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초대의 매너
정차할 때마다 승객이 밀려들었다. 조심하면서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힘들이 사방에서 옥죄어 왔다. 나는 출입문 가까이 서 있다가 한 발짝씩 밀려났다. 밀려날 때마다 펭귄처럼 걸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팔뚝과 등짝들이 노골적으로 단단해졌다. 나는 내 큰 덩치와 두꺼운 패딩 외투가 미안했다. 코밑의 정수리에서 희미하게 쉰내가 났다.
퇴근 시간대 지하철 중에서 하필이면 가장 붐비는 걸 탄 것 같았다. 다음 역에서는 아예 승강장의 사람들이 탑승을 포기했다. 출입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리며 발끝으로 버티고 있을 사람들에게 미안해 숨도 함부로 쉴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여자가 진저리를 치며 내리더니 다시 줄을 섰고 줄 앞에 서 있던 어떤 남자가 재빨리 그녀가 빠진 자리에 올라탔다. 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열차를 타고 싶었다. 열렸던 출입문이 머쓱하게 닫히자 여자는 가까스로 재난을 피한 것처럼 이쪽으로 뒀던 시선을 거두었다.
도무지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심각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핏 보이는 화면들은 게임 아니면 채팅창이었다. 어떤 사람은 SNS의 콘텐츠들을 읽지도 않고 스크롤하면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다. 왼쪽의 가까운 귀에서는 소음과 같은 음악이 이어폰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열차의 그것을 오인한 걸 수도 있었다. 이 시간에 나를 찾을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내 엉덩이의 감각을 믿지 못했다. 오랫동안 폰을 엉덩이에 두고 살다 보면 환지통 같은 감각이 한 번씩 올 때도 있었다. 내 경우엔 왼쪽 볼기짝이 스마트폰이 없는데도 가끔 저릿저릿 거린다.
한 번 울리고 마는 것 같았으므로 전화가 아니라 생각했고 메시지나 푸시 알림이라면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포승줄에 묶인 죄수나 다름없어 외투를 들추고 엉덩이에서 폰을 꺼내기가 여의치 않았다.
한참 뒤 서울의 외곽으로 나갈 수 있는 환승역에 열차가 닿자 와르르 내렸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면서 비로소 몸이 자유로워진 게 실감 났다. 객실도 훨씬 환해진 듯했다. 남은 승객들은 저마다 자기의 마지막 업무를 마감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천장의 광고를 바라보거나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내 표정 역시 그럴 거라는 짐작으로 캄캄한 차창을 바라보니 역시 비슷한 얼굴 하나가 거기 있었다. 피곤한 기색에 더해 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카카오톡에서 메시지가 드문드문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발신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어떤 단체방에 초대되어 있었다. 언뜻 광고 같은 게 떠올랐는데 올라오고 있는 대화 내용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I?E] 7명 중 4명이 들어왔습니다. 입장 종료 20분 전.
[모카골드] 누구세요?
[천우진] 여기 무슨 방이죠? 혹시 아시는 분?
[모카골드] 저도 몰라요.
[천우진] 광고 같은 건가?
[모카골드] 나가지지도 않아요.
[천우진] 정말이네…… 뭐지?
맨 처음 안내문 같은 걸 올린 이상한 이름의 사람이 방을 개설한 것 같았고 두 사람이 번갈아 메시지를 올리는 중이었다. 나가지지가 않는다는 말에 나도 퇴장 버튼을 찾아 눌러봤는데 정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단순한 버그라고 생각했고 우선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이상한 이름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사람은 프로필이랄 것이 아예 없었고 모카골드나 천우진은 둘 다 사진이 걸려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정체를 파악하기엔 모자랐다. 모카골드는 정말 모카커피로 짐작되는 찻잔 사진이 전부였다. 천우진은 해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자전거와 나란히 선 뒷모습 등 주로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많았는데 얼굴은 드러내지 않기로 한 듯 풍경 사진 위주였다. 남의 신상 정보를 캐내려다 보니 저들도 내 정체를 알아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김동혁이라는 실명과 『변신』의 도입부 한 페이지가 프로필 사진으로 노출되고 있는 게 께름칙했다. 사진 속 본문에는 연필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방에 초대된 명단에 모카골드와 천우진 말고도 네 명이 더 있었다. 명단의 이름들 중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시포스와 벵에돔은 그 닉네임만으로 캐릭터를 그려볼 만했다. 나는 허세기 있는 철학도와 세상을 등지고 사는 낚시꾼을 생각했다. 안소미와 변구일은 실명 같았고 그걸로 성별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 이름 안소미와 여자 이름 변구일을 가정해보긴 했지만 내가 부모라도 자식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짓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카골드와 천우진의 대화에 달린 숫자는 메시지의 미확인자가 몇 명인지를 알려주었는데 둘 다 ‘3’이었다. 방에는 모두 여덟 명이 있으니 이상한 이름의 개설자나 이미 들어와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두 명은 모든 메시지를 확인한 게 맞고, 나머지 다섯 명 중 내가 읽었으므로 미확인 숫자는 ‘4’여야 했다. 그러니까 나 외에 어떤 한 명이 벌써 방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말없이 메시지들을 지켜만 보는 중인 셈이었다. 나는 잠자코 있는 그 한 명이 대화에 참여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내렸고 게이트를 빠져나왔는데도 관음증 환자의 메시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 중에 메시지의 미확인 숫자가 갑자기 ‘1’로 바뀌었다.
