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리의 모든 에이
나는 스티비 원더가 통치하던 나라의 일원이 되어본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내 인생은 한동안 난항을 겪었다. 그 나라에서 살아보는 일이 어떤 경험보다도 내 마음을 강렬하게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스티비 원더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기능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지역에 따라 빙하기, 전염병, 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으나 재앙을 종식시킨 사람은 모두 스티비 원더로 같았다. 특이한 점은 스티비 원더는 이미 오래전에 그곳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정작 농담을 하는 데 그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었다.
여름을 돌아오게 만드는 건 겨우내 쌓인 햇빛에 대한 열망이다. 그 문장은 스티비 원더의 노랫말 중 하나였다.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른들이라면 모두 그 말을 좋아했다. 그 부분을 읊기 위해 틈만 나면 여름이 돌아오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는 쪽은 대개 어린아이거나 그 나라를 방문한 낯선 사람이었다.
역 근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머리숱이 적고 키가 큰 남자가 옆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확실히 해두고자 하는 마음에 버스 노선에 대해 물었더니 잘 찾아왔다고 대답을 해주고는, 이곳에 여름이 돌아오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그 문장을 수차례 들어둔 후였지만 애써 모르는 척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그야 저기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이지.”
나는 그가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곳에는 유독 설산이 많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살짝만 고개를 들면 흰 눈이 덮인 산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한 번 시야에 잡히면 더위가 푹푹 내리쬐는 여름일지라도 코끝에 한기가 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모든 산이 단 몇 걸음만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쉬웠다.
스티비 원더는 아무 장비 없이 맨몸으로 설산을 넘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이즌트 쉬 러블리, 하는 노랫말을 떠올렸다. 그가 오랜 괴로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남았다. 사람들은 눈을 얼려 그것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고 그곳을 나라의 수도로 지정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수도였다.
창밖으로 호수가 보였다. 얇은 잎을 잔뜩 매단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고, 다시 인가를 지나치기를 두 번쯤 반복했다. 어두운 나무 그늘이 걷히고 좁은 열차 칸 안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어느새 설산의 가까운 곳에 올라 있었다. 단단한 암석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눈과 산머리에 걸려있는 허술한 구름과 오점 하나 없는 푸른 하늘과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새겨진 타원형의 흔적이 보였다. 가까이서 본바, 산 아래 방향으로 굵직하게 나 있는 그것은 확실한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그때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으로는 저마다 어어, 하는 불안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발자국이 찍혀있던 산봉우리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을 비집고 창가에 가까이 섰다. 꼭대기에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두꺼운 털옷 차림의 남자가 망설임 없는 커다란 큰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그가 이곳의 구원자, 스티비 원더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최초의 강인한 스티비 원더가 이제 막 산을 넘어오고 있었다. 꼭대기 부근에 굵직한 자국이 생겨났다. 그 지점에 이르러 나는 문득, 의아했다.
산꼭대기에 스티비 원더의 발자국이 찍혔다.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설산에 올랐다. 그 모습에 시선이 빼앗겨 있던 중 스티비 원더가 맨몸으로 설산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설산에 그가 남긴 발자국이 찍혔다. 사람들은 그곳을 수도로 지정했다.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산에 올랐다.
세상은 원(圓)이다. 나는 거대한 원 안에 갇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천장에 붙어 있던 스위스의 풍경 사진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내가 스물다섯이 된 해, 삼월의 일이다.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꿈을 연관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스티비 원더의 가사를 뒤지며 에이라는 묵직한 질서를 찾아 헤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줄곧 에이에 대해 생각하며 의미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이 들 때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스티비 원더는 강인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에이, 라는 간결하고도 굵직한 결론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무게를 실감하게 했다. 에이, 라고 말할 때 그의 어투에는 그 말을 듣는 누구에게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게 하리라는 의지가 듬뿍 담겨있었다. 에이는 강렬하고, 단단했다. 어떤 혼란스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이 안에는 그가 지금껏 고심해온 모든 것들이 담겨있었다.
