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권은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시시오도시의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물이 차면 기울었다가 그 반동으로 아래에 있는 돌을 때리는 대나무였다. 빈 대나무 속을 울리는 경쾌한 소리처럼 무언가 세권의 몸을 관통한 것만 같았다. 순간 세권은 구림이 왜 보름 전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 했는지, 바타클랑 극장 앞에 직접 켠 양초와 꽃다발을 놓아야겠다고 결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깊이가 삼 미터쯤 되는 맨홀이었다. 바닥은 축축했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반사적으로 감싸 안았던 무릎이 금세 부풀어 올랐다. 몸을 일으키려다 날카로운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현기증이 났고 시야에서 반짝거리는 덩어리들이 날아올랐다. 퇴근 후 곧장 돌아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하루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었다. 어지럼증이 가시자 세권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구조 장비에 의지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구급차와 구조대 차량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조대 차량의 후미등이 깜빡이며 연신 보도블록을 훑었다. 멀쩡한 맨홀 뚜껑이 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구급대원은 아마 누군가 고물상에 가져다 팔았을 거라고 했다. 세권이 들것에 눕자 구급대원이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경추보호대를 씌워주었다. 구급차가 출발했다. 차체가 떨릴 때마다 선반에 진열된 약품들이 저마다 달그락거렸다.
   부러진 부위는 헝겊이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필름에 희부연 정강이뼈가 떠 있었다. 의사는 다행히 수술은 면했지만 몇 달간 주기적으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부러진 뼈가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세권은 목발을 짚고 현관에 들어섰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통깁스를 한 상태였다. 현관에 구림이 급하게 짐을 싸며 신발장에서 꺼내놓은 계절에 맞지 않는 신발들이 뒤엉켜 있었다. 여섯시쯤 퇴근했는데 벌써 자정이었다. 내일 아침 회사에 전화를 걸어 연차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권은 간단히 씻었고 어렵게 옷을 갈아입었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구림이 전화를 받으면 간단한 안부만 물을지 사고에 대해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구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세권은 소파에 앉아 혹여 다시 걸려올지 모를 전화를 기다렸다. 파리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은 것이 보름 전이었다.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그날은 주말 저녁이었다. 세권은 구림과 로맨스 영화 배경음악을 불러 유명해진 아일랜드 출신 가수의 내한 공연장에 갔다. 가수는 공연 내내 기타를 제외한 다른 악기는 쓰지 않았다. 잔잔한 노래가 대부분이었는데 음향 시설 때문인지 의외로 웅장하게 느껴졌다. 구림은 간혹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가수는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라오게 했다. 일 층에 있던 몇십 명의 관객이 무대에 올라 가수를 둘러쌌다. 가수는 더 이상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수십 명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공연장 안을 울렸다. 세권과 구림이 앉은 이 층 자리에서 텅 빈 좌석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무리 지어 있는 관객들 위로 휘장처럼 넓고 흰 조명이 떨어져 내렸다. 관객들은 아주 친밀한 사이인 듯 보였고 곧 어디론가 함께 떠날 것만 같았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가 유난히 북적였다. 갑자기 비가 내려 관객들이 공연장을 떠나지 못해서였다. 가까운 곳에 주차해두어 다행이라는 세권의 말에 구림이 혼잡한 로비를 돌아보았다. 발이 묶인 사람들은 소나기이길 바라며 로비에서 머뭇거리는 듯했다. 공연장 주차장까지는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세권과 구림은 옷이 눅눅하게 젖은 채 차에 올랐다. 구림이 안전벨트를 매며 핸드폰 전원을 켰다. 다소 늦게 둘은 그 소식을 접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구림은 트렁크에 짐을 쌌다. 한 달간 파리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공연장에서 집까지 오는 데는 삽십 분쯤 걸렸다. 구림의 출국은 겨우 삼십 분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구림은 전화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다. 당장 출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트렁크를 끌고 현관을 나섰다. 일단 공항에 가서 대기 예약을 걸고 무작정 기다릴 작정인 듯했다.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순간 세권은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참견하거나 캐묻고 싶지 않았다. 세권은 구림을 이해하고 싶었고 이해하려 했고 이해하는 척하는 중이었다.
