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츠오
자정이 되면 마마는 후미키리 가라오케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국숫발 같은 8차선 사거리를 느긋하게 건넌 마마는 츠오칸쇼쿠 그러니까 츠오한식당을 향했다. 사방의 경적에도 무심한 자태가 과연 신오오쿠보 한인타운의 여왕다웠다.
마마는 츠오와 후미키리의 사장이었다. 이름은 김광자(金光子)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일본인들에겐 카네모토 미쓰코였으며 우리에겐 그저 마마였다. 이유는 없었다. 부르기보단 알아듣기 쉬워서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이른바 낙하산으로 올해 초부터 츠오의 직원 신세였다. 학생비자의 불법 노동이니 근로계약서도 필요 없었다. 그런 주제에 면접장이랍시고 올라간 곳이 츠오의 이층이었다. 나는 그 새벽에 츠오의 첫 끼를 받아먹었다.
여긴 식당이니 먹고 싶은 건 뭐든 먹어.
마마는 그렇게 말하며 위생봉투에서 배추김치를 한 조각 집어 먹었다. 반찬은 그것과 역시 위생봉투에 담긴 생양파가 전부였다. 그보다 나은 걸 얻을 먹을 거란 기대를 말끔하게 버렸다. 나무 의자 등받이의 얼룩무늬 인조 가죽이나 분홍색 한복 공단 커튼 같은 정체불명의 인테리어를 보다보면 있던 입맛도 떨어졌다. 가게에 진동하는 삼겹살 냄새도 느끼하기만 했다. 밥에 김치를 올려 한입에 넣었다. 놀라울 정도로 맛이 없었다. 배추와 설탕과 소금과 고춧가루가 죄 따로 뛰놀고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기무치'인가, 싶었다. 이 나라의 실재를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더 꽉꽉 씹어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김치가 맞았고, 다만 마마의 솜씨였다. 식사와 함께 면접도 끝났다. 마마는 나 개인에 대해서는 서운할 정도로 묻지 않았다. 다만 빈 밥공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오오쿠보는 12시간 체제로 돌아갔다. 나는 주말을 제외하고 오후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저녁 시간엔 보통 열 테이블 정도의 손님들만 오갔다. 옆 동네 가부기초 환락가의 영향인지 자정 무렵이 그나마 바빴다. 전통적인 재일교포들의 터에서 마마 같은 키타조센 출신들이 가게를 갖는 건 드물었다. 키타조센은 일명 조선학교로 강점기 시대부터 북한 교포들의 후손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치사하고 폐쇄적인 한인사회에서 키타조센은 화류계나 야쿠자로 빠지기 쉬웠다.
마마도 젊었을 땐 어땠는지 모르죠.
배진수가 말했다. 하긴 마마는 툭 튀어나온 눈썹 뼈 아래로 옴폭 쌍꺼풀이 진 눈 하며 오뚝한 콧날이 평범한 인상은 아니었다. 3년 차 유학생 배진수는 츠오의 베테랑 직원이자 나의 선생이었다. 그에게서 신오오쿠보의 모든 걸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마가 재일조선인협회 회비가 아까워 등록조차 하지 않은 것도 그에게서 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마마는 돈놀이나 여행 같은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한마디로 사장보다는 주인에 어울리는 여자였다. 마마를 보다보면 츠오와 후미키리는 언제까지고 건재할 것 같았다.
츠오의 최고 단골은 역시 장씨 아저씨였다. 장씨 아저씨는 마마의 오랜 친구로 역시 키타조센 출신이었다. 아저씨는 그 땅딸막한 키와 어울리지 않게 야쿠자를 상대로 장사를 한다고 했다. 아저씨는 주로 혼자 츠오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나갈 땐 돈 대신 우리 어깨를 몇 번 쳐줄 뿐이었다. 듣기로는 마마에게 평생 밥을 얻어먹어도 될 만큼의 돈을 빌려줬다고 했다. 아저씨가 다녀간 걸 알게 될 때마다 마마는 욕을 하며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공짜 밥을 주지 말라 엄포를 놓았다. 말을 들을 배진수가 아니었다. 배를 쓰다듬으며 츠오를 나서는 장씨 아저씨의 등에 대고 배진수는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마타오시테 구다사이!(또 오십시오!)"
내 첫 손님은 야쿠자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마마부터 찾았다. 배진수는 능숙한 일어 실력을 발휘하며 가장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일명 귀빈석이었다. 키타조센들이에요. 배진수가 속삭였다. 그리고 쟁반에 밑반찬과 삼겹살을 담아 내게 내밀었다.
"삼겹살은 형이 구워요."
"나만?"
"네. 여기 법칙이에요."
법칙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배진수가 아니었다. 야쿠자들 앞에 간장 종지와 쌈장, 약간의 밥과 위생 봉투에서 꺼낸 김치를 내려놓을 때였다. 하나같이들 뭉뚝한 새끼손가락들을 보고 말았다. 인주가 필요 없는 그들만의 도장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들은 소주를 마시며 심각하게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달군 불판에 삼겹살이 올라가는 순간, 그 절대적인 소리에 정적이 흘렀다. 고기에 슨 얼음이 녹아내리고 하얀 지방질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야쿠자들이 삼겹살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방질이 기름으로 변하고 살코기에 살짝 갈색빛이 돌았다. 뒤집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하게 잘 익은 뒷면이 드러났다. 기름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인생 최고로 잘 구운 삼겹살이었다.
"얏바리, 스게(역시, 대단해)."
대단하다니. 그래, 츠오에서 가장 대단한 건 삼겹살이었다. 그 잔혹하다던 야쿠자들도 불판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삼겹살을 가위로 한 점씩 잘라냈다. 야쿠자 앞에서 가위질을 하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더는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잘 구운 삼겹살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각자의 접시에 삼겹살을 소복하게 담았다.
"도죠 메시아캇테 구다사이(맛있게 드세요)."
배진수에게 배운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두 손을 모르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가게 귀퉁이로 물러섰다. 삼겹살이 야쿠자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배진수가 전화를 했는지 마마가 왔다. 카운터는 마침 함께 있던 장씨 아저씨에게 맡겨두었다고 했다. 마마는 시키지도 않은 맥주 세 병을 자연스레 꺼내 들고 합석을 했다. 그리고 소녀처럼 쾌활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마마는 술을 아주 많이 마셨고 또 많이 마시게 했다. 안주는 삼겹살 빼고 다 먹었다. 옆에서 권해도 손바닥을 보이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대신 소주를 바로 한 잔 비워 박수를 받았다. 야쿠자가 따로 없었다. 마마는 그런 식이었다. 일본인에겐 일어를 했고 한국인에겐 한국어를 했으며 키타조센 출신에겐 북한말 특유의 콧소리 섞인 일어를 했다. 재일교포나 중국인들은 그냥 무시했다.
첫 주말 밤이었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은 어때? 할 만하니? 사장이 잘 해줘? 엄마가 메신저 어플로 무료 국제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일 괜찮아. 할 만해. 아빠한테 말 좀 잘 해줘. 그리고 엄마,"
나 고기 먹고 싶어. 하마터면 철없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주중 내내 구웠던 삼겹살 때문이었다.
"건강하시라고요."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쉬워도 너무 쉽게 감동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들을 셋이나 낳아놓고 막내인 내게 특히 그랬다. 그런 엄마가 기약도 없는 유학을 허락할 정도로 한국에서의 나는 여러 방면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유학이라 해봤자 일종의 사이버대학이었다. 매일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고 한 학기에 두 번 교토의 학교로 가서 시험을 치면 학위는 나왔다. 학위에 목메지 말고 일어나 확실하게 배우란 뜻이었다. 한국보다 조금 더 비싼 학비가 최후의 집안 후원이 돼야 했다. 내 이십 대 후반에 대한 이 플래닝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가능하다면 여기서 자리를 잡아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능동적 의지를 발휘하는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일본까지 쫓겨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엄마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인사를 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군대로 돌아온 것 같아 서글펐다. 노트북을 켜 강의에 접속했다. 알 수 없는 일본어로 역시 알 수 없는 경영학 원론을 들으려니 미칠 노릇이었다. 답이 틀릴 때마다 '여기서 자리 잡기'를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강의를 켜둔 채로 웹서핑을 시작했다. 시험은 어떻게든 족보를 사서 낙제만 면할 생각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러나 여긴 아버지의 친구분 댁의 쪽방이었다. 츠오에 간 것도 그분의 소개 덕분이었다. 얹혀사는 신세니 물 한 잔 함부로 떠 마신 적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라도 배불리 마시고 싶었다. 등 뒤로 차분한 일어가 들려왔다. 밤하늘이 유난히 새카맸다. 불판 위에서 익어가던 삼겹살이 떠올랐다. 엄마보다 더 그립다는 게 죄스러웠다. 하긴 엄마는 이제 공짜나 다름없지만 삼겹살은 한국보다 세 배가 비쌌다.
