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전야



   푸른 밤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등대가 있다 등대 옆으로 조그맣게 웅크린 짐승의 이름을 미술관이라고 하자 새하얀 그것의 뱃속에

   가면을 쓴 소년이 누워 있다
   가면 속 시선이 흰 벽 너머를 훑어 내렸고
   이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텅 빈 미술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창밖으로

   가시권 밖의 폭풍우가 검푸른 해안선을 샅샅이 훑어 내리고 있다
   소년은 귀 기울여 바라본다
   하얗게 젖어가는 미술관의 음울한 그루밍과
   비와 파도를 연출하는 등대의 헐떡임을

   전시는 아직도 멀었지

   소년은 중얼거린다, 전시는 시작되지 않는다
   곧 폭풍우가 밀려올 것이다
   등대와 짐승의 오랜 수몰이 역사할 것이다
   기도는 실패하나
   기우祈雨는 교화하지 않는다

   가면 속 시선이 짐승의 내벽을 쓰다듬는다 조금씩 몸을 웅크리는 미술관의 윤곽을 견디며
   사람들이 소년을 보러 올 것이다 타오르는 횃불로 해안을 가득 물들이며 그러나
   전시는 시작되지 않는다

   이것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에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소년은 중얼거린다
   스스로를 지워가는 가면 속에서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는 흰 벽에 대해, 이것은

   빗속에 잠겨가는 등대와 짐승의 전야





   입체적 활자



   마을 사람들은 자고 있거나 일출을 보기 위해 사막으로 향했다. 파피니는 잉크스탠드를 앞에 두고 활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그리는 것은 절름발이 신이 사막을 횡단하며 남긴 발자국에 관한 것이다. 하나의 선과 하나의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평면에 적절하다. 입체적인 신이 양피지 위를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활자와 마찬가지로 이 걸음에는 의미도 체계도 없다. 신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막으로부터 양피지를 횡단했을 뿐. 파피니는 그것을 그리고 있다. 그렸다. 마을 사람들이 꿈속에서 말라죽거나 꿈을 포기하는 동안. 수평선 위로 사막의 태양이 마을 사람들의 홍채와 창문을 투과하고

   파피니는 깃털을 적신다. 입체적인 시간이 잉크스탠드 속에서 눈을 감는 동안. 양피지 위의 사막은 바다를 덮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 절름발이 신은 평면 속에 잠겨 있다. 점과 선을 그리는. 그는 말이 없다. 파피니는 그것을 그렸다. 사막의 우물에 깃털을 적신다. 마을 사람들의 홍채가 잠겨 있다.

   활자들은 죽고 있거나 길을 따라서 수평선을 횡단한다.

   해가 뜨는 동안. 나는 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입체적인 파피니는 철학의 황혼을 썼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평면에는 일출도 일몰도 없다. 나의 파피니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바다 밑 언덕에 활자를 그렸다. 마을 사람들의 창문이 잠겨 있다. 신은 말이 없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활자는 죽어가면서 다리를 전다.

정현욱

시를 쓸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시를 쓸 때는 평소에 하지 않던 모든 종류의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것을 위해서 평소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시를 쓸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다. 언젠가는 영원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다.

2019/01/29
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