   구림이 프랑스에 직접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분명 엠마였다. 이건 여자들 간의 일이었고 엠마와 구림 사이의 일이었다. 구림은 이십 대 후반에 파리에서 일 년쯤 살았고 엠마는 그때 사귄 친구였다. 두 달 만에 단편 영화를 완성해 동아리 친구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구림이 파리에 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엠마 덕이었다. 둘은 룸메이트가 되었다. 구림과 엠마가 자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엠마는 물건을 던지거나 자해하기도 했다. 싸우다 지치면 엠마가 집을 나갔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 돌아왔을 때 여전히 구림이 집에서 엠마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이 둘만의 화해가 되었다. 어느 날 구림은 엠마가 집을 나간 뒤 캐리어에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왔다. 작별 인사를 못 했지, 구림이 그렇게 말할 때면 세권은 둘 사이가 친구보다 자매에 가까웠을지 모른다고 짐작하곤 했다.
   결혼 후 구림의 노트북을 쓰다가 파리에서 만든 단편 영화를 보았다. 구림이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주연 배우로 출연한 십오 분 짜리 영화였다. 멜로드라마였는데 여태껏 세권이 들어왔던 구림의 연애 경험들이 녹아 하나의 서사로 이어졌다. 이야기의 전개나 배우의 감정표현, 화면의 톤까지 모두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실제 경험이 주는 감각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티가 역력했다. 가끔 의식적으로 실제 경험과 반대로 설정한 디테일이 눈에 띄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주인공이 둘 다 여자라는 사실이 영화를 한층 진부하게 만들었다.
   세권은 새삼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파는 물론이고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 장 그 위의 화병, 캔들, 벽에 걸린 그림과 벽지까지 모두 구림이 고른 것이었다. 구림은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한때 정원이나 공원의 풍경을 계획하고 의미를 궁리하고 모형을 만들었다. 구림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을 조화롭게 배치할 줄 알았다. 결혼 후에도 구림은 무언가 좋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시들기 무섭게 새로운 종류의 꽃을 화병에 꽂았고, 이전에 먹어보지 못한 술, 빈티지 가구, 그림과 향수 등을 눈여겨보고 사들였다. 성별에 상관없이 친구를 사귀고 만났다. 구림은 그들의 취향을 알아내는 것에 능숙했고 취향을 알아낸 다음엔 그들을 위한 선물을 정성껏 준비했다.
   배가 고팠지만 고작 주방까지 가는데도 발을 절어야 했다. 목발은 현관 신발장에 기대있었다. 최대한 왼쪽 다리를 안 쓰려고 노력하며 부엌으로 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신음이 절로 흘렀다. 무릎 아래가 눈에 띄게 부었고 푸릇한 멍이 번져있었다.
   냉장고에는 곧바로 먹을 만 한 것이 없었다. 조리를 할 상황도 아니었다. 세권은 시리얼을 담을 만한 그릇을 눈으로 찾다가 그만두었다. 개수대에 설거짓거리가 잔뜩 쌓여있었다. 구림은 뭘 하든 뒷정리를 말끔히 하는 법이 없었다. 아침의 이부자리나 샤워 후 목욕용품들, 식사 후 자투리 재료 처리가 그랬다.
