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시계의 숫자가 흐릿해져 시간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정지 신호를 받아 차를 세우고 대시보드 위를 주먹으로 몇 번 내리쳤다. 흔히 티브이가 고장 났을 때처럼 몇 번 충격을 주면 우습게도 정말 고쳐질 때가 있었다. 막 횡단보도를 지나치는 사람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다. 아마 상당히 화가 난 사람으로 보였겠지. 리듬을 타듯 몇 번 더 두드렸다. 흐릿했던 숫자판이 잠시 진해지더니 도리어 옅어지고 말았다. 2년 된 중고차는 마치 사람처럼 이곳저곳 병치레가 많았다. 차 주인인 나는 군말 없이 탔지만 수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쉽게 불평하곤 했다. 창문이 매끄럽지 않게 턱턱 어딘가 걸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갈 때나 제때 올라오지 않을 때. 그리고 에어컨이 요란한 소리에 비해 시원하지 않을 때도 그녀는 백만 원짜리 중고차가 이렇지 뭐. 내가 살 때부터 알아봤다. 그런 말들을 했다. 얼마 전에는 접촉 사고로 앞 범퍼를 오십 만원이나 들여 바꿔 달았는데 그 후부터 수아는 내 차를 백오십짜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백오십 끌고 와라, 백오십 끌고 가라…… 아무튼 밉살맞은 오수아를 나는 또 데리러 가야만 하는 것이다.
   수아와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그녀와 함께 산다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어쩌다가 둘이 함께 살게 됐느냐고 먼저 묻지 않고 왜 오수아랑 사느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면 나는 그냥 그렇게 됐다고만 대답했다. 수아와는 대학교 기숙사 룸메이트로 알게 된 인연이라 따지자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건 서로에게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조금은 아는 사람이 낫겠다 싶던 것도 있었다. 사람이 둘이면 월세도 줄어들 것이고, 각박한 세상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것보다야 둘이 낫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아무튼 나의 그런 생각은 수아와 단둘이 살면서 차근차근 하나씩 무너져갔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인데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거다.
   수아는 회사 앞 사거리에 서 있었다. 목에는 아직 회사 출입증을 걸고 있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선물세트 쇼핑백을 들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말 아침에 잠시 사무실에 들르면 된다고 했었는데 차림새는 평일 출근 복장과 다를 게 없었다. 작게 클랙슨을 울리자 수아는 종종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그녀는 보조석에 가까스로 몸을 구겨 앉으며 선물세트를 뒷자리에 밀어 놓았다.
   "기름은 충분해?"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그리곤 구두와 스타킹을 벗어 뒷자리에 던져놓았다. 마치 갑옷을 벗기라도 한 것처럼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손목에 끼고 있던 검정 고무줄로 자신의 머리를 질끈 묶었다.
   "졸리면 말만 해, 내가 노래라도 불러줄게."
   그녀는 껌이며, 커피며 군것질거리들을 가방에서 꺼내 늘어놓았다. 점심 대신이라며 포일에 쌓인 김밥 한 줄까지 준비해 두었다. 아마도 이 갑작스런 여행길이 좀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듯 내게 전에 없던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번화가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다.