[¿▒?+I?E] 입장 종료 5분 전. 이상한 이름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자가 개설자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입장이 종료되면 뭘 하겠다는 건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모카골드] 들어와 계신 분들 눈팅만 하지 말고 말씀 좀요.
모카골드가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시시포스] 죄송합니다. 회의 중이었습니다. 저 사람 대화명은 뭐라고 읽어야 하죠? 아직 아무도 이 방의 정체를 모르시는 건가요?
시시포스는 마치 ‘회의 중’인 팀장처럼 말했다. 내 짐작대로 대화를 다 지켜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한 명은 시시포스였다. 모카골드와 천우진이 인사했고 나는 대화방을 들여다보는 데 정신이 쏠려 계단에서 몇 번인가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 뻔하며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왔다. 벵에돔과 안소미와 변구일이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미확인 숫자가 ‘1’이니 그사이 셋 중 둘이 더 입장해서 대화를 읽었고 하나는 아직 채팅창을 열어보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곧 내 원룸에 도착했고 눈길을 확 잡아채는 말풍선이 올라왔기 때문에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채팅창에 몰두했다.
[변구일] 아 씨발. 어떤 미친 새끼가 장난치는 거야?
변구일의 프로필 사진에는 살굿빛이 옅게 도는 도화지에 푸른색 선으로만 이뤄진 장미 한 송이가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장미 그림 때문에 나는 그가 냅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등장할 인물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살갗에 새긴 문신이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시포스] 지금 여기 모두가 당황스럽습니다. 서로를 위해 말투에 신경 씁시다.
나는 ‘말투’가 아니라 글투나 문투가 맞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싶었다. 첫인사를 사소한 시비로 시작할 필요는 없었기에 더 지켜보기로 했다.
[변구일] 니미 좆도. 웬 꼰대질? 시시포스? 정력제 이름임? 불만 있으면 지금 응암역 2번 출구로 오든지. 쫄리면 정력제 더 먹고 딸이나 잡으시고. 졸라 포스 있게.
변구일의 차진 욕설에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나 역시 어딘가 콧대 높아 보이는 시시포스의 ‘말투’가 거슬리던 참이었다. 게다가 변구일이 ‘시시포스’에 force를 연결하며 공격을 퍼부을 땐 나도 모르게 콧물을 흘리며 웃어버렸다.
[안소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소미가 처음으로 메시지를 올렸다. 나처럼 변구일의 언변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틈을 주지 않고 안소미의 메시지가 한 번 더 올라왔다.
[안소미] 개드립 완전 쩐다.
안소미의 프로필사진에는 흔히들 ‘못난이 인형’이라고 부르는 주근깨투성이의 꼬마 인형 셋이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모카골드] 김동혁 씬가요? 벵에돔이신가요? 둘 중 한 분은 지금 들어와 계신데, 말씀 좀 하시죠?
모카골드의 글이 날카롭게 내 눈을 그었다. 나는 귓불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더듬더듬 글을 적기 시작했다.
“접니다. 어리둥절해서 잠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자마자 변구일이 대꾸했다.
[변구일] 동혁이 이 새끼, 이 변태 같은 새끼. 너 이 방 만든 새끼랑 한패지?
나는 변구일이 더한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를 방의 개설자로 몰아세우는 것까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들은 도움 안 되니까 다물고 있어. 어른들이 알아서 할게.”
[변구일] 씨발 뭐래? 돌았냐? 너도 당장 응암역으로 와!
[안소미] ㅋㅋㅋㅋㅋㅋ 변구일 1패.
[변구일] 이 미친년은 왜 또 지랄이야. 일단 너부터 와. 요새 좀 굶었는데 함 해야겠다.
[안소미] 아, 병신 새끼 졸라 찌질해. 가서 니 엄마한테나 해달라 해.
변구일과 안소미가 좀 더 옥신각신하는 중에 안내 메시지가 새로 올라왔다. 한창 떠들던 둘도 조용해졌다.
[¿▒?+I?E] 입장 종료 1분 전.
아직 벵에돔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일종의 독촉과도 같은 안내였고 ‘1분’이라는 글자가 상당한 긴장감을 주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며 초를 세었다. 나만 숨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도 메시지를 올리지 않았다. 드디어 1분이 다 흘렀고 안내문 한 줄이 창 가운데 떴다. 안내자가 올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공지사항처럼 보였다.
“벵에돔님이 나가셨습니다.”
[천우진] 어? 나갈 수 있나 본데요?