   세권은 초콜릿 푸딩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푸딩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 없었다. 식탁 한쪽에는 직소 퍼즐이 흐트러져 있었다. 구림은 요리를 즐기지 않아 식탁을 책상처럼 쓰곤 했다. 종종 진하게 우린 홍차에 우유를 섞어 마시며 퍼즐을 맞췄다. 밑판이 없는 천 피스짜리 비정형 퍼즐이었다. 조각의 모양에 통일감이 없었다. 어떤 조각은 샴쌍둥이 같았고 어떤 조각은 나팔을 부는 원피스 차림의 천사처럼 보였다. 직사각형으로 퍼즐의 테두리가 맞춰져 있고 가운데 퍼즐 조각이 드문드문 이어져 그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끌어안고 도시 위를 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구림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순간의 충만함이 느껴진다고 했으나 세권의 눈에는 남녀가 전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만 보였다. 퍼즐은 특수 플라스틱 재질이어서 빛이 드는 곳에 걸면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효과를 낸다고 했다. 완성된 퍼즐을 액자에 끼워 거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작년 여름 잠깐 맡아준 친구 부부의 고양이가 식탁 위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퍼즐 조각 몇 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구림은 퍼즐을 완성하기보다 피스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의사는 세권의 무릎에서 부기가 빠지며 뼈가 움직였다고 했다. 이대로 뼈가 제자리를 벗어나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세권은 지난 일주일 내내 외출하지 않고 몸을 사렸다. 그런데도 경과가 좋지 않다니 믿을 수 없었다. 물리도록 배달음식을 먹었고 빨래가 밀려 당장 갈아입을 속옷이 없을 지경이었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세권의 목발을 힐끔거리며 선심 쓰듯 아파트 단지 안까지 들어가 주겠다고 했다. 세권은 거절하고 큰길가에 택시를 세웠다.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지 몰라도 세권이 느끼기엔 환부가 이전보다 훨씬 가뿐했다. 배달 음식에 질린 세권은 이런저런 메뉴를 고르다 구림과 함께 갔던 일식집을 떠올렸다. 세권이 시시오도시를 본 것은 다름 아닌 그 일식집에서였다. 정식으로 설치해놓은 것은 아니고 화장실 바깥에 마련된 세면시설을 조성해놓은 것이었다. 대나무를 쪼개 긴 수도꼭지를 감싸고 그 아래 크고 둥근 돌 세면기를 놓여 있었다. 기울거나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 그럴듯했다.
   가게는 한산했다. 홀에는 사인용 식탁 두 개가 놓여 있고 주방과 바가 마주 보는 형태였다. 바 끝에서 우측으로 꺾으면 다다미가 깔린 룸이 나왔다. 세권은 바에 앉으며 목발을 옆 의자에 기대 놓았다.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이지만 늘 퇴근 직후 구림과 함께 왔고, 한창 저녁 시간이었기 때문에 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주방장은 남색 가운과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주문을 마치자 구림의 안부를 물었다. 세권은 아내는 여행을 갔고 보시다시피 자신은 다리가 부러졌다고 대답했다. 주방장은 농담으로 듣고 소리 내 웃었다. 다친 곳이 어떤지 묻기에 세권은 마침 다리가 부러지는 순간 이곳 시시오도시를 떠올렸다고 했다.
   뼈가 부러지는 순간 대나무가 돌을 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소리는 영화에서나 듣던 건데 눈앞에 떠오르는 건 이 집 세면대였어요.
   세권은 자신이 평소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권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 나누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주방장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구림이었다.
   시시오도시는 본래 농기구죠. 일본 농가에서 새나 작은 짐승들이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도록 쫓는 역할을 해요.
   주방장은 세권의 말을 세면 시설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주방장은 작은 도자기 그릇에 명이나물 장아찌를 담아 내놓았다. 표고버섯과 매실, 레몬 청 등 온갖 재료를 넣고 끓여 절임 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단골손님이 오면 내놓는 거라며 세권의 앞쪽으로 바짝 밀어주었다.
   부인이 올 때도 내드려요.
   세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이나물을 집어 먹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저 벽화는 어때요? 최근에 사람을 불러 꽤 돈을 들였죠.
