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도는 수억의 데이터를 만드는 수는 고작 두 가지다. 0과 1. 이 두 개의 숫자는 무한대를 이루며 확장해 숫자와 글자와 세계를 만들어낸다. 0, 1, 0, 1, 0, 1······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터넷뿐 아니라 전 지구의 태생적 속성이 확장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관성이 있어서 한번 커지기 시작하면 쉽게 작아지지 않는다.
   태영이 제일 처음 꺼낸 말은 그거였다. 내내 의심의 눈초리로 태영을 노려보는 내 앞에 그는 와인 코르크 다섯 개를 균형 있게 배열한 후 저마다 이름을 붙였다.
   “누나, 잘 봐. 이거 하나에 1억이라고 해보자고. 1억, 2억, 3억, 4억, 5억.”
   태영이 코르크마다 가치를 부여하는 동안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태영은 가장 왼쪽에 있는 코르크를 번쩍 집어들어 내 눈앞에 보였다.
   “이게 1억이야.”
   그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누나가 1억을 모은 후에 다시 1억을 모으고 또 1억을 모아. 1억을 모으는 게 얼마나 어려워. 그렇지? 그런데 ‘증식 가속도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 화폐 증식 속도는 기존 보유량에 제곱 비례해 커진다. 여기까지만 어려워.”
   태영은 오른쪽 끝에 있는 코르크 두 개를 멀찍이 떨어뜨렸다. 네 번째 코르크는 조금 멀리, 다섯 번째 코르크는 아주 멀리. 태영은 왼쪽에 있던 세 개의 코르크를 네 번째 코르크 옆으로 모았다.
   
   “알겠어? 딱 여기까지야. 3억. 힘을 모으는 거야. 그 후에 돈은 관성대로 커지게 되어 있어. 이게 수의 힘이라고. 3만 힘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온다.”
   말을 마친 태영은 다섯 번째 코르크 위에 대고 통을 뒤집어엎었다. 모아놓은 와인 코르크가 우르르 쏟아졌다. 말을 마친 태영에게 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어쨌든 투자잖아. 파생상품이든 채권이든 펀드든. 나한테 그거 할 여유가 어디 있어.”
   태영은 몸을 여유 있게 뒤로 젖히며 손가락을 들어 나를 향해 두어 번 흔들었다.
   “누나 은행에 적금 들지? 금리 얼마야? 2.5%, 2.7%. 바짝 당겨 올려봐야 달랑 그거야. 100만원 넣으면 2만원! 작년까지 제1금융권 이자 얼마였지? 1.7%. 누나 월급 이백 팔십. 그걸로 수도권에 땅이라도 살 것 같아? 우리 세대의 코드는 비관이야. 앞으로 절대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집은 빚잔치로 얻어지는 게 당연, 월급은 카드값 메꾸는 수단. 대한민국에서 월급 이백팔십 받으면서 평생 어떻게 집 한 채를 마련해. 돈을 버는 방법은 두 가지. 당장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적은 돈이라도 포트폴리오에 넣거나.”
   나는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의심이 없어지지 않았다.
   
   “현물 시장이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당장 부동산에 투자하는 건 반대야. 그러면 기업 주식을 사는 건? 개미 주주들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거 누나도 잘 알잖아. 그래서 거대한 인터넷 시장에 조금씩이라도 투자하자는 거지. 신경 끄고 있으면 돈은 들어와. 어떻게? 회사가 알아서 불려주니까.”