   나는 수아와 아주 오래 드라이브를 해야 했다. 날이 궂어서 운전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는데 수아는 기어코 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녀는 좀체 부탁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 부탁을 들어주고 나면 다음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무얼 부탁해도 들어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오수아는 누구에게도 절대 빚을 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관계에서 으레 겪게 되는 도움이나 사소한 조언 같은 것에도 그녀는 잊지 않고 답례를 했다. 오늘 만난 사람이건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수아가 누구와도 친분 쌓길 꺼리는 고독한 아이쯤으로 오해하곤 했다. 나도 그랬다. 나도 수아를 오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함께 기숙사 방을 썼던 대학 생활 동안 수아는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룸메이트에게 빚지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한결같은 계산법은 신뢰를 줄지언정 친근감을 주지는 못했다. 룸메이트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학교 앞 통닭집에서 프라이드치킨을 사 온 적이 있었다. 뭐든 함께 나눠 먹고 나면 친해지기 마련이라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날 큰맘 먹고 한턱낸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야식을 먹고 나서 각자 침대로 돌아가 잠들었고 그다음 날 등교 준비를 하는 와중에 수아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저녁에도 야식을 먹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저 기름진 음식을 연달아 먹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을 뿐이었는데 수아는 그날 하루 종일 문자로 내게 뭔가 먹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왔을 때 내 침대 맡에는 야식값의 꼭 사 분의 일에 해당하는 편의점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참 별난 애라고 생각했다. 완만한 관계를 만들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 가운데 수아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기숙사 사람들은 수아의 답례에 질겁했고 그런 일들이 쌓여갈수록 기숙사 방에서만큼은 다들 수아의 방식을 따르게 됐다. 유별나긴 해도 주지도, 받지도 않는 관계의 편리함을 모두 깨달아 간 것이었다. 나도 수아의 방식을 따르긴 했지만, 다른 룸메이트들과는 좀 달랐다. 나는 수아만의 기준,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답례가 동반되고 어디까지는 아닌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멋대로 수아에게 뭔가를 빌려주거나 돕곤 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오수아 다음으로 오수아를 잘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수아는 옆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했다. 톨게이트비와 기름값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이미 이야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기준에 합당치 않았을 게 뻔했다. 수아는 공들여 노래를 선곡하고, 커피에 빨대를 꽂아 내게 건네고, 톨게이트를 지날 때는 잔돈도 미리 꺼내 두었다. 갑자기 끼어드는 앞차를 향해 내 다신 악담을 퍼붓기도 하고 가끔 시답잖은 수다도 떨었다. 내게 피로가 올 틈도 만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왕복 네 시간의 거리를 달려 수아의 고향 집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밤 수아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동안 수아의 가족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몇 년이나 함께 지냈는데 놀랄 일이었다. 외동이라고 들었던 게 전부였다. 어쩌면 수아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지도. 그게 아니면 좋다 싫다 판가름할 정도의 애착조차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편이 더 수아에게 어울리기는 했다.
   "거긴 뭐가 유명해?"
   "나도 잘 몰라. 지역 특산물 같은 건 없을걸."
   수아는 별로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고향에 가는데도 들떠 보이지 않았다.
   "저수지가 있어서 사람들이 낚시를 해."
   수아가 아주 골똘하게 생각하다 내뱉은 말이었다. 톨게이트를 나와서부터 도로에 대형 트럭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화물차들은 나란히 달리기만 해도 위협이 될 정도였다. 옆 차선에서 트럭이 지날 때마다 차창 유리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건축 공사라도 하나 봐."
   "나도 여기가 이렇게 번잡해진 건 처음 본다."
   수아도 고향에 오는 건 꽤 오랜만의 일 같았다. 그녀는 목을 빼고 화물차들이 향하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앞 유리 너머로 수시로 먼지바람이 일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네비게이션이 도착지를 알렸다.
   “그냥 쭉 직진해.”
   수아는 집 앞 골목을 지나쳐달라고 부탁했다.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지나치는 집마다 골목이 휑했다. 어느 곳이라도 차를 대기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수아는 계속 더 가달라고 했다. 마침내 우리는 잠복 경찰들처럼 목적지를 지나쳐 길 건너편 아파트 단지 앞까지 와서야 주차를 했다. 아파트 단지와 수아네 고향 집 사이에는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땅이 있어 단지에서 수아네 집 쪽을 바라보면 외딴 시골 같아 보였다. 어렴풋이 수아가 자신의 가족이나 고향에 대해 한마디도 없었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집들은 말이 좋아 주택이지 슬레이트 지붕이 많았고 더러는 판자 같은 것들을 덧대어 창고처럼 물건들을 늘어놓은 곳들도 있었다. 근방에서 그나마 오래되지 않은 건물은 차를 세워둔 한 동짜리 아파트가 전부였다. 수아는 내게 같이 내리자는 말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뒷자리에서 선물세트 쇼핑백을 꺼내 들고 내게 "잠깐 갔다 올게."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편의점에 잠깐 들르겠다는 말처럼 아주 간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 혼자서 걸어갔다. 나는 잠깐 집에 들르기 위해 두 시간을 달려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수아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가 지나온 인가 골목으로 되돌아갔다.
