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흔적
점심시간이 끝난 후 5교시, 영어 듣기 시간이었다. 창으로 스며든 봄볕은 따뜻했고 점심을 먹고 난 성장기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졸음은 부드럽게 교실 안에서 제 영역을 넓혀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영어 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어 듣기 파일을 틀어두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오후가 선사하는 나른함에 눈꺼풀을 맡기는 느긋한 시간이었다. 하늘엔 간간이 비행기가 꼬리에 구름을 달고 날아갔고 가끔 까치가 울었다. 어제와 같고 그제와 같은, 별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듣기 파일이 제 역할을 끝내고 나자 영어 선생은 관자놀이를 지압하고 일어섰다. 그런 뒤에 언제나 그랬듯, 그날 날짜의 숫자를 번호로 가진 아이를 불렀다. 16번. 일어나서 본문 읽어 봐라. 교실은 조용했다.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영어 선생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16번을 다시 불렀다. 16번 누구니. 복도 측 4분단 끝에 앉아있던 여드름투성이의 아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 없는데요.
영어 선생은 빨간색 플러스 펜을 들어 출석부에 16번 칸을 반으로 가르는 빨간 줄을 그었다. 키가 크고 몸이 말라서 나무젓가락이 별명인 그 애는 책상 위에 군청색 교복 블레이저와 교복 바지, 뿔테안경, 검은색 전자 손목시계, 와이셔츠와 교복 넥타이, 민소매 러닝과 사각팬티, 캐릭터 양말, 삼선 슬리퍼와 제 이름 석 자가 박힌 명찰을 남기고 사라졌다. 16번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 옷가지들을 아이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고, 구조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물량이 평소의 여섯 배까지 늘어나는 연말이었다. 남자는 허리 펼 새 없이 일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일감이 눈 쌓이듯 쌓였다. 남자는 주야간 마다하지 않고 특근을 신청했다. 적게는 여덟 시간에서 많게는 열 시간까지 일했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물건들은 쉼 없이 미끄러져 다가왔고 또 멀어져갔다.
남자는 제 통장에 들어갈 숫자를 하나하나씩 옮겨넣는 상상을 했다. 큰 물건은 9, 작은 물건은 0. 통장에 찍힌 숫자들은 아버지의 병원비며, 구조의 급식비로 바뀔 것이었다. 조붓한 부엌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을 생각을 하면 절로 힘이 났다.
야간작업을 끝마친 남자의 몸은 땀으로 푹 절어 있었다. 남자는 근처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24시간 콩나물 해장국집에 들어가 해장국을 먹었다. 국물에 밥을 모조리 말아 후루룩후루룩 물 마시듯 씹어 삼켰다. 국물은 적당히 칼칼하고 시원하니 매콤했다. 밥을 먹지 못하면 힘을 쓰지 못했다. 남자의 아버지는 늘 “밥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쌀을 살 수 있고 쌀을 사야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고 귀가 아프게 말했다. 아버지의 말은 논리적으로 허점이 없었다. 아버지는 너무 늙고 병들어 밥을 먹어도 일을 할 수 없는 나이였으나 꿋꿋이 폐지를 모았다. 말려도 소용없었다.
해장국집에서 나왔을 때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과 비가 뒤섞여 바닥이 온통 질척거렸다. 하얗게 눈이 쌓인 곳을 디뎠다가 남자는 낭패를 보고 말았다. 평지가 아니라 물이 고인 웅덩이였던 것이었다. 차가운 물이 운동화 안쪽으로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남자는 서둘러 발을 빼고 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구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구조는 49,800원짜리 점퍼와 8,500원짜리 티셔츠, 45,000원짜리 청바지, 10,000원짜리 장갑과 6,000원짜리 귀걸이, 1,000원짜리 양말과 37,500원짜리 운동화, 6,900원짜리 팬티와 12,000원짜리 브래지어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경찰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보호자 되시죠, 로 시작된 조사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라졌죠, 로 끝이 났다.
사람들이 걸치고 있던 물건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는 일은 최근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옷과 시계, 양말과 신발은 제 주인의 몸에 감겨 있던 모양 그대로 남았다. 허물만 벗어놓고 어디론가 가 버린 것 같기도 했고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는 사람 모양의 화석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원인을 두고 갖은 소문이 무성했지만, 가설과 풍문들이 너무도 많아서 무엇이 믿을 만한 것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어떤 날은 수많은 사람이 별안간 동시에 사라지기도 했다. 모두 안타깝게 여기기는 했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원인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인도 아니었고 실종도 아니었으며 질병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라진 사람들의 옷가지 안에서 하나같이 기묘한 영수증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영수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국세청에서도 난감을 표했다. 행정상 분류되는 항목이 없었기에 사라진 사람들이 남긴 영수증은 그 어떤 부처에서도 맡아 처리하지 않았다. 수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형식 치레일 뿐이었다. 결국은 각자 알아서 영수증을 처리해야 했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물건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주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 몸만 사라진 채 남았다. 이를테면 신발 안에는 양말이 들어 있고 바지 안에는 팬티가 들어 있는 식이었다. 물건들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버스 정류장에 기대어 있거나 사무실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물건 주인의 몸이 투명하게 변해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연히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영수증과 함께 태운다고 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장례를 대신했다.