마마는 후미키리에서 츠오에 오면 항상 매상과 잔돈부터 체크했다. 그러면 배진수는 나무계단을 삐걱삐걱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주방이모는 내게 배진수가 돈을 훔치다 걸린 적이 있다고 슬쩍 말해줬다. 배진수나 나나 분수에 맞지 않는 유학을 와서 생고생을 한다며 걱정 같은 욕도 했다. 배진수는 가끔 주방이모를 졸라 손님들이 먹다 남긴 부추전이나 맨밥을 얻어가기도 했다. 이모는 자기 것도 아니면서 그걸 아까워했다. 그러는 이모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마마 몰래 음식을 해서 딸의 대학 기숙사로 가져갔다. 딸의 유학만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 자기 가게를 차리는 게 이모의 꿈이었다.
정산이 끝나면 마마는 나를 후미키리로 보냈다. 후미키리 카운터에는 언제나 똑같은 액수의 잔돈이 들어 있었다. 가라오케 관리는 삼겹살 구워주기보다 만 배는 행복한 일이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돌릴 수도 있었다. 훌륭한 일터였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긴 했다. 피였다.
후미키리 손님의 반은 한국인이었고 나머지 반은 키타조센과 동남아인들이었다. 마마는 동남아인들이라면 무조건 베트남 놈들이라 싸잡았다. 술은 가부키초에서 먹으면서 끝장은 신오오쿠보에서 본다는 거였다. 끝장엔 칼, 소주병, 사케병, 가끔은 무선마이크도 사용됐다. 마마가 자정에 츠오로 넘어오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배진수에게 듣기론 몇 년 전 마마는 후미키리 카운터를 보다가 베트남인이 휘두른 사케병에 팔을 찔렸다. 피가 철철 흐르는 팔뚝을 부여잡고 지상으로 달아났지만 하필 사거리 신호등이 고장 나 있었다. 마마는 횡단보도 앞에서 이십분을 서 있었다. 다가오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츠오에 도착한 마마는 주방에서 소주 한 병을 팔에 붓고 앰뷸런스를 불렀다. 마마가 사거리 신호를 지키지 않은 건 그때부터였다.
베트남 놈들은 결코 경찰을 부르진 않았다. 소란이 끝나면 그들은 배, 혹은 머리에서 피가 나는 제 동포를 한마음으로 이고 지고 지상으로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계산은 깔끔했다. 카운터에 앉아 그 꼴을 보고 있자면 동포에 대한 못 견딜 사랑 때문에 칼춤을 추나 싶었다. 여남은 일은 다 내 몫이었다. 마마에게 연락을 하면 잠시 후 장씨 아저씨가 노란 용액이 담긴 생수병을 들고 등장했다. 정체불명의 그 용액은 냄새는 독하지만 효과는 강력했다. 나는 아저씨와 나란히 쭈그려 앉아 세척액을 묻힌 수건으로 소파에 스민 피를 닦아냈다. 가죽 광택제가 녹아내리는 역한 냄새가 피비린내까지 소독했다. 아저씨는 코 막힌 소리로 내게 이것저것 묻곤 했다. 주로 츠오의 경제 사정과 마마에 대한 것이었다. 아저씨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북한말 같은 울림이 있었다. 타지에 나오니 그런 것조차 친근했다.
"마마가 네 월급은 잘 주는가?"
"아직 한 달도 일하지 않아서요."
"만만하게 굴면 나중에 골치 아파져. 여긴 원래 그래. 야찡은 안 하고?"
야찡은 숙박을 뜻했다. 배진수와 주방이모의 야찡은 월 삼만 엔짜리였다. 조악하다 들었을 뿐 가본 적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친구 집 골방에 얹혀산다고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킬킬 웃었다.
"그건 진짜 잘하는 일이다."
"왜요?"
"광자랑 돈으로 엮어서 좋을 거 하나 없지. 그 점만 빼면 다 좋은 여잔데 말이야."
바로 그 점이 문제란 얘긴 안 했다. 오오쿠보에 있는 마마의 맨션에 아저씨가 들락거린단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는 생수병 뚜껑을 꽉 닫고는 후미키리를 나섰다. 나는 혼자서 룸을 닦고 깨진 유리를 정리했다. 수건은 싱크대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오랫동안 빨았다. 그래도 남아 있는 핏기는 삶아서 빼야 했다. 후미키리 가스레인지는 원래 간단한 안주 조리용이었지만 소방 점검에서 낙제점을 받아 사용금지처분을 받았다. 마마는 돈 벌려고 쓰는 게 아니니 뭐 어떠랴 하는 태도였다. 정리가 끝나면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새 손님을 들여보냈다.
아침 여섯시 경이 되면 배진수가 왔다. 우리는 함께 후미키리를 정리하고 문을 잠궜다. 여섯 시간 만에 만난 고요하고 더러운 신오오쿠보거리가 어슴푸레한 빛 속에 펼쳐져 있었다. 머리가 트이다 마는 기분이었다. 사거리는 한산했지만 우리는 항상 신호를 기다렸다. 그 정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츠오에서의 아침 식사는 얄짤 없이 손님들이 먹다 남긴 밑반찬과 식은 밥이었다. 마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방이모만이 누가 잡을세라 제 방으로 올라가 버린 후였다.
맨드르르한 불판에 감자조림, 오징어채, 고추장, 생양파, 그리고 그놈의 김치가 각각의 봉투에 담겨 있었다. 된장국은 공용 대접에 한가득이었다. 마지막 반찬은 공기 중에 떠도는 고기 냄새였다. 룸에 피칠갑을 해 놓는 베트남놈들보다 고기 한 점 남길 줄 모르는 츠오의 손님들이 더 미웠다. 일본인들은 적게 시키기에 남길 일이 없었다. 한국인들은 많이 시키고 다 먹었다. 중국인들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이 시키고 조금 남기지만 모두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마마는 중국인들이 손댄 건 고기고 반찬이고 싹 버렸다. 성격 좋은 장씨 아저씨도 중국말만 들리면 액땜하듯 침을 뱉곤 했다.
식사 후엔 마지막 과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였다. 일본은 식당을 대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해주는 시설이 따로 있었다. 비용은 한 달에 팔만 엔이었다. 마마는 당연히 신청하지 않았다. 배진수와 나는 양손에 커다란 검은 봉투를 들고 오오쿠보를 향했다. 개발붐에 밀려난 오오쿠보는 신오오쿠보의 화장실 같았다. 폐점한 가게가 많아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더 스산했다. 언젠가 신신오오쿠보 같은 게 생기면 신오오쿠보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다. 츠오나 후미키리보다 빠를지도 몰랐다.
뒷골목의 음식물 쓰레기통들에 츠오의 잔여물을 나눠 넣었다. 나름의 순번까지 있어 특정 가게에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내 기분이 음식물쓰레기만큼 더러워진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나를 위로하는 건 신오오쿠보와 오오쿠보의 경계에 있는 돈가스 가게였다. 색 바랜 푸른 간판에 붓으로 휘갈긴 흰 일어가 소위 일본스러웠다. 안쪽 유리에 붙인 사진들을 보고 돈가스 가게인 줄 알았다. 그 시각이면 항상 주방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싱싱한 파와 양배추, 그리고 당근을 채 썰어 각각 깨끗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을 것이다. 토마토와 돼지고기, 후추와 또 나는 짐작 못 할 재료를 끓여 소스를 만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심 혹은 등심의 지방질을 가위로 세심하게 잘라내고 벽돌 같은 망치로 균일한 두께가 될 때까지 힘차게 치댈 것이다. 그것에 밀가루를 입히고, 후추가 들어간 계란 물을 묻히고 잠시 재워 둘 것이다. 주문이 들어올 때에야 전날 씻어둔 팬에 깨끗한 기름을 붓고 튀김가루를 넣어보겠지. 그것이 튀김이 되어 떠오르면 꽤 두툼해진 고기에도 가루를 꾹꾹 눌러 박을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게 털어 기름에 넣으면…… 삼겹살 같은 건 말끔하게 잊을 수 있었다. 배진수에게 간판의 뜻을 물었다.