   구림이었다면 주방장이 묻기 전에 인테리어가 달라진 것을 깨닫고 먼저 말을 꺼냈을 거였다. 검은 무늬가 있는 벽지인 줄 알았는데 실은 대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수묵화였다. 집요할 정도로 빽빽하게 대나무로 들어차 있었다. 바위나 새 같은 주변 배경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촘촘히 선 대나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감추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세권은 마치 관절처럼 보이는 대나무의 마디들을 눈으로 훑었다. 대나무 이파리마다 벼 이삭 같은 것이 자잘하게 돋아 있었다. 날개가 길쭉한 날벌레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통 대나무를 표현한 그림에서는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파리 끝에 붙은 것들은 뭐지요?
   주방장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다시 벽화를 가리켰다.
   꽃입니다. 꽃이 만개한 대나무에요.
   만개라기엔 좀 시시하네요.
   글쎄요. 대나무 꽃은 번식과 무관한 돌연변이에요. 짧게는 육십 년 길게는 백 년이 지나야 개화를 볼 수 있어요. 숲 전체에 일제히 꽃이 피고 나면 다음엔 숲 전체가 말라 죽어버려요. 누구도 대나무가 왜 꽃을 피우는지 정확히 모르죠.
   주방장이 바쁘게 손을 놀려 전복과 해삼을 썰었다. 능숙하게 칼을 가누며 어깨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빳빳한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대나무 잎끝에서 저마다 꽃이 피어나는 소리, 혹은 하나둘 다시 꽃이지는 소리 같다고 세권은 생각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처럼 서로에게 옮아 피는 꽃이에요. 대나무에게야 어떻든 사람들이 보기엔 그 꽃이 귀하죠.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니까. 대나무 꽃을 보면 행운이 온다고 믿어요. 행운이란 말은 누구나 좋아하니까요. 그러니 좋은 그림이죠.
   세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케를 주문했다. 의사가 아직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배가 불렀고 이제는 술이 마시고 싶었다. 세권은 생선 살점을 입안에 넣고 혀로 꾹 눌렀다. 어제저녁 구림에게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런저런 질문들이 목구멍을 찔렀다. 세권은 상황을 그르치지 않을만한 질문을 골라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파리에 간 이유가 뭐냐고 묻자 구림은 엠마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파리 전역에서 추모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지만 모두 일상을 건강히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했다. 마치 세권이 파리 사람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구림은 전화가 늦어 미안하다고, 도시 내 치안이 강화되었고 자신은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며 웃었다. 세권은 자신이 테러에 대한 애도나 구림의 안위보다 구림의 부재가 주는 불안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세권은 말문이 막혔고 곧 전화를 끊었다.
   지금쯤 구림은 무얼 하고 있을까. 매일 십 분이나 이십 분쯤 걸어 바타클랑 극장에 갈까. 그 앞엔 갖가지 크기와 색을 가진 초들이 놓여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쌓아올려지는 꽃다발들. 세권은 평생 직접 꽃을 사본 일이 없었다. 꽃은 어디에나 있는데, 꽃을 살 만큼 축하해야 할 일 역시 끊임없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대신 세권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갔던 꽃집을 떠올렸다. 레일과 잘 맞지 않아 뻑뻑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는 미닫이문, 곁에 서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던 꽃 냉장고, 앞치마를 한 여자가 무심하게 전지가위를 놀리는 모습. 무성히 쌓인 꽃줄기와 이파리 위로 다시 비슷한 꽃의 부위들이 쌓였다.
   구림은 정말 엠마를 만나러 간 걸까. 아니면 직접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물어야 할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성급하더라도 어떤 결정을 내리고 나면 눈에 보이는 많은 상황을 확신으로 삼을 수 있게 되니까.
   세권은 구림이 얘기하곤 했던 지난 연애 상대에 대해 떠올렸다. 이런저런 이름을 번갈아 떠올리다 문득 엠마의 이야기가 구림의 다른 연애담처럼 만남과 다툼, 헤어짐의 과정까지 단단한 기승전결을 이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야기 끝에 늘 따라붙는 작별인사라는 표현도 애매했다. 세권은 종아리 근육이 심하게 땅겨오는 것을 느꼈다.
