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무 가족
작년 십이월 팔일 은영은 예고 없이 나타났다. 노란색 파카를 걸쳐 스물여섯 살이라는 나이보다 앳된 모습이었다. 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은영에게 여기는 목공소가 아니라고 소리쳐 말했다. 근처의 목공소에서 가구 만들기 체험을 운영하고 있었다. 허술한 표지판을 보고 관광객들이 종종 착각을 해오는 이유였다. 은영은 여기저기 흩뜨려져 있는 나무 조각들 사이로 걸어와 내게 물었다.
“여기가 일성임업 아닌가요? 벌목하는데요.”
나는 의심 어린 눈으로 은영을 바라봤다. 일거리가 없는 한겨울에 낯선 사람이 벌목공장을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은영은 다짜고짜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문에 게재된 구인광고를 보고 왔다는 거였다. 공장 이 층 사무실에 있던 아내는 어느새 내려와 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분이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으니 알아서 타일러 돌려보내라고 말한 뒤 다시 안쪽의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일꾼을 뽑는 것이지 사무직원을 뽑고자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은영을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지게차로 육십 킬로그램짜리 통나무 오십 개를 모두 옮겼을 때에야 아내와 은영의 긴 대화가 끝난 듯했다. 아내는 다짜고짜 내게 다가와 은영을 고용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세 번이나 되물었지만 믿기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은영과 시급과 숙식에 대한 논의를 끝냈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내는 머리를 숙이며 뒤통수에 난 커다란 탈모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래도 웃겨?”
이십 삼 년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후 공장도 빠르게 망해갔다. 이제 전국 팔도를 합해도 남아있는 임업 회사는 손에 꼽았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인건비와 자잿값이 싼 중국으로 가버렸다. 경기가 나쁠 때는 세 달 동안 기계를 못 돌린 적도 있었다. 일거리가 많을 때만 개개인으로 움직이는 벌목공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을 불러 일했다. 이제 일성임업의 진짜 직원은 나와 아내뿐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직원이 오십 명도 넘는 곳이었다. 그때 나무를 너무 잘라냈던 탓일까. 지금은 나무가 없다. 나무가 잘려나간 곳에는 나무를 다시 심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위에 골프장을 세우고 건물을 놓았다. 아내의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빠지면 다시 자라야 하는데 자라나질 않았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 탈모라고 했다. 동전만 했던 탈모는 삼 년 사이 민둥산만큼 커졌다. 그러니 은영을 고용하겠다는 아내에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무만 보면 스트레스라는데 그래서 머리가 자꾸 빠진다는데…… 아내는 은영을 시급 6,150원,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벌목공 보조이자 사무실 직원으로 고용했다. 이제 나는 은영이 제풀에 지쳐 스스로 관두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일을 가르쳐주지도 않았건만 은영은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공장 뒷산을 따라와 똑같은 둘레의 벚나무인데 얘는 왜 50도로 자르고 쟤는 왜 30도로 자르냐고 물었다. 이제 더 이상 나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큰 거래가 생길 때마다 잠깐씩 협력하는 벌목공들은 적어도 칠 년에서 몇십 년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임시 노동자들은 정확히 시키는 만큼만 일했다. 때문에 은영의 적극적인 태도가 더욱 낯설었다. 나는 은영에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영은 줄기차게 산을 따라와 나를 괴롭혔다. 첫 일주일 동안은 시키지도 않았건만 새벽 여섯 시마다 숙소에서 내려와 공장 청소를 했다. 그러다 삼 주가 지났을까, 우연히 은영이 통나무 조각을 들어 옮기는 모습을 보았다. 크기로 보아 적어도 이십 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마냥 신기해하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일을 가르쳐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영에게 날이 녹슨 구형 엔진 톱을 쥐여 주었다. 십사 인치 길이에 오 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것이었다. 은영은 요 며칠 작은 현장을 따라다녀서인지 엔진 톱이 내는 커다란 모터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엔진 톱 사용법과 잔가지를 자르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조금 떨어져서 은영을 지켜보았다. 기계진동을 이겨내며 흔들림 없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초보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새삼 은영의 체구도 달라 보였다. 뭐랄까, 키가 좀 더 자라고 몸집이 커진 듯했다. 정확한 신장은 알 길이 없으나 뒷마당에 있는 일 점 칠 미터짜리 포도나무보다 조금 커 보였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후 다음날 은영이 정말로 짐 가방을 들고 찾아왔을 때, 사실 나는 일주일도 못 버티고 도망칠 줄 알았다. 은영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 몸 쓰는 일은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흘깃 본 은영의 손에는 그럴듯한 상처하나가 없었다. 그런 아이가 하루아침에 칠백 킬로그램짜리 나무를 벨 순 없었다. 목장갑을 끼면서 새삼 손을 두어 번 뒤집어 보았다. 손마디마다 흉터와 굳은살이 배어있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도끼질을 배웠다. 아버지의 반강제적인 가르침이었다. 통나무 밑동에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고 손바닥에는 나무 가시가 박혔다. 오십 번쯤 나무를 내려쳤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술이 있어야 훗날 내가 굶어 죽지 않는다는 거였다. 결국 그날 밤 양 손바닥에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아버지는 바늘을 가져와 나를 다리 사이에 앉혀놓았다. 그제야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가까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벌목공은 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러질지 알아야 하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것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거였다. 그 순간 바늘 끝이 통통하게 차오른 물집을 찔렀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아버지는 새로 생긴 물집을 터뜨리며 자신은 미래를 볼 줄 안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나는 은영을 숲으로 데려갔다. 나무 표피와 잎을 보여주며 나무 이름부터 가르쳤다. 눈 코 입 있다고 해서 같은 사람 한 명 없듯이 생긴 건 비슷해 보여도 나무들 역시 서로 다른 객체들이었다. 침엽수라고 다 같은 침엽수가 아니고 결이 고운 전나무라고 다 똑같은 방향으로 자르는 것도 아니었다. 은영에게 어떤 모양으로 자란 놈인지, 어디에 자리 잡고 컸는지에 따라 자르는 것도 꺾어지는 것도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특히 잣나무는 벌목하는데 까다로운 놈들 중 하나였다. 높이가 삼십 미터가 넘었고 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는 만큼 무게중심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십수 년의 벌목공들도 잣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쓰러지는지 알지 못했다. 잣나무 아래에 서서 나는 은영에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했다. 햇빛이 잘 비쳐들지 않을 만큼 나뭇잎들이 빼곡했다. 잣나무는 유달리 잔가지도 많았다. 이를 세세히 설명해주며 은영에게 말했다.