   나 역시 카카오뱅크에 예적금을 다 들고 있으니까 인터넷 투자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돈이 허공에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피땀 흘려 얻은 돈을 온라인 펀드에 투자한다는 게, 어쩐지. 그렇다고 오랜 친구인 태영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그는 눈치와 셈이 빠른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그로 인해 손해를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우선 버리는 돈이라 생각하고 50만원을 태영에게 보냈다.
   세 달 뒤, 투자 정산 명목으로 8만원이 통장에 입금됐다.
   그 후 나는 태영의 회사인 인터넷 은행에 직접 들어가 투자금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다. 이자율이 2.2%인 적금을 깨트려 얻은 500만원을 태영이 운용 중인 각기 다른 포트폴리오 몇 개에 나눠 넣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21만원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태영은 주식형 펀드와 저축 은행 파생 상품 모형을 적절히 섞어 포트폴리오를 설계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허니문 효과도 있다고 했다. 그사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포맷의 은행이 앞다퉈 생겨났고 기준 금리가 높아지면서 고위험 포트폴리오를 앞세운 투자 회사는 활개를 띄었다. 관성이 붙은 돈은 스스로 증식해갔다.
   얼마 후 수익 25%를 찍었을 때 내가 넣은 550만원에 대한 예상 이익금은 37만원이었다. 37만원.
   한 번이 어려웠지, 시작한 후에 나는 수시로 인터넷 통장을 확인했다. 실물로 본 적은 없었지만 그것은 내 돈이 확실하다고 적혀있었다. 원금만 확보하면 손해날 일도 없었다. 나는 몇 년 전 태영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온라인 투자에만 몰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돈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건 알았다. 내 전 재산에서 37만원이 더 생겼을 뿐이지만 나는 어쩐지 더 맛있는 것을 먹거나 더 좋은 것을 입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장 사 먹거나 사 입지 않더라도 그 돈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내 가슴 속에는 옅은 기쁨과 안도의 감정이 차올랐다.

   내가 희주를 알게 된 건 회사 거래처 미팅에서였다. 희주는 인턴이었고 나보다 한참 어렸으므로 나는 희주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희주가 미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팀 직원들은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눈으로 희주를 바라봤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희주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오고갔다. 그런데 ‘예쁘다’는 데에는 도대체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서, 콕 집어 누군가를 예쁘다 결론짓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희주는 키가 작고 유독 팔과 다리가 희고 가늘었지만 그게 외모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턴인 희주가 에이포 용지 상자를 들고 나타나거나 빔프로젝트 같은 걸 옮길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남자들이 벌떡 일어나 희주를 돕곤 했다. 나는 그게 정말 부당하게 느껴졌다. 남자들은 연약한 여자를 도와야 한다고 부연설명을 하곤 했으나 정작 희주가 무언가를 도와달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희주는 청년 인턴을 그만두고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희주도 잊히나보다 했다.
   희주를 다시 본 건 단체 카톡 창으로 날아온 동영상 클립을 열었을 때였다. 앞뒤가 잘린 56초짜리 영상은 나체의 희주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동영상 속 인물이 희주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희주임을 알게 된 건 앞자리 남직원 때문이었다.
   “그 영상 주인공이 장희주 씨일 걸요? 나도 처음에는 아닐 거야 했지. 여러 번 돌려봤는데 맞아요. 장희주.”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팀 사람들은 혀를 찼다.
   “얼굴 값 하네. 인턴 나가서 포르노나 찍고.”
   “돈이 필요했나.”
   “요즘은 별 것들이 다 있어.”
   돌아가면서 하는 이야기를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커피 타임이 끝나고 내 자리로 돌아와 희주를 생각하다가 영상을 두어 번 돌려봤다. 영상 속 여자는 희주가 맞았다. 나는 서류로 가득 찬 박스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오는 희주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입안에서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혀를 한 번 찼다.