에이의 형체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는 스티비 원더의 결론이라는 무형한 것으로 존재했으나 현실에서는 어떨지 미지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었고, 간결한 진언일 수도 있었다. 에이는 이를테면 열려있으면서도 닫혀있고 굳건하면서도 유연하고 단단하면서도 말랑하며 그림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밝게 빛나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애석하게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래서는 영영 에이를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점점 사라지는 에이의 끝을 붙잡고 영영 늙어가는 것이다, 하고 불평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베푸는 가벼운 선의조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로 나는 에이를 찾고자 내 지나온 날들에 대해 차분히 반추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에이와 가까웠던 것들을 하나씩 나열해보기로.
한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앞에서 드러나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호감을 사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던바, 그것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기쁨을 얻었다. 그 생동감 넘치는 힘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꿈을 꾼 이후로는 그 모든 것들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그랬었지, 라는 짧은 말로 일축됐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뭘 했느냐. 이불 속에 틀어박혀 이런저런 것들을 들었다. 단,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장들은 피했다. 전개가 빠르거나 감정의 고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음악도 피했다. 되도록 간결하면서도 생각을 멀리 데려가지 않는 말이나 곡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이를테면 언니네 이발관, 같은.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우리 여기 이곳, 하는 염원을 음미했다. 동시에 오래도록 창작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작곡자의 얼굴을 어렴풋이 상상했다. 그와 내가 비슷한 질감으로 이루어진 사람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와 나는 이십 대 중반 즈음에 무심코 들이킨 라떼로부터 에이에 감염된 것이다. 신인류의 도모를 위해 코카콜라, 스테로이드와 함께 내려졌으나 수용체의 한계로 세상을 부유하는 부작용을 겪게 된 신개념 도태 인류!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차트의 꼭대기를 오래 석권하고 있는 음악들은 끊임없이 ‘비주류’라는 단어를 상기시켰다. 나를 너무도 쉽게 무력자로 만들었다. 그런 것들을 답습하지 않고서는 영영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껏 딱 한 번. 무대 밖을 서성거리고 있다 생각했던 자들이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에 다름없었다. 내가 주류라 믿어왔던 것은 사실 소수의 사람이 사랑하는 무언가다, 어느 순간 개체에 변이가 생겨 소수의 수가 다수가 되었을 뿐이다, 하는 생각이 연달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주류’에 대한 공포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한 첫 순간이었다. 마냥 단단해 보이던 외벽을 다시 바라봤다. 뭐야 시바, 저것도 별 것 아니군, 하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로 인해 나는 깨달았다. 그와 같은 구분법은 받아들임으로써 존재하는 일종의 구조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실체를 확인해야 할 만큼 취약한 논리 위에 있는. 애초에 공통점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내가 줄곧 느껴온 소외감은 곧 극악무도한 이분법적 구도와 당연하게 여겨온 질서체계에 유동성을 가져오기 위한 발판이었다. 열려있는 가능성이었다. 가능성. 그건 내게 있어서 가장 짜고 짭조름한 결론이었다. 이제는 모두 지난 얘기지만.
안타깝지만 이들 중 어떤 것도 에이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한때 의미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은 에이가 아니라, 행복했던 시절의 잔류였다.
“스위스에 갈 거야.”
에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 소리야?”
나는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왜 하필 스위스인데?”
“그런 게 있어.”
“돈은 있어?”
“없어.”
“무슨 수로 가려고?”
“몰라.”
“이 미친 새끼야.”
그가 경멸과 의구심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에스는 희극배우지망생이다. 시험에는 매번 낙방했지만 SNS상에서는 이미 연예인 행세를 하고 있다. 팔로워 수가 어마어마했고, 자신의 근황을 몇 시간 단위로 업데이트했다. 최근 몇 개월간 전화나 메시지를 일절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그 꿈을 꿨을 때,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때, 제이와 헤어졌을 때 세 번, 그가 장기 투숙을 하는 숙소로 엽서를 보냈다. 이러이러한 상태에 처해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다, 편한 시간에 전화를 좀 해 달라, 는 짤막한 내용을 적었었다. 그의 반응은 냉담했다. 전화가 걸려오기는커녕 편지를 확인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계정에는 새로운 근황이 올라왔다. 내용은 제각각이었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만은 매한가지였다.
그가 귀국을 하던 날 나는 막 한강 다리 위에서 몸을 내던지려던 차였다. 온 서울에 꽃샘추위가 들이닥쳐 뺨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떨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눈을 떴다. 별안간 불어온 찬바람이 오른쪽 뺨과 관자놀이를 묵직하게 밀었다. 그와 나의 우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아슬아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우울증이나 망상에 빠진 상태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없어.”