“나무는 절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나무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끔찍한 사고가 나기 마련이야.”
은영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잣나무는 벌목과정 중 다른 나무들과 엉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때 잘못하면 벌목공을 덮칠 수도 있었다. 잔가지 사이에 걸렸을 때 잣나무의 중간을 베어버리면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다. 은영은 나무껍질을 매만지며 나무를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뭘 알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놈이 밉지는 않았다. 어쨌든 은영이 있어서 아내는 더 이상 공장에 나오지 않아도 되었고 나는 아내의 민둥산에 대해 조금은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내와 나 그리고 은영은 각자의 일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은영은 오전 일곱 시부터 열두 시까지 벌목기술을 배웠다. 나머지 오후 시간은 사무실에서 거래처 주문을 받거나 언제 산에 가고 배달을 할지 근무 일정을 짰다. 나는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산과 일 층 공장을 넘나들며 벌목과 절통 작업을 했다. 공장 일만 아니면 된다던 아내는 정오쯤 차를 끌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정육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다 왔다.
은영과 함께 식은 밥과 콩비지 찌개로 늦은 점심을 때울 때였다. 은영에게 도시에서 이곳 산골까지 내려온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다. 물론, 대충의 가족사나 이곳에 오기까지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함께 생활하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은영의 신분도 여러 차례 확인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은영은 잠깐 고민 끝에 입을 뗐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냥 이야기가 너무 길고 모호해서 말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라고 했다. 은영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러했다.
은영은 스무 살에 독립한 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다. 엄마를 위한 일이었다. 미혼이었던 엄마는 뒤늦게 결혼이라는 걸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르바이트가 가기 싫었다. 그냥 싫은 것이 아니라 죽기보다 싫었다. 피시방에서 계산대를 지키는 일을 했다. 가끔 손님들에게 라면을 가져다줬다. 하루는 남자 중학생이 엉덩이를 만졌다. 욕이라도 하려는 찰나 계산대에 서 있는 사장의 늙은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여워서였다. 매출이 형편없어 망해가기 직전인 곳이었다. 더군다나 사장에겐 아픈 자식이 있었다. 근육이 굳어가는 희귀병이라던데 하여튼 사장이 불쌍했다. 가끔 찾아와 사장의 근심을 덜어주는 손님들인데, 그마저 내쫓으면 사장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연락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았다. 어차피 언제 잘릴지 모를 곳이었으니까. 사실 그건 변명이고 화가 났다. 불쌍한 사장한테 아르바이트비를 받는 것이 미안하고, 홀로 나를 키웠던 엄마한테 평생 미안해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미안한 거라면 지긋지긋하고,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또 미안하고. 이런 구질구질한 감정의 굴레 때문에 화가 났다.
동네를 하릴없이 걷다 작은 개천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벗어나고 싶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같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문득 15살 때 막내삼촌을 따라 벌초를 하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외할아버지의 묘를 가리며 자라나고 있는 어린나무를 베어야 했다. 삼촌을 졸라 그 대신 도끼를 손에 쥐었다. 도끼를 낮게 들어 올린 다음 나무 밑동을 찍었다.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찌릿한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삼촌은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보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좀 더 힘을 주어 나무를 내리쳤다.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했다. 어린 나무는 뻐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 순간 진원을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우울감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은영은 이게 다예요, 라고 말하면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동안 왜 말을 아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쉽게 말하자면 그냥 나무를 베는 게 좋았다는 거 아닌가. 그릇에 붙은 마른 밥풀을 떼어 먹으며 은영에게 물었다.
“진짜야?”
은영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근데 사모님한테는 그렇게 말 안 했습니다.”
“그랬겠지. 도대체 뭐라고 설득한 거야?”
“사상 초유의 심각한 청년실업 사태로 인해 새로운 직업군을 찾아 나서 봤다고, 좀 더 객관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어 보였다. 은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잘했다.”
한 달 사이 편백나무의 물량이 급증했다. 급하게 칠십 그루를 주문한 김 사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얼마 전 배우 겸 가수라는 남자 연예인이 방송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아들이 아토피를 앓고 있는데 편백나무 가구를 사용한 뒤로 말끔히 병을 나았다는 거였다. 편백나무는 살균작용이 뛰어나 이미 인기 있는 품종 중 하나였다. 두 명의 벌목공과 세 명의 중장비 일꾼을 모아 팀을 꾸렸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야산으로 장소를 정했고 벌목 허가증도 신청했다.
은영과 나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일꾼들과 굴착기는 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자동차 앞 유리로 떨어졌다. 은영이 제대로 된 벌목 현장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은영은 스스로 만들었다는 나무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벌목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차 있는 듯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 처음 벌목 현장을 따라가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물기를 머금은 새벽공기가 불쾌하리만큼 차가운 날이었다.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기 전 산에게 인사를 건네듯 몸을 돌려가며 주위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나는 돌 위에 앉아 날을 갈고 있었다. 아버지는 손을 쉬지 말라고, 벌목공에게 엔진 톱은 수족과 같다고 말했다. 엔진 톱은 일반 톱 그리고 도끼와는 다르게 예민한 구석이 많았다. 수시로 날을 갈아주면서 이십 분에 한 번씩 연료를 넣어 줘야 했다. 빽빽한 나뭇잎들 사이로 푸르스름한 조명처럼 해가 비춰 들어왔다. 일꾼들은 제각기 자기 위치로 흩어졌고 아버지는 목장갑을 꼈다. 아버지가 통나무 틈으로 엔진 톱을 밀어 넣을 때마다 귀청을 울리는 커다란 소음이 생겼다. 금방이라도 엔진 톱이 튕겨 나와 아버지를 베어버리거나 나무가 쓰러져 덮칠 것 같았다. 어린 나는 돌아갈 산길을 외워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생각에 잠기자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고개를 흔들고 핸들을 꽉 쥐었다.
