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토리
“그림자 없는 세상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요?”
Q가 내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처럼 힘없이.
“처음엔 아주 낯설어요. 어색하기 짝이 없지요. 하지만 아주 편하기도 해요. 모든 것이 밝고 가벼워요. 너무나 가벼워서 온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지요. 납으로 된 구두를 신어야 겨우 대지에 붙어 걸을 수 있는 엠마…… 거 왜 있잖아요. 공기를 다루는 능력을 지닌 영화 속 인물. 그래요. 풍선처럼 아주 가볍게 느껴져요.”
그러고 나서 Q는 검은 뿔테안경을 고쳐 끼며 먼 곳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는 네온간판이 하나둘 떠오른다. 제일학원, 승리고시원, 앨리트학원, 성실고시원……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나 보다. 해 지는 노을을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달려가던, 고향에서 살 때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붉은 노을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던 내 그림자…… 땅거미가 내려앉고, 먼 곳에서 다가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산에서 내려온 늑대인지 알 수 없다는 그 혼돈의 시간에는 종종 태양을 따라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림자와 이별하는 아쉬움 탓이었을까.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이어 멀리, 우리 집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샛별처럼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그 빛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녹슨 자전거 체인을 힘겹게 눌러대며.
“우리 몸을 땅에 붙잡아 고정시키는 것은 그림자의 무게 때문일 지도 몰라요. 그림자를 버리는 순간, 존재는 가벼워지고, 무엇이든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요. 단, 더 이상 보통의 인간이라 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Q의 말뜻을 그제야 조금 눈치챈다. 그림자를 팔라는 뜻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운명에 대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사나이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대신 존엄성을 잃어버린다.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아니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그것.
Q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담실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던진다.
“달은 스스로 제 그림자를 버립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Q를 처음 만난 그날, 나는 스스로 내 그림자를 버렸다. 눈을 떠보니 이곳, 어두운 늪지대였다.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매미는 수년간 애벌레로 살아남아야만 ‘우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우화를 꿈꾸는 애벌레들이 사는 이곳은 늪지라는 것을. 늪지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그림자 없는 삶에는 사랑도, 추억도 없다는 것을. 그게 우리들의 이상한 나라이고, 나는 그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라는 것을.
그나마 나은 것은 일 년에 한 번씩 우화할 기회가 찾아온다는 거다. 나에게는 하반기에 있을 임용고시가 세 번째 기회다.
‘오늘 알바 끝났어. 블루스카이에서 보자.’
B로부터 온 카톡을 읽자마자 나는 공부하던 책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 없는 이상한 나라에서 그나마 친구가 되어 준 B.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고시원 내 방에 들러 화분에 물을 주기로 했다. 그러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면서 음료 한 잔 시켜놓고 종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카페 손님들을 그제야 훑어보았다. 책을 보는 사람,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사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그들은 모두 외톨이다. 다 함께 모여 있는 것만으로 겨우 위로를 얻고 있는 모래알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접촉도 대화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매력적인 여자가 혹은 멋진 남자가 옆자리에 있어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거절의 불안. 절망적 미래. 그것이 청춘을 오랏줄처럼 꽁꽁 묶어 놓고 있다.
모래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각자 자기만의 알리바이에 충실할 뿐이다. 공부를 위해, 혹은 컴퓨터 작업을 위해, 가끔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카페에 앉아있다는 알리바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하지만 ‘노오력’은 하고 있다는 자기기만. 그게 아니라면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기 위해, 한눈을 팔 여유가 전혀 없는 거든가.
나는 상상해 보았다. ‘친환경 마크’처럼 안전 진단이 완료된 배우자를 마트에서 판다면 좋겠다, 라고. ‘모험’ 따위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안전한 삶을 건전지처럼 통째로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라고. 어차피 고시촌에는 안전한 삶을 원하는 부모의 요구, 친척과 이웃의 불편한 시선을 피해 숨어들어온 젊은이가 대부분이니까.
어떤 차이도, 어떤 위반도 용납되지 않는 이 ‘안전한’ 늪지대에서 매혹적인 에로스의 상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늪지대에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대신에 빠른 섹스, 즉흥적인 섹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오르가슴만이 장마철 곰팡이처럼 피어난다.
B마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곳에서 견뎠을까? 문제가 없는 친구는 아니지만, 새삼 B의 존재가 고맙다.
한 달 쯤 전, 아침부터 B가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열어 보니 굵은 벚나무 줄기에 매달린, 연둣빛을 머금은 우화 직후의 매미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학원으로 가던 B가 또 우연히 발견한 걸까?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이 거리를 걸었지만, 내 눈에는 한 번도 눈에 띈 적이 없는 생명체였다. 마침 임용고시 시험일이 불과 백 일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고마워, B! 좋은 징조 같아.’라는 문자와 빨간 하트가 그려진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생명체를 찾아내는 B의 섬세한 눈썰미에 감탄했다. 그는 어딜 가든지 그랬다. 공원에서든 거리에서든, 심지어 후미진 골목 끝에서든. 푸드득 날아오르는 새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이고, 꽃잎 위에 앉은 나비, 전봇대 뒤에 숨어 있는 새끼 고양이, 담쟁이덩굴에 숨은 달팽이를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먼저였다. B가 말했다.
“별거 아냐. 초등학교 때만 해도 진짜 잘 찾았는데…… 그땐 부모님도 참 기뻐하셨지.”
“그 뒤로는 부모님이 기뻐하지 않았나 보구나.”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니까. 어디다 써먹겠어?”
‘알쓸신잡’이란 프로가 한창 인기를 끄는 때였다. 내가 큭큭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알아? 텔레비전에 나가게 될지?”
다섯 평짜리 내 방에 들어가니 종일 닫아놓아서인지 실내에서 큼큼한 냄새가 났다. 어제저녁에 먹은 라면 냄새와 미처 하지 못한 빨래, 곰팡내, 아침에 마신 핫초코 냄새가 뒤섞여 종일 썩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 청춘이 썩어가는 냄새인지도 모른다. 급하게 창문부터 열고 나서 ‘초록이’에게 물을 주었다. 매일매일 키를 키우는 초록이야말로 나의 이상형이다.
‘초록이’를 키우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지난봄, 어느 따뜻한 주말 오후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른 재래시장 입구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새로 나온 갖가지 봄나물과 철 이른 과일을 보니, 금세 입안에 신 침이 돌았다. 노점상 할머니한테 작고 빨간 소쿠리에 담긴 딸기를 샀다.
“아가씨, 내가 덤으로 줄 건 없고 이 고추 모종이나 하나 가져가쇼.”
노점상 할머니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팔다 남은 고추 모종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손에 쥐여주었다. 얼결에 덤으로 얻은 고추를 화분에 심어 창가에 놓았다.
물을 열심히 주기만 하면 ‘초록이’는 공중을 부여잡고 키를 늘였다. 끝내 구름 위 하늘에 닿았다는 신비의 콩 줄기처럼. 콩 줄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만났다는 아베리카 인디언 부족의 오래된 이야기가 생각났다.
‘콩 줄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들은 어머니를 괴롭히는 원형 괴물을 만난다. 그놈은 호수 근처에 살고 있다. 이름은 외로운 큰 괴물. 이 괴물의 특징은 그림자를 실체로 잘못 보는 것이다. 어느 날, 이 외로운 큰 괴물은 호수에 비친 두 명의 소년을 본다. “좋아, 요 녀석들을 삼켜서 죽여 버려야지.” 괴물은 호수의 물을 다 들이마시고 충분히 소화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물을 토해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 그곳에 있다. 괴물은 호수의 물을 네 번씩이나 들이마신다. 그 때문에 완전히 쇠약해진다. 결국 소년이 이긴다.’ 원룸 문을 닫고 세미나실로 가면서 의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그렇다면 자기 그림자를 스스로 먹어버린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괴물? 아니면 사람?