구조는 공공도서관 청소년센터 열람실 구석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구조의 물건들은 구조가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문제집과 색색의 볼펜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관리자는 불이 꺼져 있어서 몰랐다고 했다. 남자는 패딩 점퍼를 붙들었다. 영락없는 구조의 뒷모습이었다. 점퍼에 매달린 후드 모자를 조심스럽게 벗겨 보니 머리칼이 있어야 할 자리에 허공이 있었다. 남자는 몇 번이고 그 허공을 움켜쥐어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점퍼를 들어 올리자, 안쪽에 있던 티셔츠와 속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들을 주워 모았다.
공공도서관 청소년센터 직원이 남자에게 내민 서류는 세 장이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무엇인가 잔뜩 적혀 있었다. 이게 뭐죠. 남자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몇 번이고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구조의 물건을 수령하는 형식 치레 같은 것이라고, 분실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한데 간단히 공증을 해 두려는 것일 뿐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남자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재촉하는 통에 얼렁뚱땅 이름을 적어넣고 말았다.
그것이 공공도서관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일종의 동의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동료들은 구조의 일을 진심으로 안타까워 해주었다. 남자는 전원이 나간 것 마냥 멍하니 멈춰 서 있곤 했지만 컨베이어 벨트는 스물네 시간 멈추는 일이 없었다. 박스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제시간에 맞춰 마감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 무렵 남자는 누가 불러도 저를 부르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작업반장은 며칠 쉬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남자가 구조의 옷가지 안쪽에서 영수증을 발견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얼룩 때문에 남자가 읽을 수 있는 글자보다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남자는 홀린 듯 영수증을 뒤집어 보았다. 할부거래계약서의 내용이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영수증이었지만 구조의 옷가지에서 나온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단순한 영수증은 아니었다.
영수증 상단에 적힌 주소대로 찾아가면 실마리가 보일 듯했다. 어쩌면 구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구조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물건들을 태우는 대신 여행 가방에 담았다. 옷가지들은 모서리를 잡아 반듯하게 접고, 물건들은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커다란 여행 가방 안에 빈 공간 없이. 남자는 구조의 사진을 조심스레 안주머니에 넣고 영수증을 보았다. 주소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찾아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남자는 무작정 그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무의로는 육각형 모양의 눈꽃광장을 통과하는 도로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육각형의 바깥 꼭지 부분에는 파출소와 차량등록사업소, 마트, 병원, 어린이집, 복지관이 각각 자리해 있었다. 광장보다 더 큰 육각형 모양의 상가단지들이 광장을 감싸고 그보다 더 큰 육각형의 땅에 주공아파트와 주택단지들이 빼곡하니 들어서 있었다. 주변은 광장을 중심으로 같은 동심을 가지고 육각형이 퍼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광장을 통과하는 무의로와 육각형의 각 꼭짓점으로 연결된 길들이 네 개가 더 있었다. 무의로 1길에서 무의로 4길까지.
광장을 통과하는 무의로 주변에는 건물이 없었다. 남자는 무의 4동 9-89번지와 무의 4동 98-9번지를 검지로 짚어 찾았다. 지번을 쓰는 기존의 주소와 새로 바뀌었다는 도로명주소가 남자의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남자는 볼펜을 들어 영수증에 적힌 주소 일곱 글자를 손등에 적어보았다. 무의로 4989. 볼펜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남자의 손등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행인을 붙잡고 여기가 무의 4동이 맞느냐고 물었다. 행인은 한마디 대꾸 없이 ‘무의로’라고 쓰인 주소 표지판을 가리켜 보였다. 남자는 주소가 가리키는 곳을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종이 지도와 휴대폰 액정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던 행인은 무어라 말할 것 같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빠른 걸음으로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어 보이거나 남자의 커다란 여행 가방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볼 뿐, 이렇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축은행에서 숫자들을 관리했다. 작고 파리한 얼굴의 그녀는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축이는 버릇이 있었고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고 눈을 늘 내리깔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투명한 유리 벽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유리 벽 너머에 존재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나른하고 느긋한 동작으로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에는 그녀가 정리해 준 숫자들이 가지런히 찍혀있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숫자들보다도, 남자를 사로잡은 것은 가지런한 그녀의 손톱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통장을 내미는 찰나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의 손톱에는 옅은 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고 가끔 그 위로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기도 했다. 남자는 통장을 받을 때 창구 위에 일부러 제 손을 내밀고 오랫동안 주춤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이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앞머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치 안쪽에 엉킨 실타래처럼 배배 꼬인 무엇인가 포슬포슬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럴 때마다 남자는 어린 시절에 과수원에서 보았던 사과 꽃을 생각했다. 남자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새벽녘에 남자는 그녀가 깨지 않게끔 조심조심 일어나 곤히 잠든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암청색의 새벽빛이 그녀의 얼굴을 어른어른 비추었다. 그녀의 배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았는데, 화답하듯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찰나였지만 아이가 닿은 손바닥 한가운데 따뜻한 물방울 같은 게 똑, 떨어져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구조는 이듬해 태어났다. 남자는 갓 태어난 구조를 품에 안고 2.8kg이라는 무게의 숫자에 대해 생각했다. 구조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작았다. 구조는 설탕 알갱이를 흩뿌려 놓은 듯 새하얀 배냇저고리를 입고 방싯방싯 웃었다.