편백나무 작업은 이틀 정도 소요될 거였다. 몇 달씩 소비되는 숲 솎아내기와 같은 대규모 일거리는 아니었지만 은영이 현장을 배우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일행을 만나 빠르게 장비부터 날랐다. 일꾼들과 함께 산 중턱까지 걸어 올라갔다. 벌목공 중 한 명이 은영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는 듯했다. 뒤쫓아 걸어오는 일행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기도 했다. 은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산은 육십도 정도의 경사가 져 있었다. 미리 봐두었던 현장에 도착하자 나는 사람들을 모아 역할과 업무를 배분했다.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고 내려가는 방향으로 벌목경로를 설정했고 벌목공들이 나무를 베면 중장비 팀과 일꾼들이 절통을 모아 산 아래까지 실어 내려가는 식으로 작업순서를 정했다. 벌목공들 간의 의견 차이로 크고 작은 고함이 오고갔지만 내 뜻을 따르기로 합의하면서 소란은 가볍게 정리되었다. 그들도 작업 현장에서는 뱃사공이 많을수록 엉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숨이 거칠어지면서 땀이 흘렀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던 은영 역시 서서히 지쳐가는 듯했다. 힘들면 물이라도 마시고 오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티는 안내도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인부들을 의식했던 모양이었다. 은영은 평소보다 더 무리해서 몸을 움직였다. 쉬지 않고 장비를 날랐고 벌목한 나무들의 가지를 베어냈다. 나는 높이 이십삼 미터, 지름 일 미터의 나무를 고른 다음, 엔진 톱으로 브이 모양의 홈을 가로로 만들었다. 멀리서 일을 하고 있는 은영을 불러 말했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라봐.”
은영은 주머니에서 나무쐐기를 꺼내 홈 사이에 끼워 넣었다. 엔진 톱 시동을 켰고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은영은 홈 반대편으로 가 나무 표피에 톱을 갖다 대었다. 재질이 생각보다 단단한지 톱을 넣다 빼는 데 힘이들어 보였다. 네 번 정도 톱을 밀어 넣었고 마지막에는 도끼로 밑동을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은영은 가르쳐 준 대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양손을 펼치며 소리쳤다.
“대피로!”
나무는 물탱크가 터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며 꺾어졌다. 주변 나무의 가지에 걸리지 않고 깔끔하게 쓰러졌다. 은영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은영을 탐탁지 않아 하던 벌목공이 작업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은영에게 절통 작업을 끝내면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고추장과 마른 멸치에 밥을 비벼 한입 가득 입안에 넣었다. 다섯 명의 일당 그리고 중장비 대여비용까지 하면 손에 쥐는 순이익은 형편없을 듯했다. 임업 사업이 축소되고 벌목공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인건비가 점점 더 비싸져 갔다. 한 움큼씩 머리가 빠진다는 아내에게 일을 쉬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언젠가 은영이 벌목기술을 완전히 익혀 습득한다면 인건비를 아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계속해서 은영을 지켜보던 벌목공이 내게 말을 걸었다.
“쟤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는 25년 차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 탐탁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무작정 그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꾼들 역시 은영을 흘끔거렸다.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은영의 얼굴이 굳어갔다. 사람들 간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영을 일으켜 세웠다.
“아침에는 제가 정신없어서 소개를 못 해 드렸습니다. 제 친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얼굴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너도 인사해.”
은영의 팔을 잡고 말했다. 은영은 당황한 듯 입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작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은영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서울로 가도 된다고 말이다. 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엑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 캄캄한 산길 위로 헤드 라이터가 비춰졌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은영을 딸 같은 아이라고 한 것일까. 은영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나는 불임이었다. 아내도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는 큰 갈등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도리어 아이 없는 삶이 아내와 나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뿐이어서 더욱 소중했다.
열아홉 살이 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다시피 집을 나왔다. 언제나 나는 벌목공보다 더 나은 다른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대문 지게꾼으로 취직을 했고 거래처인 바지공장에서 아내를 만났다. 새벽의 퇴근길마다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김밥과 국수를 먹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떴고 도로에는 출근을 하려는 차들로 빼곡했다. 아내는 여기저기 홈이 파진 오래된 콘크리트 거리를 걸으며 말했다. 이곳을 떠날 수 있으면 뭐든 할 것이라고. 아내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고 했다. 함께 대화를 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도 금방 초점을 잃고 내 어깨너머의 허공을 바라봤다.
반년 후 나는 아내와 함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번듯한 집과 하루하루 생활비를 불안해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공장이 탐나 돌아온 것이냐고 화를 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분이 차올랐다. 벌목공이 되는데 책이 무슨 소용이냐며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어릴 적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서울에서 지게꾼으로 지내지도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아버지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마다 아내는 내 팔을 꽉 쥐었다. 아내는 사장의 횡령으로 인해 칠 개월 치의 월급을 받지 못했고 나는 배달이 지연됐다는 이유로 사장으로부터 해고를 당했다. 아내는 열다섯 살 때 큰 오빠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쪽방에 함께 누워 나는 아내에게 그가 밉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내는 벗은 몸으로 내 머리를 안아주었다. 자기 마음속에서 이미 그는 죽었기 때문에 밉지 않다고 했다. 아내의 가슴골에서 바지공장의 석유 냄새가 짙게 났다. 은영은 나를 상념에서 깨우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저 아까 벌목 제대로 한 거 맞습니까?”
“응, 잘했다.”
잔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나의 대답에 은영은 긴장이 풀린 듯 물었다.
“나무는 절대 벌목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래도 벌목공이라면 최대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뜨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말도 맞네.”
대답하면서 엑셀을 밟던 발의 힘을 뺐다. 국도로 들어서자 가로등과 네온 불빛이 차 안까지 밀려들어왔다.