   세권은 이제 능숙하게 목발을 짚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축받아온 사람처럼 보일 것이었다. 구림이 보면 놀랄지도 몰랐다. 평소보다 더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신 직후 왼쪽 무릎이 조금 욱신거리는 듯했지만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되레 온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어두웠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불 꺼진 쇼윈도 위로 갈고리에 꿰인 돼지고기처럼 흔들리는 세권의 몸이 비쳤다. 희끄무레한 실루엣이 자신을 향한 장난 섞인 조롱처럼 느껴졌고 왠지 마음에 들었다. 집에 가봤자 세권을 기다리는 금붕어 한 마리 없었다. 길 건너편에 유일하게 불을 밝힌 곳이 보였다. 이십사 시간 코인 빨래방이었다. 구림이 자주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간판에 커다란 세탁기와 동전이 그려져 있었다. 유리를 지나치게 말끔하게 닦아 놓아 뻥 뚫린 것처럼 보였다. 세권은 빨래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빨래방 내부는 세로로 길쭉한 모양이었다. 입구 왼편에 팔걸이 없는 긴 의자가 비치되어 있고, 오른편 벽을 따라 드럼 세탁기 여러 대와 건조기, 동전 교환기 따위가 붙어 있었다. 정면에는 바퀴 달린 큰 빨래 바구니 두 개가 보였다.
   세권은 의자에 앉았다. 집에도 당연히 세탁기가 있었다. 구림은 빨래방을 이용하면 따로 건조할 필요가 없다고, 거실에 빨래를 널지 않아도 돼 좋다고 했다. 구림은 종종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가 한두 시간쯤 지나면 돌아왔다. 외출 시간은 대중이 없었다. 평일 자정이거나 주말의 한낮이기도 했다. 빨래는 본래 정해진 때라는 것이 없으니까. 구림은 완전히 건조된 빨래를 개어 집 안 구석구석 수납장에 집어넣었다. 구림은 여기 앉아 빨래가 다되도록 기다릴 것이다. 아니면 잠깐 짬을 내어 누군가와 통화 하거나 주변 카페에서 수다를 떨 수도 있겠지. 어쩌면 파리에서 엠마와 사는 동안 자주 빨래방을 이용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빨래방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간에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었다. 세권은 자신이 구림의 어떤 시간에 대해 명백히 알고 있다고 확신한 것이 우스웠다.
   세탁기 한 대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리문을 통해 왜소한 어린아이만 한 흰색 인형이 보였다. 둥글고 큰 코를 가진 요괴 인형이었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골짜기에 산다는 어느 외국 설화 속 캐릭터였다. 언젠가 해외 출장을 간 도시에서 구림의 선물을 고를 때 가게 직원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세탁기의 동그란 유리문에는 세탁물 적정량을 표시하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인형은 세탁기가 돌아갈 때마다 들썩이며 그 선을 넘었다. 큰 눈이 유리문 바깥을 보고 있었다. 인형은 머리를 처박고 또 처박으면서 비눗물을 맞았다.
   세권은 수십 개의 CCTV 화면을 모두 모아 보는 관제소처럼, 어쩌면 이곳이 도시 곳곳에 있는 맨홀들의 출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꿎은 빨래방이 이십사 시간 열려 있을 이유가 뭐람, 세권은 중얼거렸다. 신이란 낡은 트럭을 몰고 다니며 재미로 맨홀 뚜껑을 걷어가 버리는 늙고 추레한 괴짜일지도 몰랐다. 세탁기 뚜껑이 열리면 얇고 젖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심히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맨홀 뚜껑에 빠져 긴 튜브를 타고 흘러와 세탁기 뚜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찾아갈까.
   세탁기가 멈추었고 인형이 물에 빠진 익사체처럼 엎드려 있었다. 종료음이 울리고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등이 꺼졌다. 일순간 소음이 사라져 귀가 먹먹했다. 전면 유리에 부옇게 습기가 찰 때까지 아무도 인형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세권은 술이 깰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구림이 현관에 들어섰다. 세권은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구림을 보았다. 어쩌면 몇 년 전에 지었어야 하는 표정을 한 채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구림은 장을 봐온 듯했다. 아파트 단지 안의 마트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가 보였다.