‘블루스카이’로 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 B가 휘청, 한다. 요즘 들어 부쩍 허약해 보인다. 원룸에 들렀다가 오느라 빨리 걸어서 그런지 나도 숨이 몹시 가쁘다. 나와 B가 속한 고시학원 스터디 모임은 매주 월요일 저녁에 만난다. 우리 모임이 자주 이용하는 세미나실인 ‘블루스카이’는 지하 일 층에 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벽면에는 ‘열두 가지 문구’가 궁서체로 적혀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너의 소망을 이루어 줄 거야.’라든지 ‘하루에 한 발짝만 앞으로 나아가자’,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 이런 내가 가끔은 미워진다.’같은. 한 마디로 재수 없다. 그보다 더 재수 없는 것도 있다. ‘혹시 알아? 너희 팀원 중에 너의 미래 배우자가 될 사람이 있을지.’
저녁에 만난 B와 나, 그리고 다른 멤버들은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 ‘가져 봐야 쓸데없는 신기한 잡능’에 대해 떠들었다.
Q는 자신의 귀를 맘대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R에겐 절대음감이 있다고 했다. 나에겐 복잡한 미로에서 잘 빠져나오는 능력이 있다. 내 숨겨진 능력에 대해 말하려고 했을 때, Q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 잠깐만.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날게. 벌써 수업이 시작되었을 거야. 이번에 엄청 비싼 특강을 신청했거든.”
Q가 밖으로 나가자, 문 닫히기가 무섭게 R이 말했다.
“수업은 무슨 수업. 새로 꿴 외로운 암컷이랑 뒹굴러 갈 테지.”
옆에 있던 P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큭큭 웃는다. R과 P도 컵밥으로 배를 채우러 간다면서 부지런히 자리를 떴다. 결국 B와 나만 남게 되었다.
“비야. 오후에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니?”
“괜찮아, 앨리스. 네 얘기 듣고 가도 돼.”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닌데, 뭐. 다음에 들려줄게.”
“정말?”
“응. 어차피 별로 신통한 능력도 아니고…… 그만 가자. 나도 곧 수업이 있어.”
세미나실 이용료를 내고 나자 딱 삼천 원이 남았다. 우리는 그걸로 ‘명랑’ 핫도그를 하나씩 사 먹었다. B는 천 원짜리 원조 핫도그를, 나는 이천 원짜리 감자 핫도그를. 나에게 감자 맛을 양보한 B가 고마웠다. 내가 가게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설탕은 무조건 많이 묻혀주세요!”
“왜?”
“뇌세포를 돌리려면 당분이 필요하니까. 또……”
“또 뭐?”
“우울한 기분을 몰아내려면 달콤함이 필요해.”
B가 고개를 끄덕였다. B는 원조 핫도그에 칠리소스를 얹었다. 그건 그가 칠리소스를 얹은 오븐 닭구이를 먹고 싶다는 뜻이다. 나는 소스를 거절했다. 독일 정통 통감자 오븐구이와 수제 소시지가 먹고 싶다는 뜻이다. 게다가 난 체중 관리를 해야 했다. 요즘 들어 부척 체중이 늘었다. 우울할 때마다 과자를 먹어댄 탓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나중에 취업하면, 돈을 모아 휴가 때마다 여행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란 게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여간해서는 긴 휴가를 얻을 수가 없었다. 휴가는커녕 휴일 하루를 온전히 쉬기에도 어려웠다. 끊임없이 업무가 닥쳤고, 야근 없이는 처리 불가능했다. 주말마저 업무 진행을 묻는 카톡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정규직장을 꿈꾸게 되었다. ‘적어도 휴가가 보장되어 있을 테고, 휴일에 쉰다고 잘리지는 않을 테니까.’
임용고시를 보기로 결심한 것은 부모님의 강권 탓만이 아니었다.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안정된 일자리로는 공무원이 제일 낫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려면 고시촌에 가야 하고, 고시촌에서 견디려면 달콤함이 필요하다. 달콤함을 얻으려면 가격대비 제일 싼 것이 사탕과 과자다.
다행이라면 세계과자마켓이 가까이에 있다는 거다. 파리 과자, 중국 과자, 일본 과자, 핀란드 과자, 태국 과자…… 혀끝으로 감미로운 이국의 맛을 음미하면서 당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잠재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 체중을 늘렸다가는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힘들 거다. 늪지대에서의 애벌레 시절을 무사히 끝낸 뒤에, 성공적으로 ‘우화’를 마친 다음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비행을 하려면 더 이상 체중을 늘리면 곤란하다.
늘 그렇듯이 B는 오늘도 자기 자신을 탓했다. 달콤한 핫도그를 먹는 내내. 이번 모의고사 점수가 떨어진 건 자기가 너무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둥, 그동안 너무 방심했다는 둥. 자기가 너무 멍청하다는 둥…… 나는 ‘멍청하다’에 한 표를 던졌다.
“네가 멍청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걸 보니 그 말이 맞네. 너 멍청해. 이 멍청아!”
B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난 여기를 떠날 거야.”
난 못 들은 척 했다. 늪지대에서 사는 고시생이라면 누구나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드는 생각일 따름이니까.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라 믿었던, 그래서 이곳 생활을 잘 버틸 거라 믿었던 B 역시 꽤나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차라리 나은 처지일는지 모른다. 나를 고시촌으로 보낸 엄마, 아빠를 원망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 인생이 잘못된다면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으니까.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B에게 건네주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나도 그만 가봐야 해. 잘 가라, 비.”
“응. 앨리스, 너도 잘 가.”
B와의 이별에선 언제나 독특한 향내가 난다. 고향 집 뒷마당에 심어져 있던 오동나무 꽃향기처럼 달콤하면서도 비릿하다. 그와 함께 있을 땐 잘 느끼지 못하다가 그가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향이 그리워진다. ‘그립다’는 단어가 떠오르자 나는 진저리를 친다. 이 세계에선 ‘그림자’ 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단어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림자를 가진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닌가. 그림자로 된 긴 망토를 어깨에 매단 귀족들만의 특권인 것이다. 그림자 없는 나…… 하지만 다행히 아직 나에게는 빛나는 영혼이 남아있다.
‘영혼이란 육체의 추함을 잊기 위해 발명된 유토피아다.’라고 말한 건 푸코였던가. 저명한 철학자는 주장했다.
‘영혼은 물론 몸에 거한다. 하지만 거기서 빠져나갈 줄 안다. 영혼은 내 눈의 창을 통해 사물을 보기 위해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내가 자고 있을 때는 꿈 꾸기 위해. 내가 죽을 때는 살아남기 위해. 내 영혼은 희고, 순수하고, 아름답다. 오물투성이―어쨌든 그리 깨끗하지 않은―내 몸이 영혼을 더럽힌다 해도 어떤 효능이, 위력이, 무수히 신성한 제스처들이 본래의 순수함을 복원시킬 것이다. 내 영혼은 오래갈 것이다. 내 낡은 몸이 썩을지언정 영혼은 그대로이리라. 내 영혼 만세! 내 영혼은 빛나고 말끔하고 건강하고 날렵하고 생기에 넘치고 따스하고 신선한 내 몸이다. 매끄럽고 거세되고 비누 거품처럼 둥그런 내 몸이다.’