시멘트가 절절 끓는 팔월이 되었다. 아내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다시 공장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무만 보면 머리가 빠진다던 그녀는 이제 고기 타는 냄새만 맡으면 어지럽다고 호소했다. 대신 은영은 좀 더 많은 시간을 벌목 일을 배우는데 쓸 수 있게 되었다. 은영이 아내와 함께 시내에서 뭘 좀 사 왔다며 비닐봉지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등산복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나는 은영에게 돈을 아끼라고 언젠가 너도 공장을 차리고 싶은 거 아니냐고 물었다. 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회가 된다면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필리핀과 아프리카에는 아직 벌목이 돈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큰 공장을 차리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은영에게 정말 해외로 나가고 싶은 거냐고 되물었다. 은영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이 해외일 줄을 몰랐다. 벌목의 공급과 수요가 활발한 나라들도 이미 꿰고 있었다. 은영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며 훗날을 위해 영어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놀란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커다란 대지처럼 보이는 은영의 그림 위에 나무 한 그루를 보태 그렸다. 은영의 꿈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먼 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말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랐다. 아버지는 늘 나를 품 안에 가둬두고 싶어 했다. 나는 은영을 내 곁에만 두고 싶지도, 그렇다고 해서 그저 그런 실력을 가진 벌목공으로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날 벌목 현장에서 은영을 경계하던 벌목공은 다른 일꾼들보다 십만 원이나 더 받아갔다. 경력이 오래됐을뿐더러 실력도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벌목은 힘보다는 노련함과 기술이 더 필요한 일이었고 은영 역시 노력만 한다면 그처럼 될 수 있었다. 은영이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이 아이를 놓아줄 거였다.
마을 근처의 산에서 나무 솎아내기 작업을 했다. 은영과 나는 점심을 먹으러 마을로 내려갔다. 슈퍼 앞에 쪼그려 앉아 숨을 돌렸다. 은영은 몸에서 떨어지는 톱밥 가루가 미안하다며 안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바나나 맛 우유를 사와 은영에게 건넸다. 은영은 요즘 자꾸 어깨가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몸에 탈이 나는 게 정상이었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의자와 구멍 난 파라솔을 번갈아 바라보며 은영에게 물었다.
“아직도 이 일이 좋냐?”
은영은 잠깐 뜸을 들인 뒤 검지로 빨대 모가지를 꺾으며 대답했다.
“나무를 쓰러뜨리는 게 아직 멋있습니다.”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아직 제대로 피부도 그을리지 않은 어린애가 뭘 아나 싶었다.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병으로 은영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여기 온 지 일 년은 됐냐? 그런 네가 뭘 안다고.”
은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벌목꾼은 최대 일 분 정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무가 어느 각도와 방향으로 쓰러질지, 저는 그걸 볼 줄 압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은영의 갈매기 눈썹이 춤을 추듯이 위아래로 움직여대는데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은영의 대답은 생전에 아버지가 즐겨하던 말이었다. ‘나는 미래를 본다.’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매일 밤 바늘이 무서워 울어대는 나에게 아버지는 자신은 가까운 미래를 볼 줄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작 자신의 죽음은 알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이미 폐암 말기였다. 죽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지난 날 자신을 떠났다는 이유로 나를 원망했다. 자신을 병간호해주던 아내를 며느리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날카로운 것에 쇠가 긁히는듯한 기침을 내뱉으며 피를 토했다. 아버지의 몸에서 위산과 뒤섞인 피비린내가 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몰래 헛구역질을 했다.
지난 날 은영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벌목공은 아버지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던 후배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네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는 불쌍하지 않느냐고. 아버지는 툭하면 내게 어미 목숨 잡아먹고 태어났으면 다른 집 자식들보다 배로 잘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내가 집을 나간 순간에도 아버지는 얼마안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나를 벌목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기른 것이 아버지였으니까. 장례가 끝난 지 삼일 째가 되던 날 나는 공장과 집의 명의를 내 것으로 바꾸었다. 그 정도는 받아도 되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작업이 늦어졌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영은 남은 우유를 한입에 털어먹으며 뒤쫓아 걸어왔다. 산을 오르다 은영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나는 재빨리 은영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주었다. 그러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때 나는 기회가 있었다. 은영이 미래를 볼 줄 안다고 거드름을 피울 때 혼을 내고 말렸어야 했다. 나도 그랬던 시기가 있었다. 예전과 달리 톱이 내 손처럼 달라붙어 작업이 술술 풀리는 것 같을 때 말이다.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고 이럴 때일수록 조심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언젠가 은영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걸음에 속도를 붙여 은영보다 조금 앞서 걸었다.
작업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작업구역을 나눴다. 장소가 겹치면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해야 했다. 생각보다 산을 너무 많이 내려왔다 싶을 때 나는 은영을 큰 소리로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고 천천히 산을 되짚어 올라갔다. 은영은 높이가 십오 미터, 밑지름이 일 점 오 미터인 참나무 아래에 깔려 죽어있었다. 두개골이 호두껍데기처럼 으스러졌고 왼쪽 팔다리는 뒤로 꺾인 채 부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뭇잎들로 빼곡한 언제나 똑같은 하늘이었다. 나는 통나무를 굴려 은영을 꺼냈다. 트럭에서 방수포를 가져와 딱딱하게 굳어가는 몸을 감쌌고 노끈으로 풀리지 않게끔 말아 묶었다. 피는 젖은 땅 사이로 스며들었다. 지렁이 한 마리가 기어 나와 피거품 사이를 지나갔다. 은영을 들어 올려 트럭 뒤 통나무 더미 위에 실었다.
차에 올라타 에어컨을 틀었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자 차와 함께 몸도 심하게 흔들렸다. 은영은 고용보험을 따로 들지 않았다. 일꾼들을 제외한 누구도 은영이 일성임업에서 일하는지 알지 못했다. 은영은 재혼을 했다는 엄마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은영의 사망신고를 하면 한 번쯤 구청에서 조사를 나올 거였다. 그동안 뒷산에서 하던 벌목은 신고되지 않은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일기예보 좀 봐줘.”
아내는 곧 있으면 내가 있는 지역에서 소나기가 내릴 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은영의 죽음을 알렸다. 아내 역시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누가 가족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이제 막 대출을 갚기 시작하며 순이익을 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사고 현장은 쓸려내려 갈 거였다. 도로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렸다. 아버지의 죽음도 은영의 죽음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은영처럼 벌목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 일지도 몰랐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공장을 팔고 마을로 내려가 장사를 하자고 했다. 엑셀을 살짝 밟았다 뗐고 신호등이 있으면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하며 핸들을 고쳐 쥐었다. 진짜 가족이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되었다.