"메이진. 명인이요. 메이진 돈카츠."
"명인 돈가스."
넋 놓고 중얼거리는 나를 배진수가 끌어당겼다. 피곤하지 않다면 자기 방에서 맥주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피곤했지만 츠오로 갔다. 3층 복도 끝자락에 자리한 배진수의 방은 네 평이나 될까 싶었다. 창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습할뿐더러 손바닥만 한 창문조차 없었다. 가구라곤 앉은뱅이책상과 옷장 하나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누렇게 바랜 고서들과 프린트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한자는 한일(韓日)이나 역사(歷史) 정도였다. 샤워실은 층 공용이었으며 화장실은 츠오에서 해결하는 것 같았다. 도쿄에서 3만 엔에 야찡을 놓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이런 방을 차마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배진수는 가게 손님들이 남긴 걸 모았다며 사케를 두 병 가져왔다. 언뜻 보면 새것이지만 뚜껑은 따진 상태였다. 컵은 없었다. 남으면 가져가요. 배진수는 선심 쓰듯 말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마마 욕을 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재밌는 건 역시 이혼 이야기였다. 장씨 아저씨와 그 짓을 하다가 전남편에게 딱 걸렸는데 그 장소가 집이라고도 하고 츠오 4층의 빈방이라고도 하고 후미키리 룸의 테이블이라고도 했다. 모두 다라는 소리도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전남편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형 한인 마트를 비롯한 오오쿠보의 가게 여섯 개를 이혼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팔아넘겼다. 고깃집을 운영할 때도 집안 식탁엔 고기 한 점 놓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미루어보아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그는 종적을 감췄지만 한인교포니 갈 곳은 많을 거라고 했다. 마마는 겨우 챙긴 두 가게를 팔고 당시 무명의 빈촌이던 신오오쿠보에서 새 터를 잡았다. 츠오와 후미키리, 중앙한식당과 그 건널목 노래방. 자기중심적인 게 딱 마마다운 이름이었다. 신오오쿠보 개발붐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나 돈 훔치다가 걸렸어요. 형 오기 전에 후미키리에서."
배진수가 말했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네."
"거짓말. 아무튼 장씨 아저씨한테 걸렸어요. 처음엔 머리 몇 대 때리고 츠오로 끌고 가려다가 봐주더라고요. 마마한테는 일러바쳤겠지만."
"왜?"
"손에 이천 엔밖에 없었거든."
"너도 부자 되긴 글렀다."
배진수가 정색을 했다.
"돈 때문인 줄 알아요? 그 날 낮에 마마한테 나도 고기 좀 주면 안 되냐고 대들었거든요. 솔직히 그 정도는 먹을 권리 있잖아요? 근데 마마가 절대 안 된대요. 타지 생활하면서 그것도 못 이기겠냐고. 이기긴 뭘 이겨. 씨팔. 그래서 나도 따졌지. 한국 가면 이런 거 개나 소나 다 먹는 거라고. 그랬더니 마마가 뭐라는지 알아요? 중국인들이 남기면 그거 먹으랍디다."
배진수는 순간 복받치고 말았는지 사케병 똥구멍을 높게 쳐들고 술을 들이켰다. 그 순간만큼은 함께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단추 같은 눈을 깜빡이며 김치를 씹어 먹던 마마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츠오의 삼겹살 일 인분이 딱 이천 엔이었다. 상상해보았다. 배진수가 츠오의 테이블을 잡고 앉아서 종업원, 그러니까 예컨대 내가 구워주는 삼겹살을 집어 먹는다. 이상했다. 이번엔 내가 앉고 배진수가 고기를 굽는다. 역시 현실감이 없었다. 이번엔 마마가 굽고 우리가 먹는다. 스탠딩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잠을 청하다가 답답함에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럼 그만둬버리지. 너 일어도 잘하잖아."
"어떻게 그냥 그만둬."
배진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술인지 잠인지 모를 것에 취한 것 같았다.
"아니야. 끝내야 하는데…… 뭐든……"
배진수는 말끝을 줄줄 흘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하긴 츠오를 그만둔다 해서 배진수의 유학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츠오 중에서 조금 더 나은 츠오를 찾아야 했다. 불만 같은 건 갖지 않는 게 편했다. 그래도 한 가지 걸리는 건 있었다. 역시 피였다.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치질에 걸린다. 츠오에서 일하며 깨달았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피바다를 보며 월급만 들어오면 꼭 고기를 먹어 주리라 다짐했다. 나라고 원래부터 고기에 환장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 먹는 것과 못 먹는 건 본질적으로 달랐다. 삼겹살을 먹는다면, 다른 곳이 아닌 츠오에서 먹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츠오에서만큼은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골치 아픈 삼겹살 대신 메이진 돈카츠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날 배진수는 학교 강의가 끝날 때 즈음에야 일어났다. 그리고 날 깨웠다. 우리는 나란히 지각을 하고 마마에게 혼났다.
첫 월급은 한 달이나 늦게 들어왔다. 그나마도 반절이었다. 뭐가 됐건 점심도 굶고 메이진에 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백발의 노부부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키가 작고 피부가 좋은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았다. 돈카츠 구다사이.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덧니 하나가 비죽하게 내려왔다. 주방을 들여다봤다. 반백의 사나이는 목과 팔뚝이 붉고 굵었다. 리드미컬하게 들어 올리는 채에서 돈가스가 널을 뛰고 있었다. 쯔유를 두른 양배추가 정갈하게 한 접시, 락교와 단무지가 한 접시, 미리 썰어놓은 돈가스가 사기그릇에 담겨 차례로 나왔다. 소스는 따로 없다고 했다. 그마저도 명인다웠다. 밥도 한 그릇 받았지만 먹지 않았다. 돈까스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까슬까슬한 튀김옷이 입천장과 혓바닥을 자극했다. 기름 섞인 육즙이 새어나왔다. 짜지 않게 맞춘 간이 딱 좋았다. 뜨거웠지만 계속 씹었다. 부드러운 안심살이 밀가루와 후추에 섞여 더욱 고소했다. 젓가락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접시를 비웠다. 가격은 천오백 엔. 내심 츠오의 삼겹살보다 비쌌으면 싶었다. 가게를 나서는 나를 향해 아주머니는 소담한 어깨를 숙여 인사했다. 아리가토. 깔끔한 마무리였다.
뭔가를 사고 싶어 샵에 갔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대신 빠칭코에 가서 나머지 천오백 엔을 모두 잃었다. 그래도 좋았다. 움직일 때마다 위가 두둑했다. 삼겹살 같은 건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츠오에 들어서자마자 삼겹살 냄새부터 달려들었다. 당장 아무 불판이나 켜서 구워먹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 배 터지게 삼겹살을 먹어도 충족되지 않을 것 같았다. 카운터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던 배진수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메이진에 다녀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도 여섯시간 내도록 삼겹살을 구워 남들의 입으로 갖다 바쳤다.
주방이모가 앞치마를 던졌다. 팔락이며 떠오른 앞치마가 마마에게 떨어졌다. 그 즉시 플라스틱 컵이 이모의 뺨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이모는 짐을 들고 츠오를 나가버렸다. 사실 당시의 난 후미키리에 있었다. 장씨 아저씨는 내게 그날의 활극, 그러니까 이모와 마마가 서로의 머리채를 어떻게 잡고 휘둘렀으며 이모가 어떤 말로 마마를 욕보였는지 설명하며 츠오의 주방에서 계란을 말고 있었다.
더러운 쪽바리년.
이모의 작별인사였다. 마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문을 향해 턱짓을 했고, 그게 다였다.
마마가 일방적으로 야찡을 1만 엔이나 올렸다고 했다. 뒤늦게 통보받은 배진수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자정 무렵 후미키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까지 배진수는 카운터에 앉은 마마에게 화를 용케 눌러 참으며 조목조목 따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집요한 침묵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상습적으로 미루는 월급이나 음식물 쓰레기 투기부터 불법 노동자 고용까지 협박이 될 만한 것들이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반찬도 쓰레기 같은 것만 주고요, 고기 한 점이 아까워서……!"