“자기 자신만큼 스스로를 왜곡시키는 데 특화된 사람도 없다는 걸 상기시켜줘서 고맙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위스에 가서 뭘 어쩔 건데.”
“내가 본 곳과 똑같은 곳을 찾아야지. 호수가 있고, 설산이 있고, 기차를 타고 올라가야만 하는 곳.”
“그러면 네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답은 안 들어도 뻔하군. 저 표정을 봐. 세상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물론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그곳에 존재하리라고 믿는 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스티비 원더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으로 출마한 적도 없었다. 나는 다만 그때 느꼈던 충만함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지금껏 만족감을 느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시도해봤으나 에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전혀 그것에 부합하지 않았다. 스위스로 떠나는 것은 내 최후의 수단이었다.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이기적이냐? 그 정도면 제이도 많이 참은 거야.”
에스와 제이가 만난 건 지금껏 단 한 번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제이의 편을 들었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못내 서운했다. 그게 옳지 않은 판단이어서가 아니라, 부정할 길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전해 듣는 게 유독 괴롭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붙잡지 않은 거잖아. 옆에 있어도 잘 해주지를 못해서.”
“변명하지 마.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면서.”
“그럴지도. 제이는 에이가 아니었으니까.”
좁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네까짓 게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랬다면 나는 제이와 헤어지고 아주 힘들었겠지.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너, 제이랑 네가 완전히 헤어졌다고 생각해?”
“응.”
“정말이야?”
“그래. 이제는 완전히 멀어졌어.”
“내가 제이와 잤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정도로?”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에스의 얼굴을 살폈다. 장난기 없는 표정과 눈이 마주쳤다. 갈비뼈 안쪽에 매달려있던 추가 퉁, 하고 떨어졌다. 지금껏 그런 게 매달려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밑바닥에 있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두 사람이 실제로 그런 짓을 했을, 아니, 접촉했을, 젠장.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가 제이와 만나고 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에스는 국외를 탐방 중이었다. 중요한 건 에스는 사람을 웃길 때 외에는 농담 같은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녀석은 나 몰래 제이를 좋아해 왔다. 왜 하필이면 치정일까. 이런 식의 전개는 지금껏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라고 일이 예상한 대로만 굴러간 적이 있었나.
며칠 내내 비가 쏟아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봄비가 아닌 장마를 떠올리게 하는 어마어마한 비바람이었다. 한 번 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굵은 빗방울이 뒤따라와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렸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이마와 뺨에 차가운 빗물이 튀었다. 돌아보면 창틀에 끼워놓은 수건이 또다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도 한참을 더 누워있었다. 커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아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제이에 대해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있지, 저번 주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살면서 너처럼 섹시한 남자는 처음 봐.”
당시 내 머릿속에서는 얘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에서 내 어떤 점이 멋있다는 거지, 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일단 대화가 이루어지면 모를까. 나는 외모만으로 타인에게 큰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이 못됐다. 잔뜩 당황한 건 그 때문이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얼굴에 열기가 달아오를 때 즈음 잔뜩 인상을 구기고 그 자리를 피해버린 것이다. 제이 앞의 나는 그런 수식 값 밖에는 내놓을 수 없는 싸구려 로직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변명일 뿐. 제이의 알 바가 아니었다. 곤란했다. 나는 사실 온 신경을 다해 그녀의 수백 가지 표정들을 세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전화번호였다.