“여기가 일성임업 아닌가요? 벌목하는데요.”
나는 의심 어린 눈으로 은영을 바라봤다. 일거리가 없는 한겨울에 낯선 사람이 벌목공장을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은영은 다짜고짜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문에 게재된 구인광고를 보고 왔다는 거였다. 공장 이 층 사무실에 있던 아내는 어느새 내려와 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분이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으니 알아서 타일러 돌려보내라고 말한 뒤 다시 안쪽의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일꾼을 뽑는 것이지 사무직원을 뽑고자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은영을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지게차로 육십 킬로그램짜리 통나무 오십 개를 모두 옮겼을 때에야 아내와 은영의 긴 대화가 끝난 듯했다. 아내는 다짜고짜 내게 다가와 은영을 고용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세 번이나 되물었지만 믿기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은영과 시급과 숙식에 대한 논의를 끝냈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내는 머리를 숙이며 뒤통수에 난 커다란 탈모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래도 웃겨?”
이십 삼 년 전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후 공장도 빠르게 망해갔다. 이제 전국 팔도를 합해도 남아있는 임업 회사는 손에 꼽았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인건비와 자잿값이 싼 중국으로 가버렸다. 경기가 나쁠 때는 세 달 동안 기계를 못 돌린 적도 있었다. 일거리가 많을 때만 개개인으로 움직이는 벌목공들과 일용직 노동자들을 불러 일했다. 이제 일성임업의 진짜 직원은 나와 아내뿐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직원이 오십 명도 넘는 곳이었다. 그때 나무를 너무 잘라냈던 탓일까. 지금은 나무가 없다. 나무가 잘려나간 곳에는 나무를 다시 심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위에 골프장을 세우고 건물을 놓았다. 아내의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빠지면 다시 자라야 하는데 자라나질 않았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 탈모라고 했다. 동전만 했던 탈모는 삼 년 사이 민둥산만큼 커졌다. 그러니 은영을 고용하겠다는 아내에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무만 보면 스트레스라는데 그래서 머리가 자꾸 빠진다는데…… 아내는 은영을 시급 6,150원,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벌목공 보조이자 사무실 직원으로 고용했다. 이제 나는 은영이 제풀에 지쳐 스스로 관두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일을 가르쳐주지도 않았건만 은영은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공장 뒷산을 따라와 똑같은 둘레의 벚나무인데 얘는 왜 50도로 자르고 쟤는 왜 30도로 자르냐고 물었다. 이제 더 이상 나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큰 거래가 생길 때마다 잠깐씩 협력하는 벌목공들은 적어도 칠 년에서 몇십 년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임시 노동자들은 정확히 시키는 만큼만 일했다. 때문에 은영의 적극적인 태도가 더욱 낯설었다. 나는 은영에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영은 줄기차게 산을 따라와 나를 괴롭혔다. 첫 일주일 동안은 시키지도 않았건만 새벽 여섯 시마다 숙소에서 내려와 공장 청소를 했다. 그러다 삼 주가 지났을까, 우연히 은영이 통나무 조각을 들어 옮기는 모습을 보았다. 크기로 보아 적어도 이십 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마냥 신기해하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일을 가르쳐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영에게 날이 녹슨 구형 엔진 톱을 쥐여 주었다. 십사 인치 길이에 오 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것이었다. 은영은 요 며칠 작은 현장을 따라다녀서인지 엔진 톱이 내는 커다란 모터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엔진 톱 사용법과 잔가지를 자르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조금 떨어져서 은영을 지켜보았다. 기계진동을 이겨내며 흔들림 없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초보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새삼 은영의 체구도 달라 보였다. 뭐랄까, 키가 좀 더 자라고 몸집이 커진 듯했다. 정확한 신장은 알 길이 없으나 뒷마당에 있는 일 점 칠 미터짜리 포도나무보다 조금 커 보였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후 다음날 은영이 정말로 짐 가방을 들고 찾아왔을 때, 사실 나는 일주일도 못 버티고 도망칠 줄 알았다. 은영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 몸 쓰는 일은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흘깃 본 은영의 손에는 그럴듯한 상처하나가 없었다. 그런 아이가 하루아침에 칠백 킬로그램짜리 나무를 벨 순 없었다. 목장갑을 끼면서 새삼 손을 두어 번 뒤집어 보았다. 손마디마다 흉터와 굳은살이 배어있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도끼질을 배웠다. 아버지의 반강제적인 가르침이었다. 통나무 밑동에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고 손바닥에는 나무 가시가 박혔다. 오십 번쯤 나무를 내려쳤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술이 있어야 훗날 내가 굶어 죽지 않는다는 거였다. 결국 그날 밤 양 손바닥에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아버지는 바늘을 가져와 나를 다리 사이에 앉혀놓았다. 그제야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가까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벌목공은 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러질지 알아야 하는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것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거였다. 그 순간 바늘 끝이 통통하게 차오른 물집을 찔렀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아버지는 새로 생긴 물집을 터뜨리며 자신은 미래를 볼 줄 안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나는 은영을 숲으로 데려갔다. 나무 표피와 잎을 보여주며 나무 이름부터 가르쳤다. 눈 코 입 있다고 해서 같은 사람 한 명 없듯이 생긴 건 비슷해 보여도 나무들 역시 서로 다른 객체들이었다. 침엽수라고 다 같은 침엽수가 아니고 결이 고운 전나무라고 다 똑같은 방향으로 자르는 것도 아니었다. 은영에게 어떤 모양으로 자란 놈인지, 어디에 자리 잡고 컸는지에 따라 자르는 것도 꺾어지는 것도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특히 잣나무는 벌목하는데 까다로운 놈들 중 하나였다. 높이가 삼십 미터가 넘었고 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는 만큼 무게중심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십수 년의 벌목공들도 잣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쓰러지는지 알지 못했다. 잣나무 아래에 서서 나는 은영에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했다. 햇빛이 잘 비쳐들지 않을 만큼 나뭇잎들이 빼곡했다. 잣나무는 유달리 잔가지도 많았다. 이를 세세히 설명해주며 은영에게 말했다.