   그동안 나는 수아의 삶의 방식을 가까이에서 봐왔던 터라 어렵지 않게 그녀의 가정환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누군가로부터 거저 얻는 것에 기뻐할 여유가 비어있었다. 그녀로서는 그저 부담되는 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수아에게 누구도 거저 주는 법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아가 자신의 비어있는 부분을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남도 아니고 하물며 나에게조차 보이기 싫을 정도였던 걸까. 집 가까이 차도 대지 못하게 할 만큼 부끄럽기라도 했던 걸까.
   생각해보면 수아는 내게 숨기는 것들이 많았다. 고의로 숨긴 것들은 아니었다. 단지 내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는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다거나 예상치 못한 손님을 데려온다거나. 물론 외박을 해도 수아는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손님을 데려와서도 내가 신경쓰지 않도록 혼자서 손님치레를 다 해냈다. 그래도 나는 수아에게 아직 받아내지 못한 게 있는 것처럼 언짢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 언짢은 감정들 때문에 사람들은 수아와 함께 사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던 게 아닐까. 그래서 수아와의 공동생활을 끝낼 자격이 내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아는 갔던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대문이 잠겨있어. 난 현관 열쇠밖에 없는데.”
   “미리 연락하고 온 게 아니었어?”
   내가 도리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잠깐 들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전화를 해봐.”
   “택배만 가져오면 되는 일인데 왜 전화를 해.”
   “무슨 택배?”
   “내가 얘기 안 했나? 택배가 바뀌었다고.”
   그녀가 받아야 할 물건은 스와로브스키 장식이 박힌 은빛 귀걸이였다. 유튜브 동영상 속에서 런웨이를 걸어 나오는 모델의 귀걸이는 딱 한 번 클로즈업됐다. 그 짧은 순간 눈에 들어온 귀걸이를 다시 보기 위해 그녀는 몇 번이고 영상을 되돌렸고, 패션쇼 정보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귀걸이를 주문하면서 상기됐던 탓인지 어머니에게 보내야 할 추석 선물세트는 오피스텔로, 귀걸이는 고향 집으로 보내고 만 것이었다. 해외 사이트에서 구매 대행을 통해 쇼핑을 한 건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었는데. 그녀의 고향 집 주소로 배달이 된 건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엄마한테 택배로 보내 달라고 하면 올 필요도 없었잖아.”
   “우리 엄마는 궁금해서 몰래 뜯어볼 게 뻔해. 잘못 보냈다는 택배가 비싼 귀걸이여 봐 추석 선물세트에 몇 배는 되는 가격인 걸 알면 난리 날걸? 내가 와서 살짝 바꿔두면 쉽게 끝날 일인데.”
   우리는 그 쉽게 끝날 일을 못 해서 현관 앞에 주저앉아 수아의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열리지 않는 대문을 부단히 흔들어보다가 난데없는 개 짖는 소리 때문에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울 엄마가 개도 키우기 시작했나 봐.”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결국 수아는 내 설득에 못 이겨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고향 집에 대뜸 나타난 딸에게 “회사 잘렸냐?”라고 물었다. 수아는 그런 게 아니라고 명절이 코앞이라 얼굴 한번 비추러 왔다는 변명을 더듬더듬 뱉어냈다. 다행히도 그녀의 어머니는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그저 시내에 있는 농수산물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로 삼을 만한 몇 가지를 사 오라고 일렀는데 그녀가 밥은 됐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수록 수아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수아는 자신이 세운 기준 때문에 빚 독촉에 시달리는 기분이었을 게 분명했다. 농수산물 시장으로 들어서려는 차량 행렬에 끼어 수아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손수 문자를 쳐서 보낸 쇼핑 목록에는 ‘고사리’ 대신 ‘고사니’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한참 만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차들은 수시로 밀고 들어왔고, 주차 공간이 생긴 곳들은 쓰레기 더미 옆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시장 건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길바닥에는 마른 배추 이파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수아는 조심조심 배춧잎을 피해 걸었다. 