무의로 4길 9-89는 빌딩이었다. 남자는 회색빛 건물 앞에 붙어 있는 건물번호판을 확인한 뒤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바람에 바닥에 붙어있던 고무 패킹이 쓸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안내데스크가 있었으나 그 안에 사람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모양인지 건물 안은 적막했다.
남자는 안내데스크 안쪽의 건물 층별 안내도를 보았다. ‘(주)’라는 글씨로 시작하는 회사가 너무 많았다. 남자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일 층부터 칠층까지 너무도 많은 글씨가 깨알같이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자들이 남자의 눈앞에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때마침 승강기 문이 열렸고 누군가 내렸다.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여자는 태연하고 느린 걸음으로 안내데스크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가 저기요, 하고 입을 열자 그제야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 여기가 무의로 4길 9-89 맞지요?
- 방문 약속 하셨나요?
남자는 영수증을 조심스레 꺼내어 여자 앞에 펼쳐 놓았다. 영수증 맨 위의 상호를 검지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따라 읽고선 이런 회사가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외부인 방문일지’라고 적힌 종이를 건넸다.
- 작성하시고 기다려 주세요.
이름과 나이, 주소, 방문 일자 같은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남자는 빈칸을 적어 내려가다가 방문 목적에서 멈칫거렸다. 한참 후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건조한 목소리가 실내에 작게 울렸다.
- 없는데요. 그런 회사.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안내데스크 위에 올려두었다. 구조의 셀프 카메라 사진이었다. 여자의 눈앞에 사진과 영수증이 나란히 놓였다. 남자는 그것들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 우리 딸앤데요. 이걸 남겼어요.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작게 벌린 입술 틈새로 숨을 가쁘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자꾸만 갈라지고 새서, 가래를 끌어모아 삼킨 뒤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남자는 영수증 맨 위의 상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길 찾아가야 하는데요.
- 이 건물엔 그런 회사가 없어요.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때맞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않고 바닥에 쭈그려 앉더니 안내데스크 안쪽에서 부스럭거렸다. 여자가 꺼내 든 것은 빨간색 지갑이었다. 여자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어 영수증 옆에 올려두었다.
만원에 그려진 세종대왕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영수증과 구조의 사진만 조심스레 안주머니에 넣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지갑에 만원을 다시 쑤셔 넣으며 전화를 받았다. 남자의 추레한 뒷모습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삑, 삑. 남자의 낡은 운동화 뒤축이 대리석 바닥에 맞부딪는 소리가 건물 로비에 울렸다.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날씨였다. 남자는 가방을 고쳐 들었다. 찬바람에 얼굴이 시뻘겋게 얼어붙고 손이 자꾸 안으로 곱았다. 건물들은 예상했던 위치에 있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무의로 4길에서 건물 고유번호판에 쓰인 숫자를 쫓아 휘어진 골목길 내부로 한참 들어가다 보면 숫자가 점점 커지다가 막다른 길이 나오면서 끝나기도 했고 그럴 경우에는 다시 골목에서 나와서 다음번 블록에서 시작하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작은 골목에는 어떤 길이라든지 그런 이름이나 명칭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이리저리 걷다 큰 대로변이 나오면 무의로 3길이거나 무의로 5길이기 일쑤였다.
각 꼭짓점으로 향하는 길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게다가 육각형의 각 꼭짓점은 맞닿아 있는 다른 구역의 시작점도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엉뚱한 길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길이 넓든 좁든 길옆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고 공사현장이 나타나면 숫자가 끊어졌다. 공사현장에는 고유번호가 없었다. 공사현장을 통과해 지나쳐 갈 수 없기 때문에 남자는 어림으로 건물들의 번호를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무의로 4길에서 90번대 건물들은 언덕 위에 있었다. 남자는 가방을 둘러업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언덕의 응달진 부분은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남자는 몇 번이고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가까스로 외벽을 부여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남자의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코트 안엔 셔츠 한 장뿐이었는데 그 또한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 남자는 목을 한껏 움츠리고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무의로 4길 98-9는 오피스텔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출입 카드가 있어야 했다. 빨간색 글씨로 감시카메라 녹화 중,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이 유리문에 붙어있었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유리문에 얼굴을 붙이고 안쪽을 살폈다. 실내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유리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에 안쪽에서 웬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경비’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 노인은 소란에 대해 욕을 섞어 화를 낸 다음 몇 층 몇 호냐고 물었다. 남자는 영수증 상단에 적혀 있던 회사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 몰라. 내가 어제부터 일을 시작했거든.
- 그럼 이 건물에 회사 명단 같은 것도 없나요.