“나무는 절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나무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끔찍한 사고가 나기 마련이야.”
은영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잣나무는 벌목과정 중 다른 나무들과 엉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때 잘못하면 벌목공을 덮칠 수도 있었다. 잔가지 사이에 걸렸을 때 잣나무의 중간을 베어버리면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다. 은영은 나무껍질을 매만지며 나무를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뭘 알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놈이 밉지는 않았다. 어쨌든 은영이 있어서 아내는 더 이상 공장에 나오지 않아도 되었고 나는 아내의 민둥산에 대해 조금은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내와 나 그리고 은영은 각자의 일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은영은 오전 일곱 시부터 열두 시까지 벌목기술을 배웠다. 나머지 오후 시간은 사무실에서 거래처 주문을 받거나 언제 산에 가고 배달을 할지 근무 일정을 짰다. 나는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산과 일 층 공장을 넘나들며 벌목과 절통 작업을 했다. 공장 일만 아니면 된다던 아내는 정오쯤 차를 끌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정육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다 왔다.
은영과 함께 식은 밥과 콩비지 찌개로 늦은 점심을 때울 때였다. 은영에게 도시에서 이곳 산골까지 내려온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다. 물론, 대충의 가족사나 이곳에 오기까지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함께 생활하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은영의 신분도 여러 차례 확인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은영은 잠깐 고민 끝에 입을 뗐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냥 이야기가 너무 길고 모호해서 말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라고 했다. 은영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러했다.
은영은 스무 살에 독립한 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다. 엄마를 위한 일이었다. 미혼이었던 엄마는 뒤늦게 결혼이라는 걸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르바이트가 가기 싫었다. 그냥 싫은 것이 아니라 죽기보다 싫었다. 피시방에서 계산대를 지키는 일을 했다. 가끔 손님들에게 라면을 가져다줬다. 하루는 남자 중학생이 엉덩이를 만졌다. 욕이라도 하려는 찰나 계산대에 서 있는 사장의 늙은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여워서였다. 매출이 형편없어 망해가기 직전인 곳이었다. 더군다나 사장에겐 아픈 자식이 있었다. 근육이 굳어가는 희귀병이라던데 하여튼 사장이 불쌍했다. 가끔 찾아와 사장의 근심을 덜어주는 손님들인데, 그마저 내쫓으면 사장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연락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았다. 어차피 언제 잘릴지 모를 곳이었으니까. 사실 그건 변명이고 화가 났다. 불쌍한 사장한테 아르바이트비를 받는 것이 미안하고, 홀로 나를 키웠던 엄마한테 평생 미안해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미안한 거라면 지긋지긋하고,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또 미안하고. 이런 구질구질한 감정의 굴레 때문에 화가 났다.
동네를 하릴없이 걷다 작은 개천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벗어나고 싶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같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문득 15살 때 막내삼촌을 따라 벌초를 하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외할아버지의 묘를 가리며 자라나고 있는 어린나무를 베어야 했다. 삼촌을 졸라 그 대신 도끼를 손에 쥐었다. 도끼를 낮게 들어 올린 다음 나무 밑동을 찍었다.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찌릿한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삼촌은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보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좀 더 힘을 주어 나무를 내리쳤다.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했다. 어린 나무는 뻐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 순간 진원을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우울감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은영은 이게 다예요, 라고 말하면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동안 왜 말을 아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쉽게 말하자면 그냥 나무를 베는 게 좋았다는 거 아닌가. 그릇에 붙은 마른 밥풀을 떼어 먹으며 은영에게 물었다.
“진짜야?”
은영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근데 사모님한테는 그렇게 말 안 했습니다.”
“그랬겠지. 도대체 뭐라고 설득한 거야?”
“사상 초유의 심각한 청년실업 사태로 인해 새로운 직업군을 찾아 나서 봤다고, 좀 더 객관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어 보였다. 은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잘했다.”
한 달 사이 편백나무의 물량이 급증했다. 급하게 칠십 그루를 주문한 김 사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얼마 전 배우 겸 가수라는 남자 연예인이 방송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아들이 아토피를 앓고 있는데 편백나무 가구를 사용한 뒤로 말끔히 병을 나았다는 거였다. 편백나무는 살균작용이 뛰어나 이미 인기 있는 품종 중 하나였다. 두 명의 벌목공과 세 명의 중장비 일꾼을 모아 팀을 꾸렸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야산으로 장소를 정했고 벌목 허가증도 신청했다.
은영과 나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일꾼들과 굴착기는 현장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자동차 앞 유리로 떨어졌다. 은영이 제대로 된 벌목 현장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은영은 스스로 만들었다는 나무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벌목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차 있는 듯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따라 처음 벌목 현장을 따라가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물기를 머금은 새벽공기가 불쾌하리만큼 차가운 날이었다.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기 전 산에게 인사를 건네듯 몸을 돌려가며 주위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나는 돌 위에 앉아 날을 갈고 있었다. 아버지는 손을 쉬지 말라고, 벌목공에게 엔진 톱은 수족과 같다고 말했다. 엔진 톱은 일반 톱 그리고 도끼와는 다르게 예민한 구석이 많았다. 수시로 날을 갈아주면서 이십 분에 한 번씩 연료를 넣어 줘야 했다. 빽빽한 나뭇잎들 사이로 푸르스름한 조명처럼 해가 비춰 들어왔다. 일꾼들은 제각기 자기 위치로 흩어졌고 아버지는 목장갑을 꼈다. 아버지가 통나무 틈으로 엔진 톱을 밀어 넣을 때마다 귀청을 울리는 커다란 소음이 생겼다. 금방이라도 엔진 톱이 튕겨 나와 아버지를 베어버리거나 나무가 쓰러져 덮칠 것 같았다. 어린 나는 돌아갈 산길을 외워두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생각에 잠기자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고개를 흔들고 핸들을 꽉 쥐었다.