내내 모르쇠로 일관하던 마마가 배진수를 확 노려보았다.
"너는 그게 그렇게 먹고 싶니?"
엉뚱한 데서 말싸움이 붙었다. 야야, 그만해. 광자. 아저씨가 주방에서 외쳤다. 배진수는 작정을 했는지 덜덜 떨리는 입술로 피식 웃기까지 했다.
"그럼 저도 평생 남이 먹다 남긴 김치만 먹을까요?"
마마는 그 자리에서 배진수를 해고해버렸다. 야찡도 끊어버렸다. 츠오에 정적이 감돌았다. 마마는 금새 말을 바꿨다. 후임을 구할 때까진 책임을 지란 거였다. 배진수는 또 그걸 받아들였다. 아저씨가 배진수를 주방으로 불렀다. 돈을 훔친 걸 봐줬다는 생색을 내며 달래려는 게 뻔했다. 배진수는 불그죽죽해진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나같이들 꼴 보기 싫어서 얼른 후미키리로 갔다.
약간의 인사변동이 있었다. 배진수는 열두 시간 내도록 후미키리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게 됐다. 장씨 아저씨가 두 시간마다 후미키리로 가서 정산을 했다. 주방이모나 알바로 오려는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재일교포협회와 키타조센협회 홈페이지에 이모의 딸이 올린 글 때문인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마마는 사람들이 배가 불렀다고 하소연만 했다. 손님들이 음식으로 시비를 걸면 난감한 건 나였다. 부대찌개가 짜다고 주방으로 빽을 놓으면 마마는 뜨거운 물만 넣고 돌려보내는 식이었다. 버려야 할 비곗살을 얹어서 삼겹살 양을 늘렸다. 설거지는 아예 내 몫이었다. 차라리 내가 주방이모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인터넷 강의는 들은 지 오래였다. 엄마의 문자는 읽지도 않았다. 머리에 고기 굽는 연기가 부옇게 찬 것 같았다.
이틀 전, 새 알바생을 구했다. 요리 유학을 온 한국인 대학생이라고 했다. 주방일을 맡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딴 것 같았다. 형이건 동생이건 고기 굽기만 시킬 생각이었다.
"지긋지긋한 놈. 이제 정말 보내야지."
마마는 그제야 배진수의 월급을 계산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게 일주일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월급은 이미 삼 주 가까이 밀려 있었다. 언젠가 츠오를 떠날 미래를 위해 참았다. 츠오의 법칙이라면 역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배진수는 더 이상 츠오에서 아침을 먹지 않았다. 나는 아침밥을 물에 말아 먹고 파발마처럼 후미키리로 갔다. 배진수는 카운터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새 알바생이 구해졌다는 사정을 전했다. 배진수는 마치 남의 일 마냥 그거 잘됐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오늘은 배진수의 마지막 근무 날이었다. 점심 무렵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메이진에서 돈가스를 사줄 테니 나오란 내용이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거 말고 나랑 삼겹살 먹을래요?
웬 삼겹살? 어디서?
먹을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5시 반 경 배진수가 슬렁슬렁 츠오로 내려왔다. 그리고 텅 빈 가게를 전에 없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금기의 주방도 열어보았다. 주방이모는 장사 준비를 할 때도 우릴 좀처럼 들여보내주질 않았다. 요즘은 내가 전날 남은 국을 끓여놓거나 쌀을 씻어 안치고 있었다.
"어제 또 베트남 애들이 왔다 갔어요."
"게네 또 피 났어?"
"응. 근데 냄비가 사라졌어요. 수건을 삶아야 하는데. 혹시 여기 남는 냄비 있어요?"
고물상도 가져가지 않을 후미키리의 냄비가 사라질 리 없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배진수는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주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혹여 마마가 들이닥칠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배진수는 작은 냄비를 들고 슬그머니 주방에서 나왔다.
"고마워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다. 냄비에서 달그락하고 뭔가가, 어쩌면 젓가락과 가위일지도 모를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또 못 들은 척했다. 배진수는 츠오의 문을 발로 차고 나섰다. 창밖으로 녹색 신호등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배진수는 냄비를 품에 안고 성큼성큼 길을 건넜다.
그 무렵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드물게 일본인 단체 손님이 오는 바람에 아저씨와 마마 모두 삼겹살을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가 주방과 홀에서 열을 올릴 때였다.
"카지다(화재다)!"
누군가 외쳤다. 고개를 들었다. 허연 연기가 어두운 하늘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발원지는 후미키리였다. 수도꼭지를 잠그려던 손이 허공에 멎었다. 가게 안이 술렁거렸다. 제일 먼저 뛰어나간 건 당연히 마마였다. 아저씨도 따라갔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마는 팔차선 도로를 한 발 한 발 내려찍듯 건너더니 곧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저씨 역시 헐레벌떡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츠오의 손님들이 창에 붙어 서서 연기를 관망하고 있었다. 누군가 맥주를 시원스레 마셨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을 잠그지도 않은 채 츠오를 나섰다.
사거리는 동서양을 막론한 구경꾼들과 취객들로 번잡스러웠다. 수많은 사람이 후미키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멋대로 길을 건넜다. 후미키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너구리굴이었다.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이 계단을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는지를 되새기며 오로지 감각으로 발을 디뎠다. 얼마 내려가기도 전에 뭔가와 세게 부딪쳤다. 나는 뒤로 나자빠졌고 상대 역시 가까스로 굴러 떨어지는 걸 모면한 듯했다. 새된 기침소리가 들렸다. 마마였다. 직감적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을 붙잡고 위로 향했다.
신오오쿠보의 불빛이 연기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칠 때였다. 희미한 인영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우리를 끌어당겨 내동댕이쳤다. 우리는 와르르 넘어졌다. 소방관들이 호스를 잡고 후미키리로 달려 들어갔다. 그제야 숨이 떠밀려 올라왔다. 폐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매스껍고 뜨거웠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때까지 기침을 하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에 검댕이 번진 세 사람이 보였다.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태로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배진수는 지저분한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아이처럼 흐느꼈다. 양 손목에는 검댕 대신 벌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배진수를 망연히 바라보던 마마가 한숨을 쉬었다. 마마와 아저씨의 바지 주머니에는 아무렇게나 넣은 지폐가 가득이었다.
불은 생각보다 금방 진압되었다. 우리는 츠오에 모여 앉아 노란 띠가 둘러진 후미키리를 내다보았다. 경찰 두 사람이 츠오에 찾아왔다. 마마는 옆 테이블에서 경찰과 마주 앉아 덤덤하게 뭔가를 설명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배진수가 잡혀가는 것이냐고 슬쩍 물었다. 아저씨는 물수건으로 얼굴의 검댕을 닦으며 갸크(손님)이라는 단어를 일러주었다. 다른 경찰이 나를 다른 테이블로 데려가더니 물었다. 짧은 일어 실력으로 이해한 바로는, 배진수가 일부러 불을 냈는지 묻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또 물었다. 도대체 그는 왜 계속 울고 있습니까?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단 경찰관의 눈빛에 묘한 반발심이 들었다.
"갸크데스."
경찰들이 떠난 건 푸른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질 즈음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린 항상 밥을 먹던 그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무도 불에 관해 묻지 않았다. 코팅이 벗겨진 낡은 냄비에 삼겹살을 넣는 순간부터 연기는 적잖게 났을 것이다. 자꾸 타고 눌어붙는 고기를 어떻게 해서든 익혀보려 불의 세기를 올렸을 것이다.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지만 삼겹살을 포기하는 건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츠오와 후미키리, 나아가 마마와 신오오쿠보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배진수라도 지하의 화재경보기가 얼마나 예민한 물건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던 마마가 슥 일어났다. 잠시 후 쟁반을 하나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렸다. 비곗살이 덕지덕지 낀 츠오의 삼겹살이었다. 나는 불판의 전원을 켰다. 아저씨는 집게로 삼겹살을 집어 불판에 올렸다. 츠오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바로 그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배진수는 계속 울었다. 마마는 삼겹살이 익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마는 츠오와 후미키리의 사장이었다. 이름은 김광자(金光子)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일본인들에겐 카네모토 미쓰코였으며 우리에겐 그저 마마였다. 이유는 없었다. 부르기보단 알아듣기 쉬워서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이른바 낙하산으로 올해 초부터 츠오의 직원 신세였다. 학생비자의 불법 노동이니 근로계약서도 필요 없었다. 그런 주제에 면접장이랍시고 올라간 곳이 츠오의 이층이었다. 나는 그 새벽에 츠오의 첫 끼를 받아먹었다.