“좋아한다고 개자식아.”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의 말투가 어마어마하게 다정했다. 진득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 덜컥 젖에 물리고 난 뒤에야 그 괴로움의 정체가 배고픔이라는 걸 안 기분이라 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그녀의 고백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나와 늘 함께 있어 줬다. 에이에 대한 꿈을 꾸는 순간에도, 옆에 그녀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양쪽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국판 주제곡인 <푸른 꿈을 함께>가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들었던 곡이었다. 그럼에도 가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웅얼웅얼, 잊지 말아요, 웅얼웅얼, 우리 사랑은, 웅얼웅얼, 소중한 것을……
에이에 대해 전해 들은 그녀는 실수로 립스틱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던 맥과 페리페라를 섞어서 맛본 표정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는 제이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됐다. 그날 나는 연인 사이에서 오고가는 헤어지자는 말의 위력에 새삼 감탄했다. 입 밖에 내는 게 일초면 충분한 그 문장은 악착같이 붙어있던 사람들을, 서로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재빨리 비상구를 찾는 사이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몰아쳤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을 잡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창문이 움직이지를 앉았다. 오른쪽 손으로 벽을 짚고 세게 당겼다. 사이에 끼어있던 고무 조각 같은 게 빠져나오며, 단단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손끝이 얼얼했다. 깨진 손톱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섯 시간만 버티면 완벽하게 죽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나는 손을 꽉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헤어질 만해? 우리가 입을 맞추면 이제 어떤 감정이 배어 나오는 거야? 아, 그건 잔뜩 상해버린,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만두의 맛 같은 거야? 그러나 비슷한 말을 몇 번 반복한 후에는 자연히 깨달았다.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상해버린 건 나였다. 기호를 분별하고 감정을 증폭시키는 기관을 거세당해, 이제부터 무기력한 단면의 세계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나타난다 한들 그와 오래도록 살아본 듯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모든 시작이 권태일 것이다. 아니. 이런 식의 상념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에스가 자신의 계정을 모두 폐쇄한 후로 나는 좀 더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더운 공기와 꽃가루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결 짓는 식이었다. 문득 노랗고 고운 그 가루들이 나무에서 흔들려 떨어져 나온 게 아니라 바람의 잔여물일지 모른다, 하는 의심이 들면 그렇게 생각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마도 초여름에 대한 아쉬움을 잡념이 대신한 모양이라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고, 나는 대강 뭉뚱그렸다.
잠에서 깨고 보니 제이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편할 때 가게에 좀 들러달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가게 밖에는 매주 월, 수, 금요일마다 향초 만들기 강좌를 연다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다. 안쪽은 향초가 빼곡하게 차 있었다. 외벽에는 탁한 꽃가루와 먼지가 잔뜩 쌓인 채였다. 살짝 닿을 때마다 노란 가루가 옷깃에 한가득 묻어나왔다.
“왔어? 들어와.”
문이 열렸다. 제이가 밖으로 나왔다. 제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어두워진 머리카락 색이, 평소보다 옅은 색의 립밤이 눈에 들어왔다. 치사할 정도로 예뻤다.
그녀가 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주변에 켜져 있던 향초가 색색의 빛을 뿜어냈다. 꿈속에서 차창 밖으로 봤던 호수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여기는 그곳과 달랐다. 손을 댔다가는 공기 방울이 톡, 하고 터지는 대신 살이 녹아내려 피와 진물이 배어 나올 것이다.
“있지, 나 에이를 찾았어.”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를?”
“응.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쭉 생각해봤는데, 네가 하는 고민은 사실 보편적이었는지도 몰라. 우리는 전부 뭔가를 찾고 있잖아. 나는 권태기에, 슬럼프에, 우울증에, 어떻게든 그걸 현실에 있는 말들로 설명하려고 애쓰느라 정작 네 상태를 들여다보지 못했어.”
그렇게 말하는 제이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사이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넌 이상한 사람이 아냐. 네가 하는 고민은 그게 무엇이든 이해받을 이유가 있어. 그게 좀 더 현실적인 것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나 욕심은 무시해버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잠자코 서서 네 향기나 맡고 있든지,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해.”
“지은아……”
목에 모래가 낀 듯 서걱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중한 건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 늦어버리기 전까지는 뭐가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울먹이자, 지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아주었다.
“네가 먼저 그곳의 일원이 되면, 그의 세상이 너에게 올 거야.”
나는 그 짧은 문장이 줄곧 내가 찾던 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아무런 울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내게 의미 있는 건 에이도 스위스도 아닌 바로 이곳, 그녀와 내가 대학 시절을 보낸 바로 이 서울 끝자락의 허름한 대학가였다. 그녀야말로 나의 모든 결론, 에이였다.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왔다. 현관을 열자마자 책장에 꽂아둔 스위스의 사진을 황급히 찾았다. 라이터를 꺼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저지르듯 불을 붙였다. 먼지 쌓인 모서리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스티비 원더가 넘어온 설산에서 화산재가 하염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세계에 찾아온 재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곳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동시에, 온몸이 녹아 버릴 만큼 가까웠다.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스티비 원더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기능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지역에 따라 빙하기, 전염병, 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으나 재앙을 종식시킨 사람은 모두 스티비 원더로 같았다. 특이한 점은 스티비 원더는 이미 오래전에 그곳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정작 농담을 하는 데 그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었다.