- 나는 몰라. 외부인 출입 금지니까, 얼른 나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이 남자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남자는 경비실에서 유리문 앞까지 순식간에 떠밀렸다. 노인은 온몸을 기울여 남자를 밖으로 밀쳐냈다. 남자도 이를 악물고 노인에게 들이덤볐다. 그 와중에 노인의 완장이 떨어져 나갔다. 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아 완장을 살폈다. 그 틈을 타 남자는 재빨리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며 층별 안내도를 찾았다. 안내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남자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남자는 노인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연결되는 철문을 열었다. 비상구를 가리키는 초록색 등 덕분에 난간이 겨우 보였다.
그때였다. 뒤따라온 노인이 남자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노인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세기의 악력이 남자의 발목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는 계단에서 구르며 넘어졌고 여행 가방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남자의 손을 떠난 가방이 계단 밑으로 미끄러졌다. 가방은 어딘가에 부딪혔고 뚜껑이 활짝 열린 채로 나뒹굴었다. 구조의 옷가지며 속옷이 계단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퉤. 노인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노인은 손전등으로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빛 때문에 남자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노인이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순 변태 아냐,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구조의 옷가지를 주워 담고 허둥지둥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가방은 잠금장치가 망가졌는지 더 이상 닫히지 않았다. 남자는 반쯤 열린 여행 가방을 앞에 두고 주저앉았다. 남자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구조의 옷가지를 다시 반듯하게 개어 넣었다. 무의로 4길 9-89도 아니었고, 무의로 4길 98-9도 아니었다. 남자는 손등에 적힌 일곱 글자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무의로 4989.
해가 떨어져서인지, 바람이 불어서인지, 언덕길은 꽁꽁 얼어붙어 어느새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여행 가방을 안고, 다른 손으로 전봇대를 짚어가며 느릿느릿 한 걸음씩 내디뎠다. 노인에게 잡혔던 발목 주위가 욱신거렸고 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부딪히고 까진 곳이 쓰라렸다. 길거리며 건물 간판에 불빛이 환했다. 어디선가 캐럴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그제야 종일 먹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걸음은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졌다.
*
조금씩 흩날리던 싸락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는 하늘에서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남자는 눈앞의 허공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남자는 눈꽃광장 벤치에 누워서 투박한 제 손을 들어올려 보았다. 손가락 새로 눈송이가 들러붙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남자는 허공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언젠가 무심코 구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듯. 손끝에서 눈이 녹아 흘렀다. 남자는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 아부지.
- 왜.
- 양계장 가보셨어요?
- 글쎄다, 고향 살적에 닭을 치는 집들이 있었다만.
- 요새는 닭들이 밤낮없이 알을 낳게 하려고 스물네 시간 불을 켜둔대요.
- 요새 계란 한 판에 얼마냐.
- 육천 원이요.
- 한 알에 이백 원이나 하는구나.
- 끊을게요.
- 알았다.
여행 가방 안에는 구조가 남긴 것들이 들어있었다. 어느 겨울날 남자는 구조의 교복이 얇은 것 같아 패딩점퍼를 샀다. 구조는 점퍼를 받아들고 만세를 부르며 남자를 끌어안았다. 구조는 그 점퍼를 교복 재킷 위에 매일매일 입고 다녔다.
베이지색 터틀넥 티셔츠는 구조가 겨우내 입을 수 있도록 여 댓 벌을 사 둔 것이었다. 구조는 한겨울이면 교복 와이셔츠 대신 티셔츠를 입었다. 부드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자는 티셔츠를 세탁할 때마다 섬유 유연제를 왕창 넣었다. 혹시라도 구조가 아토피 때문에 다시 고생할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구조가 입고 있던 청바지는 남자의 조카가 구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구조는 물려받은 옷들이 많았다. 서운할 법한데도 구조는 볼멘소리 하나 없이 그 옷들이 새것 인양 기뻐하며 좋아했다. 구조는 그런 아이였다.
목에 걸 수 있는 벙어리장갑은 남자가 구조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사 준 것이었고, 큐빅이 박힌 별 모양 귀걸이는 구조의 양쪽 귓불에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 구조는 특별한 날에만 그 앙증맞은 귀걸이를 걸었다. 아이돌 가수의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은 구조가 색깔별로 모으고 있는 것이었다.
삼 년이 넘도록 신었던 운동화는 구조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스텔 톤 이었고 밑창이 튼튼해서 구조의 발을 온전히 감싸주었다. 구조가 뛰고 걸을 때, 운동화는 지면과 발 사이에서 그 걸음걸음마다 구조의 발목을 견고하게 지켜주었다. 순면 팬티와 와이어가 없는 브래지어는 남자가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구조의 몸에 맞도록 직접 고른 것이었다.
가방 안의 물건들은 가격이 있었다. 구조가 남긴 영수증에 그 아라비아 숫자들은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숫자들은 구조가 아니었다. 가방 안의 물건들도 구조가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구조를 남자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작은 일에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는 남자의 딸을.
