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007 제임스 본드의 시그니처 대사이다. 사실 마티니는 셰이킹으로 만들면 향이 약해지고 기포로 인해 특유의 투명한 멋이 반감되기 때문에 휘젓는 스터링으로 만드는 게 보통이다. 아무려나, 각자 취향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게 칵테일의 매력이니까. 마티니만 해도 기본 재료는 진과 베르무트 두 가지뿐이지만 비율과 첨가물에 따라 수백 가지의 베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베르무트의 비율을 줄일수록 드라이한 마티니가 되는데, 극단적으로 드라이한 맛을 선호했던 영국의 처칠 수상은 베르무트 병을 바라보며 진만 마셨다고 한다. 아무려나.
   내가 따끈따끈한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들고 누벨 아테네에 면접을 볼 때 사장님도 마티니로 테스트를 했다. 보드카 마티니 한번 만들어 보지. 젓지 말고 흔들어서. 얼마나 드라이하게 만들어드릴까요? 사장님은 눈만 끔벅이더니 제임스 본드 스타일로, 하고 드라이하게 대답했다. 살인 면허를 가진 바람둥이 첩보원은 왠지 씁쓸한 맛을 싫어할 것 같아 보드카와 베르무트를 2:1로 배합하고 올리브 두 개를 꽂아 내놓았다. 사장님은 내가 건넨 보드카티니를 천천히 한 모금 음미하더니 이런 맛이었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칵테일은 조화의 예술이다. 술과 술, 술과 과즙, 빛깔과 향, 글라스와 데커레이션,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울려 한 잔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렇게 탄생한 칵테일은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고 갖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성장하며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내 꿈은 마티니처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칵테일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름 붙인 칵테일을 영화 주인공들이 근사한 목소리로 주문하고 바텐더와 애주가들이 새로운 변형을 연구하고 먼 훗날 부다페스트의 어느 작은 바에서 막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딴 청년이 정성껏 제조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영광의 날을 위해 지금은 테킬라를 베이스로 국화주와 머루즙을 첨가한 퓨전 칵테일을 연구 중이다.
  “수아, 이거 시음 좀.”
   냉장고에 맥주를 채워 넣고 있던 수아가 눈을 치떠 나를 째려보았다. 늘 그렇듯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신기하게도 부탁을 거절하는 법은 없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글라스를 받아 향을 맡아보고 찌푸린 얼굴로 맛을 보았다.
  “뭐야 이거?”
  “레시피는 아직 비밀이야.”
  “영원히 비밀로 해.”
   사장님 딸인 수아는 대학의 러시아어문학과를 휴학 중이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잊지도 않고 꼬박꼬박 반말을 한다. 언제나 살풋 찌푸린 얼굴에 최소한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서비스업 부적격자이지만 신기하게도 손님들은 그녀를 좋아한다.
   이곳에서 일한 지 서너 달쯤 되었을 때,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긴 직감이랄까,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다. 혹시 너도 호모섹슈얼이니? 그녀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왜, 동성애가 쌍꺼풀처럼 유전인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니고…… 난 그냥 엘(L)로 태어난 것뿐이야. 아빠랑 관계없이. 으응, 그렇구나.
  “곤조가 없어, 곤조가. 페드로 같은 깡다구가 나와서 설쳐대야 게임이 익사이팅해지는데.”
   TV 앞에서 삼 개 국어를 섞어 중얼거리는 사람은 누벨 아테네 세 명의 공동 대표 중 한 명인 미키 형이다. 맥주를 홀짝이며 양키스와 레드삭스 게임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바로 지금이다. 새벽에 끝난 경기인데 맥주를 홀짝이며 보기 위해 종일 스포츠 정보를 차단한 채 저녁에 하는 재방송을 보고 있다.
   일본에서 밴드 활동할 때 쓰던 예명인 ‘미키’는 미키 맨틀이라는 전설적인 야구선수와 영화배우 미키 루크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시크하면서 섹시한 뉘앙스가 자신과 어울린다나. 사장님은 어원을 무시한 채 굳이 미키 마우스라고 늘여서 부른다.
  “형, 이거 마시면서 봐.”
   경기에 몰두해 있는 미키 형의 손에 내 칵테일을 쥐여 주었다. 형은 한 모금 찔끔 마시고 내려놓았다.