[시시포스] 나간 게 아니라 쫓겨난 거죠.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요.
[안소미] 강퇴? 헐…….
[변구일] 소미야, 오빠 꺼 보면 맘이 달라질걸?
[안소미] 뭐래, 미친 새끼.
[¿▒?+I?E] (사진) 홍광열(벵에돔).
[¿▒?+I?E] 게임 시작 10분 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벵에돔의 퇴장에 대해 멘트를 치려다가 개설자가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잠시 미뤘다. 사진은 오십 대 남자로 짐작되었는데 왼쪽 이마가 무언가에 지독히 강하게 맞은 것처럼 깊이 함몰된 채 얼굴 전체에 피가 흥건했다. 죽은 게 분명해 보였고 가해자나 수사관이 아니라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도 사진이거니와 실명인 듯 달려 있는 ‘홍광열’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건 개설자가 이 방에 초대된 사람들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놀랐는지 아무 말이 없다가 드문드문 하나씩 메시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변구일] 뭐야? 씨발. 재수 없게.
[안소미] 아까부터 궁금한데, 대화명 저거 왜 저럼? 졸라 소름 돋아.
[모카골드] 장난처럼 안 보이는데, 저만 그런가요?
[천우진] 벵에돔이 죽었다는 얘기 같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시시포스] 저 이상한 대화명이 개설자고요? 방에 입장해야 할 시간에 안 와서 죽인 거다? 그러니까, 어디서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시간 안에 안 들어오니까 죽여버렸다? 무슨 영화 찍습니까? 제발 애들같이 이상한 장난에 놀아나지 맙시다.
[천우진] 게임 시작 10분 전은 뭘까요?
[시시포스]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켜보는 수밖에요.
나도 이번만은 시시포스의 말에 동의했다. 메신저 앱의 업체에서 무리한 프로모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상한 대화명의 프로필은 분명 비어 있었다. 보통의 무설정 프로필처럼 증명사진 모양의 실루엣이 전부였다. 짧든 길든 머리 모양이나마 있을 법도 한데 실루엣은 아예 민머리였다. 그가 벵에돔의 것이라고 올린 시체 사진 때문인지 아니면 깨진 글자로 된 대화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설정 프로필과 더불어 제법 으스스한 조합을 만들어내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로모션을 위한 실험일 테고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이해해야 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따져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모두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시시포스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어 올리기 위해 고심하며 글자를 찍고 있는데 갑자기 대화창이 분주해졌다.
[¿▒?+I?E] (사진) 김동혁
[¿▒?+I?E] (사진) 변구일
[¿▒?+I?E] (사진) 안소미
[¿▒?+I?E] (사진) 정민중(시시포스)
[¿▒?+I?E] (사진) 천우진
[¿▒?+I?E] (사진) 최성미(모카골드)
[¿▒?+I?E] 외부 지원은 일체 불허합니다. 게임 시작 5분 전.
이목구비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 맨 먼저 올라온 내 사진의 경우 페이스북 타임라인 어느 곳에 처박혀 있는 술자리 사진 중에서 내 부분만 잘라낸 것이었다. 술자리를 자주 갖는 편이 아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연말에 모처럼 나간 큰 모임이었다. 대학 때 활동했던 문예 동아리의 멤버들 중 예닐곱 명이 1년에 한 번씩 송년회나 신년회랍시고 모이는 자리였는데 마음을 뒀던 후배가 늘 참석하기에 공지가 뜨면 무조건 나갔다. 저 때는 그 후배의 옆자리에 앉게 되어서 내 표정이 좋았다. 그러니까 저 사진의 왼쪽에서 후배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이다. 아직도 후배에게서 건너오던 좋은 냄새가 생각난다.
한참 동안 아무도 메시지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싸늘해진 등줄기가 데워질 시간이 필요했다. 변구일이라면 또 경망스럽게 설칠 법도 한데 그도 조용했다. 나는 대화창이 막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한 마디 적어봤다.
“제 페북에 있는 사진입니다. 친구 공개로만 해놓은 건데……”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메시지가 아무렇지 않게 올라갔다. 내가 메시지를 올리자마자 봇물 터지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카골드와 시시포스는 실명까지 드러난 데 경악했고 안소미는 또 소름이 돋는다며 울먹였고 변구일은 더 잘 나온 사진이 있으니 찾아 올리겠다고 나댔으며 천우진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거듭 물었다. 사진의 모카골드는 선생님 같았고 시시포스는 변호사 같았으며 안소미는 아이돌처럼 예쁘장했고 천우진은 밴드부 기타리스트인가 싶게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다들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었고 대개 내가 상상했던 것과 일치했는데 변구일은 좀 의외였다. 그는 아주 깨끗하고 곱상하게 생긴 데다 어딘가 부티까지 나는 미남자였다.
[안소미] 근데 변구일 실물임? 몇 살?
[변구일] 오프에서 보자. 좌표 찍을게.
[천우진] 안 되겠어요. 저 정말 신고하러 갑니다.
[변구일] 경찰한테? 정신병자 취급받게?