사야 할 목록을 중얼거리며 최단 거리로 최단 시간 장을 보겠다고 했다. 우선 채소를 파는 A동으로 들어섰다. 운동화를 신은 나와 달리 수아가 신은 구두 굽을 조심히 내딛기에는 시장 안이 너무 붐볐다. 길바닥에는 젖은 종이 상자 조각이나 시든 채소들이 짓이겨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와 내게 너무도 가까이 붙어왔다. 게다가 수시로 채소 상자를 실은 오토바이와 짐수레들이 지나가면서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비키라고 소리를 쳤다. ‘어이!’하고 누굴 부르는 소리인지 ‘워이!’하고 새때를 쫓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청소리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기도 했다. 결국 수아의 흰 슬링 백구두 앞코가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내 팔을 부여잡고 처참한 얼굴로 서 있다가 한 중년의 여자에게 밀쳐져 애호박을 담아 놓은 바구니와 깻잎을 쌓아 둔 판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가게 주인은 우리를 한 번 훑어봤고 수아는 애호박과 깻잎을 가리키며 지갑을 꺼내 드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번잡한 곳에 아주 익숙한 편이었다. 백화점과 아울렛, 하다못해 지하상가 쇼핑몰도 몇 시간씩 인파에 끼어 쇼핑할 만큼 번잡함에 대해서라면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수산물 시장은 내가 알아 왔던 번잡한 세계와는 다른 종류였다. 매대가 없다시피 해서 바닥을 보고 걸어야 했다. 앞사람은 기미도 없이 멈춰 섰으며 뒷사람은 손에 든 보따리로 내 팔다리를 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물건을 고르고 값을 치르는 식이 아니었다. 특유의 쇼핑객들에게서 보이는 느릿한 발걸음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가게가 있는 것처럼 재빨리 움직였다. 수아는 조금이라도 신선한 것을 고르기 포기했는지 최대한 사람이 적은 가게에서 재빨리 구매했다. 어느샌가 그녀와 내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가득했다. 반찬거리로 삼을 채소를 차에 옮겨 싣고 이번에는 과일을 파는 B동으로 넘어가 귤 한 상자를 사고서야 쇼핑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녀가 고른 알이 작고 반질반질한 귤 한 상자는 잘못 배달된 택배에 대한 미안함 값이었다.

   수아의 어머니는 수아와 똑 닮았지만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다. 매사 무뚝뚝한 딸과 달리 수아의 어머니는 모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편이었다. 그녀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우리 둘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런 딸의 방문에 혹여 결혼할 사람이라도 데려온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었다. 오해가 풀리고 나니 수아의 어머니는 생전 고향에는 올 생각도 하지 않던 딸을 붙잡고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일은 어떠니? 월급은 어떠니? 적금은 붓고 있니? 그런 질문들이었다. 수아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렸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은 못 들은 척했다. 엄마의 질문 공세가 끊이질 않자 수아는 되려 질문거리로 말길을 돌렸다.
   “근데 언제부터 대문을 잠그고 다녔어?”
   수아는 여전히 꺼림칙해 보였다.
   “요즘 세상에 누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녀? 할머니 계실 때나 열어놓고 지냈지.”
   “개는 언제부터 키웠는데?”
   “얻었어. 지난달에.”
   두 모녀는 깻잎을 무치고 호박을 볶으면서 부단히 떠들었다. 나는 파를 다듬으면서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동안 고향 집에 내려오지 않았던 게 무색할 만큼 아주 평범한 가족 같았다. 이따금 내게 날아오는 질문들까지 수아가 대신 대답했다.
   “같이 사는 친구는 무슨 일 하나?”
   “쟤는 블로그 마켓을 해. 옷을 떼다 팔아.”
   “젊은 사장님이네. 차도 친구 꺼야?”
   “아는 사람한테서 중고로 산 거야.”
   하는 식의 대화였다. 우리는 함께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수아의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수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담금주를 가지러 간 사이 화장실에 가는 척 별 탈 없이 택배 상자를 차에 옮겨 싣고 돌아왔다. 미리 택배기사와 통화한 대로 택배 상자는 담 너머 던져진 그대로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고 했다.
   “자고 갈 거지?”
   수아 어머니는 운전사격인 내가 담금주를 몇 잔이나 마셨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전 시간 많아요.”