   37만원 어치만 무언가를 해보자고 마음먹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투자로 얻은 돈이지만 엄연히 내 소유이니 내게는 그럴 권리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은행에서는 신용카드를 광고하고 있었는데 나는 꼼꼼하게 혜택을 비교해보고 다이아몬드라는 명칭의 카드를 골랐다. 여행에 특화된 VIP 카드였다. 연회비가 30만원이었는데 바우처 포인트를 27만원어치나 줬다. 그러면 결국 연회비는 기껏해야 3만원이란 말이었다. 면세점, 백화점, 호텔, 편의점, 영화관······ 전국에 수도 없이 널린 대기업 계열사에서 바우처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쓰면 쓸수록 항공사 마일리지가 쌓였다. 한 달에 50만 원 이상 사용하면 마일리지가 2배씩 쌓인다고 했다. 카드사 프로모션 기간 동안 특정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항공권을 결제하면 티켓의 15%를 할인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가입할 때 받은 쿠폰까지 쓰면 항공권 가격은 기존 책정가의 30%까지 내려갔다.
   와, 대단한데.
   나는 놀라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돈은 돈을 부른다. 1, 1, 1, 1의 순서가 아니라 1, 2, 4, 8의 순서로 불어난다. 태영의 말이 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물론 충분한 인지능력이 있는 비관 세대로서 의심과 경계의 태세는 낮추지 않았다. 그냥 돈이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550만원은 투자 가치가 상향되기도 하고 하향되기도 하면서 조금씩 몸집을 불려갔다. 25%가 될 때도 있었고 8%가 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결국 25%가 되어야 그 후에 조금 더 커지는 효과를 낳았다. 큰 수는 더 큰 수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는 32%도 되었고 38%도 되었다. 그리고 60%가 되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투자처 나름이지. 누나가 가입한 포트폴리오에 뜨는 산업이 몇 개 들어있어서 그래.”
   “그게 어떤 산업인데?”
   “다국적 인터넷 소프트웨어.”
   그 산업이 포함하는 회사들이 어딘지 나는 그제야 궁금했다. 내가 투자한 포트폴리오에는 140여개의 다국적 회사가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선별한 집합체에 투자할 뿐이었다. 이렇게 바쁜 시대에 140개 기업을 일일이 확인하는 짓은 아무도 하지 않을 거였다. 그거 하라고 중계자인 투자회사에 돈을 주는 거니까.
   이 와중에도 인터넷 공간 안에서 수는 불어났다. 산업의 미래를 예견하는 눈 밝은 투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수는 눈덩이가 됐다. 0,1의 세계에서 수는 0110000100도 됐다가 1000101010도 됐다. 그 사이에는 친숙한 아라비아 숫자와 문자가 착실히 기록됐다. 그게 00000000110이면 내가 가진 돈은 백 원 단위지만 11000000000이면 억 단위가 되었다. 백 원이 억이 되는 데는 0이 1이 되는 시간만 있으면 됐다.
   다국적 인터넷 소프트웨어 기업체란 클라우드나 유튜브 같은 개방형 오픈소스 전문 기업을 말했다. 탑다운 형태가 아니라 철저히 바텀업, 개미들의 힘으로 공국을 세울 수 있는 곳이었다. 사용자가 영상을 시청할 때마다 1, 메시지를 하나 보낼 때마다 1, 채널을 구독할 때마다 10의 포인트가 올라갔다. 개인 블로그와 검색 기능까지 흡수하면서 삽시간에 늘어난 유튜브의 후발주자들이 비슷한 포맷을 갖춘 플랫폼을 만들었고 투자처가 가세하면서 산업 전체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했다.

   그즈음 희주의 영상이 보이는 곳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해외 IP주소를 쓰는 각종 플랫폼에 희주의 표정을 캡처한 수많은 영상이 떠올랐다. 성인 인증만 하면 누구든 접할 수 있는 동영상 플랫폼이었다. 그런 다국적 플랫폼이 많은 이유는 하나였다. 만들기 쉽고, 버리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상품 설계자들은 플랫폼을 투자처 목록에 심은 후에 돈을 끌어와 몸집을 불렸다.
   투자를 받은 기업들은 동전의 앞뒤를 능란하게 사용하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개방된 플랫폼에는 대중에게 인기를 끌 만한 동영상과 광고를 심고, 조금만 깊숙이 들어오면 금지된 영상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영상이 한번 인기를 끌기만 하면 복제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음성을 제거하고 사진을 캡처하는 식으로, 크기를 줄여 화면 한쪽에 띄우는 식으로, 형태만 바뀐 영상들이 수없이 많은 플랫폼에 무한대로 증식되어 올라왔다. 유저들이 획득한 포인트는 고스란히 돈으로 환산됐다.
   희주의 동영상이 그랬다.
   