[천우진] 지금 저희 동네 지구대 근처에요. 집에 가다가 발길 돌렸습니다. 제가 해결하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스마트폰을 들고 지구대에 들어가는 한 남자가 눈앞에 그려졌다. 그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해낼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군가가 나섰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나는 만약 경찰이 나를 부른다면 뭐라고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지 생각해봤다. 변구일이나 안소미, 모카골드와 시시포스도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스마트폰 화면 중앙에 뜬 한 줄 때문에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천우진님이 나가셨습니다.
벵에돔이 쫓겨날 때와 같았다. 아직 사진은 올라오지 않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마조마하던 중에 역시 곧바로 사진이 올라왔다.
[¿▒?+I?E] (사진) 천우진
먼저 공개된 사진과 다르게 머리를 짧게 쳤고 밝은 회색 코트에 검은색 목도리를 두른 정장 차림이라 반듯한 회사원처럼 보였다. 밴드부 기타리스트가 어느새 회사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으슥하고 더러운 골목길 구석에서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바닥에 앉아 고개를 늘어뜨린 모습이었고, 그 머리에는 단도 하나가 옆으로 꽂혀 있었다. 크고 묵직해 보이는 카키색 손잡이가 달린 게 꼭 군용처럼 보였다. 벽에 기대어 앉은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진이었다. 마치 영화 스틸컷과 같은 그 사진만으로는 어떻게 봐도 희생자가 천우진이라고 할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앞서 벵에돔의 경우처럼 불길한 상상을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변구일] 지랄하네. 신고한다니까 죽였다고? 어디서 약을 팔어. 나도 신고할 테니까 죽여 봐 이 새끼야.
변구일만 한마디 던져놨을 뿐 다들 잠자코 있었다. 신고하겠다곤 했지만 나 같아도 꼼짝 않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메시지가 떴다.
[¿▒?+I?E] 게임 시작 3분 전. 초대하고 퇴장 혹은 계속 참여.
안내를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먹통이던 초대 버튼이 활성화된 채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시포스] 제가 초대했다는 건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시포스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1명 초대 대기 중.”
[안소미] 아! 초대해도 모르게 해주는 거임? 오케!
“안소미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2명 초대 대기 중.”
[변구일] 썅년, 인사도 없이 가냐.
“변구일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3명 초대 대기 중.”
시간차는 있었지만 세 명이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아직 그들이 누굴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각자의 연락처 목록에서 뽑힌 초대자들은 곧 영문도 모른 채 불려와 게임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 초대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나도 연락처를 뒤적였다. 꼴 보기 싫은 인간 하나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와 특별한 원한은 없었다. 그저 회의를 자주 소집하는 회사의 팀장이었고 자신의 일을 잘하고자 하는 성실한 인간일 뿐이었다. 채근하고 독촉하고 간섭하는 모든 일은 팀장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불과하단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최근 내 우울의 절대 비중을 그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대화명을 선택했고 초청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문득 나 역시 누군가에게 초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카골드가 아직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도 거슬렸다. 여러 일들로 미루어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에게 어떤 특전이 있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벵에돔을 죽이기 전엔 입장 종료 시간을 알렸고 천우진을 죽이기 전에는 외부의 지원을 구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으니 방의 규칙이란 게 없다고는 못했다. 하지만 명징하지도 않았다. 나가자마자 살해당하는 건 아닐까? 내가 읽어내지 못한 규칙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한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자 선뜻 나갈 수가 없었다. 모카골드에게 말을 걸어봤다.
“모카골드님은 안 나가시나요?”
[모카골드] 그냥 나가세요. 다들 저만 살겠다는군요. 어떻게들 그럴 수 있는지…… 이게 몇 번째야.
나는 지금까지의 모카골드와는 다른 톤의 메시지를 잠시 읽어보다 무거운 것으로 정수리를 한 방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게 몇 번째야? 그렇다면 모카골드는 양심상 지인을 이 방에 잡아넣을 수 없어서 계속 남아 있었던 거고 그러므로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나가기 전에 모카골드에게 확인할 것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메시지를 찍어 날렸다.
“절 초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카골드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모카골드] 저렇게 대기 상태로 있다가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에 누가 누굴 초대하고 나갔는지는 몰라요.
“이전 방에 있던 사람들 대화명을 알려주면 되잖아요. 그 사람들 중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겠죠.”
[모카골드] 경고가 있었어요. 말할 수 없어요.