   구림은 곧장 부엌으로 가 큰 그릇에 반으로 자른 방울토마토와 잘게 썬 올리브, 바질, 양파를 섞고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부었다.
   하루 동안 재워뒀다 먹으면 귀에서 종이 울린대.
   누가 구림에게 그런 걸 알려줬을까, 생각하며 세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고프니 오늘은 더 기다릴 수 없다고 구림이 말했다. 그릇 두 개를 꺼내 세권의 몫을 덜어주었다. 신선한 향이 풍겼다. 세권은 입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구림은 식사를 하다 말고 거실로 달려가 캐리어를 열고 무언가 꺼냈다. 몽마르트르 주변 화랑에서 산 그림이라고 했다. 욕실 타일만 한 크기였다. 전체적으로 선을 여러 번 그은 스케치 위에 노란 색감을 입힌 파리의 야경이었다. 귀퉁이에 작가의 서명이 있었다. 프랑스에 있을 때 구림이 좋아한 작가라고 했다.
   그땐 삼십 유로였는데 지금은 십오 유로가 됐어.
   세권은 그림을 받아들었고 신경 써서 들여다본 뒤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그림을 이런 식으로 사는 기분은 별로야.
   구림은 토마토를 입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엠마는 어떻게 지내?
   여전해.
   구림은 파리에 가자마자 엠마를 찾아 나섰다고 했다. 엠마가 몇 년 전 아르바이트를 했던 음식점을 통해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주소를 알아냈다. 현관문을 연 엠마를 본 순간 구림은 깨달았다. 자신이 파리에 간 이유가 단순히 엠마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엠마는 구림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왔구나, 하고 문을 열어놓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자 익숙한 냄새가 났고 한국으로 떠난 그날이 마치 어제의 일인 양 선명해졌다고 구림은 말했다. 집안에는 엠마가 애지중지하던 골동품 서랍장, 생활비를 모아 함께 샀던 청소기, 엠마는 쓰지 않고 구림만 쓰던 롤빗 같은 것이 널려있었다. 이전에 그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다. 엠마는 두 번이나 이사했고 지금 사는 곳은 함께 살던 곳보다 더 낡은 집이었다. 엠마의 남자친구가 자리를 비켜주었고 엠마는 구림에게 홍차를 내주었다. 가출하듯 도망쳤던 한 시절이 귀가하는 것만 같았다고 구림은 말했다.
   엠마는 그날 저녁에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기로 했었대. 같이 살던 남자친구가 먼저 약속 장소로 향했고 엠마는 조금 늦게 준비를 마쳤어. 친구들에게 줄 쿠키를 챙기는데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어. 속보였지. 엠마가 사는 동네와 주변의 건물들이 기사에 오르내렸고, 부엌의 전기 포트에서는 물이 끓는 소리가 났대.
   세권은 구림에게 식탁에 앉아 홍차를 마실 때 엠마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구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건 세권 때문에 극장 구석 자리에서 영화를 즐겨보게 된 것처럼, 또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안경 닦이를 두 번 접어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에 넣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자면 엠마 모양의 흉터일 뿐이라고 했다.
   엠마는 몇 분 전 사이렌이 울려 무심코 닫은 창문가에 다가섰다. 거리는 비어있고 경찰차와 구급차만 바쁘게 이동했다. 엠마의 남자친구는 도시 곳곳이 막혀 있다고 방법을 찾아 집에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엠마의 남자친구는 이십 분이면 거뜬한 거리를 통제된 길들을 지나 한 시간 반 만에 돌아왔다. 미리 만나 있었던 두 명의 친구가 곧 도착했고 한 친구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뉴스를 보다가 바타클랑 극장에서 터지는 총성을 들었다. 이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크고 비현실적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게 정말 총소리 맞아? 되물었다. 그들은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다 지쳐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헤어졌다. 얘기를 마친 엠마가 홍차가 반쯤 남은 구림의 잔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다음날 구림은 호스텔에 묵으며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엠마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친구가 돌아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구림은 아침 일찍 바타클랑 극장이나 리퍼블릭 광장 같은 대규모 추모 장소를 찾았다. 예전에 살았던 집 주변과, 좋아하는 시인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종일 하나의 그림만 보곤 했던 박물관에 갔다. 도시 어느 곳에서나 파랑, 흰, 빨강 순으로 배치된 물품들이 추모에 동참 하고 동참하고 있었다. 주말 저녁 외출한 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영영 기다리거나 영영 기다리지 않으며, 남은 사람들은 집을 나서고 또 집으로 돌아갔다.