남자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알 필요가 있었다. 대체 구조에게 그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이유 때문에 몸에 걸치고 있던 물건들과 한 장의 영수증만 남긴 채 사라져야 했는지. 그 애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남자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얼빠진 사람처럼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남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구조가 온전히 품 안에 돌아올 때까지, 남자는 어디든 찾아가고 또 물어볼 생각이었다. 눈꽃광장 목련 나무에 하얗게 눈꽃이 피었다.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붉은 뺨 위에 떨어진 눈송이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작달막한 흔적을 남긴 채.
- 없는데요.
영어 선생은 빨간색 플러스 펜을 들어 출석부에 16번 칸을 반으로 가르는 빨간 줄을 그었다. 키가 크고 몸이 말라서 나무젓가락이 별명인 그 애는 책상 위에 군청색 교복 블레이저와 교복 바지, 뿔테안경, 검은색 전자 손목시계, 와이셔츠와 교복 넥타이, 민소매 러닝과 사각팬티, 캐릭터 양말, 삼선 슬리퍼와 제 이름 석 자가 박힌 명찰을 남기고 사라졌다. 16번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 옷가지들을 아이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고, 구조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물량이 평소의 여섯 배까지 늘어나는 연말이었다. 남자는 허리 펼 새 없이 일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일감이 눈 쌓이듯 쌓였다. 남자는 주야간 마다하지 않고 특근을 신청했다. 적게는 여덟 시간에서 많게는 열 시간까지 일했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물건들은 쉼 없이 미끄러져 다가왔고 또 멀어져갔다.
남자는 제 통장에 들어갈 숫자를 하나하나씩 옮겨넣는 상상을 했다. 큰 물건은 9, 작은 물건은 0. 통장에 찍힌 숫자들은 아버지의 병원비며, 구조의 급식비로 바뀔 것이었다. 조붓한 부엌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을 생각을 하면 절로 힘이 났다.
야간작업을 끝마친 남자의 몸은 땀으로 푹 절어 있었다. 남자는 근처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24시간 콩나물 해장국집에 들어가 해장국을 먹었다. 국물에 밥을 모조리 말아 후루룩후루룩 물 마시듯 씹어 삼켰다. 국물은 적당히 칼칼하고 시원하니 매콤했다. 밥을 먹지 못하면 힘을 쓰지 못했다. 남자의 아버지는 늘 “밥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쌀을 살 수 있고 쌀을 사야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고 귀가 아프게 말했다. 아버지의 말은 논리적으로 허점이 없었다. 아버지는 너무 늙고 병들어 밥을 먹어도 일을 할 수 없는 나이였으나 꿋꿋이 폐지를 모았다. 말려도 소용없었다.
해장국집에서 나왔을 때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과 비가 뒤섞여 바닥이 온통 질척거렸다. 하얗게 눈이 쌓인 곳을 디뎠다가 남자는 낭패를 보고 말았다. 평지가 아니라 물이 고인 웅덩이였던 것이었다. 차가운 물이 운동화 안쪽으로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남자는 서둘러 발을 빼고 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구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구조는 49,800원짜리 점퍼와 8,500원짜리 티셔츠, 45,000원짜리 청바지, 10,000원짜리 장갑과 6,000원짜리 귀걸이, 1,000원짜리 양말과 37,500원짜리 운동화, 6,900원짜리 팬티와 12,000원짜리 브래지어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경찰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보호자 되시죠, 로 시작된 조사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라졌죠, 로 끝이 났다.
사람들이 걸치고 있던 물건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는 일은 최근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옷과 시계, 양말과 신발은 제 주인의 몸에 감겨 있던 모양 그대로 남았다. 허물만 벗어놓고 어디론가 가 버린 것 같기도 했고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는 사람 모양의 화석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원인을 두고 갖은 소문이 무성했지만, 가설과 풍문들이 너무도 많아서 무엇이 믿을 만한 것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어떤 날은 수많은 사람이 별안간 동시에 사라지기도 했다. 모두 안타깝게 여기기는 했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원인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인도 아니었고 실종도 아니었으며 질병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라진 사람들의 옷가지 안에서 하나같이 기묘한 영수증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영수한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국세청에서도 난감을 표했다. 행정상 분류되는 항목이 없었기에 사라진 사람들이 남긴 영수증은 그 어떤 부처에서도 맡아 처리하지 않았다. 수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형식 치레일 뿐이었다. 결국은 각자 알아서 영수증을 처리해야 했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물건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주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 몸만 사라진 채 남았다. 이를테면 신발 안에는 양말이 들어 있고 바지 안에는 팬티가 들어 있는 식이었다. 물건들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버스 정류장에 기대어 있거나 사무실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물건 주인의 몸이 투명하게 변해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연히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영수증과 함께 태운다고 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장례를 대신했다.
구조는 공공도서관 청소년센터 열람실 구석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구조의 물건들은 구조가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문제집과 색색의 볼펜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관리자는 불이 꺼져 있어서 몰랐다고 했다. 남자는 패딩 점퍼를 붙들었다. 영락없는 구조의 뒷모습이었다. 점퍼에 매달린 후드 모자를 조심스럽게 벗겨 보니 머리칼이 있어야 할 자리에 허공이 있었다. 남자는 몇 번이고 그 허공을 움켜쥐어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점퍼를 들어 올리자, 안쪽에 있던 티셔츠와 속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들을 주워 모았다.