허탈해졌다. 경고가 있었단 말에 앞서 살해된 멤버들의 사진이 떠올라 더 추궁할 수도 없었다. 1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안에 결정해야 했다. 팀장을 불러들일 것인지 내가 남아서 게임에 참여할 것인지. 나는 다시 연락처 화면을 열어 팀장을 선택해놓고 초대 버튼을 노려봤다. 내가 결정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30초 남짓 되는 것 같았다. 안면부가 함몰된 벵에돔과 정수리에 단도가 꽂힌 천우진의 사진에 팀장과 내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퇴근 시간대 지하철 중에서 하필이면 가장 붐비는 걸 탄 것 같았다. 다음 역에서는 아예 승강장의 사람들이 탑승을 포기했다. 출입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리며 발끝으로 버티고 있을 사람들에게 미안해 숨도 함부로 쉴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여자가 진저리를 치며 내리더니 다시 줄을 섰고 줄 앞에 서 있던 어떤 남자가 재빨리 그녀가 빠진 자리에 올라탔다. 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열차를 타고 싶었다. 열렸던 출입문이 머쓱하게 닫히자 여자는 가까스로 재난을 피한 것처럼 이쪽으로 뒀던 시선을 거두었다.
도무지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심각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핏 보이는 화면들은 게임 아니면 채팅창이었다. 어떤 사람은 SNS의 콘텐츠들을 읽지도 않고 스크롤하면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다. 왼쪽의 가까운 귀에서는 소음과 같은 음악이 이어폰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열차의 그것을 오인한 걸 수도 있었다. 이 시간에 나를 찾을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내 엉덩이의 감각을 믿지 못했다. 오랫동안 폰을 엉덩이에 두고 살다 보면 환지통 같은 감각이 한 번씩 올 때도 있었다. 내 경우엔 왼쪽 볼기짝이 스마트폰이 없는데도 가끔 저릿저릿 거린다.
한 번 울리고 마는 것 같았으므로 전화가 아니라 생각했고 메시지나 푸시 알림이라면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포승줄에 묶인 죄수나 다름없어 외투를 들추고 엉덩이에서 폰을 꺼내기가 여의치 않았다.
한참 뒤 서울의 외곽으로 나갈 수 있는 환승역에 열차가 닿자 와르르 내렸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면서 비로소 몸이 자유로워진 게 실감 났다. 객실도 훨씬 환해진 듯했다. 남은 승객들은 저마다 자기의 마지막 업무를 마감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천장의 광고를 바라보거나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내 표정 역시 그럴 거라는 짐작으로 캄캄한 차창을 바라보니 역시 비슷한 얼굴 하나가 거기 있었다. 피곤한 기색에 더해 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카카오톡에서 메시지가 드문드문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발신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어떤 단체방에 초대되어 있었다. 언뜻 광고 같은 게 떠올랐는데 올라오고 있는 대화 내용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I?E] 7명 중 4명이 들어왔습니다. 입장 종료 20분 전.
[모카골드] 누구세요?
[천우진] 여기 무슨 방이죠? 혹시 아시는 분?
[모카골드] 저도 몰라요.
[천우진] 광고 같은 건가?
[모카골드] 나가지지도 않아요.
[천우진] 정말이네…… 뭐지?
맨 처음 안내문 같은 걸 올린 이상한 이름의 사람이 방을 개설한 것 같았고 두 사람이 번갈아 메시지를 올리는 중이었다. 나가지지가 않는다는 말에 나도 퇴장 버튼을 찾아 눌러봤는데 정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단순한 버그라고 생각했고 우선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이상한 이름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사람은 프로필이랄 것이 아예 없었고 모카골드나 천우진은 둘 다 사진이 걸려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정체를 파악하기엔 모자랐다. 모카골드는 정말 모카커피로 짐작되는 찻잔 사진이 전부였다. 천우진은 해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자전거와 나란히 선 뒷모습 등 주로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많았는데 얼굴은 드러내지 않기로 한 듯 풍경 사진 위주였다. 남의 신상 정보를 캐내려다 보니 저들도 내 정체를 알아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김동혁이라는 실명과 『변신』의 도입부 한 페이지가 프로필 사진으로 노출되고 있는 게 께름칙했다. 사진 속 본문에는 연필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방에 초대된 명단에 모카골드와 천우진 말고도 네 명이 더 있었다. 명단의 이름들 중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시포스와 벵에돔은 그 닉네임만으로 캐릭터를 그려볼 만했다. 나는 허세기 있는 철학도와 세상을 등지고 사는 낚시꾼을 생각했다. 안소미와 변구일은 실명 같았고 그걸로 성별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 이름 안소미와 여자 이름 변구일을 가정해보긴 했지만 내가 부모라도 자식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짓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카골드와 천우진의 대화에 달린 숫자는 메시지의 미확인자가 몇 명인지를 알려주었는데 둘 다 ‘3’이었다. 방에는 모두 여덟 명이 있으니 이상한 이름의 개설자나 이미 들어와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두 명은 모든 메시지를 확인한 게 맞고, 나머지 다섯 명 중 내가 읽었으므로 미확인 숫자는 ‘4’여야 했다. 그러니까 나 외에 어떤 한 명이 벌써 방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말없이 메시지들을 지켜만 보는 중인 셈이었다. 나는 잠자코 있는 그 한 명이 대화에 참여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내렸고 게이트를 빠져나왔는데도 관음증 환자의 메시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 중에 메시지의 미확인 숫자가 갑자기 ‘1’로 바뀌었다.