   나는 물건을 떼러 일요일 새벽에 동대문을 오가는 일을 빼면 백수나 다름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수아는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내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예상외로 지체된 시간 때문에 무리해서 운전을 부탁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수아가 썼던 방은 오래 비워둔 냄새가 났다. 시골집에서나 맡을 만한 습한 냄새였다. 우리는 술기운에 취해 씻지도 않고 이부자리로 파고들었다. 이제야 정말 수아가 이곳에 살긴 했었구나 싶었다.
   “나는 할머니 집을 또 오게 될지 몰랐다.”
   수아는 넋두리하듯 내뱉었다.
   “엄마 집이 아니고?”
   “할머니가 살던 집이야. 돌아가시고 나니까 엄마가 대뜸 들어와 살겠다지 뭐야. 낡아서 사려는 사람도 없고 그냥 놀리기도 뭐하니 친척들이 반대하지 않은 거야. 근데 사실 엄마는 자기가 여기서 지내면 저절로 자기께 될 거란 기대를 해.”
   수아는 혼잣말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어렸을 때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밥을 챙겨줄 여력이 안 된단 이유로 자기를 할머니 댁에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수아는 삼촌이 결혼하기 전까지 쓰던 방을 물려받아 쓰게 됐는데 삼촌은 할아버지를 닮아 아주 골초였다고 했다. 방에서 늘 담배를 피워댔기 때문에 벽지가 노랗게 변할 정도였다고. 그래서 수아는 자기 방에 발린 벽지를 싫어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좀 더 커서도 꾸준히 싫어했다. 가구 같은 물건이 싫증이 나면 배치를 바꾸거나 내다 버리는 걸 택할 텐데 벽지가 싫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도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나씩 사모아도 벽지 때문에 오래된 방의 분위기는 좀처럼 바뀌질 않았다고.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들어간 기숙사 방의 흰 벽지를 보는 순간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벽지야 얼마든지 새로 바르면 될 텐데. 그 생각은 할 수가 없었지 뭐야.”
   수아는 마치 마음만 먹었더라면 도배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썼던 방은 여전히 빛바랜 꽃무늬 벽지가 발려 있었다. 벽지 군데군데에는 뭔가를 붙였다 뗐던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벽을 가리기 위해 포스터며 사진 따위를 붙여놓았다가 땐 자국 같았다.
   “그리고 여긴 옆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려. 왜 나이 들면 혼잣말이 많아지잖아.”
   시골집이 싫은 하고많은 이유 중에 벽지와 방음이라니.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구석이 있던 건지.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간신히 불을 끄고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새근거리며 금방 잠이 들었다. 나는 귀를 기울여 봤지만 옆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두워서 벽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수아와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벽을 가득 메울 정도로 난잡하게 짐이 걸려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건 옷이었다. 우리는 조립식 거치대를 설치해두고 옷을 걸어두었는데 내가 사 모은 옷과 수아의 옷이 늘어가면서 거실은 거대한 옷장처럼 변하고 있었다. 애초에 수아는 씀씀이가 큰 편도, 패션에 관심이 있던 쪽도 아니어서 옷가지에 짓눌려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생 때 그녀는 유행을 좇는 나와 같은 부류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다 공장에서 찍어낸 옷 아냐?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자기는 유행을 따라가는 무리에 절대 끼지 않을 거라는 뜻도 내비쳤다. 기숙사 식당 쿠폰을 대가로 졸업사진을 찍을 때 내 옷을 빌려 입은 일이 전부였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새 패션 잡지를 뒤적거리고, 인터넷 쇼핑몰을 떠돌아다니며 종국에는 핸드메이드 코트에 몇 개월 치 월급을 소비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처음 시작은 아주 저렴하고 무난한 무지 티 여러 장, 얼마 후에는 패션에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는 무채색 원피스를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행하는 색과 디자인을 다분히 의식한 최신 유행 옷들을 계절에 따라 사 모으게 된 것이다. 나는 점차 벽이 메워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숨이 막혔다. 하루가 멀다고 그녀 앞으로 택배가 배달되어 왔다. 주로 내가 집에 있었기 때문에 택배기사는 나를 패션산업에 종사하는 부류라고 짐작할 정도였다.