  “어때?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누벨 아테네라고 이름 붙일까 하는데.”
  “맛도 이름도 끔찍하다.”
   사장님이 가게 이름을 누벨 아테네라고 정할 때 미키 형은 결사반대였다. 미라를 전시해놓은 박물관 같다며 시크하고 섹시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이트아웃, 겟투, 케이 같은. 지분이 밀리는 관계로 석이 형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양쪽 의견을 경청한 석이 형은 흔한 겉멋보다는 지적인 이질감에 한 표를 행사했다.
   누벨 아테네는 19세기 후반 파리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며 예술을 논했던 카페의 이름이라고 한다. 사장님은 이곳을 그런 보헤미안풍의 낭만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봐, 이쪽 테이블에서는 드가와 마네가 인상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저쪽 테이블에서는 고흐와 로트레크가 압생트에 취해 멱살잡이를 하고 구석자리에서는 모파상이 커피를 앞에 놓고 뭔가 끼적이는 광경을. 하, 그 시절에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나 참, 그런 거 지금 인사동에도 많아요.(이건 미키 형이다.)
  “강철아, 오늘은 간판 켜지 마라. 단골만 받아서 조용히 보내자.”
   사장님이 어깨로 문을 밀치며 들어왔다. 양손에는 각종 과일이 잔뜩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나 참, 언제는 간판 켜놨다고 손님이 들끓었나.”
   이죽거리는 미키 형을 무시한 채 사장님은 뒷짐을 지고 착잡한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천장에서 늘어진 고풍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 일본에서 들여온 대형 엔틱 오르골, 벽감에 세워놓은 아프리카 주술사 인형, 벽에 걸려 할로겐 조명을 받고 있는 흑백사진들. 사진은 사장님이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일주를 하면서 직접 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부 비둘기의 모습만 찍혀 있기 때문에 사진만으로는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쟤들은 어딜 가나 똑같이 생겼더라고. 하는 짓도 똑같고. 먹고 돌아다니고 똥 싸고. 사장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사무소를 다니고 결혼하고 수아를 낳고 그렇게 살다가 마흔이 훌쩍 넘어 커밍아웃을 했다고 한다.
  “형석이는?”
   석이 형의 발이 팔걸이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구석의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어제도 밤새 마시던데요.”
   사장님은 혀를 찼다. 석이 형은 얼마 전 연인과 헤어진 후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인이 격리되어 만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부잣집 도련님인데 집에서 외동아들이 게이란 걸 알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지만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자 경호원을 붙여 집에 가둬놓았다고. 그 친구 아버지가 석이 형에게도 벌써 몇 차례 전화해 쌍소리를 해댄 모양이다.
  “내가 첫손님인가?”
   문이 열리며 그레이 슈트를 차려입은 승민 씨가 들어왔다. 그는 재킷을 벗어 팔에 걸고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쉬워, 이렇게 차분한 게이바는 찾기 힘든데.”
  “여기는 게이바가 아니에요.”
   사장님이 말참견하며 눈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이라 바가지를 왕창 씌울 작정인데, 뭘 드릴까요?”
  “음, 가볍게 기네스로 목부터 축일까?”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승민 씨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보여주는 훌륭한 표본이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 깔끔한 매너와 위트, 세련된 패션 감각, 억대 연봉과 은회색 재규어까지. 신은 남녀 모두에게 공평하게 세상의 불공평함을 알려주기 위해 그를 게이로 만든 게 틀림없다. 허나 역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처음엔 승민 씨가 연애 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게 <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쭐한 마음을 억누르고 겸손하게 말하자면, 그는 남자 보는 눈에 문제가 좀 있는 듯하다. 어느 날 평소처럼 바에서 혼자 코냑을 즐기던 그가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가지 않겠냐며 사장님 몰래 나를 유혹한 것이다. 난 쉬는 날은 여자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당황하는 표정마저 매력적이었다. 어, 아, 미안. 이상하네, 내 느낌엔 분명히…… 그래요? 지금은 헤테로인 게 원망스럽네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됐어? 벼룩시장에서 바텐더 구인광고를 보고 왔죠. 저도 게이바인 줄은 몰랐어요. 여긴 게이바가 아니라고.(이건 주방에서 나오던 사장님.)