   영상은 모텔 방을 비추며 갑자기 시작되었다. 화면을 삼 분의 일쯤 가린 침대 모퉁이 앞으로 조악한 흰색 간이 화장대가 보였다. 영상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쨍할 만큼 밝은 빛이 들어오지만 이내 불빛은 은은한 주황빛으로 변했다. 초반 몇 초 동안에는 자꾸만 방안의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켜고 하자, 응, 켜고 하자. 남자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여자의 몸이 침대 쪽으로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창백할 정도로 희고 환한 빛깔을 띤 몸의 선, 곧게 뻗은 팔과 가늘고 긴 다리. 남자가 여자를 침대 쪽으로 끄는데 남자의 얼굴은 그때부터 희미해지고 여자의 얼굴만 보였다. 천천히 남자의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그녀는 희주였다. 두 팔을 위아래로 흔드는 희주,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는 희주, 손으로 벽을 짚거나 머리를 올리는 희주. 희주의 얼굴은 꽁꽁 얼어버린 고드름처럼 굳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다가 내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영상은 희주 뒤에서 움직이던 남자가 카메라 앵글을 보는 걸로 끝이 났다. 남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지만 동영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상황이 녹화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남자뿐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영상의 마지막 10초를 나는 여러 번 돌려봤다. 뭘까, 이 불길하고 나쁜 종류의 기분은.
   
   
   동영상을 닫고서야 나는 영상이 벌써 만 번 넘게 조회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영상의 제목은 ‘코리안 홈메이드 포르노 101’이었다. 제목을 조금 변형해서 ‘홈메이드 코리안 포르노’나, #나 %를 붙이거나, ‘보보녀’라는 희귀한 닉네임으로도 검색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러자 머릿속이 뒤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희주는 이 영상을 정말 원해서 찍은 걸까? 자신이 포르노의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걸까?
   
   내게는 희주의 연락처가 없었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희주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희주를 잘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을 일은 아마 없을 거란 걸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경험해왔기 때문이었다.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의 시시콜콜한 내부 사정까지 간섭할 만큼의 오지랖은 내게 없었다. 희주가 포르노를 찍기로 마음먹고 투자처와 계약을 했다면 그건 전혀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고 만일 그녀가 리벤지 포르노의 희생자라고 해도 내가 나서서 좋을 일은 없었다. 혹시 희주가 동영상이 돌고 있다는 걸 모른다면 차라리 모르게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뭐가 최소한 나의 양심을 지키는 일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갔다.
   복제된 희주의 동영상이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다음 날부터였다. 나는 희주의 동영상이 신경 쓰여서 몇 번이나 플랫폼을 왔다갔다했다. 내가 본 동영상 말고도 보보녀로 검색되는 영상은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그것들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어쩐지 몇 개를 더 보다가는 희주의 안위가 궁금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희주의 동영상은 많게는 100원, 적게는 30원의 가치를 가진 포인트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몰카 동영상을 업로드 시킨 웹하드 1위와 3위 업체의 대주주 왕 회장이 잡혀 들어갔다. 그는 웹하드 업체의 큰 손으로, 웹하드가 헤비 업로더를 키워 몰카 동영상을 유포시킨 것을 방조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이 일로 한국의 웹하드 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다행히 해외 플랫폼 업계까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어서 내가 투자한 포트폴리오는 무사했다. 그걸 보고 나는 투자 금액을 2천만 원으로 올렸다. 빚을 제외하면 내가 갖고 있던 거의 전 재산이었다. 60%까지 올라갔던 수익은 45%로 떨어졌지만 하루뿐이었고 이제 다시 오름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수익이 상승하는 중이었음에도 나는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반차를 내고 태영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태영의 회사로 가는 1시간 남짓 나는 그에게 물어볼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무엇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결정하는지 알아볼 셈이었다.

   태영은 나를 만나자마자 반쯤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어이, 투자자님’하고 불렀다. 그리곤 궁금한 것들을 묻기도 전에 모략을 꾸미듯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린 후 소리 죽여 내게 말을 걸었다.
   “누나. 이번에 월세로 옮기면 보증금 나머지도 투자해. 내가 엄청 중요한 정보를 하나 주려고 하거든. 오케이?”
   “무슨 소리야?”
   “내가 누나를 내 친누나보다 더 생각하니까 하는 말인데. 5년 안에 이 시장은 망해.”
   “뭐?”
   “유튜브 말이야. 이런 오픈소스 플랫폼. 5년 안에 망해.”
   “그럼 어떻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비욘드 리얼리즘이야. 화폐라는 개념이 없어져.”
   “그럼 돈은 뭐가 되는데?”
   “누나. 사물인터넷 시대야. 21세기 중반이면 모든 게 인터넷이 되는 시대가 온다고. 중국은 벌써 바코드가 화폐를 대체하고 있어.”
   