편백나무 작업은 이틀 정도 소요될 거였다. 몇 달씩 소비되는 숲 솎아내기와 같은 대규모 일거리는 아니었지만 은영이 현장을 배우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일행을 만나 빠르게 장비부터 날랐다. 일꾼들과 함께 산 중턱까지 걸어 올라갔다. 벌목공 중 한 명이 은영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는 듯했다. 뒤쫓아 걸어오는 일행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기도 했다. 은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산은 육십도 정도의 경사가 져 있었다. 미리 봐두었던 현장에 도착하자 나는 사람들을 모아 역할과 업무를 배분했다.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고 내려가는 방향으로 벌목경로를 설정했고 벌목공들이 나무를 베면 중장비 팀과 일꾼들이 절통을 모아 산 아래까지 실어 내려가는 식으로 작업순서를 정했다. 벌목공들 간의 의견 차이로 크고 작은 고함이 오고갔지만 내 뜻을 따르기로 합의하면서 소란은 가볍게 정리되었다. 그들도 작업 현장에서는 뱃사공이 많을수록 엉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자 숨이 거칠어지면서 땀이 흘렀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던 은영 역시 서서히 지쳐가는 듯했다. 힘들면 물이라도 마시고 오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티는 안내도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인부들을 의식했던 모양이었다. 은영은 평소보다 더 무리해서 몸을 움직였다. 쉬지 않고 장비를 날랐고 벌목한 나무들의 가지를 베어냈다. 나는 높이 이십삼 미터, 지름 일 미터의 나무를 고른 다음, 엔진 톱으로 브이 모양의 홈을 가로로 만들었다. 멀리서 일을 하고 있는 은영을 불러 말했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라봐.”
은영은 주머니에서 나무쐐기를 꺼내 홈 사이에 끼워 넣었다. 엔진 톱 시동을 켰고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은영은 홈 반대편으로 가 나무 표피에 톱을 갖다 대었다. 재질이 생각보다 단단한지 톱을 넣다 빼는 데 힘이들어 보였다. 네 번 정도 톱을 밀어 넣었고 마지막에는 도끼로 밑동을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은영은 가르쳐 준 대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양손을 펼치며 소리쳤다.
“대피로!”
나무는 물탱크가 터지는 듯한 파열음을 내며 꺾어졌다. 주변 나무의 가지에 걸리지 않고 깔끔하게 쓰러졌다. 은영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은영을 탐탁지 않아 하던 벌목공이 작업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은영에게 절통 작업을 끝내면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고추장과 마른 멸치에 밥을 비벼 한입 가득 입안에 넣었다. 다섯 명의 일당 그리고 중장비 대여비용까지 하면 손에 쥐는 순이익은 형편없을 듯했다. 임업 사업이 축소되고 벌목공들의 수가 줄어들면서 인건비가 점점 더 비싸져 갔다. 한 움큼씩 머리가 빠진다는 아내에게 일을 쉬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언젠가 은영이 벌목기술을 완전히 익혀 습득한다면 인건비를 아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계속해서 은영을 지켜보던 벌목공이 내게 말을 걸었다.
“쟤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는 25년 차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 탐탁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무작정 그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꾼들 역시 은영을 흘끔거렸다.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은영의 얼굴이 굳어갔다. 사람들 간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영을 일으켜 세웠다.
“아침에는 제가 정신없어서 소개를 못 해 드렸습니다. 제 친딸이나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얼굴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너도 인사해.”
은영의 팔을 잡고 말했다. 은영은 당황한 듯 입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작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은영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서울로 가도 된다고 말이다. 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엑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 캄캄한 산길 위로 헤드 라이터가 비춰졌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은영을 딸 같은 아이라고 한 것일까. 은영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나는 불임이었다. 아내도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는 큰 갈등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도리어 아이 없는 삶이 아내와 나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뿐이어서 더욱 소중했다.
열아홉 살이 되자마자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다시피 집을 나왔다. 언제나 나는 벌목공보다 더 나은 다른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대문 지게꾼으로 취직을 했고 거래처인 바지공장에서 아내를 만났다. 새벽의 퇴근길마다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김밥과 국수를 먹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떴고 도로에는 출근을 하려는 차들로 빼곡했다. 아내는 여기저기 홈이 파진 오래된 콘크리트 거리를 걸으며 말했다. 이곳을 떠날 수 있으면 뭐든 할 것이라고. 아내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고 했다. 함께 대화를 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도 금방 초점을 잃고 내 어깨너머의 허공을 바라봤다.
반년 후 나는 아내와 함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번듯한 집과 하루하루 생활비를 불안해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공장이 탐나 돌아온 것이냐고 화를 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분이 차올랐다. 벌목공이 되는데 책이 무슨 소용이냐며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어릴 적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서울에서 지게꾼으로 지내지도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아버지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마다 아내는 내 팔을 꽉 쥐었다. 아내는 사장의 횡령으로 인해 칠 개월 치의 월급을 받지 못했고 나는 배달이 지연됐다는 이유로 사장으로부터 해고를 당했다. 아내는 열다섯 살 때 큰 오빠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쪽방에 함께 누워 나는 아내에게 그가 밉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내는 벗은 몸으로 내 머리를 안아주었다. 자기 마음속에서 이미 그는 죽었기 때문에 밉지 않다고 했다. 아내의 가슴골에서 바지공장의 석유 냄새가 짙게 났다. 은영은 나를 상념에서 깨우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저 아까 벌목 제대로 한 거 맞습니까?”
“응, 잘했다.”
잔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나의 대답에 은영은 긴장이 풀린 듯 물었다.
“나무는 절대 벌목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래도 벌목공이라면 최대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뜨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말도 맞네.”
대답하면서 엑셀을 밟던 발의 힘을 뺐다. 국도로 들어서자 가로등과 네온 불빛이 차 안까지 밀려들어왔다.