  “미키 씨, 저거 새벽에 했던 게임이죠? 9회 말에 페드로이어가 끝내기 쓰리런 쳐서 8대 7로 역전할 때 정말 짜릿하더라.”
   승민 씨의 폭탄 발언에 내가 다 들고 있던 기네스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니 맥주병을 입에 문 채 돌아보는 미키 형의 얼굴은 어떻겠는가.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저도 못 봤어요.”
  “거참, 농담 한번 위험하게 하시네.”
   둘은 건배를 하고 맛 좋게 맥주를 들이켰다.
   석이 형이 머리를 털며 다가와 미키 형 옆자리에 앉았다. 살해된 지 삼 일쯤 지난 변사체 같은 몰골이었다.
  “주접이다, 주접. 내가 뭐랬냐. 그런 애송이 만나면 골치만 아프다니까.”
   모든 면에서 상극인 미키 형과 석이 형을 친구로 만들어준 곳은 군대였다. 중졸인 미키 형은 엘리트 쫄병 석이 형을 집요하게 갈구다가 게이임을 알아챈 후부터 갑자기 수호천사를 자처해 부대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로가 취향은 아닌지라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고.
   석이 형은 얼마 전까지 대기업 전략기획팀의 대리였다. 술자리에서 절친한 입사 동기에게 성 정체성을 슬쩍 내비쳤는데 삽시간에 사내에 소문이 퍼졌다. 입사 동기는 곧 평생의 경쟁자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이내 보이지 않는 전방위 압박이 들어왔고 석이 형은 성인들의 유치한 이지메를 일 년 가까이 버티다가 결국 사표를 던졌다고 한다.
  “우리 강철아, 술 좀 내놔라.”
  “괜찮겠어?”
  “그럼, 누벨 아테네 최후의 날인데 그냥 보낼 수 있나.”
  “그럼 일단 내가 개발한 칵테일 한 잔 마시고 있어.”
  “조심해라. 그거 맨속에도 쏠리더라.”
   머루즙을 첨가한 칵테일이 해장 효과가 있는지 실험해볼 기회였는데 미키 형이 초를 치고 나섰다. 대신 승민 씨가 관심을 보이며 시음을 자청했다. 맛을 보더니 그의 미간이 아주 잠깐 스치듯이 찡그려졌다. 그의 성품을 감안했을 때 매우 극단적인 반응이었다.
  “평가는 지금 안 해도 돼요. 아직 미완성이라.”
   해가 지면서 단골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작정들을 하고 왔는지 앉자마자 맥주, 위스키, 칵테일 주문이 마구 날아왔다. 미키 형은 TV 앞에서 인생 최고의 행복을 즐기는 중이고 석이 형은 제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이고 사장님은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받느라 나 혼자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술값만 받고 안주는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수아도 바쁘게 안주 접시를 나르느라 평소보다 더 찡그린 얼굴이었다. 과일들이 점점 삐뚤빼뚤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아무리 공짜지만 좀 예쁘게 썰 수 없냐.”
  “없어.”
   손님들은 누벨 아테네가 문을 닫게 된 것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사장님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이태원이나 종로의 게이바는 부담스러운 곳이 많은데 여긴 정말 편안해서 좋았다. 게이바의 새로운 시도였는데 사회의 편견에 부딪치게 돼서 아쉽다. 부디 좌절하지 말고 다른 곳에서 새로 오픈하기 바란다. 다시 차리면 꼭 연락해 달라. 누벨 아테네 만세다. 사장님은 헛헛한 미소로 화답하면서 그런데 여기는 게이바가 아니라는 말을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무슨 시트콤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았다.