[¿▒?+I?E] 입장 종료 5분 전. 이상한 이름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자가 개설자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입장이 종료되면 뭘 하겠다는 건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모카골드] 들어와 계신 분들 눈팅만 하지 말고 말씀 좀요.
모카골드가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시시포스] 죄송합니다. 회의 중이었습니다. 저 사람 대화명은 뭐라고 읽어야 하죠? 아직 아무도 이 방의 정체를 모르시는 건가요?
시시포스는 마치 ‘회의 중’인 팀장처럼 말했다. 내 짐작대로 대화를 다 지켜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한 명은 시시포스였다. 모카골드와 천우진이 인사했고 나는 대화방을 들여다보는 데 정신이 쏠려 계단에서 몇 번인가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 뻔하며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왔다. 벵에돔과 안소미와 변구일이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미확인 숫자가 ‘1’이니 그사이 셋 중 둘이 더 입장해서 대화를 읽었고 하나는 아직 채팅창을 열어보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곧 내 원룸에 도착했고 눈길을 확 잡아채는 말풍선이 올라왔기 때문에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채팅창에 몰두했다.
[변구일] 아 씨발. 어떤 미친 새끼가 장난치는 거야?
변구일의 프로필 사진에는 살굿빛이 옅게 도는 도화지에 푸른색 선으로만 이뤄진 장미 한 송이가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장미 그림 때문에 나는 그가 냅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등장할 인물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살갗에 새긴 문신이란 게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시포스] 지금 여기 모두가 당황스럽습니다. 서로를 위해 말투에 신경 씁시다.
나는 ‘말투’가 아니라 글투나 문투가 맞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싶었다. 첫인사를 사소한 시비로 시작할 필요는 없었기에 더 지켜보기로 했다.
[변구일] 니미 좆도. 웬 꼰대질? 시시포스? 정력제 이름임? 불만 있으면 지금 응암역 2번 출구로 오든지. 쫄리면 정력제 더 먹고 딸이나 잡으시고. 졸라 포스 있게.
변구일의 차진 욕설에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나 역시 어딘가 콧대 높아 보이는 시시포스의 ‘말투’가 거슬리던 참이었다. 게다가 변구일이 ‘시시포스’에 force를 연결하며 공격을 퍼부을 땐 나도 모르게 콧물을 흘리며 웃어버렸다.
[안소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소미가 처음으로 메시지를 올렸다. 나처럼 변구일의 언변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틈을 주지 않고 안소미의 메시지가 한 번 더 올라왔다.
[안소미] 개드립 완전 쩐다.
안소미의 프로필사진에는 흔히들 ‘못난이 인형’이라고 부르는 주근깨투성이의 꼬마 인형 셋이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모카골드] 김동혁 씬가요? 벵에돔이신가요? 둘 중 한 분은 지금 들어와 계신데, 말씀 좀 하시죠?
모카골드의 글이 날카롭게 내 눈을 그었다. 나는 귓불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더듬더듬 글을 적기 시작했다.
“접니다. 어리둥절해서 잠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자마자 변구일이 대꾸했다.
[변구일] 동혁이 이 새끼, 이 변태 같은 새끼. 너 이 방 만든 새끼랑 한패지?
나는 변구일이 더한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를 방의 개설자로 몰아세우는 것까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들은 도움 안 되니까 다물고 있어. 어른들이 알아서 할게.”
[변구일] 씨발 뭐래? 돌았냐? 너도 당장 응암역으로 와!
[안소미] ㅋㅋㅋㅋㅋㅋ 변구일 1패.
[변구일] 이 미친년은 왜 또 지랄이야. 일단 너부터 와. 요새 좀 굶었는데 함 해야겠다.
[안소미] 아, 병신 새끼 졸라 찌질해. 가서 니 엄마한테나 해달라 해.
변구일과 안소미가 좀 더 옥신각신하는 중에 안내 메시지가 새로 올라왔다. 한창 떠들던 둘도 조용해졌다.
[¿▒?+I?E] 입장 종료 1분 전.
아직 벵에돔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일종의 독촉과도 같은 안내였고 ‘1분’이라는 글자가 상당한 긴장감을 주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며 초를 세었다. 나만 숨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도 메시지를 올리지 않았다. 드디어 1분이 다 흘렀고 안내문 한 줄이 창 가운데 떴다. 안내자가 올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공지사항처럼 보였다.
“벵에돔님이 나가셨습니다.”
[천우진] 어? 나갈 수 있나 본데요?
[시시포스] 나간 게 아니라 쫓겨난 거죠.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요.
[안소미] 강퇴? 헐…….
[변구일] 소미야, 오빠 꺼 보면 맘이 달라질걸?
[안소미] 뭐래, 미친 새끼.
[¿▒?+I?E] (사진) 홍광열(벵에돔).
