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들



   내 친구는 어디로 갔습니까.
   이 미움과 믿음이, 저 믿음과 미움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여, 이름을 적어봅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용서받을 일도 없고,
   용서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철없던 시절
   같이 취하고 제각기 추해지던 이 동네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의, 남겨진 몸의 비루함, 혹은
   비루한 생활보다 먼저 오는 소리를
   받아 적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친구, 친구. 성마른 햇빛이 쏟아지는,
   공구상가 근처에 자리한 카페에 앉아서
   친구도 없이 이웃도 없이 몇 권의 낡은 책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채무자와 채권자, 기독교도 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그러니 굳이 그렇게 착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내게 이 말을 건넨 또 다른 친구의 이름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 이름 끝에 떠오르는 피의 맛,
   다시 적어봅니다, 미움으로, 미움의 믿음으로,
   시커멓게 녹슨 트럭이 도로를 막고
   공구상가 안으로 천천히 후진하며 들어가듯이.
   햇볕은 쏟아지고, 나는 정말 노력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착해 보기도 했습니다.
   친구, 친구. 이름들은 더듬거리며 둔탁하게
   터무니없이 모호한데,
   맛으로 촉감으로 질끈 감기는 눈으로 기억됩니다.
   적어놓고선 주먹을 쥐면 사라지는 이름입니다.
   나는 그저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친구의 이름을 피해 비겁한 것들을
   비겁하지 않게 쓰고 있을 뿐이라도.
   하지만 피주머니를 찬 기억들이 자꾸만
   터져버리는 봄이라서,
   조문하듯 적는 이름이라서.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 딸아이와 함께 나온 초저녁 산책길에서 본, 죽은 나무 그늘 아래 죽은 잿빛 비둘기와, 죽은 새끼 고양이와, 이미 죽어 있던 것들, 갓 죽은 것들. 울던 딸아이를 달래 그네에 태우고 힘껏 밀다 보면 집집마다 뿌옇게 등 켜지고, 딸아이는 죽은 풍경을 잊고, 그네를 타며 작고 둥근 머리를 치켜들고 제 집이 몇 층인지를 헤아리고, 그렇게 높고 가파르게 적재된 가정들 틈에서 나는 선한 의지와 땅과 몸, 얕고 서글픈 역사, 눈 밖에 있는 자들 등만을 딴에 멋지게만 기억하려 하겠지. 어쩔 수 없는 걸까. 과연 그럴까? 그럴 수밖에……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함께 너와 느릿느릿 춤추다 어리석게 늙어가면 좋겠다만, 나의 무능과 실패로 짠 지옥이 자칫 네게 시작될 것만 같아서. 차마 이 부끄러움 속을 너와 함께 걸을 수 없어서.

김안

쓰는 일이 점점 부끄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는 일마저 부끄러워지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일단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구분해보자.

2019/04/30
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