   무지개 깃발을 내건 것도 아닌데 여기가 어쩌다 게이바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사장님은 푸념했지만 내가 보기엔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누벨 아테네가 오픈하던 날 세 명의 공동 대표는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며 지인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대부분 게이들이었다. 그들은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며 다른 게이 친구들과 게이 커뮤니티에 바를 소개했다. 유니크한 인테리어에 차분하게 즐길 수 있는 게이바가 생겼다는 입소문이 퍼졌고 평소 그런 장소를 찾던 이들이 하나둘 단골이 되었다. 가볍게 한잔하러 들어온 이성애자 손님들은 여기저기서 남자들이 스킨십을 나누는 광경을 힐끔거리다가 위기감을 느낀 사장님의 과도한 친절까지 더해지자 정말 딱 한 잔만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게이바라는 소문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복장도착자 등의 손님은 뚝 끊겼다. 이따금 게이바를 탐험하러 오는 여자들이 맥주나 칵테일을 한 잔 시켜놓고 키득거리며 시간을 때우기는 했다. 하지만 근육질의 꽃미남 게이들은 <섹스 앤 더 시티>에나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금세 떠나갔다. 결국 보헤미안풍의 열린 공간을 꿈꾸었던 누벨 아테네는 폐쇄적인 게이 코뮌이 되었다. 누벨 아테네라는 이름마저 사장님의 의도와 달리 동성애를 인정했던 그리스 시대의 부활을 꿈꾼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대책을 좀 세워봐. 사장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그쳤지만 뾰족한 대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름을 바꿔요, 시크하게.(이건 미키 형.) 제가 필살의 칵테일을 개발해 가게를 살리겠습니다.(이건 나다.) ……(이건 수아.)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경영학과 출신인 석이 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게이바로 밀고 나가죠. 게이바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겁니다. 형은 세그멘테이션이니 SWOT 분석이니 전문 용어를 써가며 한참 설명했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은 비즈니스맨이지 퀴어 인권운동가가 아니다, 인구의 97퍼센트를 배제하고 3퍼센트도 안 되는 게이 시장을, 그것도 틈새를 공략해서는 사업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슬슬 코냑으로 넘어가지. 헤네시 한 병 할까?”
   승민 씨가 잔을 비우며 말했다.
  “병으로요? 이젠 키핑도 안 돼요.”
  “다 마실 거야. 여자친구는 잘 있어?”
  “그럴 거예요. 걔는 낮에 일하고 저는 밤에 일해서 잘 못 만나요. 사실 요즘 간당간당해요.”
  “혹시 게이바에서 일한다고 싫어하는 거 아냐?”
  “오히려 좋아해요. 여자 손님들하고 시시덕거릴 일 없겠다고.”
  “그렇군.”
  “여긴 게이바가 아니라니까.”(마침 지나가던 사장님.)
   어둠이 내리고 술이 돌면서 누벨 아테네는 항구의 선술집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손님들은 미키 형에게 색소폰 한 곡조 뽑으라고 요청했지만 형은 TV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구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 커플이 무대에 올라 〈Perhaps Love〉를 듀엣으로 불렀다. 첫 소절을 시작하자마자 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정말이지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온 것 같은 풍부한 성량과 환상적인 하모니였다. 두 사람은 누벨 아테네가 배출한 1호 커플이다. 각자 혼자 와서 조용히 술만 마시곤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나란히 앉아서 조용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저 과묵한 커플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다니. 노래가 끝나자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오죽했으면 지켜보던 수아마저 팔짱을 풀고 딱 세 번 박수를 쳤을까.
   석이 형은 노래가 끝났는데도 고개를 푹 숙이고 염불을 외듯 〈Perhaps Love〉의 가사를 웅얼거렸다.
  “형, 기운 내. 곧 무슨 수가 생기겠지. 설마 하나뿐인 아들을 평생 가둬놓겠어.”
   형은 바에 고개를 처박은 채 큭큭거리며 웃었다.
  “강철아, 은수 아버지한테……”
  “알아.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하는 말 귀담아듣지 말고……”
  “내가 찔렀다.”
  “응?”
  “내가 아웃팅시켰어. 질투에 눈이 멀어서…… 나도 똑같은 놈이야.”
   음, 생각보다 복잡한 사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보다 원칙을 중시하던 석이 형인데…… 나도 똑같은 놈이라는 말이 음색을 달리하며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블러디 메리를 한 잔 만들어 석이 형 앞에 놓았다. 피처럼 짙은 붉은빛 때문에 사나운 이름이 붙었지만 토마토주스가 듬뿍 들어가 해장술로 애용되는 칵테일이다.
   열 시가 막 넘어섰을 때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청미니스커트를 입은 앳된 여자 손님이 혼자 들어왔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내 입에서는 어서 오세요, 대신 어떻게 오셨죠,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삼십여 명의 남자들이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앉으세요, 게이바는 아니니까.”
  “저, 그게 아니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주방에서 나오는 수아를 보더니 활짝 핀 얼굴로 달려가 팔에 매달렸다. 수아가 나직하게 몇 마디 건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애인이야?”