공공도서관 청소년센터 직원이 남자에게 내민 서류는 세 장이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무엇인가 잔뜩 적혀 있었다. 이게 뭐죠. 남자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몇 번이고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구조의 물건을 수령하는 형식 치레 같은 것이라고, 분실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한데 간단히 공증을 해 두려는 것일 뿐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남자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재촉하는 통에 얼렁뚱땅 이름을 적어넣고 말았다.
그것이 공공도서관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일종의 동의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동료들은 구조의 일을 진심으로 안타까워 해주었다. 남자는 전원이 나간 것 마냥 멍하니 멈춰 서 있곤 했지만 컨베이어 벨트는 스물네 시간 멈추는 일이 없었다. 박스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제시간에 맞춰 마감을 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 무렵 남자는 누가 불러도 저를 부르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작업반장은 며칠 쉬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남자가 구조의 옷가지 안쪽에서 영수증을 발견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얼룩 때문에 남자가 읽을 수 있는 글자보다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남자는 홀린 듯 영수증을 뒤집어 보았다. 할부거래계약서의 내용이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영수증이었지만 구조의 옷가지에서 나온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단순한 영수증은 아니었다.
영수증 상단에 적힌 주소대로 찾아가면 실마리가 보일 듯했다. 어쩌면 구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구조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물건들을 태우는 대신 여행 가방에 담았다. 옷가지들은 모서리를 잡아 반듯하게 접고, 물건들은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커다란 여행 가방 안에 빈 공간 없이. 남자는 구조의 사진을 조심스레 안주머니에 넣고 영수증을 보았다. 주소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찾아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남자는 무작정 그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무의로는 육각형 모양의 눈꽃광장을 통과하는 도로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육각형의 바깥 꼭지 부분에는 파출소와 차량등록사업소, 마트, 병원, 어린이집, 복지관이 각각 자리해 있었다. 광장보다 더 큰 육각형 모양의 상가단지들이 광장을 감싸고 그보다 더 큰 육각형의 땅에 주공아파트와 주택단지들이 빼곡하니 들어서 있었다. 주변은 광장을 중심으로 같은 동심을 가지고 육각형이 퍼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광장을 통과하는 무의로와 육각형의 각 꼭짓점으로 연결된 길들이 네 개가 더 있었다. 무의로 1길에서 무의로 4길까지.
광장을 통과하는 무의로 주변에는 건물이 없었다. 남자는 무의 4동 9-89번지와 무의 4동 98-9번지를 검지로 짚어 찾았다. 지번을 쓰는 기존의 주소와 새로 바뀌었다는 도로명주소가 남자의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남자는 볼펜을 들어 영수증에 적힌 주소 일곱 글자를 손등에 적어보았다. 무의로 4989. 볼펜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남자의 손등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행인을 붙잡고 여기가 무의 4동이 맞느냐고 물었다. 행인은 한마디 대꾸 없이 ‘무의로’라고 쓰인 주소 표지판을 가리켜 보였다. 남자는 주소가 가리키는 곳을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종이 지도와 휴대폰 액정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던 행인은 무어라 말할 것 같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빠른 걸음으로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어 보이거나 남자의 커다란 여행 가방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볼 뿐, 이렇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축은행에서 숫자들을 관리했다. 작고 파리한 얼굴의 그녀는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축이는 버릇이 있었고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고 눈을 늘 내리깔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투명한 유리 벽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유리 벽 너머에 존재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나른하고 느긋한 동작으로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에는 그녀가 정리해 준 숫자들이 가지런히 찍혀있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숫자들보다도, 남자를 사로잡은 것은 가지런한 그녀의 손톱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통장을 내미는 찰나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의 손톱에는 옅은 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고 가끔 그 위로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기도 했다. 남자는 통장을 받을 때 창구 위에 일부러 제 손을 내밀고 오랫동안 주춤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이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앞머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치 안쪽에 엉킨 실타래처럼 배배 꼬인 무엇인가 포슬포슬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럴 때마다 남자는 어린 시절에 과수원에서 보았던 사과 꽃을 생각했다. 남자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새벽녘에 남자는 그녀가 깨지 않게끔 조심조심 일어나 곤히 잠든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암청색의 새벽빛이 그녀의 얼굴을 어른어른 비추었다. 그녀의 배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았는데, 화답하듯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찰나였지만 아이가 닿은 손바닥 한가운데 따뜻한 물방울 같은 게 똑, 떨어져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구조는 이듬해 태어났다. 남자는 갓 태어난 구조를 품에 안고 2.8kg이라는 무게의 숫자에 대해 생각했다. 구조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작았다. 구조는 설탕 알갱이를 흩뿌려 놓은 듯 새하얀 배냇저고리를 입고 방싯방싯 웃었다.