여긴 식당이니 먹고 싶은 건 뭐든 먹어.
마마는 그렇게 말하며 위생봉투에서 배추김치를 한 조각 집어 먹었다. 반찬은 그것과 역시 위생봉투에 담긴 생양파가 전부였다. 그보다 나은 걸 얻을 먹을 거란 기대를 말끔하게 버렸다. 나무 의자 등받이의 얼룩무늬 인조 가죽이나 분홍색 한복 공단 커튼 같은 정체불명의 인테리어를 보다보면 있던 입맛도 떨어졌다. 가게에 진동하는 삼겹살 냄새도 느끼하기만 했다. 밥에 김치를 올려 한입에 넣었다. 놀라울 정도로 맛이 없었다. 배추와 설탕과 소금과 고춧가루가 죄 따로 뛰놀고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기무치'인가, 싶었다. 이 나라의 실재를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더 꽉꽉 씹어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김치가 맞았고, 다만 마마의 솜씨였다. 식사와 함께 면접도 끝났다. 마마는 나 개인에 대해서는 서운할 정도로 묻지 않았다. 다만 빈 밥공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오오쿠보는 12시간 체제로 돌아갔다. 나는 주말을 제외하고 오후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저녁 시간엔 보통 열 테이블 정도의 손님들만 오갔다. 옆 동네 가부기초 환락가의 영향인지 자정 무렵이 그나마 바빴다. 전통적인 재일교포들의 터에서 마마 같은 키타조센 출신들이 가게를 갖는 건 드물었다. 키타조센은 일명 조선학교로 강점기 시대부터 북한 교포들의 후손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치사하고 폐쇄적인 한인사회에서 키타조센은 화류계나 야쿠자로 빠지기 쉬웠다.
마마도 젊었을 땐 어땠는지 모르죠.
배진수가 말했다. 하긴 마마는 툭 튀어나온 눈썹 뼈 아래로 옴폭 쌍꺼풀이 진 눈 하며 오뚝한 콧날이 평범한 인상은 아니었다. 3년 차 유학생 배진수는 츠오의 베테랑 직원이자 나의 선생이었다. 그에게서 신오오쿠보의 모든 걸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마가 재일조선인협회 회비가 아까워 등록조차 하지 않은 것도 그에게서 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마마는 돈놀이나 여행 같은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한마디로 사장보다는 주인에 어울리는 여자였다. 마마를 보다보면 츠오와 후미키리는 언제까지고 건재할 것 같았다.
츠오의 최고 단골은 역시 장씨 아저씨였다. 장씨 아저씨는 마마의 오랜 친구로 역시 키타조센 출신이었다. 아저씨는 그 땅딸막한 키와 어울리지 않게 야쿠자를 상대로 장사를 한다고 했다. 아저씨는 주로 혼자 츠오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나갈 땐 돈 대신 우리 어깨를 몇 번 쳐줄 뿐이었다. 듣기로는 마마에게 평생 밥을 얻어먹어도 될 만큼의 돈을 빌려줬다고 했다. 아저씨가 다녀간 걸 알게 될 때마다 마마는 욕을 하며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공짜 밥을 주지 말라 엄포를 놓았다. 말을 들을 배진수가 아니었다. 배를 쓰다듬으며 츠오를 나서는 장씨 아저씨의 등에 대고 배진수는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마타오시테 구다사이!(또 오십시오!)"
내 첫 손님은 야쿠자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마마부터 찾았다. 배진수는 능숙한 일어 실력을 발휘하며 가장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일명 귀빈석이었다. 키타조센들이에요. 배진수가 속삭였다. 그리고 쟁반에 밑반찬과 삼겹살을 담아 내게 내밀었다.
"삼겹살은 형이 구워요."
"나만?"
"네. 여기 법칙이에요."
법칙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배진수가 아니었다. 야쿠자들 앞에 간장 종지와 쌈장, 약간의 밥과 위생 봉투에서 꺼낸 김치를 내려놓을 때였다. 하나같이들 뭉뚝한 새끼손가락들을 보고 말았다. 인주가 필요 없는 그들만의 도장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들은 소주를 마시며 심각하게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달군 불판에 삼겹살이 올라가는 순간, 그 절대적인 소리에 정적이 흘렀다. 고기에 슨 얼음이 녹아내리고 하얀 지방질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야쿠자들이 삼겹살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방질이 기름으로 변하고 살코기에 살짝 갈색빛이 돌았다. 뒤집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하게 잘 익은 뒷면이 드러났다. 기름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인생 최고로 잘 구운 삼겹살이었다.
"얏바리, 스게(역시, 대단해)."
대단하다니. 그래, 츠오에서 가장 대단한 건 삼겹살이었다. 그 잔혹하다던 야쿠자들도 불판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삼겹살을 가위로 한 점씩 잘라냈다. 야쿠자 앞에서 가위질을 하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더는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잘 구운 삼겹살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각자의 접시에 삼겹살을 소복하게 담았다.
"도죠 메시아캇테 구다사이(맛있게 드세요)."
배진수에게 배운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두 손을 모르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가게 귀퉁이로 물러섰다. 삼겹살이 야쿠자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배진수가 전화를 했는지 마마가 왔다. 카운터는 마침 함께 있던 장씨 아저씨에게 맡겨두었다고 했다. 마마는 시키지도 않은 맥주 세 병을 자연스레 꺼내 들고 합석을 했다. 그리고 소녀처럼 쾌활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마마는 술을 아주 많이 마셨고 또 많이 마시게 했다. 안주는 삼겹살 빼고 다 먹었다. 옆에서 권해도 손바닥을 보이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대신 소주를 바로 한 잔 비워 박수를 받았다. 야쿠자가 따로 없었다. 마마는 그런 식이었다. 일본인에겐 일어를 했고 한국인에겐 한국어를 했으며 키타조센 출신에겐 북한말 특유의 콧소리 섞인 일어를 했다. 재일교포나 중국인들은 그냥 무시했다.
첫 주말 밤이었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은 어때? 할 만하니? 사장이 잘 해줘? 엄마가 메신저 어플로 무료 국제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일 괜찮아. 할 만해. 아빠한테 말 좀 잘 해줘. 그리고 엄마,"
나 고기 먹고 싶어. 하마터면 철없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주중 내내 구웠던 삼겹살 때문이었다.
"건강하시라고요."
대답이 없었다. 엄마는 쉬워도 너무 쉽게 감동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들을 셋이나 낳아놓고 막내인 내게 특히 그랬다. 그런 엄마가 기약도 없는 유학을 허락할 정도로 한국에서의 나는 여러 방면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유학이라 해봤자 일종의 사이버대학이었다. 매일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고 한 학기에 두 번 교토의 학교로 가서 시험을 치면 학위는 나왔다. 학위에 목메지 말고 일어나 확실하게 배우란 뜻이었다. 한국보다 조금 더 비싼 학비가 최후의 집안 후원이 돼야 했다. 내 이십 대 후반에 대한 이 플래닝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가능하다면 여기서 자리를 잡아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능동적 의지를 발휘하는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일본까지 쫓겨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엄마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인사를 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군대로 돌아온 것 같아 서글펐다. 노트북을 켜 강의에 접속했다. 알 수 없는 일본어로 역시 알 수 없는 경영학 원론을 들으려니 미칠 노릇이었다. 답이 틀릴 때마다 '여기서 자리 잡기'를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강의를 켜둔 채로 웹서핑을 시작했다. 시험은 어떻게든 족보를 사서 낙제만 면할 생각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러나 여긴 아버지의 친구분 댁의 쪽방이었다. 츠오에 간 것도 그분의 소개 덕분이었다. 얹혀사는 신세니 물 한 잔 함부로 떠 마신 적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라도 배불리 마시고 싶었다. 등 뒤로 차분한 일어가 들려왔다. 밤하늘이 유난히 새카맸다. 불판 위에서 익어가던 삼겹살이 떠올랐다. 엄마보다 더 그립다는 게 죄스러웠다. 하긴 엄마는 이제 공짜나 다름없지만 삼겹살은 한국보다 세 배가 비쌌다.