  “애인은, 일 좀 하라고 불렀어.”
   거만한 자식 같으니, 부럽네. 수아가 학교에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은 사장님에게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누굴 닮았는지 여학생들이 줄줄 따르더라고. 정말 궁금하네요, 누굴 닮았는지.(이건 미키 형이다.)
  “마이 갓! 스바라시! 하, 인생이 저렇게 좀 짜릿해야 되는데.”
   드디어 야구가 끝난 모양이다. 쓰리런 홈런은 나오지 않았지만 정말 레드삭스가 9회 말에 8대 7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미키 형은 승민 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그도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미키 마우스, 야구 끝났으면 얼른 공연이나 해.”
   사장님의 재촉에 미키 형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색소폰을 챙겼다.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어 탄탄한 가슴 근육을 살짝 드러낸 채 무대에 오른 미키 형은 박수갈채 속에 첫 곡으로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연주했다. 뿌연 조명 밑에서 오뚝한 콧날이 멋진 실루엣을 그렸다. 리듬에 맞춰 가볍게 실룩이는 어깨, 땀방울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칼. 무대 위에서만큼은 미키 형의 카리스마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형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두 번째 곡으로 〈The Moment〉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개업 초기에는 미키 형이 공연할 때 턱을 괴고 그윽한 눈으로 무대를 응시하는 여성들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사장님은 97퍼센트의 잠재 고객을 공략하기 위해 아무 때나 내킬 때 무대에 오르던 미키 형을 설득해 고정 공연을 만들고 연주 후에는 여자 손님들과 적극적으로 동석하도록 했다. 형은 볼멘소리를 했지만 돈을 투자한 마당에 매출 증대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들은 우수에 잠긴 색소포니스트를 원한 것인데 미키 형은 테이블에만 앉으면 어설픈 익살을 늘어놓는 통에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게다가 게이라는 정확한 소문까지 퍼지면서 팬클럽은 흐지부지 해체되었다.
   의리 있게 끝까지 자리를 지킨 팬이 한 명 있기는 했다. 동그란 얼굴에 덧니와 보조개가 조화를 이룬 간호사였는데 그녀가 두 손으로 맥주병을 잡고 생글거리며 무대를 응시하는 모습은 정말 근사했다. 그녀는 팬클럽이 해체되고 모든 이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복장도착자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 후에도 종종 찾아와 미키 형의 공연을 보고 얘기를 나누었다. 주위의 게이 손님들이 그녀를 개의치 않듯 그녀도 그들을 개의치 않았다. 미키 형 역시 그녀와 있을 때는 익살의 부담 없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혼과 함께 더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형은 게이니까 계속 친구로 지내도 되지 않나? 어이구, 남편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쟤는 뭐냐?”
   사장님이 주방에서 과일을 썰고 있는 단발머리를 보고 물었다.
  “수아 애인인가 봐요. 일 도와달라고 불렀대요.”
   안주 접시를 들고나오던 단발머리가 사장님을 보고 깍듯이 인사했다. 과일은 수아가 썬 것보다 더 심하게 난도질 되어 있었다.
  “언니한테 아버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많이 아쉬우시죠?”
   방글거리며 거짓말도 잘하네. 수아가 얘기라는 것을 많이 했을 턱이 없지 않나.
  “허허, 수아가 괜히 불러서 고생시키네. 쉬엄쉬엄해요. 술이고 안주고 마음껏 먹고.”
   그녀는 싹싹하게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홀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붙임성이 좋아 어디 가도 미움은 안 받겠다.
  “넌 다른 데 자리 알아봤어?”
  “쉬면서 천천히 찾아보려고요. 사장님은 가게 다시 알아보실 거예요?”
  “글쎄다. 여기서 손해를 좀 봤고, 나도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새로 오픈하면 저를 부르세요. 그동안 필살의 칵테일을 개발하고 있을게요.”
  “그래, 기대하마.”
   우리는 잠시 말없이 미키 형의 연주를 감상했다.