무의로 4길 9-89는 빌딩이었다. 남자는 회색빛 건물 앞에 붙어 있는 건물번호판을 확인한 뒤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바람에 바닥에 붙어있던 고무 패킹이 쓸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안내데스크가 있었으나 그 안에 사람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모양인지 건물 안은 적막했다.
남자는 안내데스크 안쪽의 건물 층별 안내도를 보았다. ‘(주)’라는 글씨로 시작하는 회사가 너무 많았다. 남자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일 층부터 칠층까지 너무도 많은 글씨가 깨알같이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자들이 남자의 눈앞에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때마침 승강기 문이 열렸고 누군가 내렸다. 유니폼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여자는 태연하고 느린 걸음으로 안내데스크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가 저기요, 하고 입을 열자 그제야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 여기가 무의로 4길 9-89 맞지요?
- 방문 약속 하셨나요?
남자는 영수증을 조심스레 꺼내어 여자 앞에 펼쳐 놓았다. 영수증 맨 위의 상호를 검지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따라 읽고선 이런 회사가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외부인 방문일지’라고 적힌 종이를 건넸다.
- 작성하시고 기다려 주세요.
이름과 나이, 주소, 방문 일자 같은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남자는 빈칸을 적어 내려가다가 방문 목적에서 멈칫거렸다. 한참 후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건조한 목소리가 실내에 작게 울렸다.
- 없는데요. 그런 회사.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안내데스크 위에 올려두었다. 구조의 셀프 카메라 사진이었다. 여자의 눈앞에 사진과 영수증이 나란히 놓였다. 남자는 그것들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 우리 딸앤데요. 이걸 남겼어요.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작게 벌린 입술 틈새로 숨을 가쁘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자꾸만 갈라지고 새서, 가래를 끌어모아 삼킨 뒤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남자는 영수증 맨 위의 상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길 찾아가야 하는데요.
- 이 건물엔 그런 회사가 없어요.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때맞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않고 바닥에 쭈그려 앉더니 안내데스크 안쪽에서 부스럭거렸다. 여자가 꺼내 든 것은 빨간색 지갑이었다. 여자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어 영수증 옆에 올려두었다.
만원에 그려진 세종대왕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영수증과 구조의 사진만 조심스레 안주머니에 넣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지갑에 만원을 다시 쑤셔 넣으며 전화를 받았다. 남자의 추레한 뒷모습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삑, 삑. 남자의 낡은 운동화 뒤축이 대리석 바닥에 맞부딪는 소리가 건물 로비에 울렸다.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날씨였다. 남자는 가방을 고쳐 들었다. 찬바람에 얼굴이 시뻘겋게 얼어붙고 손이 자꾸 안으로 곱았다. 건물들은 예상했던 위치에 있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무의로 4길에서 건물 고유번호판에 쓰인 숫자를 쫓아 휘어진 골목길 내부로 한참 들어가다 보면 숫자가 점점 커지다가 막다른 길이 나오면서 끝나기도 했고 그럴 경우에는 다시 골목에서 나와서 다음번 블록에서 시작하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작은 골목에는 어떤 길이라든지 그런 이름이나 명칭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이리저리 걷다 큰 대로변이 나오면 무의로 3길이거나 무의로 5길이기 일쑤였다.
각 꼭짓점으로 향하는 길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게다가 육각형의 각 꼭짓점은 맞닿아 있는 다른 구역의 시작점도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엉뚱한 길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길이 넓든 좁든 길옆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고 공사현장이 나타나면 숫자가 끊어졌다. 공사현장에는 고유번호가 없었다. 공사현장을 통과해 지나쳐 갈 수 없기 때문에 남자는 어림으로 건물들의 번호를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무의로 4길에서 90번대 건물들은 언덕 위에 있었다. 남자는 가방을 둘러업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언덕의 응달진 부분은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남자는 몇 번이고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가까스로 외벽을 부여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남자의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코트 안엔 셔츠 한 장뿐이었는데 그 또한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 남자는 목을 한껏 움츠리고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무의로 4길 98-9는 오피스텔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출입 카드가 있어야 했다. 빨간색 글씨로 감시카메라 녹화 중,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이 유리문에 붙어있었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유리문에 얼굴을 붙이고 안쪽을 살폈다. 실내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유리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에 안쪽에서 웬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경비’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 노인은 소란에 대해 욕을 섞어 화를 낸 다음 몇 층 몇 호냐고 물었다. 남자는 영수증 상단에 적혀 있던 회사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 몰라. 내가 어제부터 일을 시작했거든.
- 그럼 이 건물에 회사 명단 같은 것도 없나요.
- 나는 몰라. 외부인 출입 금지니까, 얼른 나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이 남자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남자는 경비실에서 유리문 앞까지 순식간에 떠밀렸다. 노인은 온몸을 기울여 남자를 밖으로 밀쳐냈다. 남자도 이를 악물고 노인에게 들이덤볐다. 그 와중에 노인의 완장이 떨어져 나갔다. 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아 완장을 살폈다. 그 틈을 타 남자는 재빨리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며 층별 안내도를 찾았다. 안내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남자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남자는 노인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연결되는 철문을 열었다. 비상구를 가리키는 초록색 등 덕분에 난간이 겨우 보였다.