여름을 돌아오게 만드는 건 겨우내 쌓인 햇빛에 대한 열망이다. 그 문장은 스티비 원더의 노랫말 중 하나였다.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른들이라면 모두 그 말을 좋아했다. 그 부분을 읊기 위해 틈만 나면 여름이 돌아오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는 쪽은 대개 어린아이거나 그 나라를 방문한 낯선 사람이었다.
역 근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머리숱이 적고 키가 큰 남자가 옆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확실히 해두고자 하는 마음에 버스 노선에 대해 물었더니 잘 찾아왔다고 대답을 해주고는, 이곳에 여름이 돌아오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그 문장을 수차례 들어둔 후였지만 애써 모르는 척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그야 저기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이지.”
나는 그가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곳에는 유독 설산이 많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살짝만 고개를 들면 흰 눈이 덮인 산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한 번 시야에 잡히면 더위가 푹푹 내리쬐는 여름일지라도 코끝에 한기가 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모든 산이 단 몇 걸음만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쉬웠다.
스티비 원더는 아무 장비 없이 맨몸으로 설산을 넘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이즌트 쉬 러블리, 하는 노랫말을 떠올렸다. 그가 오랜 괴로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남았다. 사람들은 눈을 얼려 그것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고 그곳을 나라의 수도로 지정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수도였다.
창밖으로 호수가 보였다. 얇은 잎을 잔뜩 매단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고, 다시 인가를 지나치기를 두 번쯤 반복했다. 어두운 나무 그늘이 걷히고 좁은 열차 칸 안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어느새 설산의 가까운 곳에 올라 있었다. 단단한 암석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눈과 산머리에 걸려있는 허술한 구름과 오점 하나 없는 푸른 하늘과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새겨진 타원형의 흔적이 보였다. 가까이서 본바, 산 아래 방향으로 굵직하게 나 있는 그것은 확실한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그때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으로는 저마다 어어, 하는 불안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발자국이 찍혀있던 산봉우리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을 비집고 창가에 가까이 섰다. 꼭대기에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두꺼운 털옷 차림의 남자가 망설임 없는 커다란 큰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그가 이곳의 구원자, 스티비 원더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최초의 강인한 스티비 원더가 이제 막 산을 넘어오고 있었다. 꼭대기 부근에 굵직한 자국이 생겨났다. 그 지점에 이르러 나는 문득, 의아했다.
산꼭대기에 스티비 원더의 발자국이 찍혔다.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설산에 올랐다. 그 모습에 시선이 빼앗겨 있던 중 스티비 원더가 맨몸으로 설산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설산에 그가 남긴 발자국이 찍혔다. 사람들은 그곳을 수도로 지정했다.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산에 올랐다.
세상은 원(圓)이다. 나는 거대한 원 안에 갇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천장에 붙어 있던 스위스의 풍경 사진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내가 스물다섯이 된 해, 삼월의 일이다.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꿈을 연관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스티비 원더의 가사를 뒤지며 에이라는 묵직한 질서를 찾아 헤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줄곧 에이에 대해 생각하며 의미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이 들 때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스티비 원더는 강인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에이, 라는 간결하고도 굵직한 결론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무게를 실감하게 했다. 에이, 라고 말할 때 그의 어투에는 그 말을 듣는 누구에게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게 하리라는 의지가 듬뿍 담겨있었다. 에이는 강렬하고, 단단했다. 어떤 혼란스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에이 안에는 그가 지금껏 고심해온 모든 것들이 담겨있었다.
에이의 형체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는 스티비 원더의 결론이라는 무형한 것으로 존재했으나 현실에서는 어떨지 미지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었고, 간결한 진언일 수도 있었다. 에이는 이를테면 열려있으면서도 닫혀있고 굳건하면서도 유연하고 단단하면서도 말랑하며 그림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밝게 빛나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알아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애석하게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래서는 영영 에이를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점점 사라지는 에이의 끝을 붙잡고 영영 늙어가는 것이다, 하고 불평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베푸는 가벼운 선의조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로 나는 에이를 찾고자 내 지나온 날들에 대해 차분히 반추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에이와 가까웠던 것들을 하나씩 나열해보기로.