   게이바를 탈피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누벨 아테네는 석이 형의 전략대로 게이바답지 않은 게이바로 자리 잡아갔다. 다행히 다양한 연령층의 단골이 생기면서 간신히 수지타산은 맞추고 있었는데, 경영의 위기는 훨씬 더 직접적인 형태로 찾아왔다. 자신의 건물에 게이바가 들어섰다는 소문을 들은 건물주가 신의성실의 원칙을 내세워 임대차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이다. 법정 다툼을 피하고 싶었던 사장님은 로얄 샬루트 한 병을 들고 건물주를 찾아갔다. 건물주는 여든이 넘은 노파인데 틈날 때마다 길거리 전도를 나가는 열혈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사장님은 예의를 갖춰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했다. 여기는 게이바가 아니며 자신도 게이바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 상호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긴 고품격 문화 공간을 추구하는 세련된 바이다. 다양한 손님들이 드나들다보니 그중 게이도 몇 명 있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공간의 정체성이 바뀌는 건 아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게이의 ‘게’ 자만 나와도 몸을 부르르 떨며 성호를 긋던 노파는(나중에는 가게의 ‘게’ 자에도 성호를 그었다고) 사장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게거품을 물고 호통을 쳤다. 요지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곧 너희의 머리 위로 신의 불벼락이 내릴 것이니 그 불이 자신의 건물을 태우기 전에 당장 가게를 빼라는 것.
   누벨 아테네를 살리기 위해 사장님도 많이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페스트나 옮기는 시궁쥐 취급하는데 항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성애는 질병이나 정신질환이 아닌 다양한 성적 경향 중 하나일 뿐이다. 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은 집단적 광기와 폭력이며 사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발 타인을 미워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는 짓은 그만해라. 사장님은 본의 아니게 비즈니스맨에서 퀴어 인권운동가로 변신해 논쟁을 벌였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분노에 기름만 들이부은 격이었다. 자리는 곧 온갖 악다구니와 저주의 말이 오가는 전장으로 변했고 ‘히틀러 같은 할망구’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협상은 물건너간 셈이었다. 사장님은 그날 도로 빼앗아 온 로얄 샬루트를 안주도 없이 혼자 다 마셨다.
  “사장님.”
  “응?”
  “보드카 마티니 한 잔 만들어 드릴까요?”
  “좋지.”
  “젓지 말고 흔들어서?”
  “그렇지.”
   나는 처음 면접 볼 때 만들었던 것보다 조금 더 드라이한 보드카티니를 사장님께 드렸다.
  “본드 씨, 저기 노란 쫄티를 입고 혼자 블루스를 추고 있는 남자가 당신을 도와줄 홍콩 첩보원입니다.”
   승민 씨는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 돌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에게 끌리거든 연락하라는 농담으로 괜히 사람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어놓고. 석이 형은 좀비 같은 모습으로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며 술을 퍼마셨다. 어제처럼 또 바닥에 오바이트를 하는 건 아닌지. 마지막 날까지 그런 걸 치우고 싶지는 않다. 미키 형은 이제야 아쉬움이 밀려오는지 셔츠가 땀범벅이 되도록 색소폰을 불고 또 불었다. 주문이 뜸해지자 단발머리는 수아 옆에 착 달라붙어 마른안주를 집어 먹으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나는 극과 극 커플에게 테킬라 선라이즈와 테킬라 선셋을 만들어 선사했다. 그레나딘 시럽이 각각 오렌지 주스와 레몬주스를 만나 멕시코의 아름다운 일출과 석양빛을 연출하는 칵테일이다.
   띄엄띄엄 오던 단골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으니 홀이 복작복작한 게 꽤 그럴싸해 보인다. 흥겨운 말소리, 웃음소리가 커다란 캐러멜처럼 뭉쳐 사람들 머리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첫 직장이 이렇게 문을 닫게 돼 나도 기분이 무척 꿀꿀하다. 이게 긴 암흑의 터널로 이어질 내 앞날의 예고편인지, 탄탄대로의 시작을 알리는 액땜인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오늘은 그냥 이곳의 분위기에 녹아들고 싶다. 삼십여 명의 게이와 두 명의 레즈비언과 한 명의 이성애자가 모인 비운의 게이바 누벨 아테네의 마지막 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여긴 게이바가 아니라니까!(누구겠는가.)

최제훈

‘인생은 인생 나름의 계획이 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나도 많은 생각을 했겠지만, 늘 그렇듯 소설은 소설 나름의 계획이 있다.

2019/04/30
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