   수아와 따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옷 때문이었다. 얼마 전 헤어진 수아의 연인이 집까지 찾아왔던 일이 있었다. 그날 수아와 나는 오랜만에 외식을 하고 집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녀는 평소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내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내가 파는 옷들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재고로 남겨둔 옷이 필요하냐고 물었는데 수아는 그 자리에서 입어보고 싶다며 자신과 옷을 바꿔 입자고 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당황해서 되물어도 꼭 한번 입어보고 싶다고 막무가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카페 화장실에서 수아와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를 먼저 들여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수아가 급한 전화가 걸려와 내게 먼저 올라가라고 한 거라고 믿었다. 이틑날 내 화장대 위에 수아가 가져다 놓은 산호색 립스틱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내게 그 산호색 립스틱은 터무니없는 대가 그 자체였다. 자기 대신 옷을 바꿔 입어준. 어쩌면 생겼을지도 모르는 불운을 피하기 위해 대신 수아인척했던 대가. 나는 그 립스틱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언제든지 수아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누구는 결혼한다고 갑작스레 방을 나가서 동거인을 당황스럽게 한다는데 나는 그에 비하면야 낫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한 삼 개월 정도 시간을 주고 천천히 수아와 내 생활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수아의 어머니는 어제 만들어 둔 반찬들을 바리바리 싸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나는 눈곱도 떼지 못한 채 일회용 반찬 통이며 깨소금 같은 것들을 날랐다. 반찬과 담금주가 담긴 페트병을 차에 옮겨 싣는 것은 수아의 몫이었는데 마당을 오가는 그녀를 향해 개가 짖고 그 소리에 놀라 그녀가 펄쩍 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차가 좀 이상해.”
   짐을 다 옮겨놓고 돌아온 수아가 말했다. 문이 잘 안 열려서 열쇠로 열어야 했다고 했다. 아차 싶어서 차에 가보니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창문이 잘 열리지 않았던 것이나 전자시계가 흐릿했던 게 배터리의 전조증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택배를 가져다 놓으면서 수아가 조명을 켜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리기사는 주말이라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요즘 차가 막혀서 시간이 더 걸릴 텐데.”
   수아 어머니가 우려를 표했다.
   “어제도 좀 막히더라고요. 어디 공사하나 봐요.”
   “저수지를 메꾼다더라.”
   화물차들은 모두 저수지 매립 공사에 동원된 차량들이었다. 수아 어머니는 아주 조심스럽게 수아를 살폈다. 되도록 저수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조심스러움 때문에 나도 덩달아 수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대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수리기사는 날렵하게 레커차에서 내려섰다. 그는 차주가 누구냐고 묻더니 내게 “그럼 확인해드려요?”하고 물었다. 익숙하게 자동차 보닛을 열고 배터리를 확인한 그는 차의 시동 문제가 배터리 방전 탓이라고 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충전해 줄 수는 있지만 차를 오래 세워두면 얼마 안 가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불안할 바에야 새것으로 갈겠다고 했다. 잔고장이 많은 차라 그의 말대로 얼마 못 가 다시 배터리가 나가버릴지 몰랐다. 기사는 비용을 확인하고 새 배터리 상자를 세 사람 앞에서 꺼내 보였다. 말투는 건성이었는데 행동은 어떤 오해도 없도록 매뉴얼을 따라 지키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 삼십 분씩이라도 시동 걸어놓으시면 오래 써요.”
   일을 오래 한 사람들이 간혹 그러하듯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친절한 말을 친절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툭 뱉어냈다. 이쯤이면 오수아는 백오십에 새로 추가된 십이만 원을 합해가며 몇 마디 던졌을 텐데 웬일로 아주 조용했다.

   집을 나오자 수아는 조심스럽게 저수지에 가보자고 했다. 공사 중이라서 볼 것도 없을 텐데 꼭 가보고 싶은 눈치였다. 저수지는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근방에 높이가 있는 산으로 갔다. 산 입구에는 등산객들이 지나가다 말고 저수지 매립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아는 구두 굽으로 언덕을 잘도 올랐다. 사람들 틈에 섞여 저수지가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공사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물은 적었지만 웅덩이처럼 움푹진 곳들이 드러나 어디까지가 저수지였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더 커 보였는데. 지금 보니 작다.”
   수아의 말대로 저수지는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왔을 법했다. 수아는 저수지가 메워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러 온 사람처럼 금방 시선을 거뒀다.
