴대전화 시간을 확인하니 1시 48분이었다. 수연이 계산을 했고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내일부터 내린다던 비가 하루 먼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우산을 쓰고 골목길에 섰다.
   나 시장 끝까지만 데려다줘.
   응.
   너 지금 처음이라 많이 지쳐 있는 거지 이제 좋아질 거야.
   그럴까?
   응, 난 네 빵도 시나리오도 너무 좋아.
   아직 시장 입구도 가지 못했는데 수연이 전화를 받았다.
   응? 그래? 알았어.
   무슨 전화야?
   응, 근처에 있었는데 여기 거의 다 왔대. 나 망원역으로 가야할 것 같아.
   수연이 말했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망원역 쪽으로 걸었다.
   남자친구 착하네.
   나도 착해.
   그래……
   술집이 역 근처였기 때문에 우리는 금세 역에 도착했다. 토요일 새벽치곤 조용하고 간만에 내리는 빗소리가 좋은데 너무 빨리 도착했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좀전에 퇴근했고 내일 또 출근하는 망원역 2번 출구 앞이었다. 때마침 보행 신호가 들어왔고, 수연이 말했다.
   저기 저 차 같아.
   저 하얀 차?
   응, 갈게! 잘 들어가!
   잘됐다. 얼른 뛰어!
   잘되긴 뭐가 잘 됐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수연에게 갑자기 희망찬 목소리로 외쳤다. “얼른 뛰어!” 경기를 앞둔 선수를 응원하는 코치와 비슷한 제스처를 하며…… 보행 신호는 아직 한참이 남았는데 수연은 벌써 횡단보도를 건너 우산을 재빨리 접은 뒤 하얀 차에 탑승했다. 잠시 후 차가 출발했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손에 들린 커다란 빵 봉투를 발견했다. 나는 마지막 손님이 가방을 두고 자리를 비웠을 때 수연을 생각하며 가게에서 가장 큰 봉투에 서른 가지쯤 되는 빵을 하나씩 넣었다. 혼자 산다니까 다는 못 먹겠지만 아무튼 많이 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빵과 씨름하다가 또 빵을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초보 빵집 사장이 되어 아,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다음달부터는 어머니에게 잠시 가게를 맡기고 다시 영화 한 편을 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그럴 예정이긴 했지만 마음가짐은 내 예상과 달랐다. 앞으론 예상이란 걸 하지 말까? 아니, 예상을 좀 나쁜 쪽으로 하고 살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산을 쓰고 빵 봉투를 들고 골목길을 빙글빙글 걷는다. 그래, 역시 난 아직 아니었군, 난 아직 멀었군, 아니 뭐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빨간불이든 초록불이든 나도 누군가에게 뛰어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주란

원래는 서로 닮은 점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엔 서로가 아주 많이 달라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썼다.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