푸코의 글이 적힌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이 우리 스터디 모임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한국사 기출문제집을 사려고 들른 서점에서 내게 초대장을 건넨 것은 B가 아니었다. Q였다. 그게 내가 한 번만 따로 만나자는 Q의 집요한 요구를 분명히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다. Q에게는 시험에 도움 되는 많은 정보가 있다. 하지만 그게 모든 이유일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공부에 방해가 될 뿐이다.
B와 헤어지고 나서 곧장 앞으로 걸어간다. 커피집과 맥줏집과 치킨집을 지나 대로변의 컵밥 거리에 다다른다. 오늘도 싸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는 젊은이들로 넘친다.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난 작은 골목길로 접어든다. 길 양편에는 온갖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언제나 그렇듯이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여긴 미니어처 세상이로구나.”
처음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엄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렇게 말했다.
“성인이 즐길 수 있는 건 다 있네. 작고 허름하다뿐이지. 근데 어쩜 이렇게 싸니?”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를 후후 불어대며 어머니는 흐흥 흐흥 웃었다. 이 동네에서라면 생활비를 절반은 줄일 수 있겠다면서. 연신 생활비 타령이나 하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늪지대에서 살아가야 할 내 착잡한 심정을 헤아린다면, 저런 말이 입에서 나올까?
어머니 말대로 여기서도 공부하는 틈틈이 놀 수 있다. 싼값으로. 얼마든지. 청소년과 성인의 중간 방식으로. 여기는 지옥과 천당의 중간계다. 동네 학원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자라서 제 발로 찾아오는 성인 학원가. 버젓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독립된 생활을 꿈꾸지만 그러지 못하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가여운 청춘들이 사는 곳.
B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못 가 후회가 밀려왔다. 집 앞에 다다를 즈음 별로 내키지 않는 문자를 선심 쓰듯 날렸다.
“비, 넌 할 수 있어! 정말이야. 지금까지 넌 우리들 중 최고였잖아. 힘내!!!”
답이 없었다. 이모티콘을 보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아무리 이모티콘을 날려도 더 이상 B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은근히 부아가 났다. ‘이게, 정말!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명문대 출신이면 뭐해? 고작 늪에서 사는 애벌레인 주제에.’ 그날 이후, B는 더 이상 세미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 역시 한동안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창가에서 하루하루 자신의 키를 키우는 고추에게 애정을 쏟았다.
구월 첫째 주 학원가는 수강생들로 붐볐다. 학원 정문에서 B를 만났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실은 오랫동안 건물 앞을 서성인 끝에 조우한 거였다. B는 서둘러 길을 걷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힘찬 발걸음으로. 저토록 활기차게 만든 게 뭘까? 여자 친구라도 새로 사귀었나? 아니면 색다른 취미라도 생긴 걸까? B가 무엇엔가 푹 빠져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던 나로서는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커피집, 맥줏집, 당구장, 인형뽑기집, 햄버거집, 옷가게, 24시간 편의점이 줄지어 있는 상가를 지나서 자동차가 복잡한 대로를 건너 B는 한참을 걸어갔다. 어디를 가는 걸까? 이렇게 멀리까지 놀러 다니는 친구가 아닌데? 그가 마침내 다다른 곳은 근처 아파트 단지, 커다란 느티나무 밑이었다.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그곳은 매우 한산했다. 더위 탓에 오래 앉아있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도 B는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초조함과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땡볕 아래 자리를 지켰다. 책을 꺼내놓고 있었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발밑도 보고 테이블 위도 들여다보고 좀 더 먼 주변까지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점점 더 호기심이 일었다.
B는 언제나 성실한 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살아온 친구다.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독학을 하다시피 해서 명문대에 입학했고, 대학 시절에도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늘 열심히 사느라 밥 한 끼 느긋하게 먹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직 이십 대건만 어깨가 굽고, 얼굴빛이 어두웠다. 언제나 종종걸음쳤고, 늘 지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눈동자만은 누구보다 맑았다.
“넌 할 수 있어.” 주변에서 그에게 해 준 말은 언제나 그게 다였다고 했다. “넌 할 수 있어.” 나 역시 그가 힘들어할 때면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넌 할 수 있어!” 다독이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면 다음 날 아침, B는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뚜벅뚜벅 학원으로 향했다. 인생이란 노력하는 자 편이라고 그는 굳게 믿는 눈치였다. 너무 무리하는 게 오히려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랬던 B가 그토록 누군가에게 빠져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파트 건물 뒤에 숨어 B에게 전화를 걸었다. “B, 뭐해? 아까 만나서 반가웠어. 바빠서 그만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졌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괜찮아, 앨리스. 잘 지내지? 나……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얼마 전에 근처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가 발견했어. 너무나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말이야. 오, 나의 뮤즈! 그 오만한 시선, 상대를 압도하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얼굴, 품위를 잃지 않는 자세…… 그뿐이 아니야. 반듯한 어깨와 튼실한 엉덩이, 날씬하고 강인한 다리…… 오후 빛을 받아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 대지를 딛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당당하던지, 난 그만 한순간에 사로잡혔어.”
어이가 없고 한심해 보였다. 시험이 코앞인데 골치 아픈 사랑 따위에나 빠져있다니. 차라리 나처럼 고추나 키울 일이지.
“한동안 넋을 잃고 지켜보았어. 나의 집요한 시선에도 뮤즈는 전혀 당황하지 않더군. 대신 느리게, 아주 부드럽게 목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 뮤즈의 무심하면서도 강력한 시선…… 집요한 내 시선을 맞받아치는 정도를 넘어 나를 멸시하는 게 분명해 보였어. 뮤즈는 직감적으로 알았던 거야.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지. 한때는 얼마나 긴 그림자를 질질 끌고 다녔는지를. 얼마나 자주 자기 그림자에 걸려 넘어졌는지를. 그러다 이제는 그 긴 그림자마저 잃어버린 바보인지를. 그림자 없는 나…… 내 그림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내 그림자 속에 숨겨 두었던 그 오랜 추억과 비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 네온 빛 속에서 가리가리 흩어진 내 그림자……”
아, 지독한 사랑 병에 걸렸구나.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뒤나 쫓는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비참하게 여겨졌다.
눈앞에 있는 B를 두고 쓸쓸히 뒤돌아섰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과 달리, 머릿속에서는 느티나무 밑 벤치에 앉아 있던, 초췌하면서도 어딘가 들떠있는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B가 그토록 초조하게 기다리던 뮤즈가 누굴까? 어째서 갑자기 그림자를 찾고 싶어진 걸까?
그때 B한테서 카톡이 왔다. 이번엔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방금 전에 다시 만난 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뮤즈!”
사진을 열어 보니 예의 그 느티나무와 벤치가 있는 풍경이었다. 사진을 확대해서 찬찬히 살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있는 것은 한 마리의 황갈색 ‘사마귀’였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후드득후드득 우박 떨어지듯 크고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B와 멀어진 뒤로 나의 일상은 엉망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자기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B가 없어 편하고 좋았다. 가끔 적적할 때는 하루하루 키를 키우는 고추 풀을 바라보며, 콩 줄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만나고 고향으로 귀환한 소년처럼 내가 취업에 성공해 금의환향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모든 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침 특강을 들으러 가자며 일찌감치 전화를 해대는 B가 없으니까 금세 밤과 낮이 바뀌어 버렸다. 낮에는 종일 자고 밤에야 부스스 깼다. 밤새 공부한다는 핑계로 책상에 앉아 빵과 과자를 먹고 청량음료를 마셔댔다. 순식간에 살이 엄청나게 쪘다.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게으름뱅이의 천국』 에 나오는, 배가 터질 것 같은 포만감 속에서 어떤 고민과 갈등도 없이 뒹굴고 있는 인물들처럼 아무 때나 자고 아무거나 먹으면서 아무나 만나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무기력과 자기혐오만 남는다. 그럴 때 어떤 수험생들은 우울과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룻밤 연애에 매달린다.