[¿▒?+I?E] 게임 시작 10분 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벵에돔의 퇴장에 대해 멘트를 치려다가 개설자가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잠시 미뤘다. 사진은 오십 대 남자로 짐작되었는데 왼쪽 이마가 무언가에 지독히 강하게 맞은 것처럼 깊이 함몰된 채 얼굴 전체에 피가 흥건했다. 죽은 게 분명해 보였고 가해자나 수사관이 아니라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도 사진이거니와 실명인 듯 달려 있는 ‘홍광열’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건 개설자가 이 방에 초대된 사람들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놀랐는지 아무 말이 없다가 드문드문 하나씩 메시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변구일] 뭐야? 씨발. 재수 없게.
[안소미] 아까부터 궁금한데, 대화명 저거 왜 저럼? 졸라 소름 돋아.
[모카골드] 장난처럼 안 보이는데, 저만 그런가요?
[천우진] 벵에돔이 죽었다는 얘기 같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시시포스] 저 이상한 대화명이 개설자고요? 방에 입장해야 할 시간에 안 와서 죽인 거다? 그러니까, 어디서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시간 안에 안 들어오니까 죽여버렸다? 무슨 영화 찍습니까? 제발 애들같이 이상한 장난에 놀아나지 맙시다.
[천우진] 게임 시작 10분 전은 뭘까요?
[시시포스]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켜보는 수밖에요.
나도 이번만은 시시포스의 말에 동의했다. 메신저 앱의 업체에서 무리한 프로모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상한 대화명의 프로필은 분명 비어 있었다. 보통의 무설정 프로필처럼 증명사진 모양의 실루엣이 전부였다. 짧든 길든 머리 모양이나마 있을 법도 한데 실루엣은 아예 민머리였다. 그가 벵에돔의 것이라고 올린 시체 사진 때문인지 아니면 깨진 글자로 된 대화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설정 프로필과 더불어 제법 으스스한 조합을 만들어내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프로모션을 위한 실험일 테고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이해해야 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따져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모두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시시포스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어 올리기 위해 고심하며 글자를 찍고 있는데 갑자기 대화창이 분주해졌다.
[¿▒?+I?E] (사진) 김동혁
[¿▒?+I?E] (사진) 변구일
[¿▒?+I?E] (사진) 안소미
[¿▒?+I?E] (사진) 정민중(시시포스)
[¿▒?+I?E] (사진) 천우진
[¿▒?+I?E] (사진) 최성미(모카골드)
[¿▒?+I?E] 외부 지원은 일체 불허합니다. 게임 시작 5분 전.
이목구비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 맨 먼저 올라온 내 사진의 경우 페이스북 타임라인 어느 곳에 처박혀 있는 술자리 사진 중에서 내 부분만 잘라낸 것이었다. 술자리를 자주 갖는 편이 아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연말에 모처럼 나간 큰 모임이었다. 대학 때 활동했던 문예 동아리의 멤버들 중 예닐곱 명이 1년에 한 번씩 송년회나 신년회랍시고 모이는 자리였는데 마음을 뒀던 후배가 늘 참석하기에 공지가 뜨면 무조건 나갔다. 저 때는 그 후배의 옆자리에 앉게 되어서 내 표정이 좋았다. 그러니까 저 사진의 왼쪽에서 후배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이다. 아직도 후배에게서 건너오던 좋은 냄새가 생각난다.
한참 동안 아무도 메시지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싸늘해진 등줄기가 데워질 시간이 필요했다. 변구일이라면 또 경망스럽게 설칠 법도 한데 그도 조용했다. 나는 대화창이 막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한 마디 적어봤다.
“제 페북에 있는 사진입니다. 친구 공개로만 해놓은 건데……”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메시지가 아무렇지 않게 올라갔다. 내가 메시지를 올리자마자 봇물 터지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카골드와 시시포스는 실명까지 드러난 데 경악했고 안소미는 또 소름이 돋는다며 울먹였고 변구일은 더 잘 나온 사진이 있으니 찾아 올리겠다고 나댔으며 천우진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거듭 물었다. 사진의 모카골드는 선생님 같았고 시시포스는 변호사 같았으며 안소미는 아이돌처럼 예쁘장했고 천우진은 밴드부 기타리스트인가 싶게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다들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었고 대개 내가 상상했던 것과 일치했는데 변구일은 좀 의외였다. 그는 아주 깨끗하고 곱상하게 생긴 데다 어딘가 부티까지 나는 미남자였다.
[안소미] 근데 변구일 실물임? 몇 살?
[변구일] 오프에서 보자. 좌표 찍을게.
[천우진] 안 되겠어요. 저 정말 신고하러 갑니다.
[변구일] 경찰한테? 정신병자 취급받게?
[천우진] 지금 저희 동네 지구대 근처에요. 집에 가다가 발길 돌렸습니다. 제가 해결하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스마트폰을 들고 지구대에 들어가는 한 남자가 눈앞에 그려졌다. 그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해낼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군가가 나섰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나는 만약 경찰이 나를 부른다면 뭐라고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지 생각해봤다. 변구일이나 안소미, 모카골드와 시시포스도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스마트폰 화면 중앙에 뜬 한 줄 때문에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천우진님이 나가셨습니다.