한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앞에서 드러나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호감을 사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던바, 그것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기쁨을 얻었다. 그 생동감 넘치는 힘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꿈을 꾼 이후로는 그 모든 것들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그랬었지, 라는 짧은 말로 일축됐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뭘 했느냐. 이불 속에 틀어박혀 이런저런 것들을 들었다. 단,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장들은 피했다. 전개가 빠르거나 감정의 고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음악도 피했다. 되도록 간결하면서도 생각을 멀리 데려가지 않는 말이나 곡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이를테면 언니네 이발관, 같은.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우리 여기 이곳, 하는 염원을 음미했다. 동시에 오래도록 창작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작곡자의 얼굴을 어렴풋이 상상했다. 그와 내가 비슷한 질감으로 이루어진 사람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와 나는 이십 대 중반 즈음에 무심코 들이킨 라떼로부터 에이에 감염된 것이다. 신인류의 도모를 위해 코카콜라, 스테로이드와 함께 내려졌으나 수용체의 한계로 세상을 부유하는 부작용을 겪게 된 신개념 도태 인류!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차트의 꼭대기를 오래 석권하고 있는 음악들은 끊임없이 ‘비주류’라는 단어를 상기시켰다. 나를 너무도 쉽게 무력자로 만들었다. 그런 것들을 답습하지 않고서는 영영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껏 딱 한 번. 무대 밖을 서성거리고 있다 생각했던 자들이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에 다름없었다. 내가 주류라 믿어왔던 것은 사실 소수의 사람이 사랑하는 무언가다, 어느 순간 개체에 변이가 생겨 소수의 수가 다수가 되었을 뿐이다, 하는 생각이 연달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주류’에 대한 공포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한 첫 순간이었다. 마냥 단단해 보이던 외벽을 다시 바라봤다. 뭐야 시바, 저것도 별 것 아니군, 하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로 인해 나는 깨달았다. 그와 같은 구분법은 받아들임으로써 존재하는 일종의 구조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실체를 확인해야 할 만큼 취약한 논리 위에 있는. 애초에 공통점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내가 줄곧 느껴온 소외감은 곧 극악무도한 이분법적 구도와 당연하게 여겨온 질서체계에 유동성을 가져오기 위한 발판이었다. 열려있는 가능성이었다. 가능성. 그건 내게 있어서 가장 짜고 짭조름한 결론이었다. 이제는 모두 지난 얘기지만.
안타깝지만 이들 중 어떤 것도 에이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한때 의미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은 에이가 아니라, 행복했던 시절의 잔류였다.
“스위스에 갈 거야.”
에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 소리야?”
나는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왜 하필 스위스인데?”
“그런 게 있어.”
“돈은 있어?”
“없어.”
“무슨 수로 가려고?”
“몰라.”
“이 미친 새끼야.”
그가 경멸과 의구심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에스는 희극배우지망생이다. 시험에는 매번 낙방했지만 SNS상에서는 이미 연예인 행세를 하고 있다. 팔로워 수가 어마어마했고, 자신의 근황을 몇 시간 단위로 업데이트했다. 최근 몇 개월간 전화나 메시지를 일절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그 꿈을 꿨을 때,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때, 제이와 헤어졌을 때 세 번, 그가 장기 투숙을 하는 숙소로 엽서를 보냈다. 이러이러한 상태에 처해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다, 편한 시간에 전화를 좀 해 달라, 는 짤막한 내용을 적었었다. 그의 반응은 냉담했다. 전화가 걸려오기는커녕 편지를 확인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계정에는 새로운 근황이 올라왔다. 내용은 제각각이었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만은 매한가지였다.
그가 귀국을 하던 날 나는 막 한강 다리 위에서 몸을 내던지려던 차였다. 온 서울에 꽃샘추위가 들이닥쳐 뺨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떨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눈을 떴다. 별안간 불어온 찬바람이 오른쪽 뺨과 관자놀이를 묵직하게 밀었다. 그와 나의 우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아슬아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만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우울증이나 망상에 빠진 상태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없어.”
“자기 자신만큼 스스로를 왜곡시키는 데 특화된 사람도 없다는 걸 상기시켜줘서 고맙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위스에 가서 뭘 어쩔 건데.”