   세권은 섣부른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이제껏 잘 참아왔고 앞서 자신을 드러내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세권은 아직도 구림에게 본래 자신보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 하는 것이, 연애할 때와 다르지 않게 끌려다니는 것이,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도 열애의 감정에 이토록 사로잡혀 있는 것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엠마를 어떤 방식으로 질투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근처 카페에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반이 걸리는데,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이 정말로 한 달이면 충분할까. 더 천천히 더 조심해서 돌아오라고 말해야했던 것은 아닐까. 구림의 귀가하지 못했던 한 시기가 내내 이 집에 머물렀던 것처럼,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할 구림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구림의 완전한 귀가가 지금 구림이 앉아 있는 이 집의 식탁 앞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구림이 마침내 도착해야 하는 곳이 어딘지는 세권뿐 아니라 누구도 몰랐다. 세권은 단지 구림이 영영 곁에 남음으로써 그것이 귀가가 되어버리길 바라는 것이었다. 세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자주 자신의 이타심과 마주하고 그보다 더 많이 자신의 이기심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구림의 갑작스러운 출국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이기심이었다. 콘서트를 보고 돌아오던 날 구림은 그동안 귀가를 미뤄왔던 어느 한 시기의 자신을 기어코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것은 과거의 구림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구림이 선택할 수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한 귀가를, 오직 그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모습을 기다리며 사는지도 몰랐다.
   깁스한 왼쪽 다리에서 통증인지 간지러움인지 모를 감각이 피어올랐다. 손댈 수 없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온몸으로 퍼졌다. 세권은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 일제히 개화하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권은 어느 때보다 구림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또렷하다는 것을 의식했다. 왜 지금일까. 구림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난 뒤여서, 혹은 부상을 입어서, 그도 아니면 단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이 있을까. 감정이란 언제나 돌연변이였다.
   구림은 파리에 가는 바람에 미뤄두었던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전시회장을 찾았다. 영화를 다시 찍고 싶다고도 했다. 동호회를 알아보고 있으니 기회가 되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거라고, 세권이 응원해주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오래 집을 비우지는 않았다. 부상을 입은 세권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인 것 같았다. 세권은 구림이 현관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거실 소파에 앉아 지겹도록 보았다. 그러다 엠마가 어째서 그토록 태연히 구림을 맞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어떤 확신과는 달랐다. 다만 구림이 집을 나온 날의 일이 구림에게 열어젖힌 채 등지고 돌아선 문이라면, 엠마에겐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차를 끓이는 동안 내내 닫히지 않는 문이었다. 파리에 다녀온 후 구림은 엠마와 함께 살았던 그 집의 문을 완전히 닫았을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많은 문이 늘어선 긴 복도가 있을 것이었다. 거기에는 간혹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린 결정 때문에 영영 열린 채 방치되는 문들이 있다. 모든 문을 닫으려 하기엔 삶은 성실히 품을 팔아 버텨야 하는 사소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권은 엠마의 얼굴을 본 적 없었지만 한 달 만에 구림을 맞았던 자신의 얼굴이 어쩌면 엠마와 조금 닮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림은 매일 자기 전 세권에게 곱게 간 홍화씨 두 스푼을 먹였다. 뼈가 튼튼해진다고 했다. 침대에 누우면 심장보다 높이 다리를 들어야 붓기가 잘 빠진다며 쿠션을 받쳐주었다. 구림은 보험회사에 서류를 보내 병원비를 처리 했고, 아파트 관리소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사고에 관한 책임을 물었다. 세권은 그제야 자신이 어느 때보다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림이 오고 난 뒤로 끊임없이 잠이 쏟아졌다.