마마는 후미키리에서 츠오에 오면 항상 매상과 잔돈부터 체크했다. 그러면 배진수는 나무계단을 삐걱삐걱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주방이모는 내게 배진수가 돈을 훔치다 걸린 적이 있다고 슬쩍 말해줬다. 배진수나 나나 분수에 맞지 않는 유학을 와서 생고생을 한다며 걱정 같은 욕도 했다. 배진수는 가끔 주방이모를 졸라 손님들이 먹다 남긴 부추전이나 맨밥을 얻어가기도 했다. 이모는 자기 것도 아니면서 그걸 아까워했다. 그러는 이모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마마 몰래 음식을 해서 딸의 대학 기숙사로 가져갔다. 딸의 유학만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 자기 가게를 차리는 게 이모의 꿈이었다.
정산이 끝나면 마마는 나를 후미키리로 보냈다. 후미키리 카운터에는 언제나 똑같은 액수의 잔돈이 들어 있었다. 가라오케 관리는 삼겹살 구워주기보다 만 배는 행복한 일이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돌릴 수도 있었다. 훌륭한 일터였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긴 했다. 피였다.
후미키리 손님의 반은 한국인이었고 나머지 반은 키타조센과 동남아인들이었다. 마마는 동남아인들이라면 무조건 베트남 놈들이라 싸잡았다. 술은 가부키초에서 먹으면서 끝장은 신오오쿠보에서 본다는 거였다. 끝장엔 칼, 소주병, 사케병, 가끔은 무선마이크도 사용됐다. 마마가 자정에 츠오로 넘어오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배진수에게 듣기론 몇 년 전 마마는 후미키리 카운터를 보다가 베트남인이 휘두른 사케병에 팔을 찔렸다. 피가 철철 흐르는 팔뚝을 부여잡고 지상으로 달아났지만 하필 사거리 신호등이 고장 나 있었다. 마마는 횡단보도 앞에서 이십분을 서 있었다. 다가오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츠오에 도착한 마마는 주방에서 소주 한 병을 팔에 붓고 앰뷸런스를 불렀다. 마마가 사거리 신호를 지키지 않은 건 그때부터였다.
베트남 놈들은 결코 경찰을 부르진 않았다. 소란이 끝나면 그들은 배, 혹은 머리에서 피가 나는 제 동포를 한마음으로 이고 지고 지상으로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계산은 깔끔했다. 카운터에 앉아 그 꼴을 보고 있자면 동포에 대한 못 견딜 사랑 때문에 칼춤을 추나 싶었다. 여남은 일은 다 내 몫이었다. 마마에게 연락을 하면 잠시 후 장씨 아저씨가 노란 용액이 담긴 생수병을 들고 등장했다. 정체불명의 그 용액은 냄새는 독하지만 효과는 강력했다. 나는 아저씨와 나란히 쭈그려 앉아 세척액을 묻힌 수건으로 소파에 스민 피를 닦아냈다. 가죽 광택제가 녹아내리는 역한 냄새가 피비린내까지 소독했다. 아저씨는 코 막힌 소리로 내게 이것저것 묻곤 했다. 주로 츠오의 경제 사정과 마마에 대한 것이었다. 아저씨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북한말 같은 울림이 있었다. 타지에 나오니 그런 것조차 친근했다.
"마마가 네 월급은 잘 주는가?"
"아직 한 달도 일하지 않아서요."
"만만하게 굴면 나중에 골치 아파져. 여긴 원래 그래. 야찡은 안 하고?"
야찡은 숙박을 뜻했다. 배진수와 주방이모의 야찡은 월 삼만 엔짜리였다. 조악하다 들었을 뿐 가본 적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친구 집 골방에 얹혀산다고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킬킬 웃었다.
"그건 진짜 잘하는 일이다."
"왜요?"
"광자랑 돈으로 엮어서 좋을 거 하나 없지. 그 점만 빼면 다 좋은 여잔데 말이야."
바로 그 점이 문제란 얘긴 안 했다. 오오쿠보에 있는 마마의 맨션에 아저씨가 들락거린단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는 생수병 뚜껑을 꽉 닫고는 후미키리를 나섰다. 나는 혼자서 룸을 닦고 깨진 유리를 정리했다. 수건은 싱크대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오랫동안 빨았다. 그래도 남아 있는 핏기는 삶아서 빼야 했다. 후미키리 가스레인지는 원래 간단한 안주 조리용이었지만 소방 점검에서 낙제점을 받아 사용금지처분을 받았다. 마마는 돈 벌려고 쓰는 게 아니니 뭐 어떠랴 하는 태도였다. 정리가 끝나면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새 손님을 들여보냈다.
아침 여섯시 경이 되면 배진수가 왔다. 우리는 함께 후미키리를 정리하고 문을 잠궜다. 여섯 시간 만에 만난 고요하고 더러운 신오오쿠보거리가 어슴푸레한 빛 속에 펼쳐져 있었다. 머리가 트이다 마는 기분이었다. 사거리는 한산했지만 우리는 항상 신호를 기다렸다. 그 정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츠오에서의 아침 식사는 얄짤 없이 손님들이 먹다 남긴 밑반찬과 식은 밥이었다. 마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방이모만이 누가 잡을세라 제 방으로 올라가 버린 후였다.
맨드르르한 불판에 감자조림, 오징어채, 고추장, 생양파, 그리고 그놈의 김치가 각각의 봉투에 담겨 있었다. 된장국은 공용 대접에 한가득이었다. 마지막 반찬은 공기 중에 떠도는 고기 냄새였다. 룸에 피칠갑을 해 놓는 베트남놈들보다 고기 한 점 남길 줄 모르는 츠오의 손님들이 더 미웠다. 일본인들은 적게 시키기에 남길 일이 없었다. 한국인들은 많이 시키고 다 먹었다. 중국인들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이 시키고 조금 남기지만 모두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마마는 중국인들이 손댄 건 고기고 반찬이고 싹 버렸다. 성격 좋은 장씨 아저씨도 중국말만 들리면 액땜하듯 침을 뱉곤 했다.
식사 후엔 마지막 과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였다. 일본은 식당을 대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해주는 시설이 따로 있었다. 비용은 한 달에 팔만 엔이었다. 마마는 당연히 신청하지 않았다. 배진수와 나는 양손에 커다란 검은 봉투를 들고 오오쿠보를 향했다. 개발붐에 밀려난 오오쿠보는 신오오쿠보의 화장실 같았다. 폐점한 가게가 많아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더 스산했다. 언젠가 신신오오쿠보 같은 게 생기면 신오오쿠보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다. 츠오나 후미키리보다 빠를지도 몰랐다.
뒷골목의 음식물 쓰레기통들에 츠오의 잔여물을 나눠 넣었다. 나름의 순번까지 있어 특정 가게에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내 기분이 음식물쓰레기만큼 더러워진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나를 위로하는 건 신오오쿠보와 오오쿠보의 경계에 있는 돈가스 가게였다. 색 바랜 푸른 간판에 붓으로 휘갈긴 흰 일어가 소위 일본스러웠다. 안쪽 유리에 붙인 사진들을 보고 돈가스 가게인 줄 알았다. 그 시각이면 항상 주방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싱싱한 파와 양배추, 그리고 당근을 채 썰어 각각 깨끗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을 것이다. 토마토와 돼지고기, 후추와 또 나는 짐작 못 할 재료를 끓여 소스를 만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심 혹은 등심의 지방질을 가위로 세심하게 잘라내고 벽돌 같은 망치로 균일한 두께가 될 때까지 힘차게 치댈 것이다. 그것에 밀가루를 입히고, 후추가 들어간 계란 물을 묻히고 잠시 재워 둘 것이다. 주문이 들어올 때에야 전날 씻어둔 팬에 깨끗한 기름을 붓고 튀김가루를 넣어보겠지. 그것이 튀김이 되어 떠오르면 꽤 두툼해진 고기에도 가루를 꾹꾹 눌러 박을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게 털어 기름에 넣으면…… 삼겹살 같은 건 말끔하게 잊을 수 있었다. 배진수에게 간판의 뜻을 물었다.