“내가 본 곳과 똑같은 곳을 찾아야지. 호수가 있고, 설산이 있고, 기차를 타고 올라가야만 하는 곳.”
“그러면 네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답은 안 들어도 뻔하군. 저 표정을 봐. 세상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물론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그곳에 존재하리라고 믿는 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스티비 원더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나라에서 대통령으로 출마한 적도 없었다. 나는 다만 그때 느꼈던 충만함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지금껏 만족감을 느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시도해봤으나 에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전혀 그것에 부합하지 않았다. 스위스로 떠나는 것은 내 최후의 수단이었다.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이기적이냐? 그 정도면 제이도 많이 참은 거야.”
에스와 제이가 만난 건 지금껏 단 한 번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제이의 편을 들었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못내 서운했다. 그게 옳지 않은 판단이어서가 아니라, 부정할 길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전해 듣는 게 유독 괴롭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붙잡지 않은 거잖아. 옆에 있어도 잘 해주지를 못해서.”
“변명하지 마.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면서.”
“그럴지도. 제이는 에이가 아니었으니까.”
좁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네까짓 게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랬다면 나는 제이와 헤어지고 아주 힘들었겠지.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너, 제이랑 네가 완전히 헤어졌다고 생각해?”
“응.”
“정말이야?”
“그래. 이제는 완전히 멀어졌어.”
“내가 제이와 잤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정도로?”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에스의 얼굴을 살폈다. 장난기 없는 표정과 눈이 마주쳤다. 갈비뼈 안쪽에 매달려있던 추가 퉁, 하고 떨어졌다. 지금껏 그런 게 매달려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밑바닥에 있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두 사람이 실제로 그런 짓을 했을, 아니, 접촉했을, 젠장.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가 제이와 만나고 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에스는 국외를 탐방 중이었다. 중요한 건 에스는 사람을 웃길 때 외에는 농담 같은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녀석은 나 몰래 제이를 좋아해 왔다. 왜 하필이면 치정일까. 이런 식의 전개는 지금껏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라고 일이 예상한 대로만 굴러간 적이 있었나.
며칠 내내 비가 쏟아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봄비가 아닌 장마를 떠올리게 하는 어마어마한 비바람이었다. 한 번 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굵은 빗방울이 뒤따라와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렸다.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이마와 뺨에 차가운 빗물이 튀었다. 돌아보면 창틀에 끼워놓은 수건이 또다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도 한참을 더 누워있었다. 커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아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제이에 대해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있지, 저번 주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살면서 너처럼 섹시한 남자는 처음 봐.”
당시 내 머릿속에서는 얘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에서 내 어떤 점이 멋있다는 거지, 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일단 대화가 이루어지면 모를까. 나는 외모만으로 타인에게 큰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이 못됐다. 잔뜩 당황한 건 그 때문이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얼굴에 열기가 달아오를 때 즈음 잔뜩 인상을 구기고 그 자리를 피해버린 것이다. 제이 앞의 나는 그런 수식 값 밖에는 내놓을 수 없는 싸구려 로직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변명일 뿐. 제이의 알 바가 아니었다. 곤란했다. 나는 사실 온 신경을 다해 그녀의 수백 가지 표정들을 세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전화번호였다.