   깁스를 풀 때 의사는 세권에게 이제 조금씩 걷는 것이 좋다고 했다. 세권은 오전 시간에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를 걸었다.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잔디광장이 있는 곳까지 삼십 분쯤 걷다 보면 쥐가 나듯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산책로를 되돌아오는 길에는 두어 번 제자리에 멈춰 숨을 골라야 했다. 땀이 흘러 등에 티셔츠가 달라붙었다. 한밤중에 근육통을 느껴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세권이 뒤척거리면 구림도 설핏 잠에서 깨어 잠꼬대처럼 세권의 종아리를 주물렀다. 의사는 왼쪽 다리의 유연성이 이전처럼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을 거라 했다. 양반다리를 하면 왼쪽 허벅지 근육이 몹시 땅겼다. 다시 시시오도시가 있는 일식집에 가게 된다면 예전처럼 다다미 룸에 앉아 식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세권은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 구림과 살겠지만 이후 삶이 어떻게 흘러간다 해도 지난 한 달의 시간만큼은 영영 부러지고 기형이 된 채로 남을 것임을 알았다.
   구림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거실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다. 세권은 소파에 기대어 베란다 전면 창에서 드는 볕을 쬐었다. 완전히 건조된 빨래에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세권이 누리는 마지막 휴일이었다. 월요일이 되면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세권은 당분간 모든 길을 지나치게 주의하고 또 의심하면서 걸을 것이었다. 구림이 수건을 적당한 크기로 개어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적어도 구림이 곁에 있는 동안은 퍼즐을 들여다보거나 구림이 갔던 빨래방을 찾아가 한참 동안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고 세권은 생각했다.
   구림, 아홉 개의 숲이라는 의미의 이름이었다. 세권은 구림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다. 구림이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던 순간도 떠올렸다. 짓궂은 별명을 얻거나 놀림을 받곤 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꼭 이름의 의미부터 밝힌다고 했다. 숲, 하고 입술이 다물어지는 모습이 좋았다. 시옷을 발음할 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나는 것이, 피읖을 발음할 때 입술이 닫히며, 스스로 길을 열어주던 숲이 가지를 드리워 입구를 닫는 듯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세권과 구림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만났고 이태리 음식점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무슨 음식을 주문했는지 맛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림의 이름을 들었던 순간만큼은 선명했다. 세권은 그때 자신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등받이에 구부러진 못이 살짝 튀어나온 가게 바깥의 벤치 앞이었다.
   거실 깊숙이 햇볕이 들었고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 장 밑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몇 달 만에 베란다에 내놓은 유칼립투스 화분이 내내 가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권은 맨홀 속에서 하늘을 향해 반짝거리며 날아오르던 덩어리들을 떠올렸다. 시시오도시를 힘껏 내리쳐 참새처럼 쫓아야만 했던 것은 무엇일까. 결코 모든 성가신 것들을 날려 보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내일도 현관문을 열고 이 집으로 구림이 돌아온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세권은 거실 장 앞에 바짝 엎드려 바닥에 뺨을 대고 비정형 퍼즐 조각들을 꺼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오후가 되면 다시 화분을 들여 거실 장 옆에 바짝 붙여놓겠다고도 다짐했다. 구림은 퍼즐에 맞는 액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모든 조각이 맞춰지면 당연하다는 듯 완전히 허물어버릴 것이었다.

태가연

언제든 외국인을 만나면 그들의 모국어로 "수영장 몇 시에 문 닫아?”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전 세계 여름을 찾아다니며 좋은 수영장에 코를 담가야지. 다음날 도마 위 첫눈 같은 글을 쓸 거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