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공포의 천 가지 형태 / 로스트 하이웨이
공포의 천 가지 형태
숨이 멎을 때까지 우연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래 너 역시 동의할까
내가 너를 들여다보려 애쓰던 나날 네가 허벅지를 죽죽 그어대던 장면을 본, 그 순간에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갔지 나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지만 끝내 우연이라고 정의 내렸다
네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 살의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한번은 너에게 물은 적도 있었지만 너는 자신도 누굴 죽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살의는 그저 살의라며
그래 나는 슬픈 척해도 들키지 않고 그래 죽고 싶다는 말을 삼킨 채 영원을 바란다 말하고 그래 이런 마음도 누가 엿볼 수 있는 걸까
내가 구토를 하면 너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목 뒤가 견딜 수 없이 가려워졌다
서로의 악취미를 숨기며 나는 알약을 너는 칼을 쥐고 그래 너는 이 모습이 가장 슬픈 마음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아마도 살인자를 죽인 살인자를 죽인 살인자의 이야기
죽음은 미래의 마지막 모습이다 온전한 영혼 따위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후를 상상하면 몇 개의 거대한 문과 누군지 알 수 없는 심판자가 떠올라서 더는 조각날 수 없을 때까지 파편적으로 갈라지는 영혼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나는 나의 마음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그것은 와르르 무너져 쏟아지는 진열장의 유리컵이거나 단거리 경주를 끝마친 이의 심장이거나 바닥에 엎질러진 백색 알약이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감당할 수 없는 폭설과 맹목적인 살의, 목매단 사람의 발버둥 같은…… 나는 숨을 쉬기 버거울 만큼 발작하는 것들을 사랑했다 마음을 죽인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데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싶었다
유리 위로 입김을 불면
물결이 새겨지는 것처럼……
어떤 이별은 견딜 수 없는 비명을 동반한다 새를 묻는 살인자는 새와 인간의 비명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 했다 죽기 전 남자가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잘 가 다음에 만나, 였다 연인은 죽은 남자를 따라 죽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은 채 오래도록 물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여름의 익사자가 살인자의 발목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중력이 발생한다 내가 너를 끌어당기고
네가 나를 당기는,
그래 너는 나쁘고 나는 나쁘고 우리가 나빠서 이런 마음으로는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번지는 입김 위로 그림을 그리면
지문이 새겨지는 것처럼……
그래 나는 길고양이를 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습관을 가졌지
속도라는 말이 무의미할 만큼
조심스럽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
알고 있었어 그날 밤 너는 취한 몸을 비틀거리며 내게 쏟아졌고 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무엇을 잊은 거냐고 물었고 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새벽의 색채에 대해서 물었지만 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익사자의 연인에 대해 물었고 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살인자를 죽인 살인자를 죽인 살인자와 세계의 우연과 우리의 규칙과 새와 인간의 차이점과 나의 마음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너는 죽이고 싶다고 말했고 누구를 죽이고 싶냐고 물었을 때 너는 말할 수 없다고 했지 다음날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기억해봐
너는 피와 살 밖에 없다고 했지만
내가 너에게 영혼을 바랄 때
마음은 이미 상해가고 있었지
그래 너는 끝내 잠에 빠지고 그래 나는 슬픈 표정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으로 슬펐던 게 언제인지, 미래에 마지막으로 슬프게 될 때가 언제인지 생각하게 되고 그래 나는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래 나는 목소리를 망가뜨리고 마음을 소거하고
갈라지고
조각나고
호흡하고
갈라지고
조각나고
호흡하고
유리처럼 물결처럼
나는 문득 사라져
로스트 하이웨이
외면하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사건 사이에서
석고상을 조각하는 사람은 어느 표정을 사랑할까
나는 내가 충분히 슬프지 않다는 게 두려워
심판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세상을 내려놓거나 망가뜨리고 싶었지
우리의 시간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말
나는 침묵에 잠기고
네가 사랑에 잠기는 순간
해변에서 자살을 결심한 이는 오늘도 자살에 실패한다
파도는 그가 망설이던 발자국을 지우지만
실패하고 떠나는 발자국은 그대로
그날 우리는 날이 저물고 사람들이 사라지는,
고요가 찾아오는 시간을 기다렸고 밤의 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지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몰라
호수를 산책하자고, 네가 액셀을 밟아 속력을 높이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터널, 그 빛 속을 빠져나왔을 때
가늘고 기다란 빛 하나가 나를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달이 부서질 듯이 기울어진다
바깥 풍경과 나의 얼굴이 겹쳐 보이자 나는 호수에 잠겨 있었다 수많은 가로등도 수많은 아파트도 단 하나의 달도 모두 잠겨서
네가 왜 호수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아 바다는 파도를, 숲은 나무를 반복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버려서
산책로에는 산책로의 규칙이 있으나 밤은 혼절하고 잔디는 뒤엉키고 새의 울음, 물의 냄새, 너무 늦어버렸어 죽기에는 너무 많은 숨을 쉬어버렸으니까, 마음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것
너에겐 반복이 필요했다
어제와 오늘의 일상이 똑같다면, 그렇게 매일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시간이 뒤엉키게 된다면
달이 부서질 듯이 기울다가
끝내 부서지지 않듯이
조각을 끝마친 사람은
자신의 표정과 석고상의 표정을 비교하며,
웃거나 울거나
아니면 그 중간쯤의 표정으로,
그러나 완성된 석고상은
영원히 그 표정을 유지할 것이다
되돌릴 방법도 없이
되돌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채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한 이는 다시 해변을 찾아간다
바닷속으로 이어지는 발자국을 바라본다
우리는 동시에 죽지 못할 거야
나의 시계와
너의 시계 초침이 어긋나게 움직이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지만
어디서부터 왔는지 과거를 잊고
그러나
우리는 분명 밤의 도로를 지나왔는데
죽은 사람은 이제 기억을 버린 채 사라질 것이다
남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것이다
달은 다시 떠오른다
호수를 떠나 다시 밤의 도로로,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 대신 음악이 흐르지
청력이 무의미해질 때까지
어디라도 좋겠어 계속 계속 계속해서 가빠지는 속력과
관통하는 빛과
가라앉는 표정과
무작위로 분열하는 마음과
침묵에 잠기지 않고
사랑에 잠기지 않는다면
나는 빌고 빌었지
내가 세계에서 온전히 제외되기를, 그게 아니라면 세상 전부 망가뜨려달라고
얼굴을 적시며 빌었다
나의 작은 신에게
양안다
나는 죽고 싶고 너도 죽고 싶어 한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 너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 모두 시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2018/06/26
7호
- 1
- Sia, ‘1000 Forms of F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