“좋아한다고 개자식아.”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의 말투가 어마어마하게 다정했다. 진득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 덜컥 젖에 물리고 난 뒤에야 그 괴로움의 정체가 배고픔이라는 걸 안 기분이라 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그녀의 고백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나와 늘 함께 있어 줬다. 에이에 대한 꿈을 꾸는 순간에도, 옆에 그녀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양쪽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국판 주제곡인 <푸른 꿈을 함께>가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들었던 곡이었다. 그럼에도 가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웅얼웅얼, 잊지 말아요, 웅얼웅얼, 우리 사랑은, 웅얼웅얼, 소중한 것을……
에이에 대해 전해 들은 그녀는 실수로 립스틱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던 맥과 페리페라를 섞어서 맛본 표정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는 제이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됐다. 그날 나는 연인 사이에서 오고가는 헤어지자는 말의 위력에 새삼 감탄했다. 입 밖에 내는 게 일초면 충분한 그 문장은 악착같이 붙어있던 사람들을, 서로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재빨리 비상구를 찾는 사이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몰아쳤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을 잡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창문이 움직이지를 앉았다. 오른쪽 손으로 벽을 짚고 세게 당겼다. 사이에 끼어있던 고무 조각 같은 게 빠져나오며, 단단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손끝이 얼얼했다. 깨진 손톱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섯 시간만 버티면 완벽하게 죽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나는 손을 꽉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헤어질 만해? 우리가 입을 맞추면 이제 어떤 감정이 배어 나오는 거야? 아, 그건 잔뜩 상해버린,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만두의 맛 같은 거야? 그러나 비슷한 말을 몇 번 반복한 후에는 자연히 깨달았다.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상해버린 건 나였다. 기호를 분별하고 감정을 증폭시키는 기관을 거세당해, 이제부터 무기력한 단면의 세계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나타난다 한들 그와 오래도록 살아본 듯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모든 시작이 권태일 것이다. 아니. 이런 식의 상념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에스가 자신의 계정을 모두 폐쇄한 후로 나는 좀 더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더운 공기와 꽃가루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결 짓는 식이었다. 문득 노랗고 고운 그 가루들이 나무에서 흔들려 떨어져 나온 게 아니라 바람의 잔여물일지 모른다, 하는 의심이 들면 그렇게 생각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마도 초여름에 대한 아쉬움을 잡념이 대신한 모양이라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고, 나는 대강 뭉뚱그렸다.
잠에서 깨고 보니 제이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편할 때 가게에 좀 들러달라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가게 밖에는 매주 월, 수, 금요일마다 향초 만들기 강좌를 연다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다. 안쪽은 향초가 빼곡하게 차 있었다. 외벽에는 탁한 꽃가루와 먼지가 잔뜩 쌓인 채였다. 살짝 닿을 때마다 노란 가루가 옷깃에 한가득 묻어나왔다.
“왔어? 들어와.”
문이 열렸다. 제이가 밖으로 나왔다. 제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어두워진 머리카락 색이, 평소보다 옅은 색의 립밤이 눈에 들어왔다. 치사할 정도로 예뻤다.
그녀가 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주변에 켜져 있던 향초가 색색의 빛을 뿜어냈다. 꿈속에서 차창 밖으로 봤던 호수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여기는 그곳과 달랐다. 손을 댔다가는 공기 방울이 톡, 하고 터지는 대신 살이 녹아내려 피와 진물이 배어 나올 것이다.
“있지, 나 에이를 찾았어.”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를?”
“응.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쭉 생각해봤는데, 네가 하는 고민은 사실 보편적이었는지도 몰라. 우리는 전부 뭔가를 찾고 있잖아. 나는 권태기에, 슬럼프에, 우울증에, 어떻게든 그걸 현실에 있는 말들로 설명하려고 애쓰느라 정작 네 상태를 들여다보지 못했어.”
그렇게 말하는 제이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사이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넌 이상한 사람이 아냐. 네가 하는 고민은 그게 무엇이든 이해받을 이유가 있어. 그게 좀 더 현실적인 것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나 욕심은 무시해버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잠자코 서서 네 향기나 맡고 있든지,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해.”
“지은아……”
목에 모래가 낀 듯 서걱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중한 건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 늦어버리기 전까지는 뭐가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울먹이자, 지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아주었다.
“네가 먼저 그곳의 일원이 되면, 그의 세상이 너에게 올 거야.”
나는 그 짧은 문장이 줄곧 내가 찾던 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아무런 울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내게 의미 있는 건 에이도 스위스도 아닌 바로 이곳, 그녀와 내가 대학 시절을 보낸 바로 이 서울 끝자락의 허름한 대학가였다. 그녀야말로 나의 모든 결론, 에이였다.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왔다. 현관을 열자마자 책장에 꽂아둔 스위스의 사진을 황급히 찾았다. 라이터를 꺼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저지르듯 불을 붙였다. 먼지 쌓인 모서리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스티비 원더가 넘어온 설산에서 화산재가 하염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세계에 찾아온 재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곳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동시에, 온몸이 녹아 버릴 만큼 가까웠다.
우혜린
김영하 작가의 아버지가 그의 재떨이를 비워줬다는 말을 듣고는 넌 비흡연자니까, 하고 쓰레기통을 비워주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죽을 때까지 주인공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만들어주는 중이다.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