“여기서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전염병이야.”
언제나 자신감 있게 말하는 Q. 그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늪지대에 사랑 따위는 없다. Q는 ‘돌아온 싱글’이다. 그는 이혼의 결정적 이유가 사랑의 부재가 아닌, 경제력과 장래성 부재 탓이라고 믿는다. 하기야 요즘 여자들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안전한 직장을 가진 남자와의 안온한 생활을 꿈꾼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한다. 일벌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여왕벌은 알을 낳고, 우리는 일을 낳는다.’라는 신념 하에.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야 먹고 살 수가 있다. 그래야 노후를 위해 연금을 들고 목돈을 만들어 재테크라도 시도할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연인을 찾는 수컷의 충혈 된 눈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밤새 시험공부를 하거나 일에 지친, 피로한 눈망울들만 지천이다. 그도 아니면 배터지게 먹은 다음 늘어져 자고 싶은 얼굴들……
갑자기 ‘세과마’에 가고 싶어졌다. 세계의 과자란 과자는 다 파는 마트야말로 우리들의 집일는지 모른다. 빵과 과자와 사탕으로 만들어진 스위트홈. 달콤함과 부드러움과 향긋함만이 있는 애벌레들의 유토피아.
츄리닝 복장으로 오피스텔을 나서자마자 ‘세과마’로 직행했다. 그곳은 오늘도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사탕과 젤리, 빵과 과자와 청량음료를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B에게서 카톡이 왔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얄미운 B. ‘죽지 않고 살아있군!’ 모른 체 할까, 하는 맘도 들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안녕, 앨리스? 잘 지내니? 오늘은 정말 황홀한 가을 날씨였어. 이토록 빛나는 햇살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오늘따라 내 그림자가 정말 선명하게 보이더라. 앨리스, 드디어 잃어버린 내 그림자를 되찾았어.”
또다시 카톡, 하는 알림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사진이었다. 열어보니, 돌담과 팽나무가 어우러진 바닷가 마을 풍경이다. 지붕 낮은 돌집 마당에는 빨간 자전거가 놓여있다.
“앨리스. 여긴 남쪽 끝에 있는 섬이야. 얼마 전부터 이 마을에서 지내고 있어. 마을회관에는 아주 작은 도서관이 있는데, 난 그곳을 지키는 지킴이야. 이곳에서는 나를 ‘생물 선생’이라고 불러. 숲과 바닷가 생물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지. 오전에는 텃밭 농사를 짓고 오후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책 읽기와 외국어를 가르쳐. 휴일에는 아이들과 숲의 생태를 알아보러 다니고. 나의 퇴근 시간은 언제나 일몰 때야. 낡았지만 아직 잘 굴러다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날마다 변하는 바다색과 멋진 파도가 내 길동무야.”
여길 떠나 가버린 데가 고작 시골 동네라니. 어이가 없었다.
“크게 자란 그림자를 어깨에 걸고 노을을 향해 달려가 보았니? 그럴 때 그림자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생동하지. 한참을 달리다 보면, 멀리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집이 보여. 내 또래 젊은이 셋이 같이 사는 그 집은 오래된 돌 창고를 개조한 거지만, 우리한테는 아주 멋진 보금자리야. 너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구나.”
미친 B! 하지만…… 무척 부럽다. 과자를 먹고 젤리를 씹어댄다. 또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하필 엄마다.
“잘 지내니? 모의고사 결과 나왔어?”
“아직. 신경 쓰지 마.”
“엄마는 내일 서울 갈 거야. 사촌 언니 결혼식이잖아.”
“나도 가야 되나? 마땅히 입을 옷도 없는데…… 살이 많이 쪘거든.”
“넌 공부하느라 못 간다고 해뒀으니 염려 마. 그나저나 이번에는 합격해야……”
“알았어. 공부해야 되니까 그만 끊어!”
초조감이 일었다. 초콜릿과 탄산음료로는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가 점점 거세지는 파도처럼 거칠게 밀려왔다. 나는 Q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파르르 손끝이 떨렸다.
고깃집, 커피집, 맥줏집, 치킨집, 인형뽑기월드, 안마의자카페, PC방, 옷가게, 서점, 문구점, 명랑핫도그, 와플 전문점, 할매순대집, 컵밥 집, 세과마…… 그리고 ‘토끼굴’. 토끼굴은 골목 가장 안쪽, 어둡고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작고 허름한 여인숙이다. 노란 토끼를 그려놓은 출입문 앞에 Q가 기다리고 있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시커멓고 커다란 몸뚱이가 야생 곰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시발! 시간 없어 죽겠는데.”
Q가 이마에 굵은 주름을 그었다. 그러고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운동화 바닥으로 짓눌렀다. 흔해빠진 스니커즈 운동화다. 한 번도 빨지 않아 검고 더러워진.
Q가 손에 쥐고 있던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자, 토끼굴 주인이 째진 눈으로 나를 흘긋흘긋 훔쳐보며 말했다.
“겨우 한 시간? 기왕이면 두 시간 쓰지 그래? 아가씨도 피곤해 보이는데……”
Q의 손에 이끌려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우울과 분노를 한순간에 태우기 위해. 인스턴트커피처럼 쉬운 연애, 값싼 연애, 일회용 연애를 위해.
늪지대 애벌레들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사랑 따위 기대하지 않는 게 규칙이다. 서로의 이름조차 묻지 않는다.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떠나는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잊는 것. 그것만이 상호 간에 지켜야 할 약속이자 예의다.
B로부터 다시 카톡이 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토끼굴 복도의 어둠 속에서, B의 문장을 읽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결국 노예가 된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하얀 머릿속으로 해지는 저녁, 낯익은 풍경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달려가던 어린 날의 내 모습. 붉은 노을 속에서 태양과 함께 아스라이 사라지던 내 그림자……
나는 Q의 손을 뿌리쳤다. Q가 화났는지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으로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Q가 사납게 노려보았다. 충혈된 그의 눈이 죽음의 화마처럼 보였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목에 해골을 꿴 목걸이를 두른 다키니(모든 부처에 따라다니는 요정 같은 여신)가 내 앞에서 사람 가죽으로 만든 깃발을 휘두르고 사람 허벅지 뼈로 만든 나팔을 불면서 외친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죽음의 축제다. 춤추는 다키니는 Q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다. 거친 몸뚱이를 빠져나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다.
“앨리스, 돌아와! 안 오면 넌 죽음이야!”
나는 대답 없이 뒤돌아서서 앞을 향해 달린다. 돌아서 뛰는 내 앞에 깎아지른 벼랑이 가로막는다. 나는 아래로 떨어진다. 호숫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가을 도토리처럼, 기꺼이, 떨어져 내린다. 물속에 깊이 잠기기를 소망하면서. 괴물이 삼켜버린, 잃어버린 내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서.
Q가 내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처럼 힘없이.