시멘트가 절절 끓는 팔월이 되었다. 아내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다시 공장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무만 보면 머리가 빠진다던 그녀는 이제 고기 타는 냄새만 맡으면 어지럽다고 호소했다. 대신 은영은 좀 더 많은 시간을 벌목 일을 배우는데 쓸 수 있게 되었다. 은영이 아내와 함께 시내에서 뭘 좀 사 왔다며 비닐봉지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등산복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나는 은영에게 돈을 아끼라고 언젠가 너도 공장을 차리고 싶은 거 아니냐고 물었다. 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회가 된다면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필리핀과 아프리카에는 아직 벌목이 돈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큰 공장을 차리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은영에게 정말 해외로 나가고 싶은 거냐고 되물었다. 은영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이 해외일 줄을 몰랐다. 벌목의 공급과 수요가 활발한 나라들도 이미 꿰고 있었다. 은영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며 훗날을 위해 영어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놀란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커다란 대지처럼 보이는 은영의 그림 위에 나무 한 그루를 보태 그렸다. 은영의 꿈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먼 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말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랐다. 아버지는 늘 나를 품 안에 가둬두고 싶어 했다. 나는 은영을 내 곁에만 두고 싶지도, 그렇다고 해서 그저 그런 실력을 가진 벌목공으로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날 벌목 현장에서 은영을 경계하던 벌목공은 다른 일꾼들보다 십만 원이나 더 받아갔다. 경력이 오래됐을뿐더러 실력도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벌목은 힘보다는 노련함과 기술이 더 필요한 일이었고 은영 역시 노력만 한다면 그처럼 될 수 있었다. 은영이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이 아이를 놓아줄 거였다.
마을 근처의 산에서 나무 솎아내기 작업을 했다. 은영과 나는 점심을 먹으러 마을로 내려갔다. 슈퍼 앞에 쪼그려 앉아 숨을 돌렸다. 은영은 몸에서 떨어지는 톱밥 가루가 미안하다며 안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바나나 맛 우유를 사와 은영에게 건넸다. 은영은 요즘 자꾸 어깨가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몸에 탈이 나는 게 정상이었다. 한쪽 다리가 부러진 의자와 구멍 난 파라솔을 번갈아 바라보며 은영에게 물었다.
“아직도 이 일이 좋냐?”
은영은 잠깐 뜸을 들인 뒤 검지로 빨대 모가지를 꺾으며 대답했다.
“나무를 쓰러뜨리는 게 아직 멋있습니다.”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아직 제대로 피부도 그을리지 않은 어린애가 뭘 아나 싶었다.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병으로 은영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여기 온 지 일 년은 됐냐? 그런 네가 뭘 안다고.”
은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벌목꾼은 최대 일 분 정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무가 어느 각도와 방향으로 쓰러질지, 저는 그걸 볼 줄 압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은영의 갈매기 눈썹이 춤을 추듯이 위아래로 움직여대는데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은영의 대답은 생전에 아버지가 즐겨하던 말이었다. ‘나는 미래를 본다.’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매일 밤 바늘이 무서워 울어대는 나에게 아버지는 자신은 가까운 미래를 볼 줄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작 자신의 죽음은 알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이미 폐암 말기였다. 죽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지난 날 자신을 떠났다는 이유로 나를 원망했다. 자신을 병간호해주던 아내를 며느리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날카로운 것에 쇠가 긁히는듯한 기침을 내뱉으며 피를 토했다. 아버지의 몸에서 위산과 뒤섞인 피비린내가 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몰래 헛구역질을 했다.
지난 날 은영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벌목공은 아버지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던 후배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네 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는 불쌍하지 않느냐고. 아버지는 툭하면 내게 어미 목숨 잡아먹고 태어났으면 다른 집 자식들보다 배로 잘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내가 집을 나간 순간에도 아버지는 얼마안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나를 벌목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기른 것이 아버지였으니까. 장례가 끝난 지 삼일 째가 되던 날 나는 공장과 집의 명의를 내 것으로 바꾸었다. 그 정도는 받아도 되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작업이 늦어졌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영은 남은 우유를 한입에 털어먹으며 뒤쫓아 걸어왔다. 산을 오르다 은영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나는 재빨리 은영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주었다. 그러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때 나는 기회가 있었다. 은영이 미래를 볼 줄 안다고 거드름을 피울 때 혼을 내고 말렸어야 했다. 나도 그랬던 시기가 있었다. 예전과 달리 톱이 내 손처럼 달라붙어 작업이 술술 풀리는 것 같을 때 말이다.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고 이럴 때일수록 조심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언젠가 은영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 걸음에 속도를 붙여 은영보다 조금 앞서 걸었다.
작업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작업구역을 나눴다. 장소가 겹치면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행해야 했다. 생각보다 산을 너무 많이 내려왔다 싶을 때 나는 은영을 큰 소리로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고 천천히 산을 되짚어 올라갔다. 은영은 높이가 십오 미터, 밑지름이 일 점 오 미터인 참나무 아래에 깔려 죽어있었다. 두개골이 호두껍데기처럼 으스러졌고 왼쪽 팔다리는 뒤로 꺾인 채 부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뭇잎들로 빼곡한 언제나 똑같은 하늘이었다. 나는 통나무를 굴려 은영을 꺼냈다. 트럭에서 방수포를 가져와 딱딱하게 굳어가는 몸을 감쌌고 노끈으로 풀리지 않게끔 말아 묶었다. 피는 젖은 땅 사이로 스며들었다. 지렁이 한 마리가 기어 나와 피거품 사이를 지나갔다. 은영을 들어 올려 트럭 뒤 통나무 더미 위에 실었다.
차에 올라타 에어컨을 틀었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자 차와 함께 몸도 심하게 흔들렸다. 은영은 고용보험을 따로 들지 않았다. 일꾼들을 제외한 누구도 은영이 일성임업에서 일하는지 알지 못했다. 은영은 재혼을 했다는 엄마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은영의 사망신고를 하면 한 번쯤 구청에서 조사를 나올 거였다. 그동안 뒷산에서 하던 벌목은 신고되지 않은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일기예보 좀 봐줘.”
아내는 곧 있으면 내가 있는 지역에서 소나기가 내릴 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은영의 죽음을 알렸다. 아내 역시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누가 가족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이제 막 대출을 갚기 시작하며 순이익을 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사고 현장은 쓸려내려 갈 거였다. 도로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렸다. 아버지의 죽음도 은영의 죽음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은영처럼 벌목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 일지도 몰랐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공장을 팔고 마을로 내려가 장사를 하자고 했다. 엑셀을 살짝 밟았다 뗐고 신호등이 있으면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하며 핸들을 고쳐 쥐었다. 진짜 가족이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되었다.
최은하
글을 쓰며 살고 싶습니다.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