벵에돔이 쫓겨날 때와 같았다. 아직 사진은 올라오지 않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마조마하던 중에 역시 곧바로 사진이 올라왔다.
[¿▒?+I?E] (사진) 천우진
먼저 공개된 사진과 다르게 머리를 짧게 쳤고 밝은 회색 코트에 검은색 목도리를 두른 정장 차림이라 반듯한 회사원처럼 보였다. 밴드부 기타리스트가 어느새 회사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으슥하고 더러운 골목길 구석에서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바닥에 앉아 고개를 늘어뜨린 모습이었고, 그 머리에는 단도 하나가 옆으로 꽂혀 있었다. 크고 묵직해 보이는 카키색 손잡이가 달린 게 꼭 군용처럼 보였다. 벽에 기대어 앉은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진이었다. 마치 영화 스틸컷과 같은 그 사진만으로는 어떻게 봐도 희생자가 천우진이라고 할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앞서 벵에돔의 경우처럼 불길한 상상을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변구일] 지랄하네. 신고한다니까 죽였다고? 어디서 약을 팔어. 나도 신고할 테니까 죽여 봐 이 새끼야.
변구일만 한마디 던져놨을 뿐 다들 잠자코 있었다. 신고하겠다곤 했지만 나 같아도 꼼짝 않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메시지가 떴다.
[¿▒?+I?E] 게임 시작 3분 전. 초대하고 퇴장 혹은 계속 참여.
안내를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먹통이던 초대 버튼이 활성화된 채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시포스] 제가 초대했다는 건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시포스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1명 초대 대기 중.”
[안소미] 아! 초대해도 모르게 해주는 거임? 오케!
“안소미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2명 초대 대기 중.”
[변구일] 썅년, 인사도 없이 가냐.
“변구일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3명 초대 대기 중.”
시간차는 있었지만 세 명이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아직 그들이 누굴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각자의 연락처 목록에서 뽑힌 초대자들은 곧 영문도 모른 채 불려와 게임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 초대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나도 연락처를 뒤적였다. 꼴 보기 싫은 인간 하나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와 특별한 원한은 없었다. 그저 회의를 자주 소집하는 회사의 팀장이었고 자신의 일을 잘하고자 하는 성실한 인간일 뿐이었다. 채근하고 독촉하고 간섭하는 모든 일은 팀장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불과하단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최근 내 우울의 절대 비중을 그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대화명을 선택했고 초청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문득 나 역시 누군가에게 초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카골드가 아직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도 거슬렸다. 여러 일들로 미루어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에게 어떤 특전이 있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벵에돔을 죽이기 전엔 입장 종료 시간을 알렸고 천우진을 죽이기 전에는 외부의 지원을 구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으니 방의 규칙이란 게 없다고는 못했다. 하지만 명징하지도 않았다. 나가자마자 살해당하는 건 아닐까? 내가 읽어내지 못한 규칙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한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자 선뜻 나갈 수가 없었다. 모카골드에게 말을 걸어봤다.
“모카골드님은 안 나가시나요?”
[모카골드] 그냥 나가세요. 다들 저만 살겠다는군요. 어떻게들 그럴 수 있는지…… 이게 몇 번째야.
나는 지금까지의 모카골드와는 다른 톤의 메시지를 잠시 읽어보다 무거운 것으로 정수리를 한 방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게 몇 번째야? 그렇다면 모카골드는 양심상 지인을 이 방에 잡아넣을 수 없어서 계속 남아 있었던 거고 그러므로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나가기 전에 모카골드에게 확인할 것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메시지를 찍어 날렸다.
“절 초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카골드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모카골드] 저렇게 대기 상태로 있다가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에 누가 누굴 초대하고 나갔는지는 몰라요.
“이전 방에 있던 사람들 대화명을 알려주면 되잖아요. 그 사람들 중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겠죠.”
[모카골드] 경고가 있었어요. 말할 수 없어요.
허탈해졌다. 경고가 있었단 말에 앞서 살해된 멤버들의 사진이 떠올라 더 추궁할 수도 없었다. 1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안에 결정해야 했다. 팀장을 불러들일 것인지 내가 남아서 게임에 참여할 것인지. 나는 다시 연락처 화면을 열어 팀장을 선택해놓고 초대 버튼을 노려봤다. 내가 결정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30초 남짓 되는 것 같았다. 안면부가 함몰된 벵에돔과 정수리에 단도가 꽂힌 천우진의 사진에 팀장과 내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김덕희
시장의 오렌지, 쌀국숫집의 레몬 조각, 마트의 딸기, 선물 받은 렌틸콩, 과일 트럭의 방울토마토에서 씨를 발라내 싹틔웠고 아직 잘 크고 있다. 연화바위솔 한 조각을 옮겨와서는 익사시킬 뻔했다가 살렸다. 지금은 블루베리와 체리의 싹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이다. 어쩐지 이 둘은 실패인 것 같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