“처음엔 아주 낯설어요. 어색하기 짝이 없지요. 하지만 아주 편하기도 해요. 모든 것이 밝고 가벼워요. 너무나 가벼워서 온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지요. 납으로 된 구두를 신어야 겨우 대지에 붙어 걸을 수 있는 엠마…… 거 왜 있잖아요. 공기를 다루는 능력을 지닌 영화 속 인물. 그래요. 풍선처럼 아주 가볍게 느껴져요.”
그러고 나서 Q는 검은 뿔테안경을 고쳐 끼며 먼 곳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에는 네온간판이 하나둘 떠오른다. 제일학원, 승리고시원, 앨리트학원, 성실고시원……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나 보다. 해 지는 노을을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달려가던, 고향에서 살 때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붉은 노을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던 내 그림자…… 땅거미가 내려앉고, 먼 곳에서 다가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산에서 내려온 늑대인지 알 수 없다는 그 혼돈의 시간에는 종종 태양을 따라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림자와 이별하는 아쉬움 탓이었을까.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이어 멀리, 우리 집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샛별처럼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그 빛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녹슨 자전거 체인을 힘겹게 눌러대며.
“우리 몸을 땅에 붙잡아 고정시키는 것은 그림자의 무게 때문일 지도 몰라요. 그림자를 버리는 순간, 존재는 가벼워지고, 무엇이든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요. 단, 더 이상 보통의 인간이라 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Q의 말뜻을 그제야 조금 눈치챈다. 그림자를 팔라는 뜻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운명에 대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사나이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대신 존엄성을 잃어버린다.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아니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그것.
Q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담실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던진다.
“달은 스스로 제 그림자를 버립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Q를 처음 만난 그날, 나는 스스로 내 그림자를 버렸다. 눈을 떠보니 이곳, 어두운 늪지대였다.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매미는 수년간 애벌레로 살아남아야만 ‘우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우화를 꿈꾸는 애벌레들이 사는 이곳은 늪지라는 것을. 늪지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그림자 없는 삶에는 사랑도, 추억도 없다는 것을. 그게 우리들의 이상한 나라이고, 나는 그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라는 것을.
그나마 나은 것은 일 년에 한 번씩 우화할 기회가 찾아온다는 거다. 나에게는 하반기에 있을 임용고시가 세 번째 기회다.
‘오늘 알바 끝났어. 블루스카이에서 보자.’
B로부터 온 카톡을 읽자마자 나는 공부하던 책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 없는 이상한 나라에서 그나마 친구가 되어 준 B.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고시원 내 방에 들러 화분에 물을 주기로 했다. 그러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면서 음료 한 잔 시켜놓고 종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카페 손님들을 그제야 훑어보았다. 책을 보는 사람,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사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그들은 모두 외톨이다. 다 함께 모여 있는 것만으로 겨우 위로를 얻고 있는 모래알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접촉도 대화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매력적인 여자가 혹은 멋진 남자가 옆자리에 있어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거절의 불안. 절망적 미래. 그것이 청춘을 오랏줄처럼 꽁꽁 묶어 놓고 있다.
모래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각자 자기만의 알리바이에 충실할 뿐이다. 공부를 위해, 혹은 컴퓨터 작업을 위해, 가끔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카페에 앉아있다는 알리바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하지만 ‘노오력’은 하고 있다는 자기기만. 그게 아니라면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기 위해, 한눈을 팔 여유가 전혀 없는 거든가.
나는 상상해 보았다. ‘친환경 마크’처럼 안전 진단이 완료된 배우자를 마트에서 판다면 좋겠다, 라고. ‘모험’ 따위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안전한 삶을 건전지처럼 통째로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라고. 어차피 고시촌에는 안전한 삶을 원하는 부모의 요구, 친척과 이웃의 불편한 시선을 피해 숨어들어온 젊은이가 대부분이니까.
어떤 차이도, 어떤 위반도 용납되지 않는 이 ‘안전한’ 늪지대에서 매혹적인 에로스의 상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늪지대에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대신에 빠른 섹스, 즉흥적인 섹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오르가슴만이 장마철 곰팡이처럼 피어난다.
B마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곳에서 견뎠을까? 문제가 없는 친구는 아니지만, 새삼 B의 존재가 고맙다.
한 달 쯤 전, 아침부터 B가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열어 보니 굵은 벚나무 줄기에 매달린, 연둣빛을 머금은 우화 직후의 매미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학원으로 가던 B가 또 우연히 발견한 걸까?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이 거리를 걸었지만, 내 눈에는 한 번도 눈에 띈 적이 없는 생명체였다. 마침 임용고시 시험일이 불과 백 일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고마워, B! 좋은 징조 같아.’라는 문자와 빨간 하트가 그려진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생명체를 찾아내는 B의 섬세한 눈썰미에 감탄했다. 그는 어딜 가든지 그랬다. 공원에서든 거리에서든, 심지어 후미진 골목 끝에서든. 푸드득 날아오르는 새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이고, 꽃잎 위에 앉은 나비, 전봇대 뒤에 숨어 있는 새끼 고양이, 담쟁이덩굴에 숨은 달팽이를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먼저였다. B가 말했다.
“별거 아냐. 초등학교 때만 해도 진짜 잘 찾았는데…… 그땐 부모님도 참 기뻐하셨지.”
“그 뒤로는 부모님이 기뻐하지 않았나 보구나.”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니까. 어디다 써먹겠어?”
‘알쓸신잡’이란 프로가 한창 인기를 끄는 때였다. 내가 큭큭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알아? 텔레비전에 나가게 될지?”
다섯 평짜리 내 방에 들어가니 종일 닫아놓아서인지 실내에서 큼큼한 냄새가 났다. 어제저녁에 먹은 라면 냄새와 미처 하지 못한 빨래, 곰팡내, 아침에 마신 핫초코 냄새가 뒤섞여 종일 썩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 청춘이 썩어가는 냄새인지도 모른다. 급하게 창문부터 열고 나서 ‘초록이’에게 물을 주었다. 매일매일 키를 키우는 초록이야말로 나의 이상형이다.
‘초록이’를 키우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지난봄, 어느 따뜻한 주말 오후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른 재래시장 입구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새로 나온 갖가지 봄나물과 철 이른 과일을 보니, 금세 입안에 신 침이 돌았다. 노점상 할머니한테 작고 빨간 소쿠리에 담긴 딸기를 샀다.
“아가씨, 내가 덤으로 줄 건 없고 이 고추 모종이나 하나 가져가쇼.”
노점상 할머니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팔다 남은 고추 모종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손에 쥐여주었다. 얼결에 덤으로 얻은 고추를 화분에 심어 창가에 놓았다.
물을 열심히 주기만 하면 ‘초록이’는 공중을 부여잡고 키를 늘였다. 끝내 구름 위 하늘에 닿았다는 신비의 콩 줄기처럼. 콩 줄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가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만났다는 아베리카 인디언 부족의 오래된 이야기가 생각났다.
‘콩 줄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들은 어머니를 괴롭히는 원형 괴물을 만난다. 그놈은 호수 근처에 살고 있다. 이름은 외로운 큰 괴물. 이 괴물의 특징은 그림자를 실체로 잘못 보는 것이다. 어느 날, 이 외로운 큰 괴물은 호수에 비친 두 명의 소년을 본다. “좋아, 요 녀석들을 삼켜서 죽여 버려야지.” 괴물은 호수의 물을 다 들이마시고 충분히 소화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물을 토해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 그곳에 있다. 괴물은 호수의 물을 네 번씩이나 들이마신다. 그 때문에 완전히 쇠약해진다. 결국 소년이 이긴다.’ 원룸 문을 닫고 세미나실로 가면서 의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그렇다면 자기 그림자를 스스로 먹어버린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괴물? 아니면 사람?