"메이진. 명인이요. 메이진 돈카츠."
"명인 돈가스."
넋 놓고 중얼거리는 나를 배진수가 끌어당겼다. 피곤하지 않다면 자기 방에서 맥주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피곤했지만 츠오로 갔다. 3층 복도 끝자락에 자리한 배진수의 방은 네 평이나 될까 싶었다. 창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습할뿐더러 손바닥만 한 창문조차 없었다. 가구라곤 앉은뱅이책상과 옷장 하나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누렇게 바랜 고서들과 프린트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한자는 한일(韓日)이나 역사(歷史) 정도였다. 샤워실은 층 공용이었으며 화장실은 츠오에서 해결하는 것 같았다. 도쿄에서 3만 엔에 야찡을 놓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이런 방을 차마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배진수는 가게 손님들이 남긴 걸 모았다며 사케를 두 병 가져왔다. 언뜻 보면 새것이지만 뚜껑은 따진 상태였다. 컵은 없었다. 남으면 가져가요. 배진수는 선심 쓰듯 말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 마마 욕을 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재밌는 건 역시 이혼 이야기였다. 장씨 아저씨와 그 짓을 하다가 전남편에게 딱 걸렸는데 그 장소가 집이라고도 하고 츠오 4층의 빈방이라고도 하고 후미키리 룸의 테이블이라고도 했다. 모두 다라는 소리도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전남편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형 한인 마트를 비롯한 오오쿠보의 가게 여섯 개를 이혼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팔아넘겼다. 고깃집을 운영할 때도 집안 식탁엔 고기 한 점 놓지 않았다는 소문으로 미루어보아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그는 종적을 감췄지만 한인교포니 갈 곳은 많을 거라고 했다. 마마는 겨우 챙긴 두 가게를 팔고 당시 무명의 빈촌이던 신오오쿠보에서 새 터를 잡았다. 츠오와 후미키리, 중앙한식당과 그 건널목 노래방. 자기중심적인 게 딱 마마다운 이름이었다. 신오오쿠보 개발붐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나 돈 훔치다가 걸렸어요. 형 오기 전에 후미키리에서."
배진수가 말했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네."
"거짓말. 아무튼 장씨 아저씨한테 걸렸어요. 처음엔 머리 몇 대 때리고 츠오로 끌고 가려다가 봐주더라고요. 마마한테는 일러바쳤겠지만."
"왜?"
"손에 이천 엔밖에 없었거든."
"너도 부자 되긴 글렀다."
배진수가 정색을 했다.
"돈 때문인 줄 알아요? 그 날 낮에 마마한테 나도 고기 좀 주면 안 되냐고 대들었거든요. 솔직히 그 정도는 먹을 권리 있잖아요? 근데 마마가 절대 안 된대요. 타지 생활하면서 그것도 못 이기겠냐고. 이기긴 뭘 이겨. 씨팔. 그래서 나도 따졌지. 한국 가면 이런 거 개나 소나 다 먹는 거라고. 그랬더니 마마가 뭐라는지 알아요? 중국인들이 남기면 그거 먹으랍디다."
배진수는 순간 복받치고 말았는지 사케병 똥구멍을 높게 쳐들고 술을 들이켰다. 그 순간만큼은 함께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단추 같은 눈을 깜빡이며 김치를 씹어 먹던 마마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츠오의 삼겹살 일 인분이 딱 이천 엔이었다. 상상해보았다. 배진수가 츠오의 테이블을 잡고 앉아서 종업원, 그러니까 예컨대 내가 구워주는 삼겹살을 집어 먹는다. 이상했다. 이번엔 내가 앉고 배진수가 고기를 굽는다. 역시 현실감이 없었다. 이번엔 마마가 굽고 우리가 먹는다. 스탠딩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잠을 청하다가 답답함에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럼 그만둬버리지. 너 일어도 잘하잖아."
"어떻게 그냥 그만둬."
배진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술인지 잠인지 모를 것에 취한 것 같았다.
"아니야. 끝내야 하는데…… 뭐든……"
배진수는 말끝을 줄줄 흘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하긴 츠오를 그만둔다 해서 배진수의 유학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츠오 중에서 조금 더 나은 츠오를 찾아야 했다. 불만 같은 건 갖지 않는 게 편했다. 그래도 한 가지 걸리는 건 있었다. 역시 피였다.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치질에 걸린다. 츠오에서 일하며 깨달았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피바다를 보며 월급만 들어오면 꼭 고기를 먹어 주리라 다짐했다. 나라고 원래부터 고기에 환장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 먹는 것과 못 먹는 건 본질적으로 달랐다. 삼겹살을 먹는다면, 다른 곳이 아닌 츠오에서 먹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츠오에서만큼은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골치 아픈 삼겹살 대신 메이진 돈카츠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날 배진수는 학교 강의가 끝날 때 즈음에야 일어났다. 그리고 날 깨웠다. 우리는 나란히 지각을 하고 마마에게 혼났다.
첫 월급은 한 달이나 늦게 들어왔다. 그나마도 반절이었다. 뭐가 됐건 점심도 굶고 메이진에 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백발의 노부부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키가 작고 피부가 좋은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았다. 돈카츠 구다사이.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덧니 하나가 비죽하게 내려왔다. 주방을 들여다봤다. 반백의 사나이는 목과 팔뚝이 붉고 굵었다. 리드미컬하게 들어 올리는 채에서 돈가스가 널을 뛰고 있었다. 쯔유를 두른 양배추가 정갈하게 한 접시, 락교와 단무지가 한 접시, 미리 썰어놓은 돈가스가 사기그릇에 담겨 차례로 나왔다. 소스는 따로 없다고 했다. 그마저도 명인다웠다. 밥도 한 그릇 받았지만 먹지 않았다. 돈까스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까슬까슬한 튀김옷이 입천장과 혓바닥을 자극했다. 기름 섞인 육즙이 새어나왔다. 짜지 않게 맞춘 간이 딱 좋았다. 뜨거웠지만 계속 씹었다. 부드러운 안심살이 밀가루와 후추에 섞여 더욱 고소했다. 젓가락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접시를 비웠다. 가격은 천오백 엔. 내심 츠오의 삼겹살보다 비쌌으면 싶었다. 가게를 나서는 나를 향해 아주머니는 소담한 어깨를 숙여 인사했다. 아리가토. 깔끔한 마무리였다.
뭔가를 사고 싶어 샵에 갔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대신 빠칭코에 가서 나머지 천오백 엔을 모두 잃었다. 그래도 좋았다. 움직일 때마다 위가 두둑했다. 삼겹살 같은 건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츠오에 들어서자마자 삼겹살 냄새부터 달려들었다. 당장 아무 불판이나 켜서 구워먹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 배 터지게 삼겹살을 먹어도 충족되지 않을 것 같았다. 카운터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던 배진수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메이진에 다녀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도 여섯시간 내도록 삼겹살을 구워 남들의 입으로 갖다 바쳤다.
주방이모가 앞치마를 던졌다. 팔락이며 떠오른 앞치마가 마마에게 떨어졌다. 그 즉시 플라스틱 컵이 이모의 뺨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이모는 짐을 들고 츠오를 나가버렸다. 사실 당시의 난 후미키리에 있었다. 장씨 아저씨는 내게 그날의 활극, 그러니까 이모와 마마가 서로의 머리채를 어떻게 잡고 휘둘렀으며 이모가 어떤 말로 마마를 욕보였는지 설명하며 츠오의 주방에서 계란을 말고 있었다.
더러운 쪽바리년.
이모의 작별인사였다. 마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문을 향해 턱짓을 했고, 그게 다였다.
마마가 일방적으로 야찡을 1만 엔이나 올렸다고 했다. 뒤늦게 통보받은 배진수 역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자정 무렵 후미키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까지 배진수는 카운터에 앉은 마마에게 화를 용케 눌러 참으며 조목조목 따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집요한 침묵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상습적으로 미루는 월급이나 음식물 쓰레기 투기부터 불법 노동자 고용까지 협박이 될 만한 것들이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반찬도 쓰레기 같은 것만 주고요, 고기 한 점이 아까워서……!"