그때였다. 뒤따라온 노인이 남자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노인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세기의 악력이 남자의 발목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는 계단에서 구르며 넘어졌고 여행 가방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남자의 손을 떠난 가방이 계단 밑으로 미끄러졌다. 가방은 어딘가에 부딪혔고 뚜껑이 활짝 열린 채로 나뒹굴었다. 구조의 옷가지며 속옷이 계단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퉤. 노인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노인은 손전등으로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빛 때문에 남자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노인이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순 변태 아냐,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구조의 옷가지를 주워 담고 허둥지둥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가방은 잠금장치가 망가졌는지 더 이상 닫히지 않았다. 남자는 반쯤 열린 여행 가방을 앞에 두고 주저앉았다. 남자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구조의 옷가지를 다시 반듯하게 개어 넣었다. 무의로 4길 9-89도 아니었고, 무의로 4길 98-9도 아니었다. 남자는 손등에 적힌 일곱 글자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무의로 4989.
해가 떨어져서인지, 바람이 불어서인지, 언덕길은 꽁꽁 얼어붙어 어느새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여행 가방을 안고, 다른 손으로 전봇대를 짚어가며 느릿느릿 한 걸음씩 내디뎠다. 노인에게 잡혔던 발목 주위가 욱신거렸고 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부딪히고 까진 곳이 쓰라렸다. 길거리며 건물 간판에 불빛이 환했다. 어디선가 캐럴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그제야 종일 먹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걸음은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졌다.
조금씩 흩날리던 싸락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는 하늘에서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남자는 눈앞의 허공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남자는 눈꽃광장 벤치에 누워서 투박한 제 손을 들어올려 보았다. 손가락 새로 눈송이가 들러붙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남자는 허공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언젠가 무심코 구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듯. 손끝에서 눈이 녹아 흘렀다. 남자는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 아부지.
- 왜.
- 양계장 가보셨어요?
- 글쎄다, 고향 살적에 닭을 치는 집들이 있었다만.
- 요새는 닭들이 밤낮없이 알을 낳게 하려고 스물네 시간 불을 켜둔대요.
- 요새 계란 한 판에 얼마냐.
- 육천 원이요.
- 한 알에 이백 원이나 하는구나.
- 끊을게요.
- 알았다.
여행 가방 안에는 구조가 남긴 것들이 들어있었다. 어느 겨울날 남자는 구조의 교복이 얇은 것 같아 패딩점퍼를 샀다. 구조는 점퍼를 받아들고 만세를 부르며 남자를 끌어안았다. 구조는 그 점퍼를 교복 재킷 위에 매일매일 입고 다녔다.
베이지색 터틀넥 티셔츠는 구조가 겨우내 입을 수 있도록 여 댓 벌을 사 둔 것이었다. 구조는 한겨울이면 교복 와이셔츠 대신 티셔츠를 입었다. 부드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자는 티셔츠를 세탁할 때마다 섬유 유연제를 왕창 넣었다. 혹시라도 구조가 아토피 때문에 다시 고생할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구조가 입고 있던 청바지는 남자의 조카가 구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구조는 물려받은 옷들이 많았다. 서운할 법한데도 구조는 볼멘소리 하나 없이 그 옷들이 새것 인양 기뻐하며 좋아했다. 구조는 그런 아이였다.
목에 걸 수 있는 벙어리장갑은 남자가 구조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사 준 것이었고, 큐빅이 박힌 별 모양 귀걸이는 구조의 양쪽 귓불에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 구조는 특별한 날에만 그 앙증맞은 귀걸이를 걸었다. 아이돌 가수의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은 구조가 색깔별로 모으고 있는 것이었다.
삼 년이 넘도록 신었던 운동화는 구조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스텔 톤 이었고 밑창이 튼튼해서 구조의 발을 온전히 감싸주었다. 구조가 뛰고 걸을 때, 운동화는 지면과 발 사이에서 그 걸음걸음마다 구조의 발목을 견고하게 지켜주었다. 순면 팬티와 와이어가 없는 브래지어는 남자가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구조의 몸에 맞도록 직접 고른 것이었다.
가방 안의 물건들은 가격이 있었다. 구조가 남긴 영수증에 그 아라비아 숫자들은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숫자들은 구조가 아니었다. 가방 안의 물건들도 구조가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구조를 남자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작은 일에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는 남자의 딸을.
남자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알 필요가 있었다. 대체 구조에게 그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이유 때문에 몸에 걸치고 있던 물건들과 한 장의 영수증만 남긴 채 사라져야 했는지. 그 애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남자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얼빠진 사람처럼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남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구조가 온전히 품 안에 돌아올 때까지, 남자는 어디든 찾아가고 또 물어볼 생각이었다. 눈꽃광장 목련 나무에 하얗게 눈꽃이 피었다.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붉은 뺨 위에 떨어진 눈송이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작달막한 흔적을 남긴 채.
변아름
낮에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글을 쓰고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글 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