‘블루스카이’로 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 B가 휘청, 한다. 요즘 들어 부쩍 허약해 보인다. 원룸에 들렀다가 오느라 빨리 걸어서 그런지 나도 숨이 몹시 가쁘다. 나와 B가 속한 고시학원 스터디 모임은 매주 월요일 저녁에 만난다. 우리 모임이 자주 이용하는 세미나실인 ‘블루스카이’는 지하 일 층에 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벽면에는 ‘열두 가지 문구’가 궁서체로 적혀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너의 소망을 이루어 줄 거야.’라든지 ‘하루에 한 발짝만 앞으로 나아가자’,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 이런 내가 가끔은 미워진다.’같은. 한 마디로 재수 없다. 그보다 더 재수 없는 것도 있다. ‘혹시 알아? 너희 팀원 중에 너의 미래 배우자가 될 사람이 있을지.’
저녁에 만난 B와 나, 그리고 다른 멤버들은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 ‘가져 봐야 쓸데없는 신기한 잡능’에 대해 떠들었다.
Q는 자신의 귀를 맘대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R에겐 절대음감이 있다고 했다. 나에겐 복잡한 미로에서 잘 빠져나오는 능력이 있다. 내 숨겨진 능력에 대해 말하려고 했을 때, Q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 잠깐만.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날게. 벌써 수업이 시작되었을 거야. 이번에 엄청 비싼 특강을 신청했거든.”
Q가 밖으로 나가자, 문 닫히기가 무섭게 R이 말했다.
“수업은 무슨 수업. 새로 꿴 외로운 암컷이랑 뒹굴러 갈 테지.”
옆에 있던 P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큭큭 웃는다. R과 P도 컵밥으로 배를 채우러 간다면서 부지런히 자리를 떴다. 결국 B와 나만 남게 되었다.
“비야. 오후에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니?”
“괜찮아, 앨리스. 네 얘기 듣고 가도 돼.”
“별로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닌데, 뭐. 다음에 들려줄게.”
“정말?”
“응. 어차피 별로 신통한 능력도 아니고…… 그만 가자. 나도 곧 수업이 있어.”
세미나실 이용료를 내고 나자 딱 삼천 원이 남았다. 우리는 그걸로 ‘명랑’ 핫도그를 하나씩 사 먹었다. B는 천 원짜리 원조 핫도그를, 나는 이천 원짜리 감자 핫도그를. 나에게 감자 맛을 양보한 B가 고마웠다. 내가 가게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설탕은 무조건 많이 묻혀주세요!”
“왜?”
“뇌세포를 돌리려면 당분이 필요하니까. 또……”
“또 뭐?”
“우울한 기분을 몰아내려면 달콤함이 필요해.”
B가 고개를 끄덕였다. B는 원조 핫도그에 칠리소스를 얹었다. 그건 그가 칠리소스를 얹은 오븐 닭구이를 먹고 싶다는 뜻이다. 나는 소스를 거절했다. 독일 정통 통감자 오븐구이와 수제 소시지가 먹고 싶다는 뜻이다. 게다가 난 체중 관리를 해야 했다. 요즘 들어 부척 체중이 늘었다. 우울할 때마다 과자를 먹어댄 탓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나중에 취업하면, 돈을 모아 휴가 때마다 여행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란 게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여간해서는 긴 휴가를 얻을 수가 없었다. 휴가는커녕 휴일 하루를 온전히 쉬기에도 어려웠다. 끊임없이 업무가 닥쳤고, 야근 없이는 처리 불가능했다. 주말마저 업무 진행을 묻는 카톡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정규직장을 꿈꾸게 되었다. ‘적어도 휴가가 보장되어 있을 테고, 휴일에 쉰다고 잘리지는 않을 테니까.’
임용고시를 보기로 결심한 것은 부모님의 강권 탓만이 아니었다.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안정된 일자리로는 공무원이 제일 낫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려면 고시촌에 가야 하고, 고시촌에서 견디려면 달콤함이 필요하다. 달콤함을 얻으려면 가격대비 제일 싼 것이 사탕과 과자다.
다행이라면 세계과자마켓이 가까이에 있다는 거다. 파리 과자, 중국 과자, 일본 과자, 핀란드 과자, 태국 과자…… 혀끝으로 감미로운 이국의 맛을 음미하면서 당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잠재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 체중을 늘렸다가는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 힘들 거다. 늪지대에서의 애벌레 시절을 무사히 끝낸 뒤에, 성공적으로 ‘우화’를 마친 다음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비행을 하려면 더 이상 체중을 늘리면 곤란하다.
늘 그렇듯이 B는 오늘도 자기 자신을 탓했다. 달콤한 핫도그를 먹는 내내. 이번 모의고사 점수가 떨어진 건 자기가 너무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둥, 그동안 너무 방심했다는 둥. 자기가 너무 멍청하다는 둥…… 나는 ‘멍청하다’에 한 표를 던졌다.
“네가 멍청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걸 보니 그 말이 맞네. 너 멍청해. 이 멍청아!”
B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난 여기를 떠날 거야.”
난 못 들은 척 했다. 늪지대에서 사는 고시생이라면 누구나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드는 생각일 따름이니까.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라 믿었던, 그래서 이곳 생활을 잘 버틸 거라 믿었던 B 역시 꽤나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차라리 나은 처지일는지 모른다. 나를 고시촌으로 보낸 엄마, 아빠를 원망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 인생이 잘못된다면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으니까.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B에게 건네주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나도 그만 가봐야 해. 잘 가라, 비.”
“응. 앨리스, 너도 잘 가.”
B와의 이별에선 언제나 독특한 향내가 난다. 고향 집 뒷마당에 심어져 있던 오동나무 꽃향기처럼 달콤하면서도 비릿하다. 그와 함께 있을 땐 잘 느끼지 못하다가 그가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향이 그리워진다. ‘그립다’는 단어가 떠오르자 나는 진저리를 친다. 이 세계에선 ‘그림자’ 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단어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림자를 가진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닌가. 그림자로 된 긴 망토를 어깨에 매단 귀족들만의 특권인 것이다. 그림자 없는 나…… 하지만 다행히 아직 나에게는 빛나는 영혼이 남아있다.
‘영혼이란 육체의 추함을 잊기 위해 발명된 유토피아다.’라고 말한 건 푸코였던가. 저명한 철학자는 주장했다.
‘영혼은 물론 몸에 거한다. 하지만 거기서 빠져나갈 줄 안다. 영혼은 내 눈의 창을 통해 사물을 보기 위해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내가 자고 있을 때는 꿈 꾸기 위해. 내가 죽을 때는 살아남기 위해. 내 영혼은 희고, 순수하고, 아름답다. 오물투성이―어쨌든 그리 깨끗하지 않은―내 몸이 영혼을 더럽힌다 해도 어떤 효능이, 위력이, 무수히 신성한 제스처들이 본래의 순수함을 복원시킬 것이다. 내 영혼은 오래갈 것이다. 내 낡은 몸이 썩을지언정 영혼은 그대로이리라. 내 영혼 만세! 내 영혼은 빛나고 말끔하고 건강하고 날렵하고 생기에 넘치고 따스하고 신선한 내 몸이다. 매끄럽고 거세되고 비누 거품처럼 둥그런 내 몸이다.’