   “수아 아니니?”
   누군가 수아를 불러세웠다. 진한 보라색 등산복을 입은 여자였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수아는 전에 없이 소극적인 태도로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했다. 등산객 여자는 잘 지냈느냐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고 이것저것 다정하게 물어왔는데 수아는 아직도 얼어붙은 모양인지 “네.” 또는 “아뇨.” 정도로만 간신히 여자의 질문들에 대답했다. 여자가 수아에게 큰 잘못을 했거나 어쩌면 그 반대의 경우 같았다. 그리고 여자는 남편으로 보이는 일행에게 “당신도 수아 알지? 현지 친구.” 하고 소개했고 수아는 반사적으로 남자를 향해서도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나는 산 입구로 올라가는 부부의 뒷모습을 향해서도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드는 수아의 뒷모습 때문에. 그녀가 신은 구두의 굽이 흙바닥에 움푹 들어가거나 돌멩이를 밟고 비틀거리는 걸 보면서 저수지와 부부가 수아를 고향에서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고 그냥 알 수 있었다.

   수아는 저수지에 서 있다. 얼음이 단단히 얼어있다는 걸 안다. 넘어질까 무서워 발을 끌면서 비적비적 걸어간다. 날이 추워서 뺨이며 코가 발갛게 얼어있다. 아이들 사이에는 언 저수지를 누가 가장 멀리 걸어가는지 경쟁 같은 것이 일어서 돌이나 나뭇가지를 걸어간 곳까지 놓아두고 오는 놀이가 생겼다. 처음에는 너도나도 주워 온 물건들로 표시를 해두었는데 서로 자기 것이라고 언쟁이 붙으면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변했다. 어떤 아이는 장화 한 짝을, 어떤 아이는 고무로 된 딱지 같은 것을, 수아는 할머니가 뜬 모자를, 현지는 머리핀을. 수아가 모자를 가져온 이유는 단지 잘 날아가기 때문이다. 얼마간 얼음 위를 걸어가다 냅다 던지면 누가 뭐래도 수아의 물건이 가장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현지는 생일선물로 받은 그 머리핀이 싫다고 한다. 자기가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갖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는데. 그래서 수아는 친절을 베풀 듯이 그 머리핀을 가장 멀리까지 보내는 데 동참한다. 그런데 거저 준 친절 때문에 수아는 가장 먼저 비극을 목격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큰일 날 뻔했다고 하는 소리가 내방까지 들려오더라.”
   조수석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수아가 말했다. 수아의 어머니는 딸의 친구 사고 소식에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 부산한 밤에 수아가 자는 줄 알고 옆방에서 숨죽여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큰일이라는 건 이미 일어났는데 그게 다른 집 아이라는 것 때문에 안도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죽은 아이와 또래라는 것 때문에 누구도 수아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수아는 자신이 비극을 목격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 어머니가 자신이 커가는 걸 보면서 잃어버린 딸을 떠올리지 않도록 눈에 띄기조차 싫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사고일 뿐이었다고 수아를 안심시켜야 하는지 그냥 조용히 수아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자주 차선을 바꿨다. 그리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엔 수아가 안전벨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수아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반찬이 든 보따리와 담금주를 꺼내 들었다. 나는 주차를 해 놓고 수아의 택배 상자만 챙겨 나왔다. 그녀는 내가 올 동안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고 있었다. 나는 빼꼼히 문을 지탱하고 있는 수아의 손가락을 보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다가 문뜩 궁금해져서 물었다.
   “전에 나한테 준 립스틱 그건 뭐야?”
   그녀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 엘리베이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눈을 비비고,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거 이쁘지? 그동안 서로 생일도 그냥 넘어가서 나도 어색하더라. 선물은 원래 잘 시도하지 않았던 걸 주는 거래. 그 색깔이 너한테 없는 거더라고.”
   수아는 짐이 무거운지 추켜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다 올라왔다는 작은 알림음이 울렸다. 아주 잠시 몸이 일렁였다.

정오

타인의 눈을 통해 보는 나는 자주 낯설게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그러겠지요. 스스로를 그리고 누군가를 낯설게 하는 일을 계속 쓰고 싶습니다.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