내내 모르쇠로 일관하던 마마가 배진수를 확 노려보았다.
"너는 그게 그렇게 먹고 싶니?"
엉뚱한 데서 말싸움이 붙었다. 야야, 그만해. 광자. 아저씨가 주방에서 외쳤다. 배진수는 작정을 했는지 덜덜 떨리는 입술로 피식 웃기까지 했다.
"그럼 저도 평생 남이 먹다 남긴 김치만 먹을까요?"
마마는 그 자리에서 배진수를 해고해버렸다. 야찡도 끊어버렸다. 츠오에 정적이 감돌았다. 마마는 금새 말을 바꿨다. 후임을 구할 때까진 책임을 지란 거였다. 배진수는 또 그걸 받아들였다. 아저씨가 배진수를 주방으로 불렀다. 돈을 훔친 걸 봐줬다는 생색을 내며 달래려는 게 뻔했다. 배진수는 불그죽죽해진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나같이들 꼴 보기 싫어서 얼른 후미키리로 갔다.
약간의 인사변동이 있었다. 배진수는 열두 시간 내도록 후미키리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게 됐다. 장씨 아저씨가 두 시간마다 후미키리로 가서 정산을 했다. 주방이모나 알바로 오려는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재일교포협회와 키타조센협회 홈페이지에 이모의 딸이 올린 글 때문인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마마는 사람들이 배가 불렀다고 하소연만 했다. 손님들이 음식으로 시비를 걸면 난감한 건 나였다. 부대찌개가 짜다고 주방으로 빽을 놓으면 마마는 뜨거운 물만 넣고 돌려보내는 식이었다. 버려야 할 비곗살을 얹어서 삼겹살 양을 늘렸다. 설거지는 아예 내 몫이었다. 차라리 내가 주방이모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인터넷 강의는 들은 지 오래였다. 엄마의 문자는 읽지도 않았다. 머리에 고기 굽는 연기가 부옇게 찬 것 같았다.
이틀 전, 새 알바생을 구했다. 요리 유학을 온 한국인 대학생이라고 했다. 주방일을 맡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딴 것 같았다. 형이건 동생이건 고기 굽기만 시킬 생각이었다.
"지긋지긋한 놈. 이제 정말 보내야지."
마마는 그제야 배진수의 월급을 계산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게 일주일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월급은 이미 삼 주 가까이 밀려 있었다. 언젠가 츠오를 떠날 미래를 위해 참았다. 츠오의 법칙이라면 역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배진수는 더 이상 츠오에서 아침을 먹지 않았다. 나는 아침밥을 물에 말아 먹고 파발마처럼 후미키리로 갔다. 배진수는 카운터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새 알바생이 구해졌다는 사정을 전했다. 배진수는 마치 남의 일 마냥 그거 잘됐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오늘은 배진수의 마지막 근무 날이었다. 점심 무렵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메이진에서 돈가스를 사줄 테니 나오란 내용이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그거 말고 나랑 삼겹살 먹을래요?
웬 삼겹살? 어디서?
먹을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5시 반 경 배진수가 슬렁슬렁 츠오로 내려왔다. 그리고 텅 빈 가게를 전에 없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금기의 주방도 열어보았다. 주방이모는 장사 준비를 할 때도 우릴 좀처럼 들여보내주질 않았다. 요즘은 내가 전날 남은 국을 끓여놓거나 쌀을 씻어 안치고 있었다.
"어제 또 베트남 애들이 왔다 갔어요."
"게네 또 피 났어?"
"응. 근데 냄비가 사라졌어요. 수건을 삶아야 하는데. 혹시 여기 남는 냄비 있어요?"
고물상도 가져가지 않을 후미키리의 냄비가 사라질 리 없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배진수는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주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혹여 마마가 들이닥칠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배진수는 작은 냄비를 들고 슬그머니 주방에서 나왔다.
"고마워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다. 냄비에서 달그락하고 뭔가가, 어쩌면 젓가락과 가위일지도 모를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또 못 들은 척했다. 배진수는 츠오의 문을 발로 차고 나섰다. 창밖으로 녹색 신호등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배진수는 냄비를 품에 안고 성큼성큼 길을 건넜다.
그 무렵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드물게 일본인 단체 손님이 오는 바람에 아저씨와 마마 모두 삼겹살을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가 주방과 홀에서 열을 올릴 때였다.
"카지다(화재다)!"
누군가 외쳤다. 고개를 들었다. 허연 연기가 어두운 하늘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발원지는 후미키리였다. 수도꼭지를 잠그려던 손이 허공에 멎었다. 가게 안이 술렁거렸다. 제일 먼저 뛰어나간 건 당연히 마마였다. 아저씨도 따라갔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마는 팔차선 도로를 한 발 한 발 내려찍듯 건너더니 곧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저씨 역시 헐레벌떡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츠오의 손님들이 창에 붙어 서서 연기를 관망하고 있었다. 누군가 맥주를 시원스레 마셨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을 잠그지도 않은 채 츠오를 나섰다.
사거리는 동서양을 막론한 구경꾼들과 취객들로 번잡스러웠다. 수많은 사람이 후미키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멋대로 길을 건넜다. 후미키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너구리굴이었다.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이 계단을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는지를 되새기며 오로지 감각으로 발을 디뎠다. 얼마 내려가기도 전에 뭔가와 세게 부딪쳤다. 나는 뒤로 나자빠졌고 상대 역시 가까스로 굴러 떨어지는 걸 모면한 듯했다. 새된 기침소리가 들렸다. 마마였다. 직감적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을 붙잡고 위로 향했다.
신오오쿠보의 불빛이 연기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칠 때였다. 희미한 인영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우리를 끌어당겨 내동댕이쳤다. 우리는 와르르 넘어졌다. 소방관들이 호스를 잡고 후미키리로 달려 들어갔다. 그제야 숨이 떠밀려 올라왔다. 폐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매스껍고 뜨거웠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때까지 기침을 하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에 검댕이 번진 세 사람이 보였다.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태로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배진수는 지저분한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아이처럼 흐느꼈다. 양 손목에는 검댕 대신 벌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배진수를 망연히 바라보던 마마가 한숨을 쉬었다. 마마와 아저씨의 바지 주머니에는 아무렇게나 넣은 지폐가 가득이었다.
불은 생각보다 금방 진압되었다. 우리는 츠오에 모여 앉아 노란 띠가 둘러진 후미키리를 내다보았다. 경찰 두 사람이 츠오에 찾아왔다. 마마는 옆 테이블에서 경찰과 마주 앉아 덤덤하게 뭔가를 설명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배진수가 잡혀가는 것이냐고 슬쩍 물었다. 아저씨는 물수건으로 얼굴의 검댕을 닦으며 갸크(손님)이라는 단어를 일러주었다. 다른 경찰이 나를 다른 테이블로 데려가더니 물었다. 짧은 일어 실력으로 이해한 바로는, 배진수가 일부러 불을 냈는지 묻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또 물었다. 도대체 그는 왜 계속 울고 있습니까?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단 경찰관의 눈빛에 묘한 반발심이 들었다.
"갸크데스."
경찰들이 떠난 건 푸른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질 즈음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린 항상 밥을 먹던 그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무도 불에 관해 묻지 않았다. 코팅이 벗겨진 낡은 냄비에 삼겹살을 넣는 순간부터 연기는 적잖게 났을 것이다. 자꾸 타고 눌어붙는 고기를 어떻게 해서든 익혀보려 불의 세기를 올렸을 것이다.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지만 삼겹살을 포기하는 건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츠오와 후미키리, 나아가 마마와 신오오쿠보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배진수라도 지하의 화재경보기가 얼마나 예민한 물건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던 마마가 슥 일어났다. 잠시 후 쟁반을 하나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렸다. 비곗살이 덕지덕지 낀 츠오의 삼겹살이었다. 나는 불판의 전원을 켰다. 아저씨는 집게로 삼겹살을 집어 불판에 올렸다. 츠오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바로 그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배진수는 계속 울었다. 마마는 삼겹살이 익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선영
떠돌이들에 대하여 생각해봤습니다. 자기의 것, 자기의 자리를 가지기 힘들어질수록 세상에 떠돌이들은 더욱 많아지겠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이 모인 자리에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그 세계는 가난하고 외롭지만 가끔씩 따뜻한 자리를 내어주기에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