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오후의 컵 / 컨테이너 박스 교실로 애들이 달려간다
오후의 컵
나는 타박합니다
컵이 다시 시작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소파 위에는 컵이 놓여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고
안에 담긴 걸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빛과 또 다른 빛과
다른 빛 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컵에 담겨 있는 것을 상정하는 동안
고양이가 소파 위로 올라갑니다
소파에 발도장을 꾹꾹 찍어댑니다
컵이 아직은 쓰러져지지 않아 괜찮습니다
쓰러지더라도 괜찮습니다
얼음만 담겨 있다고 상정하고
이내 안심합니다
고양이는 울어댑니다
고양이는 오르골일지도 모릅니다
서서히 풀리는 태엽처럼
앞발을 움직입니다
나는 앞과 뒤
다시는 시작할 수 없는 정의
그리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떤 계절에 대해
어떤 계절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에 대해
이어지지 않던 선배의 말에 대해
젖어있는 수건에 대해
쉽게 잠식되어 버린 경계에 대해
뇌가 작아 잠을 자지 못하는군요
파충류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불면1)
불면은 자주 흔들립니다
액체는 굳어가고
굳어가는 액체를 닮은 파충류
파충류의 눈알이 언덕을 굴러갑니다
언덕 위 낮은 구멍마다 구슬이 하나씩 맺힙니다
액체인지 고체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차가운 언덕 위에서 쉽게 녹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괜찮지 않습니다
굳이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다시 컵 속에 담기고
담긴 채로 굳어가도
달라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삶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잠의 경계에서
확장되는
컨테이너 박스 교실로 애들이 달려간다
어린 애들이 달려간다
너는 어린애들이다
어린애들보다 조금 더 어린애들이다
애들은 자리에 앉는다
선생님 산책 다녀올게요
이곳의 공기를 견딜 수 없네요
컨테이너 박스 교실에서 손을 들고
당당히 말하는 너는 정말 어린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실내화를 신고 5 대 5로 풋살을 하다가
실내화 주머니를 까맣게 잊을 줄은 몰랐다
운동장 한구석에서
인조잔디에 물을 주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인조잔디가 무럭무럭 자라
운동장을 채운 것은
다음날 받아쓰기 시간의 일이다
풋살장에서 열심히 달려온 너에게 우리는
애초에 네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
애초에 네가 우리 반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
수군거렸다
울지 않던 네가 웃을 때까지
선생님이 플라스틱 자를 부러뜨릴 때까지
네가 빨간 스웨터에서 담쟁이 넝쿨을 걷어낼 때까지
양철 연통 아래
석유 난로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는
박다래
여름을 좋아하며, 여름이 지나갈 무렵 담장에 세워진 흰 서프보드를 좋아한다. 가끔 따듯하고 자주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8/05/29
6호
- 1
- 천명관의 「파충류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