푸코의 글이 적힌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이 우리 스터디 모임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한국사 기출문제집을 사려고 들른 서점에서 내게 초대장을 건넨 것은 B가 아니었다. Q였다. 그게 내가 한 번만 따로 만나자는 Q의 집요한 요구를 분명히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다. Q에게는 시험에 도움 되는 많은 정보가 있다. 하지만 그게 모든 이유일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공부에 방해가 될 뿐이다.
B와 헤어지고 나서 곧장 앞으로 걸어간다. 커피집과 맥줏집과 치킨집을 지나 대로변의 컵밥 거리에 다다른다. 오늘도 싸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는 젊은이들로 넘친다.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난 작은 골목길로 접어든다. 길 양편에는 온갖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언제나 그렇듯이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여긴 미니어처 세상이로구나.”
처음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엄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렇게 말했다.
“성인이 즐길 수 있는 건 다 있네. 작고 허름하다뿐이지. 근데 어쩜 이렇게 싸니?”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커피를 후후 불어대며 어머니는 흐흥 흐흥 웃었다. 이 동네에서라면 생활비를 절반은 줄일 수 있겠다면서. 연신 생활비 타령이나 하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늪지대에서 살아가야 할 내 착잡한 심정을 헤아린다면, 저런 말이 입에서 나올까?
어머니 말대로 여기서도 공부하는 틈틈이 놀 수 있다. 싼값으로. 얼마든지. 청소년과 성인의 중간 방식으로. 여기는 지옥과 천당의 중간계다. 동네 학원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자라서 제 발로 찾아오는 성인 학원가. 버젓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독립된 생활을 꿈꾸지만 그러지 못하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가여운 청춘들이 사는 곳.
B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못 가 후회가 밀려왔다. 집 앞에 다다를 즈음 별로 내키지 않는 문자를 선심 쓰듯 날렸다.
“비, 넌 할 수 있어! 정말이야. 지금까지 넌 우리들 중 최고였잖아. 힘내!!!”
답이 없었다. 이모티콘을 보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아무리 이모티콘을 날려도 더 이상 B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은근히 부아가 났다. ‘이게, 정말!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명문대 출신이면 뭐해? 고작 늪에서 사는 애벌레인 주제에.’ 그날 이후, B는 더 이상 세미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 역시 한동안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창가에서 하루하루 자신의 키를 키우는 고추에게 애정을 쏟았다.
구월 첫째 주 학원가는 수강생들로 붐볐다. 학원 정문에서 B를 만났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실은 오랫동안 건물 앞을 서성인 끝에 조우한 거였다. B는 서둘러 길을 걷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힘찬 발걸음으로. 저토록 활기차게 만든 게 뭘까? 여자 친구라도 새로 사귀었나? 아니면 색다른 취미라도 생긴 걸까? B가 무엇엔가 푹 빠져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던 나로서는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커피집, 맥줏집, 당구장, 인형뽑기집, 햄버거집, 옷가게, 24시간 편의점이 줄지어 있는 상가를 지나서 자동차가 복잡한 대로를 건너 B는 한참을 걸어갔다. 어디를 가는 걸까? 이렇게 멀리까지 놀러 다니는 친구가 아닌데? 그가 마침내 다다른 곳은 근처 아파트 단지, 커다란 느티나무 밑이었다.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그곳은 매우 한산했다. 더위 탓에 오래 앉아있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도 B는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초조함과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땡볕 아래 자리를 지켰다. 책을 꺼내놓고 있었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발밑도 보고 테이블 위도 들여다보고 좀 더 먼 주변까지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점점 더 호기심이 일었다.
B는 언제나 성실한 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살아온 친구다.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독학을 하다시피 해서 명문대에 입학했고, 대학 시절에도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늘 열심히 사느라 밥 한 끼 느긋하게 먹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직 이십 대건만 어깨가 굽고, 얼굴빛이 어두웠다. 언제나 종종걸음쳤고, 늘 지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눈동자만은 누구보다 맑았다.
“넌 할 수 있어.” 주변에서 그에게 해 준 말은 언제나 그게 다였다고 했다. “넌 할 수 있어.” 나 역시 그가 힘들어할 때면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넌 할 수 있어!” 다독이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면 다음 날 아침, B는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뚜벅뚜벅 학원으로 향했다. 인생이란 노력하는 자 편이라고 그는 굳게 믿는 눈치였다. 너무 무리하는 게 오히려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랬던 B가 그토록 누군가에게 빠져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파트 건물 뒤에 숨어 B에게 전화를 걸었다. “B, 뭐해? 아까 만나서 반가웠어. 바빠서 그만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졌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괜찮아, 앨리스. 잘 지내지? 나……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얼마 전에 근처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가 발견했어. 너무나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말이야. 오, 나의 뮤즈! 그 오만한 시선, 상대를 압도하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얼굴, 품위를 잃지 않는 자세…… 그뿐이 아니야. 반듯한 어깨와 튼실한 엉덩이, 날씬하고 강인한 다리…… 오후 빛을 받아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 대지를 딛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당당하던지, 난 그만 한순간에 사로잡혔어.”
어이가 없고 한심해 보였다. 시험이 코앞인데 골치 아픈 사랑 따위에나 빠져있다니. 차라리 나처럼 고추나 키울 일이지.
“한동안 넋을 잃고 지켜보았어. 나의 집요한 시선에도 뮤즈는 전혀 당황하지 않더군. 대신 느리게, 아주 부드럽게 목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 뮤즈의 무심하면서도 강력한 시선…… 집요한 내 시선을 맞받아치는 정도를 넘어 나를 멸시하는 게 분명해 보였어. 뮤즈는 직감적으로 알았던 거야.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지. 한때는 얼마나 긴 그림자를 질질 끌고 다녔는지를. 얼마나 자주 자기 그림자에 걸려 넘어졌는지를. 그러다 이제는 그 긴 그림자마저 잃어버린 바보인지를. 그림자 없는 나…… 내 그림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내 그림자 속에 숨겨 두었던 그 오랜 추억과 비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 네온 빛 속에서 가리가리 흩어진 내 그림자……”
아, 지독한 사랑 병에 걸렸구나.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뒤나 쫓는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비참하게 여겨졌다.
눈앞에 있는 B를 두고 쓸쓸히 뒤돌아섰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과 달리, 머릿속에서는 느티나무 밑 벤치에 앉아 있던, 초췌하면서도 어딘가 들떠있는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B가 그토록 초조하게 기다리던 뮤즈가 누굴까? 어째서 갑자기 그림자를 찾고 싶어진 걸까?
그때 B한테서 카톡이 왔다. 이번엔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방금 전에 다시 만난 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뮤즈!”
사진을 열어 보니 예의 그 느티나무와 벤치가 있는 풍경이었다. 사진을 확대해서 찬찬히 살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있는 것은 한 마리의 황갈색 ‘사마귀’였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후드득후드득 우박 떨어지듯 크고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B와 멀어진 뒤로 나의 일상은 엉망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자기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B가 없어 편하고 좋았다. 가끔 적적할 때는 하루하루 키를 키우는 고추 풀을 바라보며, 콩 줄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만나고 고향으로 귀환한 소년처럼 내가 취업에 성공해 금의환향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모든 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침 특강을 들으러 가자며 일찌감치 전화를 해대는 B가 없으니까 금세 밤과 낮이 바뀌어 버렸다. 낮에는 종일 자고 밤에야 부스스 깼다. 밤새 공부한다는 핑계로 책상에 앉아 빵과 과자를 먹고 청량음료를 마셔댔다. 순식간에 살이 엄청나게 쪘다.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게으름뱅이의 천국』 에 나오는, 배가 터질 것 같은 포만감 속에서 어떤 고민과 갈등도 없이 뒹굴고 있는 인물들처럼 아무 때나 자고 아무거나 먹으면서 아무나 만나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무기력과 자기혐오만 남는다. 그럴 때 어떤 수험생들은 우울과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룻밤 연애에 매달린다.