   “실물 화폐 없이 어떻게 거래를 해?”
   “증식. 대체 화폐도 결국 증식하게 되어 있다. 그것 역시 새로운 개념의 숫자일 뿐이거든.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업은 어디든 있지. 새로운 교통수단,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인프라. 미래 산업 구도를 예측한 숫자의 재배열, 그건 투자 관리자의 기본 덕목이야.”
   태영은 무릎을 탁 치며 일어났다.
   “나 이제 가봐야 해. 새로운 게 생기면 또 알려줄 테니까. 누나는 다리 뻗고 자고 있어.”
   태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직 신축 건물 냄새가 가시지 않은 건물 로비를 가로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태영아, 잠깐만!”
   태영이 나를 돌아봤고 나는 급히 태영이 있는 쪽으로 뛰어 갔다. 텅 빈 로비가 내 목소리로 가득 찼다.
   “나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내 투자처 목록에 불법 동영상 같은 거 취급하는 회사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어? 난 말이야, 이왕이면 정직하고 깨끗한 기업에 투자했으면 해.”
   나는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다음에는 불법 동영상을 배포한 업체에 투자하는 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태영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하”하고 웃더니 나중에는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우스워?”
   “누나. ‘깨끗한 기업’이라고 했어? 모든 양에는 음이 있어. 아래서 개미들에게 판매되는 것이 있어야 위에서 그 돈으로 연구 개발을 하지. 그런 건 그쪽 세계에서 굴러가게 놔둬. 우리는 맨 위에 팔짝 뛰어오르는 것들만 담아 예쁘게 싸 먹으면 되는 거야.”
   태영은 쌈을 해서 먹듯 손바닥을 오므려 입안에 넣는 시늉을 했다.
   “리벤지 포르노, 몰카, 이런 뉴스 안 봤어?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알아?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고.”
   “누나. 투자처 수백 군데를 다 돌아다니면서 관리할 거야?”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왔고 그걸 보고 있던 태영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 걱정까지 하면서 사는 아주 모범적이고 정직한 분이었어. 역시, 누나. 맘에 들어.”
   그러면서 태영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들어 총 모양을 만들더니 나를 향해 쏘는 흉내를 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는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태영의 입술은 ‘또 봐!’하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닫힌 엘리베이터를 돌아섰다. 신축 건물 특유의 냄새 때문인지 미약한 두통이 일었다.

   신도심은 휑했다. 매끈한 콘크리트 도로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심어진 아기 벚꽃이 눈에 들어왔다. 연하고 보드라운 벚꽃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도시로 가기 위해 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멀리 판교 테크노밸리에서 뿜어내는 현란한 사무실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한낮을 지난 오후였는데 그곳에서는 한낮 햇빛보다 강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태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누나. 혹시 아는 사람이 불법 동영상 레이더에 걸린 거야?
   나는 태영의 문자를 읽으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당연히 희주가 생각났고 그래서 이번에는 희주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곱씹어봤다. 희주는 겨우 6개월 동안 일 때문에 몇 번 만난 사이에 불과했고, 희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희주를 보호한답시고 무언가 섣불리 이야기를 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나에게는 희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희주는 모르는 사람에 가까웠고 내게는 희주를 향한 어떤 의무나 책임이 없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뭐야. 놀랐네. 회사 들어가서 일이나 하셔, 투자자님.

   나는 작별의 메시지를 보내고 버스에 올랐다. 움직이는 버스 창밖으로 새로 짓는 아파트와 상가들이 즐비하게 지나갔다. 증식이 끝나는 날이 과연 올까 생각하다 얕은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희주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꿈을 꾸면 희주의 얼굴이 희미해질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또다시, 계속해서 꿈을 꾸려고 눈을 뜨지 않았다.

최유안

나는 모순적이지 않은 인간인지 생각하는 날이 늘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은 과연 진짜 옳은지. 소설을 쓰는 동안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하지 못하곤 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 힘으로 계속 소설을 쓸 것 같습니다. 소설을 함께 쓰는 동인 <어등이어>에서 활동합니다.

2019/04/30
17호