“여기서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전염병이야.”
언제나 자신감 있게 말하는 Q. 그의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늪지대에 사랑 따위는 없다. Q는 ‘돌아온 싱글’이다. 그는 이혼의 결정적 이유가 사랑의 부재가 아닌, 경제력과 장래성 부재 탓이라고 믿는다. 하기야 요즘 여자들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안전한 직장을 가진 남자와의 안온한 생활을 꿈꾼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한다. 일벌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여왕벌은 알을 낳고, 우리는 일을 낳는다.’라는 신념 하에.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야 먹고 살 수가 있다. 그래야 노후를 위해 연금을 들고 목돈을 만들어 재테크라도 시도할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연인을 찾는 수컷의 충혈 된 눈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밤새 시험공부를 하거나 일에 지친, 피로한 눈망울들만 지천이다. 그도 아니면 배터지게 먹은 다음 늘어져 자고 싶은 얼굴들……
갑자기 ‘세과마’에 가고 싶어졌다. 세계의 과자란 과자는 다 파는 마트야말로 우리들의 집일는지 모른다. 빵과 과자와 사탕으로 만들어진 스위트홈. 달콤함과 부드러움과 향긋함만이 있는 애벌레들의 유토피아.
츄리닝 복장으로 오피스텔을 나서자마자 ‘세과마’로 직행했다. 그곳은 오늘도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사탕과 젤리, 빵과 과자와 청량음료를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B에게서 카톡이 왔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얄미운 B. ‘죽지 않고 살아있군!’ 모른 체 할까, 하는 맘도 들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안녕, 앨리스? 잘 지내니? 오늘은 정말 황홀한 가을 날씨였어. 이토록 빛나는 햇살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오늘따라 내 그림자가 정말 선명하게 보이더라. 앨리스, 드디어 잃어버린 내 그림자를 되찾았어.”
또다시 카톡, 하는 알림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사진이었다. 열어보니, 돌담과 팽나무가 어우러진 바닷가 마을 풍경이다. 지붕 낮은 돌집 마당에는 빨간 자전거가 놓여있다.
“앨리스. 여긴 남쪽 끝에 있는 섬이야. 얼마 전부터 이 마을에서 지내고 있어. 마을회관에는 아주 작은 도서관이 있는데, 난 그곳을 지키는 지킴이야. 이곳에서는 나를 ‘생물 선생’이라고 불러. 숲과 바닷가 생물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지. 오전에는 텃밭 농사를 짓고 오후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책 읽기와 외국어를 가르쳐. 휴일에는 아이들과 숲의 생태를 알아보러 다니고. 나의 퇴근 시간은 언제나 일몰 때야. 낡았지만 아직 잘 굴러다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날마다 변하는 바다색과 멋진 파도가 내 길동무야.”
여길 떠나 가버린 데가 고작 시골 동네라니. 어이가 없었다.
“크게 자란 그림자를 어깨에 걸고 노을을 향해 달려가 보았니? 그럴 때 그림자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생동하지. 한참을 달리다 보면, 멀리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집이 보여. 내 또래 젊은이 셋이 같이 사는 그 집은 오래된 돌 창고를 개조한 거지만, 우리한테는 아주 멋진 보금자리야. 너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구나.”
미친 B! 하지만…… 무척 부럽다. 과자를 먹고 젤리를 씹어댄다. 또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하필 엄마다.
“잘 지내니? 모의고사 결과 나왔어?”
“아직. 신경 쓰지 마.”
“엄마는 내일 서울 갈 거야. 사촌 언니 결혼식이잖아.”
“나도 가야 되나? 마땅히 입을 옷도 없는데…… 살이 많이 쪘거든.”
“넌 공부하느라 못 간다고 해뒀으니 염려 마. 그나저나 이번에는 합격해야……”
“알았어. 공부해야 되니까 그만 끊어!”
초조감이 일었다. 초콜릿과 탄산음료로는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가 점점 거세지는 파도처럼 거칠게 밀려왔다. 나는 Q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파르르 손끝이 떨렸다.
고깃집, 커피집, 맥줏집, 치킨집, 인형뽑기월드, 안마의자카페, PC방, 옷가게, 서점, 문구점, 명랑핫도그, 와플 전문점, 할매순대집, 컵밥 집, 세과마…… 그리고 ‘토끼굴’. 토끼굴은 골목 가장 안쪽, 어둡고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작고 허름한 여인숙이다. 노란 토끼를 그려놓은 출입문 앞에 Q가 기다리고 있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시커멓고 커다란 몸뚱이가 야생 곰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시발! 시간 없어 죽겠는데.”
Q가 이마에 굵은 주름을 그었다. 그러고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운동화 바닥으로 짓눌렀다. 흔해빠진 스니커즈 운동화다. 한 번도 빨지 않아 검고 더러워진.
Q가 손에 쥐고 있던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자, 토끼굴 주인이 째진 눈으로 나를 흘긋흘긋 훔쳐보며 말했다.
“겨우 한 시간? 기왕이면 두 시간 쓰지 그래? 아가씨도 피곤해 보이는데……”
Q의 손에 이끌려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우울과 분노를 한순간에 태우기 위해. 인스턴트커피처럼 쉬운 연애, 값싼 연애, 일회용 연애를 위해.
늪지대 애벌레들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사랑 따위 기대하지 않는 게 규칙이다. 서로의 이름조차 묻지 않는다.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떠나는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잊는 것. 그것만이 상호 간에 지켜야 할 약속이자 예의다.
B로부터 다시 카톡이 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토끼굴 복도의 어둠 속에서, B의 문장을 읽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결국 노예가 된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하얀 머릿속으로 해지는 저녁, 낯익은 풍경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달려가던 어린 날의 내 모습. 붉은 노을 속에서 태양과 함께 아스라이 사라지던 내 그림자……
나는 Q의 손을 뿌리쳤다. Q가 화났는지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으로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Q가 사납게 노려보았다. 충혈된 그의 눈이 죽음의 화마처럼 보였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목에 해골을 꿴 목걸이를 두른 다키니(모든 부처에 따라다니는 요정 같은 여신)가 내 앞에서 사람 가죽으로 만든 깃발을 휘두르고 사람 허벅지 뼈로 만든 나팔을 불면서 외친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죽음의 축제다. 춤추는 다키니는 Q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다. 거친 몸뚱이를 빠져나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다.
“앨리스, 돌아와! 안 오면 넌 죽음이야!”
나는 대답 없이 뒤돌아서서 앞을 향해 달린다. 돌아서 뛰는 내 앞에 깎아지른 벼랑이 가로막는다. 나는 아래로 떨어진다. 호숫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가을 도토리처럼, 기꺼이, 떨어져 내린다. 물속에 깊이 잠기기를 소망하면서. 괴물이 삼켜버린, 잃어버린 내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서.
김재영
첫 소설집 『코끼리』는 한국에 와 있는 이주민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두 번째 소설집 『폭식』은 국경을 넘어간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조명했다. 그런데 지난여름에 새 소설집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자음과 모음)을 출간했다. 이번에는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 안의 차별, 양극화가 너무 극심해서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 안타까웠다. 당분간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소설을 쓰고 싶다. 공동체적 삶, 전환 마을, 나눔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